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정의 요즘 미술 읽기 (38) 인간과 동물] 가축·반려동물의 ‘복수’가 시작돼야 비로소 쳐다보는 우리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기자 2017.09.04 10:13:20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살충제 달걀 사건으로 먹거리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감이 높아지고 있다. 달걀 공포증을 의미하는 에그포비아(eggphobia), 음식 공포증을 의미하는 푸드포비아(foodphobia)가 연일 검색어에 오르내렸다. 음식은 그것을 먹은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직접적이다. 달걀의 경우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채 섭취하는 경우도 많아 더욱 걱정스럽다. 그 밖의 다른 먹거리들은 과연 안전한 것인지 확인하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그 관리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인간이 자기들의 편리대로 자연을 훼손해온 시간이 긴 만큼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많다. 해결하는 데에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포기해서도 안 된다.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Soderbergh) 감독의 영화 ‘컨테이젼(Contagion)’(2011)에 나오는 것과 같은 재앙이 언제 인간을 덮칠지 모른다. ‘컨테이젼’은 축산 위생을 소홀이 한 결과로 전염병이 퍼지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을 미화 없이 다룬다. 

문제의 발생과 그 인지 사이의 멀고도 먼 시공간

바이러스의 시작점을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은 정말 충격적이고 허무하다. 영화 속 주인공들 중 일부는 백신을 발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무책임하고 - 인류에게 닥친 재앙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할 정도로 - 악하다. 이 영화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 중 하나는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을 커다란 구덩이에 한꺼번에 묻는 모습이었는데 가축 전염병이 돌 때 동물들을 살처분하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영화 ‘컨테이젼’ 포스터. 

살충제 달걀과 관련한 뉴스 중 DDT(디클로로디페닐트라클로로에탄)가 검출된 농가에서 닭에게 DDT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특히 충격적이었다. 이는 흙에 축적되어 있던 살충제 성분이 닭에게 옮겨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뉴스를 읽은 후 사람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이제 먹을 음식이 없구나’, ‘이미 오염된 땅에서 난 과일과 야채 혹은 다른 무언가를 먹은 것은 아닐까?’, ‘내가 먹고 있는 음식들은 안전할까?’와 같은 걱정일 것이다. ‘DDT 성분이 검출된 닭은 이제 어떻게 되나?’, ‘눈앞의 이익과 편리함만을 따른 결과가 이제 돌아오는구나’와 같은 생각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나 가능하다. 아예 생각 안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동물도 생명을 가진 존재다. 비록 인간의 먹거리로 제공되는 동물이라 해도 말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생기면 어김없이 따라 나오는 것은 - 지금 이 글처럼 - 인간의 이기심과 안일함에 대한 (자기)비판과 반성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동물들을 좁은 공간에 가두고, 살충제를 뿌리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죽인다. 인간에 의해 사육당하다가 인간의 안전을 해친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죽임당하는 동물들의 모습은 참혹하다. 사실 동물 학대, 유기견(심지어 강아지가 자주 버려지는 것으로 유명한 지역이 뉴스에 나올 정도다), 길고양이, 강아지 공장 등 인간 때문에 동물이 겪고 있는 처참한 상황은 너무 많다. 도시로 내려온 멧돼지, 로드킬(road kill) 당하는 동물들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비윤리적이거나 불법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소수이므로, 일부의 사례를 바탕으로 모든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안 되겠지만 최소한 내 주변 동물들의 복지와 안전에 나는 얼마나 관심을 가졌었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마크 퀸의 인간·동물 토르소와 서울대미술관의 ‘동물원’전

‘자아(Self)’(1991-ongoing)로 유명한 마크 퀸(Marc Quinn)은 인간도 동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동물의 몸통 부분을 캐스팅하여 마치 인간의 토르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얼굴과 사지가 사라지자 완성된 조각의 형상은 인간인지, 동물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글에서 퀸은 인간의 죽음과 희생, 질병과 고통에는 슬퍼하고 애도하지만 인간 이외의 존재들에 대해서는 냉정해지고 잔인해지는 인간을 비판했다. 지능이 조금 더 높을 뿐 인간도 동물인데, 아무 거리낌 없이 다른 동물 위에 군림하고 폭력을 행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퀸은 자신이 기르는 반려 동물은 애지중지 하면서 다른 동물들의 안전에는 무관심한 현대의 모순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 아무리 인간사가 모순적이라고는 하지만 - 동물 복지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동물 학대 사건이 끊이지 않는 요즘, 한편에서는 가족과도 같은 반려동물에 대한 기사나 동영상, 책, 반려동물과 관련된 상품들이 인기다. 최근 온라인에서는 홈CCTV로 집 밖에서도 반려동물을 돌볼 수 있는 ‘반려동물 IoT’의 광고가 화제였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보다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할 뿐더러 이 짧은 글에서 모두 다 이야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 더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조금이라도 바뀐다면, 아니 상황이 악화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LGU+의 ‘반려동물 IoT’ 바이럴영상 장면.

올해 여름 서울대학교미술관 모아(MoA)에서는 이러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전시가 진행되었다. ‘미술관 동물원’(2017. 6.7~8.13)은 특히 동물원의 역사, 시대에 따라 변해왔던 동물원의 의미를 성찰하는 전시였다. 동물원은 인공적으로 작은 생태계를 만든 것으로 인간의 우월함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즐거움을 주는 구경거리였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을 잡고 동물원을 가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물론 자연과 멀어진 아이들에게는 학습의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살충제 달걀이 논란이 되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가 동물의 복지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을까? 터전을 잃은 동물들이 마을로 내려와 인간을 위협하기 전에 그들의 터전을 우리가 빼앗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오직 인간만이 행복을 느끼고 고통과 공포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인간만이 이 세상의 주인공인 것도 아니다. 인간이 동물을 보호하고, 환경을 지킨다는 생각도 오만한 것일지 모른다. 지나치게 당연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우리는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정리 = 최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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