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한국전쟁? ②] 미-중 전사 "국군-인민군 다 한심했다"…정전 간절히 바랐던 건 어느쪽?

최영태 발행인-편집국장 기자 2017.08.16 17:35:13

▲최영태 발행인-편집국장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면 일부 국내외 언론들은, 특히 한국의 이른바 보수 매체들은 곧 전쟁이 임박한 것처럼 보도를 해댑니다. 하지만 한국민들은 그럴 때마다 여유를 보여왔습니다. 이는 제1차 한국전쟁의 경험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지요. 선제공격을 가하겠다는 미국과 북한의 '말폭탄'이 얼마나 허망된 것인지를, 지난 회에 이어 미국과 중국의 한국전쟁사를 통해 짚어봅니다. 


◇ 도망가기 바빴던 한국군

한국인은 ‘국뽕’ 영화들 덕분에 한국군은 용감무쌍하기만 했는 줄 알지만, 미-중의 한국전쟁사(史)에는 그들이 본 한국군은 정반대였다는 증언이 숱하게 나옵니다. 중공군의 참전 뒤 미국이 호되게 당해 중공군이 전투를 시작할 때 불어대고 쳐대는 나발-꽹과리 소리만 들려도 미군은 혼비백산했다지만, 매튜 리지웨이 사령관의 올바른 판단으로 중공군 역시 미군에게 혼쭐이 납니다. 서로 타격을 주고받으면서 미-중 양군은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보입니다. 미군은 중공군의 놀라운 속도와 헌신성에, 그리고 중공군은 미군의 막강한 화력에 존경심을 표한 것이지요. 하지만 한국군은? 

리지웨이 장군의 한국군에 대한 한탄입니다. 
“정말이지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한국군 병사들은 너도 나도 트럭에 올라타고 정신없이 달아났다. 지휘관도, 무기도, 상부 명령도 없는 아수라장이었다. 무작정 걷는 이가 있는가 하면 모든 차량을 제멋대로 가져다 썼다. 가능한 한 중공군에게서 멀리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소총과 권총은 오래 전에 던져 버렸고 각종 무기와 박격포, 기관총 등도 다 내버린 상태였다.(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782쪽)

흔히 중공군에 유엔군이 밀린 것이 ‘인해전술’ 때문이라고 한국인은 교육받았지만, 중국 측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인해전술은 한국군이 놀라 허둥지둥하는 바람에 착각한 것이다. 이 전투는 기본적으로 연대와 연대 간의 싸움이었다.(왕수쩡 ‘한국전쟁 -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알리지 않았던 것들’ 247쪽)

연대와 연대 사이의 전투로 한-중 양측의 병력은 비슷했지만 도망가기에 바빴던 한국군이 “중공군 숫자가 너무 많아(즉 인해전술 때문에)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다”고 거짓 핑계를 댔다는 비아냥입니다. 

▲현리 전투에서 포로가 된 엄청난 숫자의 한국군을 중공군이 호송하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 중국 측의 사진.


▲이승만 대통령(오른쪽)과 만나는 한국전쟁 당시의 유재흥 제3군단장. 유 군단장은 현리 전투 중 지휘권을 버리고 비행기를 타고 도주함으로써 국군 제3군단을 붕괴시켰고, 이에 미군 측은 한국군 제3군단을 아예 해체해버린다.



허겁지겁 한국군에 대해 미군은 극약처방까지 내립니다. 

미국인들이 바로 이 전투 후에 이렇게 무능한 군대는 아예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 한국군 제3군단을 해산시켜버렸다. 한 나라의 군대가 자기 나라에서 전투를 하다가 참패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전투에 협조한' 외국 군대로부터 강제해산 명령을 받다니, 이는 이유야 어찌됐든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희귀하고도 기이한 일이다. 제3군단의 해산으로 한국군은 극도의 불만을 품게 되었다. 실패의 주요한 원인이 미군의 패배로 조성된 것이니, 해산하려면 미군이 먼저 해산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한국전쟁 -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알리지 않았던 것들’ 881쪽) 

3군단은 미군에 의해 해산됐다가 1953년 재창설되지요. 이런 지적을 들으면 요즘처럼 당시에도 한국군에는 ‘똥별’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허긴,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말을 주문처럼 입에 달고 다니는 자칭 보수가 집권한 9년 동안 청와대와 내각은 거의 군 미필자로 채워졌고, 그렇게나 신성하다는 그 의무를 신성한 자신들은 도저히 질 수 없다며 가난한 청년들에게만 지우는 한국의 이른바 지배층들이니 두 말 하면 잔소리지요.


