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2) 유나얼] 존재 의미 되살리는 유나얼의 ‘콜라주얼’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기자 2018.01.15 10:26:17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2017년 7월 파라다이스 집(Paradise ZIP)은 약 2달간 유나얼의 개인전 ‘유나얼.ZIP-for thy pleasure’를 진행했다. 파라다이스 문화재단이 운영하는, 그 자체로 조형적 아우라를 발산하는 주목받는 전시공간에서의 개인전은 작가로서 유나얼의 행보가 한 계단 올라섰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 전시에서 작가는 매우 적극적으로 대형 콜라주 회화와 설치 작품들을 선보였다. 작년 연말부터 가수이자 작곡가 나얼의 행보가 주목받는 것을 보며, 최근 부쩍 성장한 모습을 보였던 작가 유나얼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런 연유로 이번 호 ‘더 갤러리’는 필자의 연구소 프로젝트를 위해 진행했던 작가와의 대화 일부를 바탕으로 그의 작업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자 한다. 

형식적으로 유나얼의 작업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콜라주이다. 그의 작업을 소개하는 기사들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었던 콜라주얼(Collagearl)이라는 단어는 그의 작업 방식을 대표하는 고유명사로 자리 잡았다. 최근에는 다양한 오브제들을 이용한 설치 작품들이 두드러져 작가가 장르적 실험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일부는 아상블라주(assemblage)나 컴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의 방식으로, 일부는 단일 오브제 그 자체로 놓인다. 결과물이 입체이든, 평면이든, 손으로 직접 붙여나가든, 스캔한 이미지들을 컴퓨터 안에서 조합하든, 작가가 일상에서 우연히 혹은 의도적으로 발견해낸 무언가를 재조합하는 방식은 동일하다. 그의 작업에 음악적 활동의 영향이 전혀 없을 수도 없고, 그의 작업을 음악과 연결시켜 해석하려는 시도도 있기에 이러한 작업 방식을 1990년대 흑인 음악의 샘플링(sampling)과 비슷하다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유나얼이 의도적으로 샘플링의 방법을 미술에서 시도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이어짐 정도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유나얼, ‘Collagearl’ 2016, 부분

어느 하나가 ‘독재’ 않고 서로 포용하는 콜라주

한편 콜라주를 위한 재료의 선택 기준은 전적으로 작가 개인의 취향에 근거한다. 어떤 형태로든 작가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거나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선택된다. -작가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단어를 선택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문자나 텍스트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완성된 시각적 결과물에 가장 집중한다. 물론 재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선별하여 한 점의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과정도 중요하다. 그러나 유나얼의 경우 작업의 과정을 공개하거나,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활용한 작업을 -아직은- 선보이지 않기 때문에 결국 관객과 만나는 것은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작품뿐이다. 

▲유나얼, ‘Charles VS. Walcott’ video, 13min, 2017

전적으로 작가의 취향을 따른 선택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기에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몇몇 특징을 찾아낼 수 있다. 본 글에서는 두 가지만 이야기해보겠다. 하나는 다른 색이나 형태와 어우러지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배타적 고유성을 내뿜는 이미지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화면 속 세상에서는 분명 대조보다 조화가 우선시된다. 특정한 하나, 특정한 부분이 주인공이 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는다. 마치 모든 이미지가 처음부터 그렇게 함께였던 것처럼 모두를 포용하는 전체가 먼저다. 또 하나의 특징은 시간의 흐름을 전달하는 이미지들이 절대 다수라는 점이다. 그의 작품은 맑지만 아렴풋한 ‘과거 어느 한 때’들의 중첩 같다. 실제로 유나얼은 고등학교 때, 미술 수업 시간에도 새 스케치북의 흰 종이가 아니라 골판지나 박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것들로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 흡족함을 느꼈다. 그러나 시간을 담아낸다는 것이 단순히 낡은 물건을 사용함을 의미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브제가 풍기는 분위기까지 포함한다. 여기에는 작가가 1980-1990년대의 감성을 선호하고, 세월을 머금은 오브제들을 가까이 두는 삶의 방식도 한 몫 할 것이다.

▲유나얼, ‘Order of Water’, mixed media, 1245x800, 2017

그의 작품에 나오는 흑인의 의미는?

유나얼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흑인의 이미지 역시 이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흑인을 그리게 된 것은 중학교 때부터 즐겨 들었던 흑인 음악, 그로 인해 알게 된 흑인 문화의 영향 때문이다. 작가는 컨템포러리 알앤비(Contemporary R&B), 1990년대 중창단, 하모니와 보컬스킬에 흠뻑 빠졌고,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들을 그리면서 흑인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흑인 음악을 좋아하다보니 그들의 신체적 특징, 그들의 행동, 리듬감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것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즐거움이 되었다. 여기에는 어떤 계산도, 의도도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존재를 그리는 순수한 마음만 있었다. 오늘날 흑인의 이미지가 미술에 등장할 경우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탈식민주의, 다원주의 같은 인종과 민족의 문제이다. 다양한 민족성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유나얼의 작업도 일정 부분 연결 지점이 있을 것이다. 반대로 누군가는 그에게 흑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토대로 작업하는 것인지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현실과는 괴리된 흑인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낼 뿐이라 비판할 수도 있다. 작가 역시 자신이 좋아서 그리는 순수한 행위가 현실의 많은 문제들을 망각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확실한 것은 그의 작업이 특정한 인종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생산하거나 어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 비해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기 위함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나얼, ‘Great Mystery’, digital collage, 88x120cm, 2017

