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서 채무탕감 세미나…"도덕적 해이? 장기채권 소각은 사람 살리기 위한 것"

김광현 기자 2017.07.14 13:00:05

▲발언하는 민병두 의원.(사진 = 민병두 의원실)


안 갚아도 되는 빚더미로 휘청거리는 채무자를 살리기 위해 '죽은 빚문서'를 없애야 한다는 국회 토론회가 열렸다. 더불어민주당 민병두 국회의원(서울 동대문구을)과 같은 당 국회의원 2명이 경제 능력을 상실한 장기 채무자의 신용 회복을 위한 채무 탕감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세미나를 7월 12일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열었다. 

세미나에는 주최자인 민병두-김영주-제윤경 의원을 비롯해 쥬빌리은행 유종일 은행장, 한국금융복지정책연구소 정운영 소장이 발제자로 참석했다. 전남대학교 양채열 교수가 사회를 보고 토론자로 서강대 이군희 교수, 서민금융연구포럼 조성목 회장,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 박정만 센터장, 법무법인 공존 이동형 변호사, 금융위원회 서민금융과 하주식 과장이 참석했다.

▲왼쪽부터 이동형 법무법인 공존 변호사, 하주식 금융위원회 서민금융과 과장, 박정만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 센터장, 유종일 쥬빌리은행 은행장, 양채열 전남대 교수, 정운영 한국금융복지정책연구소 소장, 이군희 서강대 교수, 조성목 서민금융연구포럼 회장. 사진 = 민병두 의원실


세 의원은 "신용능력 상실자들이 장기 연체 채권을 갚지 못해 정상적인 경제 생활을 못 하고 있다"며 “장기 연체 채권을 소각해 신용 능력 상실자들의 신용 회복 지원 방안을 논의하고자 했다"고 세미나 취지를 밝혔다. 이어 발제자들은 구체적인 채무 탕감 방안들을 내놓았다.

"제대로 심사 않고 돈 빌려주는 금융기관이 더 도덕적 해이"

유종일 은행장은 신용 능력을 상실한 장기 연체 채무자의 채권 소각이 채무자의 인권을 지킬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효율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유 은행장은 "돈을 갚지 못했다는 것이 비인간적 채권 추심을 정당화하지는 못하며 노력의 대가가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닌 채무 상환에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사회적 낭비"라는 입장을 밝혔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도덕적 해이 논란에 대해 유 은행장은 "1000만 원 미만 10년 이상 채무 연체자는 경제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안 갚은 것이 아니라 못 갚은 것"이라며 "채권자가 채무자의 경제적 능력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대출해주고 추심을 과도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채권자의 도덕적 해이"라고 지적했다.

유 은행장은 채무 탕감 기관을 민간 비영리 단체가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정부 때 채무 탕감 기관으로 출범한 국민행복기금은 사실상 주식회사로 운영돼 주주의 이익을 대변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는 지적이었다. 국민행복기금은 약 8000억 원의 이익을 남기는 등 사실상 채권 추심 기관으로 존재했다고 유 은행장은 꼬집었다. 지난 3월 기준으로 국민행복기금에 빚진 1000만 원 미만 10년 이상 장기 연체 채무자 수는 123만 3000여 명이며, 채권 잔액은 4조 4848억 원에 이른다. 이들 중 40만 3000여 명은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는데 이들의 채권액만 1조 8930억 원이나 된다.

유 은행장은 채무 탕감 정책의 궁극적 목적은 채무자의 경제적 자활이며 이를 위해 금융 복지를 취약계층에 교육하고 법과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운영 소장은 "채무 탕감은 역사적으로 오랜 전통을 갖고 있으며 국가 경제 위기 극복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전했다. 2차 세계대전 후 서독은 미국 등 20여 개 서방 채권국이 빚을 절반으로 줄여주는 '런던채무협정'에 힘입어 라인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1980년대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들은 미국의 채무 탕감 정책인 '브래디 플랜' 시행 뒤 경제 위기를 극복했다.

"5년 지나면 특수채권의 법적 상환의무 소멸지는데 금융기관들이 편법으로 늘려"