◇ ‘무적의 인민군’ 역시 북한이 나중에 만든 신화

미-중의 한국전쟁사는 인민군도 낮춰봅니다. 북한은 정전이 이뤄진 7월 27일을 ‘전승절’로 기념한다지만, 미-중 측 전사 입장에서 본다면 택도 없는 사후미화라는 게지요. 

처음에 김일성은 소련에 대한 의존도가 아주 높았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리더십이 소련군보다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좋아했다. 그가 실제로 정치적인 역량과 지도력이 뛰어났다면 마음대로 다루기 어려웠을 테니 이것은 당연했다. 스탈린이 유고슬라비아의 공산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마오쩌둥을 우려했던 것은 이들 스스로 이룩한 성과물 때문이었다.(‘콜디스트 윈터’ 116)

▲7월 27일 한국전쟁 휴전일을 전승절, 즉 ‘전쟁에서 승리한 날’로 기념하는 북한. 사진은 2013년 김정일 생존 당시 7월 26일 열린 전승절 60주년 기념 행사의 모습. 그러나 국제적인 자료를 통해 한국전쟁 휴전 당시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북한 측의 ‘전승’ 주장에 고개가 저어진다.(사진=연합뉴스)


한국전쟁을 앞두고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을 당시 스탈린은 따뜻하게 만나준 반면, 마오쩌둥에겐 낡은 호텔에 머물게 하고는 한동안 만나주지 않으면서 냉대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니 김일성-박헌영은 당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에게는 무한한 신뢰를, 그리고 이웃이지만 아직 힘없는 중국에게는 곁눈질도 주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지요.    

김일성은 인민군이 38선을 넘고 이틀이 지난 6월 27일까지 중국 당국에 공격을 제시했다는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콜디스트 윈터’ 83쪽) 

김일성-박헌영은 중국은 완전히 제쳐놓고 전쟁을 시작했다는 소리인데, 그렇게 깔봤던 중국이  김일성의 구세주가 된다는 겁니다.

인천상륙작전을 미리 감지하고 마오쩌둥이 김일성에게 알려줬지만… 

인천에서는 (맥아더의) 운이 좋았다. 사실 김일성이 그다지 영리한 상대가 아니었다는 점이 크게 기여했다. 김일성은 미군이 공동 상륙작전으로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공군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몇 주 전부터 일본에 대규모의 미군 부대가 모여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었다. 부두 잡역꾼 상당수는 열성적인 공산주의자였다. 덕분에 중공군은 공동 상륙작전에 쓰일 장비들이 일본에 속속 도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8월초 마오쩌둥은 인민군의 공격 상황에 대해 듣고 걱정스런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그 내용을 김일성에게도 그대로 알려주라고 지시했다. 러시아 측 고문들도 비슷한 경고를 했지만 그 어느 것도 김일성을 설득하지 못했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원래 김일성이 권력을 잡은 건 전쟁에 대한 예리한 안목 덕분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대에 살아남아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전적으로 포용한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인민군은 보란듯이 정면 공격을 일삼으면서도 지원군은 제대로 마련해놓지 않고 적을 무너뜨리기보다 새로운 지역을 점령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것도 문제였다. 마오쩌둥은 김포비행장처럼 취약한 지역을 지적하면서 일단 후퇴하여 이들 지역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는게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인천항을 폭파하기는커녕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중국을 맥빠지게 했다
저우언라이는 자이준워를 다시 보내 김일성에게 전략상 후퇴하는 것이 좋겠다고 강력히 권했지만 김일성은 "후퇴할 생각이 전혀 없다"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이 실행에 옮겨진 날로부터 사흘 후인 9월 18일 저우언라이는 소련 고위 대표를 만나 다시 한 번 인민군이 일단 후퇴하여 북쪽에서 부대를 재정비한 다음 중국이나 소련이 한국전쟁에 개입할지 모른다는 서방국가들의 두려움을 이용하자고 제안했다.(‘콜디스트 윈터’ 461~464쪽)

중국은 일본 내 부두노동자들을 통해 미군 상륙작전을 예측했고, 이를 막으려면 인천항을 아예 폭파시키라고 했는데도 김일성-박헌영은 계속 미군에 대한 정면공격과 땅 따먹기, 그리고 북한에서 낙동강 전선까지 길게 이어지는 보급로를 고집한 끝에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된통 당했다는 얘기입니다. 

