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전시] 불분명한 몸짓-음악이 분명한 언어를 넘어 소통할 때

메시티가 아트선재에 펼친 ‘릴레이 리그’

김금영 기자 2018.01.17 09:52:56

▲‘수신자 전원에게 알림’은 모스 부호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시각화한 조각 작품이다.(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1997년 1월 31일. 해양 조난 통신에 사용돼 오던 모스 부호가 130여 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프랑스 해군이 송출한 마지막 전신 내용. “수신자 전원에게 알림. 이것은 영원한 침묵에 앞선 우리의 마지막 함성.” 그리고 이 모스 부호는 안젤리카 메시티가 소통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됐다.


아트선재센터가 호주 작가 안젤리카의 국내 첫 개인전 ‘릴레이 리그’전을 2월 11일까지 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황동과 철로 만들어진 작품이 보인다. 작품명은 ‘수신자 전원에게 알림’. 프랑스 해군의 마지막 전신을 구성하는 실제 단음과 장음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물리적으로 표현한 조각이다. 이 조각들이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소리가 전시장에 울려 퍼지며, 발신과 수신이라는 모티브를 시청각적으로 드러낸다.


▲‘릴레이 리그’가 설치된 2층 전시장. 각 영상을 분리하는 비닐 구조물이 설치됐다.(사진=김금영 기자)

작가는 “모스 부호는 과거 멀리 있는 상대와 소통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다. 단음과 장음이 반복되며 새로운 내용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흥미로운 일이었다”며 “단지 언어뿐만 아니라 소리, 몸짓, 그림자 등 우리를 둘러싼 모든 요소들이 소통의 방식으로 사용되며, 분리된 우리를 연결해줄 수 있는 가능성도 여기에서 엿봤다”고 말했다.


‘수신자 전원에게 알림’을 지나쳐 2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영상 작업 ‘릴레이 리그’가 설치됐다. 3채널 비디오로 구성됐는데 이 공간에 들어서면 복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일단 각 영상을 한곳에서 한꺼번에 볼 수 없는 구조다. 비닐 구조물이 각각의 영상 사이를 가로막아 한 영상을 볼 때 다른 영상의 소리만 들린다.


그런데 비닐 구조물은 각 영상을 분리하는 동시에 또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한 영상을 볼 때 전시장에 들어오는 사람 등 다른 편에 존재하는 대상의 모습이 비닐 구조물에 뿌옇게 비친다. 그래서 다른 쪽 화면의 영상을 볼 수는 없지만 또 그렇다고 다른 공간과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닌, 모호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런 구성을 취한 이유는 ‘릴레이 리그’에서 찾을 수 있다.


▲안젤리카 메시티, ‘릴레이 리그(Relay League)’. 3채널 비디오 설치, 8분. 2017.(사진=아트선재센터)

가장 먼저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위리엘 바르텔레미가 파리 교외의 한 건물 옥상에서 최후의 모스 전신을 정교한 악보로 번역해 드럼을 연주하는 화면을 볼 수 있다. 연주자는 빗자루와 드럼 스틱, 씨앗이 든 호주 오동나무 꼬투리를 번갈아 사용해 단음은 심벌, 장음은 베이스 드럼의 깊은 저음으로 표현하며 리듬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마주하게 되는 두 번째 영상은 남녀 무용수가 스튜디오 바닥에 앉은 가운데 시작된다. 여자 무용수 에밀리아 위브론 베스터룬드는 남자 무용수 신드리 루두네의 손과 팔을 잡고 들어서 흔드는 등 이끌면서 동작 하나하나를 몸소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 작가는 “신드리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이들을 어떤 공연장에서 마주했는데, 그때도 에밀리아가 신드리의 몸에 접촉하면서 어떤 공연이 펼쳐지는지 전달하고 있었다”며 “꼭 언어가 아니더라도 몸짓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그 소통 방식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얼굴 붉히며 언성 높이는 불협화음이 아닌
서로의 몸짓, 소리에 주목해 이루는 아름다운 화음


