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독립출판 ③ - 헤적프레스] 작품 보여주는 책이 작품되다

작가-디자이너-사진작가 모여 "작품으로서 책 만들기" 도전

윤하나 기자 2016.05.20 16:16:30

▲헤적프레스, 포스터 1 'everything is still floating'. (사진 = 헤적프레스)

그래픽 디자이너와 사진 작가가 만나 해적의 배, 아니 '헤적출판사'란 한 배를 탔다. 헤적프레스(Hezuk Press)는 박연주 디자이너에 의해 2009년 출판동록을 마치고 2014년부터 정희승 작가와 합심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출판사다. 이들은 평면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자신들의 매체, 즉 사진과 그래픽디자인을 기반으로 출판 협업을 실험한다. 예술가가 책을 만들 때 일어나는 실험적이고 흥미로운 현장인 헤적프레스를 만났다.


헤적프레스

최근 페리지갤러리에서 열린 정희승 작가의 전시 '장미는 장미가 장미인 것(ROSE IS A ROSE IS A ROSE)'에는 헤적프레스의 작가 관련 책도 함께 전시됐다. 전시를 통해 처음 만난 헤적프레스의 책은 정희승 작가의 세로 44cm 가로 32cm의 대형 아티스트 북이었다. 이렇게 큰 책이 있을까 싶을만큼 책의 크기에 1차로 압도당하며 책장을 넘겼고, 2차로 작가의 사진에 매료됐다. 해당 전시에 걸린 사진 작품과 거의 흡사한 크기와 퀄리티로 출력된 모습이 경이로웠고, 그래서 책을 함부로 들춰보기 조심스러워지기도 했다. 이렇게 작품을 만들듯 책을 제작하는 헤적프레스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을까?


▲정경자, 'In Between Something and Nothing'. 2012. (사진 = 헤적프레스)


우선 헤적프레스란 이름이 흥미롭다. 출판사명에 대한 질문에 박연주 디자이너는 "자신이 가진 내재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답했다. 예를 들어 이전에 자신이 학교에서 진행한 워크숍의 제목이 왔다갔다라는 뜻의 가게오게'였다거나, 2008년 디자인 올림픽에 참여하면서 꾸린 '베반 패밀리'의 팀명도 박연주 디자이너의 작명이었다고 말이다. 여기서 베반은 디자인의 배반 혹은 전복이나 전유를 의미했지만 그와 별도로 자신 안에서 발현하는 음율을 따랐다고 한다. 해적도 마찬가지로 출판 등록을 생각할 무렵 갑자기 떠오른 해적이란 단어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 것이다. 해적이 헤적이 되자 '헤적거리다'라는 말도 눈에 들어왔다. '무엇을 찾으려고 자꾸 들추거나 파서 헤치다'라는 의미를 지닌 헤적(거리다)이 미술작가들의 작업을 들추고 파헤치며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완성시키는 출판사에 걸맞는 이름처럼 느껴졌다. 


헤적프레스의 첫 출판물은 정경자 작가의 작품집이었다. 정경자 작가가 박연주 디자이너에게 도록 디자인을 의뢰했는데, 그것이 출판으로까지 이어졌다. 총 2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 페이지의 높이가 균일하게 제본되지 않고 같은 크기의 페이지가 한 장은 제자리보다 위로, 그 뒤 한 장은 제자리보다 아래로 불규칙하게 배치됐다. 그래서 실제 종이의 크기보다 책의 크기가 크고, 각 페이지마다 시선이 머무는 인쇄물의 높이도 다르다. 쉽게 책장을 넘기기 조심스럽고 그럼으로써 각 페이지를 더 오래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플로트(Float) 시리즈. 왼쪽부터 1. 장종완, 2. 이수인, 3. 후니다 킴, 4. 로와정의 책이다. (사진 = 헤적프레스)

지속가능한 A4 판형 16페이지 포맷, ‘Float’

2013‘Float(플로트)’ 시리즈를 시작으로 정희승 작가가 박연주 디자이너의 헤적 프레스에 합류했다. 플로트 시리즈는 헤적프레스가 기획한 첫 번째 프로젝트다. 약 3개월마다 한 명의 작가를 초대해 동일한 지면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인쇄물 형식은 A4 판형, 16페이지(전지 한 장을 4번 자르면 A4 16장으로 나뉜다)로 중철제본이다. 초대된 작가들은 이 인쇄물 형식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 펀딩에 의지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인 만큼, 프로젝트는 경제적이어야 했다. 박연주 디자이너가 이 고안한 이 포맷은 지속가능성을 갖춘 동시에 펀딩에도 자유롭다. 


