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강남대로 식' 데카르트와 '연남동 골목 식' 돈키호테 중 우리의 선택은?

최영태 발행인-편집국장 기자 2017.07.21 14:06:53

▲최영태 발행인-편집국장

필자와 ‘돈키호테’와의 오랜 악연 또는 투쟁이 막을 내려간다. 소설 한 권을 끝까지 읽어나가고 이해하는 데 거의 10년이 걸렸다니 기가 막히기도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거둔 성과는 꽤 되는 것 같아 나름 보람을 느낀다.

풍차에 덤벼든 돈키호테 일화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돈키호테라는 작품의 전모를 아는 사람도 드물다. 1-2권 전체의 분량이 엄청난 데다 대개는 축약판으로만 읽기 때문이다. 더구나 ‘돈키호테’는 1-2권 두 편으로 나눠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흔히 1권만을 돈키호테의 전부로 칠 뿐, 문학적-철학적으로 더 뛰어난 것으로 꼽히는 2권은 아예 없는 것으로 치는 경우가 많으니 몰이해 정도가 심한 것으로 느껴진다. 

소설 돈키호테를 처음 손에 잡은 것은, 한글 활자에 목말라하던 10여 년 전 미국 체류 때였다. 도서관에 가봐야 온통 영어 책이니 그 중 이런저런 책들을 읽다가 ‘Don Quixote’를 집어 들었다. 1600년대 스페인 소설을 영어로 읽자니 잘 읽힐 리가 없었다. 그래서 절반쯤 읽고는 집어던졌다. 

▲돈키호테가 세상에 나온 400주년을 맞아 출간된 영문판 돈키호테 표지.

미련에 남던 차에 올해 한국 도서관에서 과거의 그 영문판 돈키호테를 다시 집어 들었다. 깨알처럼 작은 활자에 942쪽이 넘는 분량이니 역시 읽기가 고통스러웠지만, 악전고투 끝에 다 읽어내렸다. 다 읽고 나서도 도대체 이 책이 왜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인쇄되고 읽힌 책’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해설서들을 찾아봤다. 해설서 중에서 최고는 고려대 안영옥 교수의 ‘돈키호테를 읽다 : 해설과 숨은 의미 찾기’(2016)와 영남대 박홍규 교수의 ‘돈키호테처럼 미쳐?’(2007년)였다. 

엉터리 번역 넘치는 한국에 귀한 '제대로 번역' 책들 

안영옥 교수는 2014년에 돈키호테 1-2권을 스페인어 원본으로부터 ‘100% 완역’을 마쳤다. 1-2권 도합 1708쪽이라는 엄청난 분량에다가, 또한 세세한 각주가 일품이다. 이런 번역판을 볼 때는 정말 행복감을 느낀다. 엉터리 번역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영문 원본이랑 대조하면 ‘완전히 다른 내용’인 번역이 많으니 말이다. 안 교수처럼 평생을 한 작품에 바쳐 완역을 해내는 전문가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안 교수는 돈키호테 완역판을 내놓은 2년 뒤인 작년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돈키호테를 읽다 : 해설과 숨은 의미 찾기’를 내놨다. “돈키호테 이후의 모든 소설은 돈키호테의 번안에 불과하다”는 과격한 해석이 나오는 이유를 알게 해주는 해설서였다.

박홍규 교수의 ‘돈키호테처럼 미쳐?’도 큰 도움이 됐다. 특히 박 교수는 스스로의 별명이 ‘돈키호테’인 사람이다. 대학교수이면서도 “모든 공식 회의에 불참을 선언하고 연줄로 얽힌 모든 모임, 특히 관혼상제를 거부하는”(‘돈키호테처럼 미쳐?’ 249쪽) 인물로 스스로를 밝혔다. 별명이 돈키호테인 교수가 400년 전 스페인의 돈키호테를 해설하는 내용인지라 흥미가 더했다. 

▲안영옥 교수의 스페인어 완역판 돈키호테 제2권. 한국에선 이상하게 전 2권인 '돈키호테' 중 1권만을 번역하고 끝마치는 경우가 많다.

