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성 - 겸재 정선 그림 속 길 (2)] 아스팔트 아래로 흐를 자하동川을 마음으로 걷는다

이한성 동국대 교수 기자 2018.02.05 09:42:13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아쉬움을 남기고 경복고등학교 정문을 나선다. 주택가 골목을 빠져 나와 우로(서쪽으로) 향하면 자하문로로 나서게 된다. 자하문터널을 통해서 세검정, 평창동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길을 북쪽 자하문터널 방향으로 잡는다. 이 길은 이제는 대중교통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차량이 다니는 큰길이지만 복개된 도로 밑으로는 북악산과 인왕산에서 발원한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르던 하천이었다. 자하동, 백운동, 청풍계, 옥류동, 수성동…. 그 맑던 물이 어두운 공간으로 흘러들어가 청계천으로 간다. 도시가 되면서 얻은 편리함과 잃은 자연이 함께 있는 공간이다.

 

한 500m쯤 올라왔을까, 우측으로 경기상업고등학교가 나타나는데 반갑게도 학교 담에는 조그만 옛 그림이 붙어 있다. 가만 들여다보니 겸재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 있는 그림 청송당(聽松堂)이다. 이곳이 청송당 유지(遺址)임을 알리는 표지판인 셈이다.

 

‘청송당 집터’라는 표지판이 반기고

 

청송당의 흔적을 찾으려면 학교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유지는 두 곳에 있다. 하나는 청송당 초석이고, 또 하나는 청송당 유지임을 알리는 자연석에 새긴 각자(刻字)와 요즈막에 세운 표지석이다. 

 

학교 건물은 남쪽을 향해 두 줄로 서 있다. 정문에서 직진하여 건물 서쪽 끝에서 뒷담 쪽으로 향하다 보면 앞건물과 뒷건물 사이 화단에 잘 정비된 초석들이 보인다. 청송당 유지임을 알리는 안내판도 있다. 일단 이 유지를 확인했으면 두 번째 건물을 지나 학교 뒷담까지 나아가자.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았을 것처럼 보이는 층계를 올라 뒷담을 끼고 가면 동북쪽 코너에 고목이 서 있고 그 아래 바위에 聽松堂遺址(청송당유지)라는 반가운 각자(刻字)가 기다리고 있다.

 

청송당이 있던 자리임을 표시하는 ‘청송당유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진 = 이한성

聽松堂(청송당). 조선 전기의 큰 학자 성수침(成守琛, 1493~1564년) 선생이 머물던 곳이다. 聽松, 소나무를 보지 않고 듣다니….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다. 눈으로 보는 견송(見松)이나 관송(觀松)이라 하지 않고 성수침 선생은 귀로 듣는 미학을 택했다. 이 집에 칩거하여 글 읽고 사색하던 선생에게는 청청한 푸르름을 보고 눈을 호사하기보다는 송뢰(松籟; 솔바람 소리)를 듣는 것이 마음에 들었던가 보다. 聽松은 선생의 호(號) 중 하나이며, 당호(堂號) 청송당은 중종 21년에 눌재 박상(訥齋 朴祥) 선생이 붙여준 것이다.

 

복사꽃 흐드러지게 피었던 동네 

 

이 집터를 처음 잡고 집을 지은 이는 아버지 성세순(成世純)이었다. 

 

성수침 선생은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선생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중종 14년(1519년) 일어난 기묘사회로 이상을 꿈꾸던 도학정치가 무너지고 피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는 청치의 현장을 접하고는 과거의 뜻을 접고 이곳에서  학문의 길에만 정진하였다. 이 지역에 소나무가 얼마나 우거졌는지는 기록에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알 수는 없으나 복숭아 나무가 많아 예부터 복사골 즉 도화동(桃花洞)으로 이름을 날리던 곳이었다. 이미 거쳐온 경복교 교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대은암 도화동 이름난 이곳…”.

 

봄이면 복사꽃 흐드러지게 핀 청송당에 앉아 선생은 노래하였다.