최근으로 올수록 유나얼에게 특히 중요한 주제는 성서이다. ‘유나얼.ZIP-for thy pleasure’에서 선보였던 작품 대부분은 기독교의 교리와 믿음에 대한 것이었다.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전면에 내세운 작업을 선보이는 것은 요즘 작가로서 보기 드문 행보다. 미술에서 특정 종교의 도상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은 현재의 사회, 정치, 문화 등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것들이다. 서구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부활,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에 대한 의문과 고뇌, 인간의 종교적 행위에 숨겨진 이중성 등을 다루어 신성모독 논란까지 일었던 작품들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분명 유나얼의 작업은 이런 작업들과 정반대에 위치한다. 오늘날의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있다. 작가의 신앙이 예술적 성취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작가의 예술적 시도들이 제한될 수도 있다. 세상을 하나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폐쇄성을 갖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특정한 종교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작업에 대한 분석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할 수도 있다. 

▲유나얼, ‘500’, digital collage, 124x172cm, 2017

믿음과 예술 사이에서

긍정적, 부정적, 혹은 또 다른 제 3의 방식, 그 어떤 시선으로 보아도 현재 그의 작업이 중요한 전환점에 위치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모든 작가가 다 그렇겠지만 작업을 할수록 점점 고민이 많아진다. 무엇보다 나의 작업이 하나님 보시기에 과연 좋은 일이고, 옳은 일인지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다. 콜라주 작품 하나를 할 때에도 내가 좋아서 하는 이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을지 생각한다. 만약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 아니라면 나는 이것을 그만 둬야 하는지와 같은 고민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관이 성경과 반대될 수 있지만 나 자신도 이 시대를 살고 있고, 이 시대의 문화 속에서 상호작용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 고민하고 있다. 과연 어떻게, 어디까지 표현하는 것이 좋을지 늘 고민한다. 쉽지 않다”는 작가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가 종교적 믿음과 예술 사이에서 가장 좋은 위치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의 고민을 알기에 다음 개인전에 그가 어디에 서 있을지 기대된다. 유나얼에게는 큰 짐일 수 있지만 어쩌면 그 고민이 끝나서는 안 될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고민할수록, 그 고민이 깊을수록 ‘참 보기 좋은 작품’이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유나얼, ‘Image Bomb’, digital collage, 130x180cm, 2017



작가와의 대화

Q. 언제부터 작품에 성서의 내용이 들어가게 됐는지 궁금하다.   

A.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텍스트가 작품에 등장하면서부터일 것이다. 텍스트가 작품에 등장한 것도 영어의 이미지 그 자체가 시각적으로 재미있어서였고, 처음에는 좋아하는 곡의 가사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문자가 작품의 조형 요소로서 역할을 할 것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Pieces of Words> 시리즈, <Divine Nature>, <Body of Death>와 같은 신작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작품을 보고 그것이 복음의 구절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관객, 그냥 이미지로 읽는 관객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작품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업한다. 

Q. 일상의 물건 혹은 버려진 물건으로 작업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분법적 위계와 경계를 해체하는 동시대적 미술의 특성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본인의 경우는 조금 다른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버려진 물건을 주워서 예술로 변화시키는 데에도 종교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가? 또한 길 위의 물건들을, 아프리카를 떠나 부유(浮遊)하는 삶을 살았던 흑인의 역사를 은유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될지 궁금하다. 

A. 기독교적인 의미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지만 버려진 물건들에 대해 측은지심을 갖는 것은 사실이다. 이 세상에서 무가치한 것으로 버려진 물건을 데려와 의미 있는 걸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쁨을 많이 느낀다. 어떻게 보면 나의 작업은 아무에게도 관심 받지 못했던 것들의 조합이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이 진지하게 바라본다. 보기 좋다고 말해주기도 한다. 이것이 예술의 힘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실 때에도 그런 생각을 하시지 않을까 싶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쓸모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소중한 자녀이고, 하나님의 뜻으로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으로 만드실 수 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작업을 시작할 때 흑인의 역사를 은유하기 위해 길 위의 물건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들이 맞물리게 되었다.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라 생각한다.    

Q. 오늘날의 미술은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특정한 메시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관객들의 다양한 해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열린 의미를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본인의 작업은 절대적 진리인 성서를 다룬다. 물론 모든 미술 작품이 무조건 관객과 소통하거나 함께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굳이 동시대의 미술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미술은 이미지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기에 누가, 언제, 어디에서 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종교적 교리를 담아낸 작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본인의 의도와 전혀 다른 해석이나 반응이 나올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A. 복음을 다룬 작업의 경우, 아직까지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독된 경우는 없었지만 당황스러울 정도로 다르게 해석되면 속상할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이미지로서의 접근이니 내가 의도한대로 다 전해질 수는 없고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작품들은 모두 다양한 세부 이미지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다. 때때로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해석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더 좋은 의미였다. 그럴 때는 감사하다. 작가마다 작업을 하는 이유가 모두 다를 것이고, 관객들도 미술을 보러 오는 이유가 다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 작업을 하면서 가장 원하는 것은 사람들이 나의 작품을 보고 ‘참 보기 좋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그저 하나님께 맡길 뿐이다.

(정리 = 최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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