두 교수의 돈키호테 해석은 비슷했다. 안 교수는 돈키호테의 편력을 ‘책의 세상에서 나와 현실의 세상에서 진실과 마주한 것’(‘돈키호테를 읽다’ 173쪽)이라고 총평했다. 세르반테스가 살던 시대에는 더 이상 철지난 편력기사(세상을 방랑하며 불의를 바로잡고, 자신이 사랑하는 한 여성만을 정신적으로 사랑하는)가 존재하지 않았고, 아니, 역사적으로도 편력기사라는 존재는 사실상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상상 속의 인물들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주인공 돈키호테는 책 속의 세상에 완전히 빠져,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는 편력기사의 시대이며, 자신이 진정한 편력기사라면서 온갖 얼토당토않은 모험과 소동을 벌이고 다닌다는 해석이다. 

이런 돈키호테의 광기에 대해 안영옥-박홍규 두 교수는 돈키호테가 “미친 척한 것”으로, 즉 정말로 미친 게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선택적으로 미친 척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소설 속에서 돈키호테는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을 하다가도 또 금세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와 종자 산초 판사(Sancho Panza)에게 바른 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책에서 읽은 진실을 제 한 몸 안 돌보고 세상에 펼치려 했던 돈키호테 

돈키호테는 자신의 ‘미친 척’ 탓에 이빨이 옥수수처럼 떨어져나가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팔다리가 부러지기도 하지만, 그가 이렇게 미친 척을 하는 이유는, 자기가 좋아하고 유일하게 진실한 세계라고 믿는 ‘책 속의 진실'을 현실에서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별명이 돈키호테인 영남대 박홍규 교수가 쓴 '돈키호테처럼 미쳐?'의 표지.

이를 박홍규 교수는 “책에서 읽은 것 외에 모든 것을 잃는다. 따라서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된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회복한다. 세르반테스가 어쩌면 그러한 자유인으로서 돈키호테를 그리고자 했는지도 모른다고 유추할 수 있다”(‘돈키호테처럼 미쳐?’ 287쪽)고 했다. 안영옥 교수는 “돈키호테의 ‘나’는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나’와는 다른 행동하는 ‘나’이다.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 행위로 자신을 창조하고 실현해 가는 의지의 인간이다”(‘돈키호테를 읽다’ 206쪽)라고 평가했다. 

책에서 읽은 내용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자신의 팔-다리-이빨의 망가짐에는 아랑곳 않을 수 있는 인간이 돈키호테였다. 그런 인간이었기에 400년이 지나도록 더욱더 슈퍼스타로서 인기가 높아가는 모양이다.

책에서 읽은 내용을 현실에서 구현한다니, 조선 시대의 선비들 생각도 난다. 조선 시대에는 선비들이 상소를 할 때 ‘내 말이 틀렸다면 이 도끼로 내 목을 쳐라’는 의미로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 나가 상소를 했다고도 한다. ‘유교 경전 책에 쓰인 옳은 소리’에 근거해 상소를 하다가 목숨을 잃은 선비도 많았다니, 그때만 해도 한국에는 이른바 돈키호테형 인간이 꽤 있었나 보다. 조선 왕조가 위태위태하면서도 500년 역사를 이어간 바탕에 이러한 선비들의 기개가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조선시대의 '도끼 상소'를 이명박근혜 정부의 "책 따로 현실 따로" 장관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개혁 의지는 좋지만 왕에게 너무 심하게 대했다”는 평가도 받는 조광조(1482~1519년)가 아직도 한국인의 기억에 선명한 ‘개혁 슈퍼스타’로 기억되고 있다는 점을 돌이켜본다면, ‘책에서 읽은 내용을 현실화하기 위해 제 한 몸 안 돌보고 미친 짓을 마다않는’ 돈키호테 형 인간은 확실히 스타가 되기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러한 조선시대 선비를 생각하다가 21세기 대한민국 현실로 생각을 옮기면, 자신이 버젓이 책 속에 써 놓은 내용과는 완전히 반대로, ‘책은 책이고, 현실에서 출세하려면 그깟 내 책 속의 내용이야 상관없다’는 식으로 비굴하게 살았던 이명박근혜 시대의 일부 ‘학자 출신 관료들’을 떠올리면 토가 나올 것처럼 속이 불편해진다.