국민행복기금 외에 금융권이 보유한 특수 채권에 대한 소각 논의도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수 채권은 5년이 지나면 채권의 법적 상환 의무가 사라진다. 하지만 일부 금융사는 채무자에게 소액이라도 받아내거나 직접 소송을 제기하는 편법으로 소멸 시효를 연장하고 있다. 특수 채권 10개 중 4개는 법정 소멸 시효인 5년이 지난 후에도 시효가 연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저축은행들이 채권 소멸 시효를 25년 이상 늘리는 등 채권 소멸 시효 제도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자연 채무를 소멸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자연 채무는 채무자가 신용 회복 프로그램, 채무 감면 프로그램을 통해 빚을 일부 갚으면 채권자의 빚 독촉 압박에서는 벗어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나머지 빚이다. 더 이상 빚은 갚지 않아도 되지만 빚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어서 빚진 자가 정상적인 금융 생활을 할 수 없게 옥죈다는 문제가 제기돼 왔다. 정 소장은 "개인회생 등 프로그램을 통한 감면이 이뤄진 경우 자연 채무를 즉시 소멸시켜 채무자가 정상적인 금융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군희 교수는 채무 탕감 정책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 세 가지를 우려했다. 첫째, 도덕적 해이다. 홍콩에서 98년에 개인파산법이 개정돼 채무자 빚을 탕감해준 적이 있다. 이후 3년 동안 빚 탕감 건수가 893건에서 9151 건으로 9배 넘게 늘었으나 빚 탕감자의 60% 이상은 '사기 파산자'로 추정됐다. 둘째, 채무 탕감 정책 자체의 효과에 대한 의문이다. 국민행복기금에서 채무 조정을 받은 사람의 18%가 3개월 이상 채무를 다시 연체한 것을 보면 땜질식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셋째, 탕감 조치에 따라 제도권 금융회사들이 서민 금융 시장을 떠남으로써 오히려 서민들이 대부업이나 불법 사채 시장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반면 이 교수는 불법 채권 추심 행위는 강력하게 처벌해 채무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7월 3일 여수시청 회의실에서 주철현 시장과 유종일 주빌리은행장, 금융기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부실채권 소각행사를 열리고 있다. 이날 소각행사에서는 기초생활수급자와 소상공인, 주부 등 사회적 약자 604명의 채무 103억원(원금 38억, 이자 65억)이 소각됐다. 사진 = 연합뉴스



조성목 회장은 "채무 탕감이란 용어 자체가 금융 회사가 인심을 써서 빚을 없애준다는 인식을 주는 잘못된 용어"라며 "소비자 입장을 반영한 '채무 정리' 같은 용어로 변경해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 회장은 정책의 보완 대책으로, 채무자에게 시효가 완성된 채권을 갚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채무자 10명 중 7명은 소멸 시효가 지난 채권임에도 소멸 시효가 지난 사실을 몰라 계속 빚을 갚는 것으로 조사됐다. 채권 추심업자는 "소액만 갚으면 나머지는 감면해주겠다"고 채무자를 회유해 채무자가 소액을 갚으면 채권의 소멸 시효가 자동 연장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채권자 변동조회 시스템'을 이용하면 채권에 대한 소멸 시효 완성 여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채무자는 신용정보원, 신용조회회사(나이스지키미, 올크레딧 등), 신용회복위원회 등에서 채권의 소멸 시효 완성 여부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채무자 본인 조회가 원칙이며 조회한다고 신용등급에 불리한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조 회장은 기타 방안으로, △채권 시효가 연장된 채무자에 대한 법률 지원 서비스 확대 시효 완성 채권을 유통시키는 관련자를 처벌할 법적 근거 마련 민관 합동 금융 소통 기구 마련 개인 회생 제도 개선 퇴직 금융인 등 전문가를 주축으로 지역 서민들의 금융 안전성을 상담해줄 수 있는 조직의 구축을 제안했다.

박정만 센터장은 "중앙 정부는 장기 연체 부실 채권을 소각하고, 지방 정부는 금융 복지 상담 센터를 중심으로 금융 취약 계층에 채무 조정 등 금융 복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는 중앙센터 외에 서울 내에 12개 지역센터를 두고 개인 신용 관리 교육, 가계 부채 면책 신청 지원, 금융 복지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박 센터장은 "시효 완성 채권을 부활시키기 위해 채무자에게 변제를 독촉하는 채권 회사들을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시효 완성이 1년 남은 채권을 유통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판결에 의해 연장되는 단기 소멸 시효를 현행 10년에서 7년 이하로 줄이는 방안을 검토할 것"을 제안했다.

이동형 변호사는 "시효가 지난 채권과 소액 장기 연체 채권을 소각하는 것은 부채 탕감이 아닌 이미 죽은 채권을 소각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며 "채권 소각의 궁극적 목적은 가계 부채 감소를 통한 서민 경제 안전성 강화"라고 말했다.

국회에서 관련 입법 다양하게 발의돼 

한편 국회에서는 관련 입법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민병두 의원은 작년 대부업법 개정안(의안번호 1383)을 대표발의한 바 있다. 개정안은 일정 기간이 경과한 장기 소액 채권 또는 소멸 시효가 완성된 채권을 채무 조정해 채무 불이행자의 신용을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게 주요 내용이다.

제윤경 의원은 작년 6월 채권추심법 개정안(의안번호 215)을 대표발의했다. 개정안 내용은 소멸 시효가 완성된 채권의 추심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징벌적 손해배상과 단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했다. 두 법안은 각각 정무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 심사 단계에 있다.

한편 국정기획자문위원회와 금융위원회는 국민행복기금과 민간 금융회사에 묶인 1천만 원 이하 10년 이상 연체 채권을 정부가 사들여 소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은 "최종구 금융위원장 후보자가 장기·소액 연체채권 소각 등 신용회복 방안, 소멸시효 완성 채권의 권리 강화에 대해 정책적 소신을 제시해야 할 것"이라며 "인사청문회에서 관련 내용을 검증하겠다"고 말했다. 금융위원장 인사청문회는 7월 17일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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