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이번 주 두 현장을 방문했다. 뮤지컬 ‘영웅’ 쇼케이스와 ‘데스노트’ 공연장. 두 작품은 그냥 봐서는 굉장히 동떨어져 보인다. 그런데 나타나는 영웅의 양상이 굉장히 다르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1월 18일 개막하는 뮤지컬 ‘영웅’은 2009년 국내에 첫선을 보인 창작뮤지컬이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최근엔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의 역사 특집에서 힙합 장르와의 컬래버레이션 공연을 펼쳐 주목 받기도 했다.
쇼케이스에서 독립투사들의 굳건한 의지가 드러나는 곡들이 펼쳐졌다. 손가락까지 자르며 독립을 향한 의지를 밝히는 ‘단지동맹’을 비롯해, 명성황후 시해라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바라보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황후마마여’, 독립을 향한 의지를 굳히지 않겠다는 ‘오늘의 이 함성이’ 등 노래에 사람들이 열광했다.
특히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뒤 이토가 대한제국에 행한 죄를 하나하나 읊는 ‘누가 죄인인가’에서는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더 당당한 태도로 나서고, 벌을 받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이 노래에 울분을 토하고 공감한다. 또한 국정교과서 논란이 계속되는 지금,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의식이 사람들 가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무한도전의 역사 특집이 많은 공감을 받았고, 뮤지컬 ‘영웅’에 대한 관심 또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숨을 거두었을 때 그의 나이 고작 31세. 그렇다고 안중근 의사가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개인의 복수심도 아니었다. 죄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아파했고, 그렇기에 한 명이라도 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다. 그 또한 인간이기에 극중 ‘십자가 앞에서’ ‘동양평화’ ‘장부가’ 등을 부르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고백하지만, 독립을 향한 올곧은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의 용기가 현재까지 사람들 가슴 속에 남았고, 지금의 독립된 세상을 있게 한 영웅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특히 요즘같이 영웅이 그리워지는 시대도 없다. 나라가 정말로 어지럽다. “이게 나라냐”가 유행어라니. 여기에 안중근 의사를 연기하는 정성화, 안재욱, 양준모, 이지훈도 입을 모았다. 이들은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영웅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지금이다. 안중근 의사를 연기하면서 책임감도 많이 느꼈다. 위로와 희망이 필요한 국민들에게 공연을 통해 힘을 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올곧았던 영웅상은 이제 고구마 캐릭터?
이와 달리 ‘데스노트’에서는 삐뚤어진 영웅의 양상이 보인다. ‘데스노트’는 이름이 적히면 죽는 사신의 데스노트가 인간계에 떨어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원작 만화를 바탕으로 뮤지컬로 제작됐다. 현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노트를 줍게 되는 장본인이 야가미 라이토다. 세상이 지루하고 따분했던 이 천재 소년은 노트를 주운 뒤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한다. 세상이 정의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지 못하다며, 죄를 지은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죽이기 시작한다. 라이토의 행각은 사람들에게 키라(KIRA)라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키라를 숭배하기 시작한다.
라이토는 일반적으로는 범죄자를 처벌하지만, 간혹 처벌 대상이 주관적이기도 하다. 키라의 사상에 반대하는 자 또한 가차 없이 처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라를 영웅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키라 맹신자로 등장하는 미사의 경우, 자신의 부모를 죽인 살인자가 법의 테두리를 교묘히 피해갔다. 그래서 현실을 원망하던 미사에게 데스노트로 법 대신 범죄자에게 처벌을 내려준 키라는 신적인 존재가 됐다.
이 키라를 상대하기 위한 캐릭터로 또 다른 천재인 탐정 엘(L)이 등장한다. L은 키라의 행위를 저지하고, 그를 법의 심판대 위로 올리려 한다. 실상 도덕적으로 봤을 때 키라는 살인자다. 그런데 키라와 L의 인기가 비등비등하다. 때로는 키라를 더 응원하는 독자, 관객이 많기도 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만화책 속 L이 쓰러지는 장면(키라에게 패배한다고 볼 수 있는)이 명장면으로 꼽히는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비탄한 현실에 대한 자괴감이 극대화 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착하게 법을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이 권력을 가진 사람 앞에서 무참하게 짓밟히는 상황은 현재 진행형으로 이 사회에 일어나고 있다. 영화 ‘날 기다리며’에선 악이 이길 수 있는 절대 조건으로 ‘착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뭘 하고 싶어도 할 수조차 없는 비탄한 현실. 그 현실을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마주하고 있다. 여기서 발생하는 분노가 축적되면 잘못된 방법을 행해서라도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잘못된 방법으로 행해진 게 진정한 정의인지는 모르겠지만.
2007년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었던 조승희의 이야기에서도 이를 느낄 수 있다. 처음엔 범죄자로 불렸던 조승희가 인종 차별과 모욕을 겪었다고 알려지자, 나중엔 오히려 “잘 죽였다”는 식으로 영웅, 신격화 되는 상황이 펼쳐졌다. 조승희가 잘못된 현실에 심판을 내렸다는 것. 여기서 점차 ‘정의의 실현=복수=영웅’ 식으로 과격화 되는 현상이 보인다. 더 심해지면 ‘정의의 실현’보다 ‘복수’가 앞서기도 한다. 즉 목적이 정당한 처벌이 아니라, 분노를 폭발시키는 복수가 되는 것이다. 데스노트에서도 처음엔 범죄자를 처벌하던 라이토가 자신의 정의에 반하는 L에게 분노하며 L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는 것처럼.
얼마 전에 본 영화 ‘랜드마인 고즈 클릭’ 결말도 떠오른다. 의견이 분분하다. 이 영화에서는 지뢰를 밟은 청년 크리스와 그 청년 옆을 지키던 여자 앨리시아에게 갑자기 불청객 일리아가 찾아오면서 불행을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지뢰를 밟아 움직일 수 없는 크리스는 일리아에게 앨리시아가 당하는 모습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강자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약자의 현실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중에 크리스는 복수를 행한다. 그런데 복수를 행하고 맨 마지막에 클로즈업 되는 크리스의 표정은 복잡하다. 이 영화는 ‘복수의 허망함’을 말하고 있는데, 결말에 대해 ‘찝찝하다’고 하면서도 ‘통쾌하다’는 이야기 또한 함께 존재한다.
이밖에 영화 ‘복수’를 키워드로 약자의 분노를 보여주는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 ‘악마를 보았다’ 등도 결말에 대해 이야기가 많은 작품들이다. 현실에서 법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악인을 처벌해줄 수 없으니, 비상식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악인에게 처벌을 내려주는 존재. 그런 존재가 점차 영웅으로 여겨지고, 이런 영웅에 열광하는 사회가 됐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오죽 정의가 힘이 없으면 악한 방법, 악한 영웅에 기대서라도 정의를 실현하고 싶은 시대가 됐을까.
과거 영웅은 희생을 동반했지만 이젠 희생만으로는 안 된다. 그런 자괴감이 사회를 휩쓸고 있다. 이 자괴감이 이 시대에 ‘삐뚤어진 영웅상’을 만들어 냈다. 드라마, 영화에서도 정의를 부르짖는 캐릭터는 현실을 모르는 고구마(답답함을 뜻함) 캐릭터로 비춰지기도 한다. 앞으로 또 시대는 어떤 영웅상을 만들 것인가. 그럼에도 역시 ‘올바른 정의의 실현’이 이뤄지는 시대가 오기를, 그런 실현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진정한 영웅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싶다. 두 작품을 보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드는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