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전시] ‘회피’로 세워진 ‘국적 없는 돈’의 행방

파레틴 오렌리, '기괴 생명체' 대도시에 주목

김금영 기자 2017.11.17 10:48:25

▲파레틴 오렌리, ‘하이힐(HIGH HEELS)’. 혼합 미디어 설치, 80 x 140 x 200cm. 2016.(사진=김상태, 아트선재센터)

(CNB저널 = 김금영 기자)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하티제 귀부인은 홀로 남았다. 그래도 그녀를 보살펴주는 하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하티제가 허리 통증으로 하이힐을 신지 않으면서부터 하인들이 그녀를 험담하고 물건을 훔치기 시작했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는 하티제의 존재를 상징했기에, 이 소리가 사라지자 하티제에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게 된 것. 하티제는 2년 동안 주기적으로 하인을 새로 고용하고 다시 해고하는 수고를 거듭하다가 지치고, 결국 집에서 다시 하이힐을 신기 시작한다.


터키 작가 외메르 세이페틴의 단편 소설 ‘하이힐’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아트선재센터에서 12월 3일까지 열리는 파레틴 오렌리의 개인전 ‘국적 없는 돈’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큰 토대가 됐다. 파레틴 오렌리가 이 소설에서 주목한 점은 바로 ‘회피’. 소설 속 하티제는 하인들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꼈지만, 정면 돌파를 하기보다는 다시 하이힐을 신으며 눈과 귀를 가리기를 선택한다. 즉 문제가 있다는 건 알지만, 굳이 대면하고 싶지 않으므로 문제를 피한 것. 그리고 이 회피 행위는 현재의 시장만능 자본주의 사회라는 괴물을 탄생시킨 거름이 됐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회피로 생겨난 일들과 앞으로 생길 수 있는 일들에 대한 경고를 작업을 통해 이야기한다.


▲파레틴 오렌리의 개인전 ‘국적 없는 돈’이 열리는 전시장 전경.(사진=김상태, 아트선재센터)

한국, 네덜란드 등을 오가며 다양한 사회의 모습을 살펴 온 작가는 권력의 흐름을 따라가는 작업을 이어 왔다. 이전 작업은 보다 정치적인 색깔이 강했다. 대표적으로 이번 전시에서도 볼 수 있는 비디오 DMZ 프로젝트(2013)는 남북의 정치적 상황을 성형수술에 빗대어 표현한 작업이다. 화면에는 성형수술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작가는 “수술을 한 뒤 새 얼굴을 봤을 땐 본인의 얼굴이지만 낯선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이것이 한국을 바라보는 여러 정치적 상황들과도 비슷해 보였다. 서구에서 한국을 바라볼 때는 당장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남북문제를 심각하게 보지만, 서울 내부에서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며 “진실을 제대로 보려는 노력보다는 보이는 대로 쉽게 믿으려 하는 회피 행위 속, 익숙하고도 낯설게 느껴지는 온도의 차가 마치 성형수술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시장 한쪽 벽에는 큰 지도가 그려졌다. 전 세계의 석유, 천연가스 수송을 위해 만들어진 파이프라인을 표시했다. 작가는 이 파이프라인에서도 권력의 흐름을 느꼈다. 그는 “전 세계의 파이프라인은 단순하지 않다. 테러리즘 등 국가 간 불거지는 정치적인 문제로 통행금지가 된 지역, 국가에서 갈 수 없는 지역이라 선포된 곳들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파이프라인의 흐름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 흐름에 주목해 작업에 옮겼다”고 설명했다.


▲파레틴 오렌리, ‘눈 먼 서울/소울(BLIND SEOUL)’. 캔버스에 혼합 미디어, 11 x 170cm. 2015.(사진=김상태, 아트선재센터)

2014년을 전후로 작가는 주목의 대상을 바꾼다. 이번 전시에서는 ‘정치’보다 ‘경제’에 따라 움직이는 권력의 흐름에 주목했다. 작가는 “과거엔 정치가 권력의 주체였다면, 이젠 경제가 더 많은 권력을 쥐는 시대라고 생각했다. 자본이 정치를 흔들고 있다”며 “자본주의의 흐름에 따라 지식에도 시장만능을 추구하는 상업화가 일어났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인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자본이 정치를 흔드는 시대에 인간은?