 

이려도 太平聖代(태평성대) 
저려도 太平聖代
堯之日月(요지일월)이요 
舜之乾坤(순지건곤)이로다
우리도 太平聖代에 놀고 가려 하노라       

 

아드님 성혼(成婚) 선생은 율곡 이이, 구봉 송익필 등과 더불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서 명망이 높았다. 부자(父子)가 한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였기에 청송당은 후학들에게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 되었다. 선생 사후에는 많이 퇴락한 청송당을 윤선거, 윤순거 등의 후학들이 중건하였다. 겸재의 그림에 그려진 청송당은 이들이 중건한 모습일 것이다. 현재 청송당을 그린 겸재의 그림은 세 점이 전해진다. 국립박물관 소장 장동팔경첩 속 청송당, 간송에 소장된 장동팔경첩 속 청송당, 그런데 갑자기 몇 년 전에 또 하나의 청송당 그림이 나타났다. 고미술 전문화랑 공 아트스페이스에서 또 하나의 장동팔경첩을 내놓은 것이다. 간송본 청송당도에는 긴 지팡이를 든 신선 같은 선비가 동자를 앞세우고 청송당의 위 건물을 향하고 있다. 아마도 겸재는 반은 도사가 된 청송 선생을 그렸으리라. 

 

이제는 청송당 아랫건물은 학교 부지 속 일부가 되었고 계곡 위 건물터로 여겨지는 곳에는 뉘 집인지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은 시간에 따라 임자가 달리 있는 것이니 과히 애석해 할 일도 아니다.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청송 성수침으로 보이는 선비가 동자를 앞세우고 청송당을 향하는 모습을 그림 겸재 작 ‘청송당’(간송미술관 소재). 그림 속의 맑은 물은 이제 아스팔트에 뒤덮여 지하를 흐르고 있을 터이니, 도대체 우리의 쇠락은 어디까지 흐를 것인가. 

이제 청송당 옛터를 나와 자하문터널 방향으로 나아간다. 터널에 이르기 전 오른 쪽에 후기성도교회가 보인다. 그 앞길로 올라 교회를 지나면 옛 건물터가 있는 산 아래 넓은 공터를 만난다.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선생이 살던 집터다.

 

현재의 자하문로에서 자하문로 36길로 갈라지는 지점. 사진 = 이한성

동농 김가진. 선생은 1886년 병자호란 때 순절한 선원 김상용(金尙容: 청음 김상헌의 형님) 선생의 장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한 후, 주일공사, 개혁을 주도하던 군국기무처회의원, 공조판서, 농상공부대신, 중추원1등의관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독립협회에도 가담하였다

식민조선 최고위직이 임시정부에 가담하고, 
그 며느리는 임시정부 안살림 책임졌으니…

 

1910년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庚戌國恥)에는 일본인들이 조선 고관들에게 내려준 남작의 작위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선생은 활동을 중지하고 은거하며 하사금을 받지 않았다 한다. 이후 비밀결사조직 대동단(大同團)의 총재로 활약하였고 삼일운동이 일어나던 해 10월에는 둘째 아들 의한(1900~1964)의 손을 잡고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선생의 대동단은 1919년말 고종황제의 5자(五子) 의왕 이강(義王 李堈)공을 망명시키는 특별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압록강 건너 중국 땅 안동(安東, 지금의 단동)에서 발각되어 국내로 송환되고 말았다. 생각할수록 아쉬운 일이었다. 

 

비록 의왕의 망명은 실패하였지만 선생은 상해임시정부의 고문으로 복국(復國: 나라 회복)운동에 몸 바치니 74세 노구의 조선 최고위직 관리의 임시정부 가담은 독립을 꿈꾸는 조선인들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은 일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선생의 며느님 수당 정정화(修堂 鄭靖和) 선생도 20세 꽃다운 나이에 노구의 시아버지를 모셔야 한다는 일념으로 1920년 1월 상해로 떠났다. 이렇게 시작하여 수당 정정화 선생의 국내 잠입 독립자금 조달 활동과 임시정부의 주부로서 모든 안살림을 맡아야 했던 고된 생활은 해방을 맞던 그 날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이들 가족은 어찌 되었을까?

