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국민연금의 '재벌총수만 사랑'에 "집사책임제 재갈 물려야"

롯데·현대중공업의 인적분할 찬성 싸고 논란

윤지원 기자 2017.09.12 09:25:37

▲국민연금공단. (사진 = 연합뉴스)


국민의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이 일부 재벌에게만 힘을 보탠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는 올해 롯데그룹과 현대중공업 등이 지주사 체제로의 전환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들 회사에 상당한 지분을 보유한 국민연금의 의결권이 결과적으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지배력 강화에 힘을 실어주는 방향으로 결정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롯데그룹 지주사 전환 찬성에 소액주주연대 "국민연금에 크게 실망"

지난 8월 29일, 롯데그룹의 핵심 계열회사인 롯데제과와 롯데쇼핑, 롯데칠성음료, 롯데푸드 등 4개 회사가 임시주주총회를 통해 지주사 전환을 위한 분할·합병 안건을 일제히 가결했다. 당시 이들 각각의 회사에 4~12% 정도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던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분할·합병에 찬성하는 쪽으로 의결권을 행사했다. 이로써 롯데 4개 계열사의 투자부문만을 통합한 별도의 법인인 롯데지주 주식회사가 신설된다.

롯데그룹은 이번 분할합병에 의한 지주회사 신설을 통해 지난 2015년 416개였다가 그동안 67개까지 줄인 순환출자 고리를 18개로 대폭 줄이게 되므로 지배구조 단순화 및 순환출자 해소를 통해 투자자산의 가치 재평가를 기대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ISS를 비롯한 금융계도 같은 근거로 롯데의 지주사 전환은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이 분할합병에 지속해서 반대한 입장들도 있다. 롯데소액주주연대모임은 롯데그룹이 내놓은 4개사 분할합병안이 중국에서 난항을 겪고 있던 롯데쇼핑의 심각한 사업 위험을 나머지 3개사 주주들에게 떠넘기는 동시에 신동빈 그룹 회장의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 모임은 국민연금에 탄원서를 제출해 분할합병안 부결을 이끌어달라고 요구했다.

국민연금은 탄원서 접수를 확인했으나, 25일 열린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산하 의결권 행사 전문 위원회 심의에서 롯데 경영진의 제안에 찬성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롯데소액주주연대모임은 국민연금에 크게 실망했다는 입장을 드러내며, 지주사 설립 이후 주주가치가 떨어질 경우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할 것을 요구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왼쪽)이 8월 29일 오후 강원 평창군 2018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장을 찾아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현대중공업 지주사 전환 찬성 역시 "총수만 돕기"?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말부터 추진해 온 그룹의 지주사 전환을 지난 8월 14일 마무리했다. 현대중공업은 4개 사업부를 별도의 법인으로 인적분할하고, 현대로보틱스가 주식 공개매수 방식으로 각 계열사 지분을 24~28% 확보해 지주사가 됐다. 

이러한 회사 분할 계획을 승인하는 임시주주총회는 지난 2월 27일 열렸다. 여기에는 노동조합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노조는 경영진이 경영 효율화를 분할의 이유로 내세웠지만, 진짜 의도는 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지분율을 높여 지배체제를 강화하고, 3대 세습으로 나아가는 데 초점이 놓여있다고 지적했으며, 이러한 내용을 담은 의견서를 국민연금에도 전달했다. 당시 국민연금의 지분 비율은 8.07%로, 현대중공업의 2대 주주였다. 대주주였던 정 이사장의 지분은 10.15%로 이런 국민연금이 임시주총에서 분할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다면 다른 주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안건을 부결시킬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고 경영진에 위임해 사실상 찬성하는 쪽에 힘을 실어줬다.

지주사로 전환된 현대로보틱스는 인적분할에 따른 ‘자사주의 마법’에 의해 현대중공업 그룹에 대한 13.4%의 새로운 의결권을 확보했고, 이후 나머지 계열사의 주주들을 대상으로 현물출자 유상증자를 통해 지주사의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계열사 지분율 20%를 간단히 넘겼다. 이때 정 이사장이 보유했던 지분 10.15% 역시 공개매수 대상에 포함되어, 정 이사장은 추가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현대로보틱스 지분을 25.8%까지 늘렸고, 그룹에 대한 지배력은 두 배 이상으로 커졌다.

결과가 이렇게 되자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과 양대 노총은 성명을 통해 국민연금의 이번 의결권 위임이 2015년 삼성 합병 당시와 마찬가지의 재벌 편들기라고 지적했고, 국민연금 측에서는 “개별 기업 이슈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는다”고 사실상 해명을 거부해 논란을 증폭시켰다.

▲8월 31일 현대로보틱스 대구 본사에서 열린 공식 출범식에서 권오갑 현대중공업 부회장(왼쪽 두번째부터), 윤중근 현대로보틱스 대표, 권영진 대구광역시 시장이 기념식수하고 있다. (사진 = 현대로보틱스)


'국민이 모은 돈'인데 도움받는 건 주로 재벌총수

국민연금의 반복되는 재벌 편들기 논란에는 표면에 잘 드러나지 않는 다른 요인들이 잠복해 있다는 지적이 있다.