▲안젤리카 메시티, ‘릴레이 리그(Relay League)’. 3채널 비디오 설치, 8분. 2017.(사진=아트선재센터)

마지막 영상에는 안무가이자 무용수인 필리프 루랑소가 등장한다. 그는 격렬한 춤을 춘다. 그런데 영상을 잘 살펴보면 어딘가 익숙한 장소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영상이 진행될수록 영상 한켠에 슬쩍 에밀리아와 신드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즉 에밀리아, 신드리, 필리프는 모두 같은 장소에 있고 필리프의 춤을 본 에밀리아가 몸짓으로 신드리에게 이를 전달한 것. 또 이 모든 영상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음악이 첫 번째 영상의 멜로디다. 각 영상은 분리돼 있지만 하나로 소통하고 있다는 점, 이것이 비닐 구조물 형태를 통해 극대화된다.


작가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보고 넘어가면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각각의 이야기가 연쇄적인 내러티브로 펼쳐지기를 바랐다”며 “이것은 타인 또는 여러 상황들과 마주하며 다양한 형태로 소통하게 되는 우리의 모습과도 같다”고 설명했다.


▲안젤리카 메시티, ‘시민 밴드(Citizens Band)’. 4채널 비디오 설치, 21분 25초. 2012.(사진=아트선재센터)

비디오 설치 작업 ‘시민 밴드’에서도 여러 만남이 이뤄진다. 네 개의 개별 화면으로 구성된 이 작업에는 고향을 떠나 프랑스와 호주로 이주한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고향의 전통 음악 기법으로 새롭게 각색한 연주를 펼친다. 카메룬 출신인 제랄딘 종고는 파리의 한 실내 수영장에서 자신의 양손을 이용해 물의 표면을 두드리며 다채로운 비트를 만들어낸다. 이어서 펼쳐지는 영상에는 알제리에서 온 난민 음악가 모하마드 라무리가 고향에서 사회적 탄압을 받았던 라이 음악을 파리 지하철 안에서 키보드 연주에 맞춰 부른다.


몽골에서 온 부크출롱 갱보르게드는 시드니 뉴타운 길모퉁이에 자리 잡은 채 마두금이라는 현악기 반주에 맞춰 연주를 시작한다. 수단에서 이민 온 아심 고레시는 해가 저문 브리즈번에서 택시를 몰다 즉흥적으로 휘파람을 분다. 처음엔 각각 연주되던 이 소리들이 나중에는 한꺼번에 결합되면서 화음을 이루기 시작한다.


▲안젤리카 메시티, ‘시민 밴드(Citizens Band)’. 4채널 비디오 설치, 21분 25초. 2012.(사진=아트선재센터)

작가는 “내 작업은 사회적 상황과도 맞닿아 있다. 2015년 파리에서 살 때 테러 사건을 마주하면서 죽음과 상실에 대해 고민했고, 이 고민은 구조 신호를 보낸 과거의 모스 부호를 떠올리게 했다. 지금 모스 부호는 사라졌지만 현재 사회는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가운데 미디어에 노출된 다수의 이야기보다는 개개인의 역사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리고 개개인의 에피소드를 보니 그들의 이야기가 들렸다. 이야기는 언어로 들리기도 했고, 때로는 악기 소리, 몸짓으로도 전달됐다”고 설명했다. 이 가운데 작가가 바라본 것은 공동체의 회복,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들 간의 화합과 이해다.


작가는 “‘릴레이 리그’의 영상들에선 소리와 몸짓을 연결시켜 소통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시민 밴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자랐고 언어도 다르다. 그래서 이해가 어려울 것 같지만 하나의 음악으로 연결되며 서로에 대한 이해의 가능성을 연다”며 “직접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현장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들의 소통 방식에 주목하며 미래 화합의 가능성을 찾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얼굴 붉히며 서로 언성 높이는 불협화음이 아니라 서로의 몸짓, 소리에 주목해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내는 아름다운 화음. 작가는 그 화음을 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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