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투자사 “5대 재벌의 무책임 주총 방치하면 ‘헐값 한국’ 계속”

APG 박유경 이사 “10조 투자를 30분만에 무기명 결정하다니…”

윤지원 기자 2018.03.02 17:51:23

2월 26일 국회에서 '기업지배구조 개선 및 주주총회 활성화를 위한 정책 세미나'가 열렸다. (사진 = 윤지원 기자)

 

올해 3월에도 많은 기업들의 주주총회가 예정되어 있다. 본격적인 주총 시즌을 앞둔 2월 26일, 국회에서는 ‘기업지배구조 개선 및 주주총회 활성화를 위한 정책 세미나’가 열렸다.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 박용진 의원이 주최한 이 날 세미나에서는 네덜란드계 연기금 운용사인 APG의 박유경 아태지역 기업지배구조담당 이사가 발제자로 나서 우리나라의 기업지배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본 한국의 기업지배구조에 나타나는 문제점은 이사회가 지배주주만을 위해 존재할 뿐이고, 그에 비해 주주총회는 아예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권한이 적다는 점이다. 주주의 권한을 생각하기는커녕 외국인 주주를 위한 기본적인 정보 번역 서비스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니, 지배구조를 기반으로 기업을 판단할 때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적용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한국은 각종 기관이 평가한 아시아 국가들의 기업지배구조 순위에서 최하위권을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매년 하락세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날 세미나를 주최한 금태섭 의원은 “대기업들은 우리나라 경제 발전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지만 경제력 집중이나 남용과 같은 부작용도 있다”며 “일감 몰아주기와 같은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나 편법으로 계열회사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는 일들은 기업의 경쟁력 강화라는 측면뿐 아니라 국가 경제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박용진 의원은 “우리나라는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가 2016년에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기업지배구조의 투명도는 아시아 대상 국가 11개국 중 8위를 기록할 정도로 후진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운을 띄웠다. 그러면서 “30대 그룹 총수 일가가 전체 주식 중 평균 5% 미만의 지분을 가지고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으며 주식회사의 최고의결기구인 주주총회가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어 문제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며 “주주총회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한 오늘의 세미나는 매우 시의적절하고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박유경 APG 아시아태평양지역 지배구조담당이사가 2015년 3월 현대자동차 주주총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50대 기업 중 82%, 기업지배구조 문제 있어

 

이날 발제를 맡은 APG 박유경 이사는 우리나라 기업지배구조(거버넌스)의 개선을 위해 오랫동안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고 해 왔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반대 의사를 밝혔고, 지난해 말에는 삼성전자에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한 정경유착 문제에 대한 질의서를 보내는 등 국내 기업 주주총회에서 보기 드물게 적극적인 주주 활동으로 정평이 나 있다.

 

박 이사는 발제문을 통해 한국 기업들의 거버넌스 문제는 지나치게 지배주주 위주인 데다 윤리성에 대한 무감각이 만연해있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박 이사는 시가총액 기준 국내 50대 기업 가운데 거버넌스와 관련해 문제가 있는 기업으로 평가된 기업들의 리스트를 공개했다. 해당 리스트는 해외 자산운용사의 한국 담당 펀드매니저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로 작성된 것이며, 자본 효율성 문제 같은 흔한 문제를 배제하고, 외국 기업에서는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기업만을 표시했다. 그는 “거버넌스 상의 심각한 문제라면 지배주주가 연루된 사건, 대주주가 감옥에 가는 사건 등 신문 헤드라인에서 거론될 정도의 심각한 일”로, “한 나라의 시총 50위 안에 드는 기업이 이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더 큰 부끄러움은, 해당 리스트의 50대 기업 중 ‘문제 있음’으로 평가된 기업이 41개나 된다는 점이었다. 이들 50개 기업이 전체 시총의 60.28%를 차지하고 있으니, 대한민국 기업 경제가 전반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박 이사는 이 부끄러운 리스트에서 희망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이들 50대 기업의 대부분이 다시 삼성, 현대, SK, LG, 롯데 등의 그룹 계열사로 묶인다는 사실이다. 즉, 이들 다섯 개 그룹의 거버넌스만 개선될 수 있다면 대한민국 기업 경제 전반이 건전성을 갖추게 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으므로 “지금부터 잘 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2월 26일 국회에서 '기업지배구조 개선 및 주주총회 활성화를 위한 정책 세미나'가 열렸다. (사진 = 윤지원 기자)

상법의 틀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박 이사는 기업의 거버넌스 구조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요소를 ▲법체계 ▲공정한 시장 메커니즘 ▲합리적인 경영진과 기능적인 이사회 ▲활발한 주주 등으로 꼽았다. 그리고 이러한 구성원들이 성실성(integrity), 책임감, 선의 등을 바탕으로, 회사가 잘 됐으면 하는 마음처럼 회사의 가치와 성장 가능성이 훼손되지 않게 거버넌스가 운영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 기업의 거버넌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며, “우리나라 기업에서 이사회는 권한이 큰 데 비해 제 기능을 못 하고, 주주총회의 권한은 너무 적어서 있으나 마나 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주주총회에서는 재무제표 승인, 배당, 이사회 구성 승인, 이사 보수 한도, M&A, 정관개정 등 이사회에서 이미 다 결정되다시피 한 형식적인 안건만 올라오기 때문에 주주총회의 역할이 무시되곤 한다.