 

동농 선생은 망명 3년만인 1922년 이역 땅 상해에서 명을 다하니 그곳에 묻혔다. 지금은 손문의 부인 송경령(宋慶齡) 묘역인데 아쉽게도 선생의 묘는 찾을 수가 없다. 1922년 7월 7, 8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선생의 부음 소식을 알리고 있는데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아들 김의한은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고, 수당 정정화 선생은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 요인들이나 중국에서 활약한 독립운동 세력들이 그렇듯이, 해방 후 광복한 고국 땅에 돌아와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완용, 윤덕영 등 친일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나 그 후손들이 누린 세월과는 너무 먼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며느님 정정화 선생이 장강일기(長江日記)라는 제목으로 기록해 놓았다.

 

선생의 집터에 서니 만감이 교차한다. 간송미술관 장동팔경첩에는 이곳을 그린 자하동(紫霞洞)도가 있다. 북악산이 흘러내린 곳 골짜기 제법 넓은 평지와 언덕에 지어진 집들의 배치가 아름답게 구도를 잡은 그림이다.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이 집이 선원 김상용 선생의 고손자 모주 김시보(茅洲 金時保; 1658~1734)의 집으로 설명하고 있다. 겸재 정선은 1711년 36세 되던 해 8월, 스승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이 6번째 금강산 탐승 길에 나섰을 때 그의 시(詩) 제자이며 조카뻘 되는 모주 김시보와 송애 정동후와  함께 금강산을 다녀오는 등 김시보와는 가까운 사이였으니 그의 집을 그림으로 남겼으리라.

 

겸재가 그린 ‘자하동’(간송미술관 소재). 이 아름답던 풍경을 현재는 아스팔트와 시멘트 집들이 뒤덮었으니, 우리 인간은 발전한 것인가, 뒷걸음질 친 것인가.

모주의 7세손인 동농 김가진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넓은 터에 1903년 백운장(白雲莊)이라는 새 집을 지었다. 왼쪽 언덕에는 몽룡정(夢龍亭)을 짓고 당대 명필의 솜씨로 손수 편액(片額)도 써 달았다(이 편액은 현재 남아 있다). 며느님 정정화는 1910년 11살의 나이로 동갑내기 의한과 혼례를 올리고 이곳에서 놀았다 한다. 이곳에는 인왕산 호랑이도 내려왔다던가…. 어린 새 신랑 각씨가 소꼽장 하며 놀았을 몽룡정이 아련하다.

 

겸재와 금강산 동행한 김시보의 7대손

 

동농 김가진 선생의 힘찬 글씨로 남아 있는 ‘백운동천’ 각자. 그의 기상을 느끼게 해준다. 사진 = 이한성

이 터 북쪽 암벽에는 동농 선생이 쓴 힘찬 글씨가 남아 있다. 

 

白雲冬天(백운동천). 光武七年 癸卯 中秋 東農(광무 칠년 중추 동농). 

 

새 집을 짓던 해인 1903년 광무 7년 가을, 힘찬 해서로 쓴 백운동천. 번창하는 대한제국에서 뜻을 펴고자 했을 선생의 기상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라도 빼앗기고 집사의 농간으로 이 집도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 갔다. 1915년(大正4년)에는 일본 요리집 청향원(淸香園)이 되었다가 1929년(소화4년)에는 감히 백운장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생선요리(갑뽀, 割烹)집이 되었다니 아아 슬프다. 아직도 그때의 흔적이 남아 몽룡정으로 올랐음직한 층계길 어구에는 왜색의 정원 석장식이 그대로 서 있다. 독립 후에도 나아진 것은 없어 카바레, 요정, 음식점 화남장으로 전전했으니 동농 선생 일가가 겪은 어려움만큼 이 터도 어려움을 겪었다. 