월남의 베트콩이었다면 김일성-박헌영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도 나옵니다.  
베트민은 서방 국가들의 훌륭한 공군력이나 일반적인 화력에 대처하는 데 익숙했다. 만일 베트민이었다면 아주 소규모의 부대로 나누어 낙동강 근처에 있는 산악지대에 몰래 숨어 들었다가 밤에 공격을 개시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민군은 진군하려면 길이 막히자 처음부터 어찌 할 바를 몰랐고 이에 미 공군은 이틀 가량 무차별 폭격 지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콜디스트 윈터’ 438쪽) 

▲인천상륙작전 뒤 서울에서 인민군을 체포해 압송하는 미군. 당시 김일성은 중국 측의 “상륙작전이 준비되고 있으니 인천항을 미리 파괴하라”는 사전 경고를 무시했고, 상륙작전 성공 뒤에도 인민군에게 “죽을 각오로 방어에 힘쓰라”라는 무리한 명령만 내림으로써 인민군 3만 명을 사지로 몰아넣었다고 데이비드 핼버스탐은 지적했다.(사진=위키피디아)


이렇게 전략적 실수를 거듭한 끝에 한반도에서 축출될 지경에 빠진 김일성-박헌영을 마오쩌둥이 그냥 놔둘 리 없지요. 마오쩌둥은 ‘조중연합사령부 부사령에 조선인 김웅을 임명했고, (중략) 이는 김일성이 전쟁의 작전 지휘에서는 완전히 배제’된다는 의미였다고 와다 하루키는 저서 ‘북조선’(103쪽)에 썼습니다.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 역시 한 보고서에서 “(북한군이) 다들 그냥 모험심으로 밀어붙이는 것 같다. 군 지휘 체계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다. 19일 평양에서는 죽을 각오로 방어에 힘쓰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그 결과 3만 명의 군인이 (계속 북으로 밀고 올라오는 UN 군으로부터) 달아나지 못하게 되었다"라고 기술했다지요.(‘콜디스트 윈터’ 553쪽)

인천에 상륙하는 미군이 북한 인민군의 허리를 자르고 쳐들어오는 데도 김일성-박헌영 지휘부는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인민군 3만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됐다는 얘기니, 이들의 지휘 실력을 알 수 있습니다. 


◇ 휴전 간절히 원했던 김일성-미국 vs “미국 말 들어주면 안 돼” 스탈린-마오쩌둥 

리지웨이 신임 사령관이 지평리 전투 등을 통해 중국 측에 큰 피해를 안겨준 뒤에 한국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집니다. 휴전에 이르기까지 누가 계속 싸우고 싶어했고, 누가 계속 싸우기 싫어했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김일성은 전쟁을 그만두고 싶어했답니다. 허술한 지휘능력으로 마오쩌둥에게 지휘권을 빼앗겨버렸으니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그만두고 싶었겠지요. 

김일성은 전쟁을 그만두고 싶어했다. 포로는 어떻게 해도 좋다. 가고 싶은 데로 가도록 하면서 마오쩌둥에게 교섭을 타결해달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마오는 거절했다. “이제까지 열심히 싸워왔는데 미국 말대로 하면 안 돼. 그런 말 하면 스탈린에 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와다 하루키 '한일 100년사’ 201쪽)

막강한 미국의 화력에 중공군이 죽어나가도 “미국 말을 들어주면 안 된다”며 전쟁 계속을 고집한 마오쩌둥의 군사전략가다운 면모가 무섭지요. 

스탈린 역시 휴전을 하기 싫어했답니다.  
 
스탈린은 "휴전 회담을 하면서 전쟁을 계속하면 된다"고 중국과 북한을 설득했다.('한일 100년사’ 182쪽)

교착상태 아래서 한국군, 미군, 중공군이 죽어나가면서도 전쟁이 무려 2년을 더 끌었던 데는 이처럼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한국에서 전쟁 계속”이란 의지가 배후에 있었던 것이지요. 

휴전 반대하는 이승만에게 미군 사령관은 “중공군에 혼쭐나게 만들자”

휴전 협상과 관련해서는 우리의 이승만 초대 대통령님 얘기도 빼놓을 수 없지요? 중국 측의 전사에 나오는 이승만의 모습을 한 번 봅시다.  

