▲순정효황후의 화려한 ‘적의’. 적의는 왕의 결혼인 ‘가례’ 때 입는 최고 권위의 예복이다. 1919년경. 사진 = 세종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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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왕진오 기자) 조선 시대의 왕비와 후궁들은 TV 드라마에 등장하듯, 이 세상에 유일한 ‘그 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암투를 벌이고 시기질투만 했던 것일까? 임금의 사랑에 목맬 수밖에 없는 왕비와 후궁들이 사랑의 전쟁을 벌인 건 사실이지만, 이밖에도 이들은 자체적인 경제 생활을 영위하고, 시와 서예를 닦고, 외부의 남자 정치인 그룹과 연결되며 권력 쟁탈에도 참가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문헌으로 전해지는 조선의 왕비와 후궁의 모습을 조명하는 특별 전시 ‘오백년 역사를 지켜온 조선의 왕비와 후궁’전(7월 7일~8월 30일,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이다.
이 전시는 왕비를 최고 정점으로 하는 궁중 여성들의 공식적 위계(내명부) 아래, 왕실 밖 사대부 여성이 간택 과정을 거쳐 왕비로 책봉되거나 후궁으로 봉작된 후, 별궁에서 예비 신부 교육을 받고 왕과 가례를 올림으로써 궁궐 속 또 하나의 권력의 축으로 자리 잡은 모습을 300여 유물을 통해 소개한다.
왕실 여성의 위계 체계를 갖추다
왕비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위로는 왕실 어른들을 섬기고, 아래로는 품계를 받은 궁중 여성들의 조직인 내명부를 지도해 왕실의 권위와 질서를 확립했다.
왕비와 세자빈, 후궁들은 왕실 내의 엄격한 위계질서 아래 있었으며 각각의 지위에 따라 요구되는 역할도 다르고 거주하는 곳과 입는 것, 먹는 것 등에도 차등이 있었다.
특히 왕실 여성들이 크고 작은 의식 때 입었던 예복인 원삼(圓衫)의 경우 황후는 황색, 왕비는 홍색, 세자빈이나 빈은 자적색, 왕녀, 대군부인, 군부인 등은 녹색 원삼을 착용해 색깔로 확실하게 구분을 했다. 색깔의 층층시하다.
왕실 밖 여성이 왕실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후보자들을 궐내에 모아 배우자를 뽑는 제도인 ‘간택’을 거쳐 왕실의 혼례인 ‘가례’를 치러야 했다. 간택은 왕실 혼례에만 있는 절차로, 엄격한 과정을 거쳤다.
사대부가의 10세 안팎 규수들에게 혼인을 금하는 금혼령이 선포되면, 전국 각지는 처녀단자(處女單子, 간택령이 내렸을 때 후보가 될 만한 처녀의 이름을 써서 올리는 단자)를 제출해야 했다. 처녀단자를 제출할 수 있는 자격은 △국성인 전주 이 씨가 아니어야 하고 △성과 본관이 다른 이 씨라 하더라도 대왕대비나 왕대비, 왕의 이성친(異姓親) 중 촌수의 제한이 있었으며 △부모가 모두 살아 있는 등의 조건에 맞아야 했다.
왕비와 후궁의 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 등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왕비 또는 세자빈으로 최종 선택된 처녀는 ‘비씨’라고 불렸으며, 비씨는 결정된 당일 곧장 별궁에 들어가 친영 전까지 왕실의 법도와 예절을 교육받았다.
▲매화 문양에 진주를 붙인 진주두루주머니(珍珠狹囊). 20세기 초, 중요민속문화재 265호.
조선의 왕비는 ‘가례’를 통해 왕실의 가계를 잇고 사직과 종묘를 받드는 신성하고 중요한 역할과 의무를 부여받았다. 왕과 왕비의 가례는 간택(揀擇) 절차를 거친 후, 납채(納采, 신부 측에 청혼) → 납징(納徵, 신부 집에 혼인 예물을 보냄) → 고기(告期, 혼인 날짜를 알림) → 책비(冊妃, 왕비 책봉 의식) → 친영(親迎, 왕이 직접 왕비를 맞이하러 감) → 동뢰(同牢, 왕과 왕비가 함께 술을 나누는 잔치 의식)의 ‘육례(六禮)’에 따라 행해졌다.
아들을 낳아 왕위를 잇게 하는 것은 왕실의 안정과 직결된 사안으로 왕비와 후궁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내명부와 고위 관리 아내들 이끌고 친잠례
왕비와 후궁들은 경제 생활도 했다. 왕이 농사의 시범을 보이는 친경(親耕) 의식을 치렀듯, 왕비는 내명부 여성들, 고위 관리의 부인들을 이끌고 날을 잡아 누에를 치는 친잠례(親蠶禮) 의식을 주관해야 했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왕비는 국모의 자리에서 물러나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렴청정을 통해 미성년의 왕이 국정 수행 능력을 기를 수 있을 때까지 한시적으로 국정을 보좌하기도 했다.
▲명성황후의 한글 편지. 궁중의 여인들은 이처럼 곱게 치장된 종이에 개인편지를 주고 받았다. 사진 = 국립고궁박물관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국왕이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국장으로 장례가 진행됐다. 대개 상을 당한 지 5개월 뒤 발인해 장례를 지냈으며, 장례가 끝난 뒤 신위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혼전(魂殿, 임금이나 왕비의 국장 뒤 삼 년 동안 신위를 모시던 전각)에 봉안하고 삼년상을 지냈다.