박홍규 교수는 돈키호테를 ‘성스러운 바보, 고귀한 백치’로 평가하면서 이후 서양 문학사에서 “성스러운 바보, 고귀한 백치는 세르반테스 이후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한 유형이 되었다”(‘돈키호테처럼 미쳐?’ 214쪽)고 썼다. 

죽음을 살기 위해 태어난 돈키호테와, 먹다가 죽으려고 태어난 산초

돈키호테의 묘비명은 ‘미쳐 살다가 정신 들어 죽었다’라고 소설에 나온다. 묘비명을 쓴 작자는, 학사 삼손 카라스코로, 돈키호테의 팬이자 돈키호테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끝내 돈키호테와 결투를 벌여 그를 굴복시키는 젊은이다. 카라스코가 정리한 대로 미쳐 살다가 정신 들어 죽는 돈키호테는 스스로의 운명을 예감하듯, 산초 판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산초, 나는 죽음을 살기 위해 태어났고, 그대는 먹다 죽기 위해 태어났네(I was born, Sancho, to live dying, and thou to die eating).”

▲돈키호테의 객기로 소떼에 짓밟힌 뒤 개울가에 축 늘어져 "나는 죽음을 살기 위해 태어났고 너는 먹다 죽으려 태어났다"고, 음식을 입안 가득 넣은 산초에게 말하는 돈키호테.(귀스타브 도레의 판화)

자기는 ‘죽기를 살기’ 위해 태어났고, 산초는 먹다 죽기 위해 태어났다는 이 말은, 웃기기도 하지만 슬픔이 서려 있기도 하다. 돈키호테가 이 말을 하는 장면은, 대로 위에 나타난 소떼를 돈키호테가 막아서며 자신의 영혼의 주인인 둘시네아 델 토보소(돈키호테의 환상 속의 그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공주님)가 지상 최고의 미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녀석은 나와 대결하지 않고는 이 길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괜한 심술을 부리다가 질주하는 소떼에 짓밟힌 뒤에 나온다. 

소떼에 짓밟힌 뒤 돈키호테는 생각에 잠겨 있고, 역시 소떼에 짓밟혔지만 그 와중에도 음식 생각이 나 주인님 앞에 음식을 펼쳐 놓았다가 생각에 잠긴 돈키호테가 손도 대지 않자 냉큼 음식을 입안 하나 가득 우겨넣은 산초에게 말한다. 

“먹어라, 산초 내 친구여. 살아야지. 나보다 그대에게 삶은 더 중요할 수 있고, 내 생각의 고통과 불행의 중압 아래서 나를 죽게 내버려두게”라고 말한 뒤, 자신의 인생관이라고나 할 “나는 죽음을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대사다. 생각의 고통 아래 죽을 자신의 운명을 토로하는 이 장면은 돈키호테 특유의 웃음과 슬픔이 서려있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종교재판소가 악명을 떨치던 
17세기 스페인에서도 돈키호테의 놀 공간이 마련됐는데, 
19살 시험성적으로 인생을 결정짓는 한국… 

돈키호테를 ‘책 속에 나오는 진실을 현실에 풀어놓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했던 사람’으로 본다면, 그리고 조선 시대의 선비를 ‘책 속의 진실을 현실화하기 위해 도끼로 목이 잘리는 위험도 감수했던 사람들’으로 본다면, 오늘날 한국은 이런 비현실적인 사람들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을까. 

“나는 편력기사”라며 고어체 말투에 이상한 행동을 서슴치 않는 돈키호테를 소설 속의 사람들은 뜨악하거나 또는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지만, 대개는 재미있어 하면서 “어서 해봐”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특히 2권에선 백작 부부가 온갖 무대장치를 만들어놓고는 돈키호테와 판사가 “아, 편력기사의 세상이라는 것이 책 속에서만 아니라 진짜로 현실에 존재하는구나”라고 감탄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종교재판소의 마녀 사냥이 한창이었다는 당시 스페인에서도 이 정도의 아량은 있었나 보다.  