게다가 작가에게도 A4판형 16페이지 포맷은 작품으로서 그리 가볍지 않은 무게감을 준다. 결코 전시 팜플렛이 될 수 없는 이 포맷을 통해 헤적프레스는 작가에게 새 작업을 위한 플랫폼 역할을 한다. 그리고 동시에 작품으로서의 인쇄물을 편집, 디자인, 제작, 배포 그리고 목록화한다. 이 프로젝트는 펴서 봄. 또는 펴서 보임이라는 의미의 전시(展市)이기도 하다인쇄물은 총 500(전지 한 연)가 제작되며 이후에 추가로 출판되지 않는다.


박연주와 정희승이 서로의 동의를 얻어 작가를 초대하면, 해당 포맷 안에서 작가는 자유로이 출판 내용을 기획한다. 작가의 기획은 적극적으로 수용되며 때론 서로 상의하며 함께 기획을 진행하기도 한다. 특히  헤적프레스는 이 과정에서 작가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나 출판 기법 등을 제안하며 돕는다.


▲장종완, Float 1. '나는 네 소리를 듣는다'. 2014. (사진 = 헤적프레스)


플로트 시리즈의 첫번째 작가 장종완의 경우 페이지에 맞춰 이미지 시퀀스(순서)까지 공들여 기획했다. 여기에 헤적프레스는 원작의 인상적인 색연필 색감을 훼손하지 않고 구현해낼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고, 그 결과 노란 잉크를 형광 노랑으로 대체해 색연필의 색감을 표현해낼 수 있었다. 반면 이수인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기획해 제안했고 작가의 요구가 충분히 반영됐다.


플로트의 세 번째 작가 후니다 킴은 특히 진행과정에서 대화를 많이 나눈 작가다. 사운드를 활용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지면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고민과 회의가 길었다고 한다. 고민의 결과, 작가가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 만든 디바이스(소리를 저장하는 동시에 출력할 수 있는 기기)를 위한 매뉴얼북을 제작하기로 결정했고, 출간에 맞춰 사운드 퍼포먼스도 진행하며 작업을 완성했다. 작가나 헤적프레스 모두 처음부터 뚜렷한 계획을 갖고 시작하진 않았지만, 서로 아이디어를 긴밀히 주고받으며 보다 멋진 협업을 이뤄냈다


▲로와정의 Float 4. '판타지가 없다는 환타지'의 리딩클럽이 더북소사이어티에서 열렸다. (사진 = 헤적프레스)

플로트와 행사, 책과 독자가 만나 일어나는 화학작용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헤적프레스의 플로트 시리즈는 매번 책이 출간될 때마다 다양한 형식의 행사가 함께 진행됐다. 장종완 작가의 플로트 창간호 출간을 기념하고자 서울 연남동 플레이스막에서 간단한 기념 다과회를 열었다. 이후 어쩌다보니 매 호의 작가들 일정과 맞물려 행사가 발생했다. 이수인 작가는 플로트을 진행하던 중 마침 송은아트큐브에서 전시가 열려 플로트 인쇄물도 함께 전시했고, 후니다 킴은 서울 창전동의 우정국에서 책 출간과 함께 사운드 퍼포먼스 쇼케이스를 진행했다.


로와정은 독립서점 더북소사이어티에서 '리딩클럽'을 열었다. 리딩클럽이라 하면 독서모임처럼 들리지만, 이곳에선 이미지를 글자 그대로 읽어냈다. 로와정은 일상의 맥락에서 직접적이지 않고 일시적인 어떤 것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하는 작가부부다. 로와정의 플로트는 여러 곳에서 발견한 이미지들을 기승전결의 서사가 아닌 즉흥적인 이미지들 간의 관계성을 바탕으로 책으로 엮은 것이다. 따라서 쉽게 맥락이 읽히지 않을 것 같은 이 책을 리딩클럽에서 여러 참석자가 함께 읽어내는 시도를 했다. 퍼포먼스처럼 진행된 그날의 경험을 박연주와 정희승은 모두 독특하고 흥미진진했다고 회상했다.


▲로와정, Float 4 '판타지가 없다는 환타지'. 2015. (사진 = 헤적프레스)


책이 뚜렷하게 지시하는 바는 불분명하지만, 작가가 어떤 관계성을 토대로 편집, 배열한 이미지들을 읽어내기 위해 리딩클럽의 첫 타자는 옛 살롱문화의 현장처럼 운을 띄웠다. 그는 두 남녀가 전화로 대화하는 첫 이미지를 보고 혼자 상황극을 하듯 독백을 해나갔다. 그가 상상력을 동원해 배우처럼 연극하며 이끌어낸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까지 모두 자기만의 해석을 덧붙이며 거대한 연극을 만들어냈다. 참석자 모두 각자의 이해와 경험을 바탕으로 이미지를 읽어내는 모습이 책을 제작한 헤적프레스와 작가 모두에게 인상적인 순간으로 남았다.