우선, 현재 재계에 불고 있는 지주사 전환 바람이 근본적인 배경으로 지목된다. 문재인 정부가 지배구조에 대한 규제를 강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기업들이 이른바 ‘자사주의 마법’이 사라지기 전에 지주사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자사주의 마법’은 기업이 인적분할을 할 경우 지주사는 본래 가지고 있던 자사주와 동일한 비율로 새로 생긴 법인에 대한 지분을 자동으로 확보하게 되는데, 이때 자사주로는 행사할 수 없던 의결권이 새롭게 생기면서 지주사의 자회사 지배력이 높아지게 된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소유구조가 대부분 순환 출자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이를 투명하게 하려면 지주사 전환이 불가피하며, 적대적 투자자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기존 대주주의 지배력을 강화해줄 필요가 있다며 ‘자사주의 마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사주 마법’을 빌미로 지배력이 편법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재벌 개혁의 핵심 과제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이에 지난해부터 지주사 전환을 위해 기업 분할을 추진하는 기업이 크게 늘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016년도에 유가증권 시장 상장사의 합병·분할·분할합병 공시는 총 66건으로 2015년에 비해 20%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회사분할공시가 전년 대비 100% 증가한 20건으로 나타났고, 그중에서도 인적분할이 6건으로 2015년 1건에 비해 크게 늘었다. 작년 하반기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샘표식품, 일동제약, 크라운해태제과, 매일유업 등이 지주사 전환 후 재상장을 완료했고 오리온도 지난 7월 7일 지주사 전환을 마친 뒤 재상장 됐다. 삼성전자 역시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이어 2016년 기업 분할을 추진했으나, 전면 철회하고 모든 자사주를 소각한 바 있다.

이처럼 많은 기업이 기업 지배구조를 바꾸는 데 나서고 있으니, 이들 기업에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국민연금이 결정적인 카드를 쥐고 있는 상황 또한 자주 연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이 당연한 것이, 국민연금은 주식시장 최대의 큰손이다. 2017년 6월 말 기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국내 주식시장을 대상으로 운용하고 있는 기금은 무려 124조 원에 달한다. 사실상 우리나라 주식시장 전체를 쥐고 흔들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기금이다.

▲국민연금 기금 운용현황. (사진 =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홈페이지)


공공의 돈이라 민간 부문에 개입 못한다고?

국민연금은 공공부문이나 중소기업에 대한 투자를 늘려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기금인 만큼 모험을 피하고 안정적인 수익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 막대한 돈이 주로 대기업에 쏠려 왔다. 30대 재벌그룹 가운데 국민연금이 그룹 총수 일가보다 더 많은 지분을 보유한 그룹이 3분의 2에 달한다. 재벌개혁의 필요성과 관련해 국민연금의 역할론이 불거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공적 기금인 국민연금이 민간 기업의 경영에 개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영향력이 큰 국민연금이 지분에 따른 의결권을 함부로 행사하면 자본시장 교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미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당시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는 과정에서 공권력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난 것처럼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원칙 및 세부 기준에는 허점이 많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해당 의견이 절대적으로 반영되는 것이 아니며, 겨우 찬성, 반대, 기권 정도의 선택지 안에서 주주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고작이다. 여기서도 국민연금은 안정적인 방향을 최우선으로 택하기 때문에, 대개 ‘대세’의 흐름을 따라왔다. 그리고 기업의 대주주가 바로 대세인 셈이다.

이런 일이 거듭되다보니,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좀 더 세부적인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가 허용된 것이 2003년이고,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지침이 마련된 것은 2005년도다. 당시 국민연금 기금에서 주식시장에 투자되던 금액은 50조 정도였는데, 그 규모가 2배 이상 커진 현재에 적합한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국민연금 30주년 기념 앰블럼. (사진 = 국민연금공단)


남의 돈 관리하려면 '집사의 책임' 제대로 져야

이에 최근 들어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의 도입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주식 투자가 주목적인 기관투자자는, 고객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집사(steward)’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관리해야 하므로, 소극적인 의결권 행사를 넘어서 기업의 핵심 경영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해 개선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를 수탁자에게 투명하게 보고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현재 영국을 비롯해 10여 개 국가에서 도입해 운영 중인데, 일반적으로 기관투자자의 자율에 맡기는 가이드라인으로 강제성은 없다. 하지만, 원칙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그 사유를 설명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2016년 12월 기본 7개 원칙을 공포한 바 있는데, 그 핵심은 의결권 행사 및 기업 경영 참여다.

국민연금도 새로운 정부의 정책방향에 맞춰 스튜어드십 코드의 세부시행 방안을 외부 용역에의 의뢰를 통해 마련 중이다. 그 결과에 따라 의결권 행사는 물론 지배구조 등 핵심 경영사항 전반에 걸쳐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국민연금이 직접 운용하고 있는 기금에 대해서 적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약 40%가량에 달하는 기금을 위탁 운용하고 있는 외부 기관들에게도 스튜어드십 코드 채택을 유도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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