관람 여성들 “정말 예쁘다” 찬사
왕실 여성은 조선 최고의 스타일을 선도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착용한 복식은 아름다움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이번 전시에 공개된 왕비와 후궁들의 화장품, 노리개, 비녀들은 당시 부와 아름다움의 극치를 나타내는 것들인만큼, 전시장을 찾은 여성들은 “이 노리개 너무 예쁘다”라며 연신 탄성을 자아낸다.
겉으로 분을 바르고 금은보화로 치장한다고 여인이 아름다워지는 건 아니다. 교양미 역시 지체높은 여성엔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왕비와 후궁들은 언문으로 편지를 써서 보내고 받기도 했지만, 인목왕후(선조의 제2 왕비), 혜경궁 홍씨(사도세자의 부인)처럼 한시를 짓고 수준높은 붓글씨 솜씨를 보인 경우도 있다. 이번 전시에는 광해군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인목왕후가 자신의 힘든 처지를 남긴 5언시 붓글씨, 혜경궁 홍씨의 한시 붓글씨 작품이 전시된다.
▲1906년 순정효황후가 내명부 여성들, 고위 관리의 부인들을 이끌고,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는 ‘친잠례’를 거행한 뒤 찍은 사진. 사진 = 일본지조선, 1911년
궁중의 여인들은 편지 쓰기, 시 쓰기, 바느질과 자수 등으로 여가를 보냈으며, 불교에 귀의해 고단한 삶에 위로를 얻고 왕실의 번영을 빌기도 했다.
각자 인장 갖고 사유재산 관리하던 후궁들
왕비와 후궁들은 공식적인 진상(進上: 진귀한 물품이나 지방의 토산물 따위를 임금이나 고관 따위에게 바침)을 통해 의식주를 해결하는 한편, 별도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왕실의 사유재산 관리 업무를 담당했던 내수사(內需司, 조선시대 왕실 재정의 관리를 위해 설치됐던 관서)는 왕비와 대비의 주된 수입원 가운데 하나였으며, 용동궁(龍洞宮, 조선 중기의 왕자 순회세자가 살았던 궁), 어의동궁(於義洞宮) 등의 왕실 궁방을 통해서도 재산을 관리했다.
후궁들의 경우에는 각각의 궁방을 운영함으로써 사유 재산을 관리했다. 왕실의 사유재산 관리를 담당했던 궁방들에 사용된 다양한 도장들은, 왕실 여성의 사유재산과 경제생활에서 보이는 주체성과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들 후궁들의 인장에는 손잡이로 동물들을 새겨놓았는데, 앙징맞은 표정으로 고개를 꼬아 뒤를 보는 귀여운 동물의 모습도 있어 흥미를 더한다.
국립고궁박물관 임지윤 학예연구사
“왕실의 숨은 실력자, 왕비와 후궁을 조명”
왕실의 절대 권력자인 역대 왕들을 조명하는 기회는 여러 차례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권력을 집행하는 왕의 출생과 궁궐 살림을 맡아 꾸렸던 왕비들과 후궁들의 모습은 자주 부정적이거나 과장되어 비추어졌다.
국립고궁박물관이 특별전 ‘오백년 역사를 지켜온 조선이 왕비와 후궁’을 통해 왕의 주변인 같은 형식에서 탈피해 그들의 역할과 삶의 일면을 조명한다.
전시를 준비한 국립고궁박물관 임지윤 학예연구사는 “왕의 최측근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왕비들만 모아서 조명한 기회는 드물었습니다. 모든 포커스는 왕에게만 맞추어진 전시가 많았던 것 같았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숨은 권력자의 진면목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고 기획 배경을 설명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장의 임지윤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사진 = 왕진오 기자
조선 왕조에서 권력자로서 힘을 과시한 사례는 수렴청정이나 왕실보존을 위해 선택한 불교에 쏟은 남다른 애정도 그 예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물이 미비한 관계로 그 힘의 실체를 오늘에 보기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임지윤 학예연구사는 “왕실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궁궐 행사를 진행하고 내명부를 꾸릴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로 불교를 꼽는다. 또한 인목왕후가 서궁 유폐 시절에 문학작품을 통해 본인을 늙은 소로 비유하고, 광해군 을 채찍질 하는 인물로 비유할 정도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여성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명성황후가 남긴 편지에 일상의 안부 외에 정치적 문제에 개입한 대목을 볼 수 있기에, 당시 왕실 여성들의 역할이 내명부를 뛰어 넘었던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왕실 여성들의 유물인 왕비와 후궁들이 사용했던 ‘인장’은 놓치지 말고 보아야 할 전시품이다.
인장은 당시 왕비와 후궁들이 직접 사용했던 것으로 경제적 주도권을 행사 할 수 있던 상징물 같은 존재였다. 또한 친잠례를 통해 권위를 펼쳐 보였고, 빈전이나 혼전에서 지냈던 다례를 집전한 문헌을 통해 당시 왕실의 주축으로서 활약상을 볼 수 있다. 또한 왕비와 후궁의 신위를 모신 칠궁은 왕실 여성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놓치지 말고 봐야할 유물이다.
임 학예연구사는 “왕실 여성을 주목하고자 만든 전시 입니다. 그 중에서도 궁궐의 핵심부에 있던 왕비와 후궁에 주목을 했습니다. 궁방에서 사용된 인장들을 유심히 보면, 당시 왕비와 후궁도 사유재산을 따로 관리하면서 경제생활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실에는 공주와 옹주, 궁녀들도 있지만, 왕과 유사한 인물을 조명할 때 우선 등장하는 인물이 왕비와 후궁이라고 생각했습니다”며 “왕비와 후궁이 공존하며 지냈던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도 후궁을 무시하지 않으며 왕비의 권위와 왕실을 위해 힘을 보탠 존재로서 후궁들의 역할 조명에도 전시 구성을 배려했습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