 

그에 비해 홍콩에 상장된 중국 회사의 주주총회에서는 이 같은 안건 외에도 유상증자, 투자승인, 이해관계자 거래 관련 안건, 감사 승인 및 보수 등 매우 많은 안건을 처리할 권한이 주어지므로 주주총회가 없이는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다.

 

따라서 대표이사가 이사회 결정문을 주주들에게 공시할 때, 이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해당 결정이 내려졌는지를 반드시 명시해야 하고, 특히 어떤 이사들이 결정에 동의했는지, 자신의 이름을 공시문에 밝혀야 하므로 이사회가 책임감 있게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다.

 

27일 오전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서 열린 롯데지주 주식회사 임시주주총회에 주주들이 입장 전 확인을 받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의사결정과정 투명하게 공개해야

 

반면, 한국의 공시는 형식적이고 무성의하며 결정 과정에 대해 알 수가 없으며, 이는 주주의 권한이 무시되고 있음을 잘 드러내 준다. 박 이사는 현대자동차가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의 옛 한전부지 취득 결정 과정을 공시한 예를 들었다. 해당 거래는 10조 원 이상이 들어간 큰 거래지만 이 중대한 결정을 내린 이사회 결정 과정에 대해서는 참석자 수와 불참자 수만 표시되어 있다.

 

박 이사는 주주의 입장에서 이 무성의한 공시에 불만이 큰 것은 현대자동차가 배당 성향이 극히 낮은 기업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전 세계 기업들의 배당률 평균은 50% 정도인데 한국의 배당은 평균 12% 수준으로 매우 낮아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매력이 떨어진다. 심지어 현대자동차는 그중에서도 6% 수준으로 배당 성향이 아주 낮은 기업이어서 주주들의 불만이 많다”면서 “그런데 주주의 이익으로 배당할 수 있는 거금 10조 원을 땅 사는 데 투자하겠다는 것을 이사회가 결정하는 데 겨우 30분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이런 결정에 어떤 이사가 찬성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박 이사는 또한, 기업이 인수합병(M&A) 등을 진행할 때 지배주주의 경영권을 좌우할 수 있는 규모의 주식을 매입할 때 대주주와 소액주주들에게 한 주당 가격이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면서, 2016년 KB금융이 현대증권을 합병할 때와 미래에셋증권이 대우증권을 합병할 때의 소액주주 차별을 비판했다.

 

박 이사는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이 결국 해외 투자자들에게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용인하는 것과 다름없다”면서 “회사의 중요한 사항을 결정하기 위해 모인 이사회에 참가한 인원들의 실명을 공개하고, 토론 내용을 밝혀 투자자들이 이사회의 모든 내용을 투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영진의 책임 의식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모든 주주들이 각 이사의 실명 뿐 아니라 전문성과 성향을 파악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간자산운용사 블랙록의 원신보 상무는 자본시장에서도 시민의 힘, 소수자의 힘이 규합되어야 한다는 컨센선스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 블랙록 홈페이지)

스튜어드십 코드와 이사-주주 간 소통도 중요해

 

민간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Rock)의 원신보 상무는 현재 대한민국이 중요한 변곡점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며, 주주 권한 강화를 주장하는 박 이사의 발제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그는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시민의 힘, 소수자의 힘이 사회적 이슈에 규합되고 있다”며 “이런 현상은 사회적 성숙도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본 시장에서도 그와 비슷한 컨센서스(집단적 합의)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 기업 문화에서 지배주주를 포함한 특정 주주 집단의 이익이 그동안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면, 이제는 형평성, 준법성, 공평함 등의 키워드가 자리 잡을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원 상무는 블랙록이 APG와 같은 해외 연기금을 고객으로 유치하는 민간자산운용사이며, 지난해 운용한 기금이 7천조 원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운용하는 자금이 크기 때문에 국내 기업 상당수에서 국민연금공단 다음으로 큰 주주인 경우가 많다.

 

또한, 원 상무는 “연기금은 수십 년 후에는 돌려줘야 하는 자산이라는 특성이 있고, 다음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익을 내줘야 한다”며 “따라서 우리는 고객의 이익을 성실하게 추구하기 위해 투자하고 있는 기업에 주주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자 한다”고 ‘스튜어드쉽 코드’를 강조했다.

 

또한, 블랙록이 많은 국내 기업에서 2대 주주 자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주주 이익을 위한 의견을 이사회에 반영하거나 이사회 결정 과정에 의문이 있어 묻고 싶어도, 주주와 사외이사 간 소통이 여의치 않은 현재의 관행을 비판했다.

 

주주 및 투자자들의 입장을 들은 금융위원회 박정훈 자본시장국장은 “그동안 정부가 기업지배구조와 관련한 법제도, 사외이사제도 등을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뒀다고 생각했으나 결과는 꼴찌라는 사실이 유감스럽다”면서 “지난해 통과된 회계개혁법이 시행되면 이런 우려들이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는 토대가 구축될 것이며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섀도보팅 폐지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주주총회 활성화와 관련해 금태섭 의원은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주주총회 활성화를 위한 논의를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며 “특히 집중투표제, 다중대표소송제 등 기업 투명성을 강화하는 방안과 작년 말 폐지된 섀도우보팅 폐지에 따른 주주총회 의결정족수 문제 해결을 위한 상법 개정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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