▲편력기사 소설에 빠져 미치기 시작하는 돈키호테를 그린 귀스타브 도레의 흑백 판화에 색깔을 입힌 그림.

이처럼 소설 속에선 ‘미친 척하는 돈키호테’에게 놀 공간을 마련해주지만, 한국에선 그렇게 놀 공간이 거의 없다. 19살 고3 때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는 실패를 하면 나머지 인생 전체를 2류 인생으로 만들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공포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일본 등 앞서 나가는 나라들의 엉덩이를 열심히 쫓아가기만 하면 되는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시대에는 이런 공포식 교육이 나름대로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더 이상 쫓아가야 할 엉덩이가 없어 우리 스스로가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진로를 개척해야 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의 시대에까지 “한번 실패하면 인생 끝”이라는 무서운 교훈을 각인시키는 한국 시스템은 무자비하고 무식하다.

돈키호테는 책 속의 세상이, 백작 부부의 장난에 따라 현실세계에 진짜로 펼쳐지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백작 부부의 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는 정신을 차리고 죽는다. 결국 처절한 쓴맛을 보는 게 인생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뭔가 이룰 수 있을 듯 날뛰는 돈키호테에서 독자는 재미를 맛본다. 인생이란 그처럼 ‘안 될 걸로만 알았던 일이 되는’ 기쁨과 놀람을 바라면서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헌데, 그런 실낱같은 가능성을 19살 때 일찌감치 차단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게 한국인의 인생이라면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재승 교수가 말하는 "안 되는 걸 될 것처럼 믿는 한국 학무보들"

요즘 이른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들이 무성하지만, 분명한 것은, 남보다 더 잘, 더 많이 외우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엘리트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점점 더 분명해지는 듯하다. 

▲정재승 KAIST 교수가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 방송에서 "부모가 생각하는 미래는 자녀에게 오지 않을 것"이라고 인공지능 시대의 미래를 예측하고 있다.(JTBC 화면 캡처)

지난 7월 12일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해 강연하면서 정재승 KAIST 물리학 교수는 “6살에 영어 조기교육을 받고, 17살에 명문 고교에 진학하며, 20살에 명문대에 들어가, 20대 중반에 OO고시를 통과해, 30대에 연봉 O천만 원을 받아낸다는, 즉 부모가 짜준 미래는 현재 자라는 세대에게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유는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미래는 완전히 예측불허인데도 한국 부모들은 완전 예측이 가능한 것처럼 인생 시간표를 짜서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만 강요하고 있다는 소리다.  

올해 ‘왜 지금 재벌개혁인가’란 책을 펴낸 서울대 행정대학원 박상인 교수는 “문제는 기업 혁신과 정부 주도 경제 정책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혁신형 경제의 가장 큰 특징은 불확실성인데, 이런 불확실성 하에서 정부가 어떤 산업이나 기업을 육성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67쪽)라고 짚었다. 과거처럼 정부가 어느 특정 산업 분야의 특정 기술을 미래 선도 산업으로 지정해서 돈과 정책으로 밀어주는 산업진흥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어느 분야에서 어떤 기술이 세상을 휘어잡을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세상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결책으로 박 교수는 “정부가 스티브 잡스를 찾으려는 역할을 버리고 누군가가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79쪽)이라고 제시했다. 문제는 이러한 혁신형 경제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사회환경 수준에서 한국은 “개발도상국 수준”(80쪽)에 불과하다는 점이 여러 경제-사회 지표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혁신형 경제를 맞이하기 위한 한국의 준비태세는 "개발도상국 수준에 불과하다"고 진단한 박상인 교수의 책 표지.