 

겸재의 스승이었던 삼연 김창흡의 후손인 동농 김가진은, 조선총독부가 내려주는 하사금도 받지 않고 결연히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해 조선인들을 일깨웠다. 그가 지은 백운장은 그 뒤에 일본 요리집이 됐고 지금은 왜색 석등만 덩그러니 남았으니 치욕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사진 = 이한성  

이제 옛터를 두고 다시 교회 앞길로 돌아내려 온다. 주택지 포장도로가 창의문 쪽을 향해 열려 있다. 포장길 바닥을 살피면 계속해서 쇠로 만든 맨홀 뚜껑이 덮여 있다. 그 아래로 하천이 흐른다는 말이다. 바로 창의문도에 그려져 있는 문 아래 심산계곡을 이루는 동천(洞川, 洞天)이다. 이른바 백운동천(白雲洞天)이요, 좁은 범위로 부르면 자하동천(紫霞洞天)이다.

 

겸재의 장동팔경첩에 이 골짜기를 그린 그림 두 점이 자하동(紫霞洞)과 백운동(白雲洞)으로 전해 온다. 간송의 최완수 선생은 자하동은 창의문 아래 북악산 기슭을 일컫던 동네라 했고, 백운동은 인왕산 동편 북쪽 끝자락이라 했다. 그런데 이 골짜기에서 놀던 필자에게는 크지 않은 골짜기 하나를 둘로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성실한 연구자들이 호암 문일평 선생의 글을 찾아 공표를 해주니 백운동과 자하동의 고민은 한결에 풀렸다. 내용인즉, 한양천도 초에 이 골자기를 백운동이라 했는데 이 백운동의 깊숙한 곳을 개성에 있던 자하동에 비교하여 자하동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 이름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개성(松京)의 북쪽 성문 아래 동네가 자하동이라 한다. 그러니 창의문(북서문)이 있는 성 아래 동네를 자하동이라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옛 옥편을 찾으면 城이란 글자의 훈음(訓音)이 “잣/자 성, 잿/재 성”이다.

 

조선 중종 때 어린이들을 위한 책, 최세진의 훈몽자회에도 城은 ‘잣 성’으로 쓰여 있고, 필자가 가지고 있는 1981년 대옥편에도 城은 ‘성 성’과 ‘잿 성’이 병기되어 있다. 옛사람들은 城을 자/잣이나 재/잿으로 불렀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城門은 자문이며 성문밖은 자문밖이다.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창의문밖 구기동, 평창동을 자문밖이라 불렀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 자문은 그 아랫동네는 자하문이 되어 한자화하면 紫霞門이 되고, 잣문으로 쓰다 보면 ‘잣 栢’의 백이 되어 성 근처 동네는 栢洞, 栢子洞도 되었다가 ‘자 尺’으로 잘못 알고 尺洞도 되고, 더 나아가 鵲洞(작동)도 되니 모두 城이 일으킨 요지경 속 이야기다.

 

성 밖 동네란 뜻의 ‘자문밖’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자하(紫霞)-백동(栢洞)-척동(尺洞)-작동(鵲洞)으로 
온갖 괴이한 변화를 일으켰으니  

 

이제 주택 사이 맨홀로 덮인 백운동천(자하동천) 길을 조금 더 오르면 길은 빌라들로 인해 갈라지는데 우측은 벽산빌라로 가는 길이며, 좌측은 신구파인힐로 오르는 길이다. 


우선 우측 벽산빌라 길로 가보자. 창의문도에 계곡을 따라 곧바로 창의문으로 가는 층계길로 그려져 있는 길이다. 슬프게도 바닥 맨홀 뚜껑이 길을 찾는 나침반이 된다. 머릿속은 창의문도의 계곡수를 그리며, 오솔길에 찬찬히 그려져 있던 돌층계를 밟듯이 가자. 

 

이윽고 맨홀 뚜껑이 끝날 즈음, 세상과 단절하려는 듯 절벽으로 선 빌라의 시멘트벽이 있고 거기에 가파르게 설치해 놓은 시멘 층계가 보인다. 가슴이 답답하다. 어서 벗어나자. 층계를 벗어나니 밖에도 역시 그림 속 계곡수는 없고 자동차만 쌩쌩 달리는 창의문 고갯길이다. 길 건너에는 김신조 무리가 넘어오던 그날 순직한 두 분의 동상이 서 있다. 그 앞쪽에는 청계천 발원지 샘이 150m 안쪽에 있다는 표지석이 서 있다. 앞쪽으로는 창의문(彰義門)이 보인다.