휴전 협상 중 이승만 대통령은 여러 차례 “목숨을 걸고 공산당과 협상하지 않겠다”고 공언했고, 한국 정부도 여러 차례 대규모 군중집회를 조직했다. 집회에서 군중은 “북으로 쳐들어가자!”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이 정부를 거들떠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쟁은 이 정부의 영토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 정부는 전쟁에서 아무런 실권도 없었다.(‘한국전쟁 -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알리지 않았던 것들’ 964쪽) 

정전협정에 곧 서명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갑자기 중부전선에서 대규모 전투가 또 벌어졌다. 이승만은 한국이 단독으로 처리하겠으니 더 이상 유엔군은 필요없다고 단언했다. 그 결과 1953년 7월 13일 중국군이 최후의 공세인 금성전투(金城戰役)를 개시해 단독으로 처리하겠다는 한국군에 맹공을 퍼부었다. 한국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을 뿐 아니라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새로 부임한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은 “중국이 한국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게 하자”라고 말했다.(‘한국전쟁 -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알리지 않았던 것들’ 973쪽)

▲핼버스탬 기자와 중국 측 한국전쟁사가 한국전쟁 당시 최악의 지휘능력을 보인 두 인물로 꼽는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이 김포공항에서 포옹하는 모습.(사진=위키피디아)


그림이 그려지지요? 아무런 실권도 없으면서, 전쟁 전과 마찬가지로 “북진통일을 이루겠다”고 헛소리를 치다 못해, “유엔군은 빠져라. 한국군이 밀고 올라갈 테니”라고 망발을 보이는 이승만을 혼내주기 위해 주한 미군은 “그래? 그렇다면 한 번 해봐”라면서 2선으로 빠지면서 중공군이 한국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도록 방치했다는 소리입니다. 이승만이 한국전쟁을 전후해 한국인을 엄청나게 죽인 것은, △전쟁이 나자 저 혼자서만 대전 이하로 뺑소니치면서 △대전에서 녹음한 방송으로 “서울을 사수할 테니 안심하라”고 라디오 방송을 해서 많은 민주시민을 서울에 남게 한 점 △그리고는 불시에 한강다리를 끊어 다리 위와 다리 이북의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을 사지에 몰아넣고 △1.4후퇴 이후 유엔군과 함께 북으로 진격해서는 서울에 남겨졌던 민간인들을 “북한 공산주의에 부역했다”며 몰아붙이며 처단하는 등 양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참으로 이런 사람을 국부로 모시자고 떼를 쓰는 짝퉁보수들의 주장이 역겨울 뿐입니다. 

제2의 한국전쟁, 또는 제2의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어려운 게 바로 역사의 교훈

중-미-일의 자료를 토대로 한국전쟁을 길게 검토해봤습니다. 그 결론은 ‘워낙 무섭게 싸우고,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었기에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국-북한-미국-중국 등 전쟁 당사자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교훈입니다. 이런 피가 철철 넘치는 교훈이 있기에, 우리는 휴전선 바로 아래라는 너무도 취약한 지역에 서울이라는 거대도시를 차려놓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잘못 시작한 전쟁이었지만 그 전쟁에서의 무서운 교훈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전쟁 걱정에 심각하게 시달리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8월 11일자에 나란히 전쟁 위협에도 불구하고 태평한 한국인을 꼬집은 조선일보(위)와 동아일보의 기사들. ‘말 폭탄’ 위협이 오가는 가운데서도 한국인이 심드렁할 수 있는 것은, 순국선열의 덕이기도 하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신문은 8월 9일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 한국 사람들은 놀라운 정도로 심드렁하다’는 기사를 내보냈다지요? 기사는 신촌에서 만난 한 대학생이 “내 생애에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고 전하며, 북한에서 한두 시간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어쩌면 이렇게 태평할 수 있냐면서 놀라워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남북대치의 현실이지요. 미국과 중국 측의 한국전쟁사를 읽지 않더라도, 한국인들은, 특히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은 그간의 경험으로, 본능적으로, 한반도에서 제2차 한국전쟁이 일어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미국이나 북한, 또는 한국의 가짜보수들이 떠벌이는 대로 전쟁이 임박했다면, 돈있는 사람들은 잽싸게 미국으로 이사 가거나, 아니면 그들의 마음 속 고향인 미국으로 떴겠지요. 돈 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뜰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국내 정치적 이득을 노리기 위한 속임수로 ‘전쟁 임박’을 내세우는 말장난, 또는 더 심하게 말한다면 가짜뉴스에 더 이상 휘둘리지 말아야 겠습니다. 

제2차 한국전쟁이 정말로 일어나기 힘든 것은 너무나도 살벌하고 많은 한반도인과 중국인, 미국인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세대에게는 너무나도 무서운 시련이었지만 그 덕에 우리는 휴전선의 긴장을 목격하면서도 밤잠을 푹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광주민주화항쟁 덕분에 한국에서 군부 쿠데타 걱정을 거의 안 하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광주사태’라 불린 난리를 겪은 덕에 그런 짓을 한 번 더 일으켰다가는 어떻게 된다는 것을, 한국 군부가, 미국 정부가, 한국 국민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역사는 오늘날의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 공(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윗대의 열사들을 입 다물고 생각하라는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이란 국가의례 순서가 있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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