미국에서 스티브 잡스를 필두로 하는 ‘디지털 영웅’들이 밟아간 길에 대해 정재승 교수는 “기성세대를 거부한 히피 세대 중에는 마약에 매력을 느낀 거리의 히피들도 있지만, 스티브 잡스처럼 ‘인간 각 개인에게 좋은 성능의 개인 컴퓨터(PC)를 안겨줘 독자적으로 살아나갈 수 있도록 하자는 철학을 갖고 이를 디지털 세계에서 현실화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디지털 혁명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미국의 디지털 경제가 그냥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 뚝 떨어진 게 아니라, 히피 문화의 여러 갈래 중 하나에서 발원했다는, 즉 철학적 배경이 있다는 소리였다. 잡스처럼 종잡을 수 없는 괴짜(미국의 ’디지털 돈키호테‘라고 부를 만한)가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는 미국 사회이기에 미국의 디지털 신경제가 발원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잡스 같은 성격을 반드시 죽이는 나라에서 
정부가 어떻게 잡스를 발굴해내겠다는 생각을 하는지…  

한국 학교에서라면 잡스 같은 별종은 철저히 단죄되기 쉽다. 이런 사회-교육 체제를 유지하면서 정부 부처는 입버릇처럼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발굴하겠다”고 나서니, 박상인 교수의 지적처럼 “혁신형 경제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사회환경 수준에서 겨우 개발도상국 수준”에 머물고 있는 나라에서 그저 우스울 뿐이다. 잡스 같은 인간형은 정부가 발굴해내는 게 아닌데…       

자신이 좋아하는 것(책 속의 세상)을 과감히 행동에 옮기는 돈키호테를 안영옥 교수는 “돈키호테의 ‘나’는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나’와는 다른 행동하는 ‘나’이다.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 행위로 자신을 창조하고 실현해 가는 의지의 인간이다. (중략) 돈키호테는 인간의 귀족적인 조건인 의지, 행위의 의지를 자기의 환경에 충실히 반영하며 살았기에 불사조로서 독자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아 오늘날도 새로운 독자들과 만남으로 계속 새로운 희망을 탄생시키고 있다”('돈키토테를 읽다' 206쪽)고 정리했다.

▲안영옥 교수가 필생의 작업이라 할 스페인어판 돈키호테 완역판을 낸 2년 뒤 돈키호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펴낸 '돈키호테를 읽다'의 표지.

서양 근대철학을 열었다고 하는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나’이기도 했지만, 또한 군인이었다고도 한다. 박홍규 교수는 데카르트에 대해 “기하학적 시각이나 합리적 판단을 마치 인간의 본래적 자질인 것처럼 여긴 점에 바로크 형식의 특징이 있다 (중략) 수리철학자이자 병사였던 데카르트”(‘메트로폴리탄 게릴라 루이스 멈퍼드’ 200쪽)라고 평했다. 행군하는 군인으로서 곧게 직선으로 뻗은 가로 풍경을 데카르트는 좋아했단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데카르트 같은 인간형은 서울 연남동의 골목길처럼 꼬불꼬불하고 좁은 길은 낮게 보고, 서울 강남대로처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딱딱 각이 맞게 정돈된 신작로를 좋아했으리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돈키호테형 인간이 뛰놀 수 있는 나라라야 재밌고 행복하지 않나?

한때 강남대로형 개발만이 살길인 줄 알았던 한국인들이 요즘은 연남동 골목길에 맛을 들이고 있다. 미국에서도 ‘천천히 살자’는 주의가 은근히 인기를 끌고 있다는 외신도 나온다. 합리적으로 각지게 사는 것만이 인생능사가 아니란 얘기다. 그렇다면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몸부터 움직이는(그래서 사고도 많이 치는) 돈키호테형 인간을 봐주는 사회적 분위기 역시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셰익스피어보다 위대한 걸로 평가되기도 하는 세르반테스(셰익스피어는 전설로 내려오는 햄릿 등 ‘이미 존재하는 인물’을 토대로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냈지만,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인물상을 100% 스스로 창조해냈으므로)의 ‘돈키호테’ 읽기 붐이 한국에서 더 불면 좋을 것 같다. 특히 작품상 더 위대한 ‘돈키호테 2편’을 마치 없는 것처럼 치고 마는 한국의 이상한 출판 풍토(특히, 어린이용 ‘그림 돈키호테’ 등에서는 1권만 번안하고 그치는 경우가 태반)인지라 그런 생각이 더욱 절실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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