 

이제 벽산빌라와 신구파인힐이 갈리는 빌라 갈림길로 다시 돌아온다. 좌측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창의문도에서 보면 계곡 좌측 능선 어디메쯤 가로 질러 오르는 길일 것이다. 이윽고 만나는 괜찮은 건물이 있는데 청운문학도서관이다. 위로는 새로 조성한 청운공원이 깔끔하게 자리잡고 있다. 가난하던 시절 서민들의 보금자리 청운아파트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그 이전에는 이곳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었을까? 국립박물관 소장 겸재의 백운동(白雲洞)도에는 300여 년 전 이곳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림 아래로는 나귀를 탄 길손이 동자 하나 앞세우고 있고, 동과 북으로는 바위에 청청한 소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이 소나무 중 하나였을까? 문학도서관에서 공원으로 오르는 길에는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지금도 길손의 앞길에 휘어져 있으니…. 아쉬운 것은 집 앞에 층층 늘어진 버드나무는 모두 어디론가 가고 없다는 점이다. 없어진 것이 어디 그것뿐이랴.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서울에서 놀만한 곳 중 하나로 백운동이 소개되어 있다. (漢城都中。佳境雖少。而其中可遊處三淸洞爲最。仁王洞次之。雙溪洞白雲洞靑鶴洞又其次). 그러나 이제는 빌라만 빽빽할 뿐 놀 곳이라고는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백운동을 인왕산 기슭 도성에 가까우면서 홍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강희맹(姜希孟)의 시를 빌어 소개하고 있다.

 

“백운동(白雲洞) 속엔 흰 구름 그늘,
백운동 밖엔 홍진(紅塵)이 깊구나
한 줄기 길 서려돌아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문득 놀랐다네 도시에 감춘 산숲.”
(白雲洞裏白雲陰 白雲洞外紅塵深  一逕廻盤入雲中 忽驚城市藏山林)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겸재 정선의 ‘백운동’ 그림. 

옛 자료들을 보면 이곳에는 세조 비, 정희왕후 윤씨의 형부 되는 이념의(李念義)가 살았다. 그는 정2품 지중추부사까지 지냈고 떵떵거리고 살았던 것 같은데 시(詩)를 몰랐던 모양이다. 

 

(白雲洞在藏義門內。中樞李念義居之。詩人有題咏。然李目不知書)

 

남들은 시를 읊는데 그는 눈앞에 책을 두고도 알지 못했다고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콕찝어 소문을 낸 것을 보면 아마도 이념의는 그즈음 사람들 사이에 비호감이었던 것 같다. 임금의 동서로서 권력을 가진 이였을 테니 상황이 짐작된다.

 

겸재의 ‘창의문도’에도 층계길이 그려져 있고, 21세기 이곳 자하문으로 오르는 길에도 계단은 있으나, 그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사진 = 이한성

이제 청운문학도서관을 오르면 새로 단장한 청운공원이 나타난다. 청운이란 이름은 인왕산 북쪽 계곡 청풍계(靑風溪)에서 靑, 이곳 백운동에서 雲, 이렇게 한 자씩 따서 붙인 동명이다. 다만 靑雲이 되지 못하고 현재 淸雲으로 쓰고 있는 것은 1914년 토지조사 사업 당시 동서기(洞書記)의 단순한 실수 때문이다. 윤동주 문학관을 지나 창의문으로 간다. (다음 회에 계속) 

 

(정리 = 최영태 기자)

 

교통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

 

걷기 코스: 경복궁역 ~ 영추문 ~ 쌍홍문터 ~ 무궁화 동산(김상헌 집터) ~ 경복고 ~ 경기상고 ~ 김가진 집터 ~ 자하동 ~ 백운동 ~ 창의문 ~ 한양도성 ~ 해골바위 ~ 기차바위 ~ 홍지문 ~ 옥천암/보도각 백불.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9008-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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