▲전시장 한쪽 벽에 전 세계의 파이프라인 흐름을 읽는 지도가 그려졌다.(사진=김상태, 아트선재센터)

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실질적 대상으로 작가는 ‘돈’ 그리고 이 돈을 만들어내는 플랫폼으로서의 ‘도시’에 주목했다. 특히 도시를 기괴한 생명체로 표현한 점이 눈길을 끈다. 괴물이 된 도시는 사람들의 돈과 노동력 그리고 욕망을 먹고 더욱 기괴하게 커진다. 이 욕망은 국경에 상관없이 어디든 존재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먹어 치우고 있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한 모습이다. 아니, 알고는 있지만 회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 많은 자본을 위해.


이 도시가 전시장에서 유독 번쩍번쩍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다. 30분마다 전시장의 전체 조명이 꺼지고, 잠시 후 소리가 점차 공간을 채운다. 그리고 고층빌딩들이 즐비한 모습을 표현한 작품 ‘하이힐’에 빛이 서서히 켜진다. 이 작품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며 존재감을 발하는 동안 다른 작품은 어둠 속에 가려진다. 어둠 속 은밀하게 숨겨진 욕망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현재 손에 쥔 것에 만족하지 못한 채 자본의 욕망에 점점 휩쓸려 다른 것들에서 점점 시선을 돌리는 현대인의 일면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파레틴 오렌리, ‘국적 없는 돈’. 40개 초상화, 혼합 미디어, 33 x 48cm(each). 2016.(사진=김상태, 아트선재센터)

그리고 이 현대인의 표정이 ‘국적 없는 돈’ 마스크팩 작업에서 읽힌다. 미용을 위한 마스크팩에 작가는 시진핑, 푸틴 등 익숙한 얼굴들을 넣었다. 작가는 이들을 “소위 일컬어지는 전 세계의 부자 패밀리”라 소개했다. 표정은 근엄하게 지으려 애썼지만, 마스크팩의 형태에 따라 얼굴이 쭉 늘어져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웃픈’ 지점이다.


돈이 최고로 일컬어지는 사회에 대한 작가의 우려는 ‘눈 먼 서울/소울’과 ‘마지막 신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눈 먼 서울/소울’은 사람 형상 안에 서울 풍경을 집어넣은 작업이다. 그런데 이 사람 형상의 눈이 가려져 있다. 작가는 “하루아침에 뭔가 없어졌다 나타나는 게 이상하지 않은 사회다. 그리고 이 현상을 돈이 주도하고 있다. 그 광경이 내게는 돈밖에 보지 못하는, 점점 눈이 멀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영혼마저 잠식당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작업명을 ‘눈 먼 서울/소울’이라고 정했다”고 설명했다.


▲파레틴 오렌리 ‘국적 없는 돈’ 중 시진핑의 얼굴을 한 마스크팩.(사진=김상태, 아트선재센터)

전시장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가장 처음 마주하고, 또 나갈 때 마주하게 되는 ‘마지막 신호’엔 그래도 희망을 바라보려는 작가의 의도가 담겼다. 화면 속 인간의 신체에 TV를 연결했는데 이 TV에 다양한 영상이 펼쳐진다. 이 영상은 주마등과도 같다.


작가는 “사람이 죽기 전 자신에게 내재된 마지막 이미지를 송출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삶의 주체로서 설 수 있는 기반엔 삶을 살아오며 쌓인 지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식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형태를 바꿔오며 항상 존재해 왔다. 이 지식의 상업화가 격심해지고 있다”고 짚었다. 그는 이어 “단지 돈을 위해서만,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만 쌓는 지식이라면 나무 이파리처럼 언젠가는 떨어져서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성숙한 경험을 쌓아 튼튼히 지식을 구축해 놓는다면 나무 이파리가 아닌 튼튼한 뿌리가 돼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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