정희승은 그날의 경험에 대해 "(이 책을 제작하면서) 이미지들 간의 관계를 개인적으로 해석하긴 했지만, 하나의 스토리 구조로 이해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참석자들의 해석으로 마치 퍼즐조각이 맞춰지듯 (책의 첫 이미지 속 통화하는 남녀) 둘의 관계가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됐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물이 창조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박연주는 "마치 연극처럼 사람들이 연기하고, 시낭송을 하는 모습은 여러 개인적 경험을 떠오르게 했다"며 "그 현장이 기록되지 않아 너무 아쉽다. 앞으로는 본격적으로 기록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헤적프레스는 이런 체험을 하면서 그 뒤 출간될 플로트 시리즈의 작가들에게 행사 진행을 제안하게 됐다. 책이 완성된 후 독자를 색다른 방식으로 만나 책이 해석되는 과정의 경이와 즐거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곧 출간될 플로트의 작가 심래정은 오는 64일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열릴 신작 애니메이션 쇼케이스에서 플로트 행사도 함께 선보일 예정이다

    

▲헤적프레스, 포스터 2 '타타라탓(tattarrattat)'. (사진 = 헤적프레스)


즉흥적 협업의 , 포스터

헤적프레스의 작가-디자이너 협업에서 또 다른 갈래는 바로 포스터다. 포스터는 광고나 선전을 위한 매체로 인식된다. 알리려는 내용을 상징적인 이미지와 간단한 글로 표현하고, 실용적인 목적이 있기에 가시성에 중점을 둔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이 강렬한 타이포그래피와 이미지의 결합을 실험하는 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헤적프레스의 포스터 작업은 플로트처럼 계획 하에 시작된 시리즈가 아니라, 타이포잔치 2015 전시의 뉴스레터(임경용 기획)를 의뢰받으면서 갑자기 시작됐다. 헤적프레스와 플로트를 알릴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Everything is still floating'라는 문구를 결정했다. 문구를 먼저 생각하고 이 문구에 어울릴만한 사진을 정희승 작가에게 부탁했다.  문구와 사진을 조합해 만들어보니 오랫동안 고심하며 만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훔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뚝딱 만들었는데 즉흥적으로 나오는 맛이 있었다" 


이후 로와정 작가의 플로트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두번째 포스터가 제작됐다. 당시는 공교롭게 두 명 모두 회문(回文, Palindrome, 앞뒤가 똑같은 문장)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둘은 로와정과 출판 회의 차 만났을때도 회문이 들어간 포스터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이야기를 멈출 수 없었다는 에피소드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만든 두번째 포스터 가운데 '타타라탓tattarrattat)'이란 단어가 보인다. 이 말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에 등장하는 단어로 똑똑 또는 쾅쾅 두드리는 소리를 나타내는 조이스의 조어다. 나른하게 내려온 넝쿨 사진 위에 '쾅쾅' 소리가 제 몸을 감추듯 자리했다. 


서로의 작업을 존중하고 이해하며 협업해온 이들의 화학작용은 포스터 작업에서 특히 눈에 띈다. 재빠르고 경쾌하게 협업한 결과물은 시선을 한 눈에 사로잡는 포스터가 됐다. 곧 심래정 작가의 플로트를 인쇄할 때 새 포스터도 함께 제작할 예정이다.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는 이들에게 헤적프레스의 정체를 물었다. "재밌게 작업하고 결과물이 쌓이다보면 언젠가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라 말에 이어 "같이 작업한 작가들이 곧 헤적프레스의 정체성"이라고 답했다. 출판사의 정체성은 곧 출판 목록인데, 헤적프레스의 그것은 곧 작가들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함께 작업한 작가들과의 협업 아카이브가 쌓이고, 그 아카이브를 통해 헤적프레스(박연주-정희승)의 지향점, 취향, 고민도 함께 기록된다. 헤적프레스가 앞으로 함께 할 작가들이 궁금해진다.


▲정희승의 아티스트 북 'ROSE IS A ROSE IS A ROSE'. (사진 = 헤적프레스)


- 헤적프레스 출판물 목록 -


1. In Between Something and Nothing (vol. 1) inVisible/Suspended Landscape (vol. 2)

정경자 / 2012

 

2. Float 1 나는 네 소리를 듣는다

장종완 / 2014

 

3. Float 2 The Polka-dot Garden

이수인 / 2014

 

4. Float 3 Space Composition

후니다 킴 / 2015

 

5.

강서경 / 2015

 

6. Float 4 판타지가 없다는 환타지

로와정 / 2015

 

7. ROSE IS A ROSE IS A ROSE

정희승 / 2016

 

8. Float 5 심래정(출간 예정)

 

9. 이혜승(진행 중)

 

10. KDK(진행 중)


+++

포스터 1 / 2015

포스터 2 / 2016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