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3) 이정윤] ‘하이힐 코끼리’처럼 힘들게 또는 세련되게 여행하는 우리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기자 2018.03.12 09:38:19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작가 이정윤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하이힐을 신은 코끼리가 떠오른다. 이정윤은 무리지어 다니는 코끼리에서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코끼리가 하이힐(때로는 넥타이)과 만나면서 작가의 메시지는 분명해졌다. 이정윤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간결하고 명쾌하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관객들의 공감대 형성과 참여 속에서 더 깊고 풍부한 사색이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이힐은 문명과 사회,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삶의 무게와 의무, 규범과 관습 그 모두를 은유한다. 그러나 의무와 규범이 하염없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 역시 편견인지 모르겠으나 - 구두를 신으면 옷맵시가 좋아지듯, 자신에게 부과된 의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인정받을 때 사람들은 뿌듯함과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삶의 무게가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삶의 무게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과 연결된다. 또한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누구나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하이힐은 그저 사회적 억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개인이 스스로에게 느끼는 만족감과 자존감, 그리고 개인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노력까지 은유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Falling Trunk, 섬유, 공기주입모터, 700 x 350 x 440cm, 2015, 도판 제공(all) = 이정윤 작가  

최근으로 올수록 이정윤의 작업에서 여행이라는 주제가 강조되고 있다. 사실 코끼리와 구두라는 상징물에는 이미 이동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코끼리는 늘 어디론가 이동하며, 신발은 우리가 집 밖을 나설 때 신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여행에서 일시적 해방과 자유, 휴식을 찾는다. 많은 사람들이 재충전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 여행지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여행이 삶의 전환점이 될 때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여행은 우리의 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인간의 삶은 여행과 같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긴 여행으로 묘사된다. 우리 모두는 일생동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끝없이 이동한다. 과학과 문명의 발달 덕분에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 몸이 한 장소에 머무르더라도 인터넷이나 매스미디어를 통해 무수한 여행을 떠난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여행을 한다. 기억을 회상하며 시간과 공간 여기저기를 이동한다. 그리고 이정윤의 여행은 이 모두를 포함한다. 작가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잠시만이라도 해방과 자유를 경험하길 바란다. 동시에 자신의 삶 -일상- 을 의미 있게 되돌아보길 바란다.  

Round Trip, 관객들에게 입양 보내기 전, 2012 
Round Trip, 관객들이 돌려 보내준 인형, 2012-ongoing 

작가가 분양해 전세계로 갔다가 
한국 돌아와 전시되고 
다시 세계로 나가는 별별 코끼리 인형들

 

이런 개념과 목표가 종합적으로 담겨있는 작업이 바로 ‘Round Trip’(2012-ongoing)이다. 이 장기 프로젝트에는 ‘코끼리, 하이힐, 여행, 일상, 소통’이라는 작가의 주요 개념들이 훌륭히 결합되어 있다. ‘Round Trip’은 작가가 제작한, 하이힐을 신은 코끼리 봉제 인형을 참가자들에게 분양하고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되돌려 받아 전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참가 지원자는 주로 SNS를 통해 모집하지만, 전시장에서 신청을 받을 때도 있다. 때로는 특정한 지역이나 단체의 요청을 받기도 한다. 에디션 별로 구두의 색만 바뀔 뿐 하얀 캔버스 천으로 코끼리를 제작하여 소포로 주고받는 방식,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코끼리 인형을 꾸밀 수 있다는 점은 매번 동일하다. 인형을 분양받는 사람들은 모두 입양 확인서를 작성하게 된다. 주된 내용은 작가가 전시를 위해 요청하면 인형을 돌려보내야 하며, 인형을 보내지 않더라도 인형과 함께한 시간의 기록물을 보내줘야 한다는 것이다. 분양받은 사람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자료를 보내주면 작가는 그것을 인형에 부여된 고유 번호별로 정리하여 전시하고 관객들과 공유한다. 2012년, 이 프로젝트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한국, 프랑스, 영국, 미국 등으로 33개의 코끼리 인형이 여행을 떠났고, 그 중 30개의 코끼리 인형이 작가에게 돌아와 전시되었다.(2명의 참가자는 연락이 두절됐고, 1명의 참가자는 출장 중이었다고 한다.) 물론 전시가 끝난 후 모든 인형은 참가자들의 집으로 되돌아갔으며 전시가 진행될 때마다 이 과정이 반복된다. 2018년 현재까지 283개의 코끼리 인형이 분양되었다. 이정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신해서 돌아오는 코끼리 인형들을 보며 항상 놀라고 감탄한다고 말한다. 인형들은 구분을 위해 매겨 놓은 고유 번호가 무색할 정도로 각양각색의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각종 소품으로 꾸며졌다. 인형에 가지각색의 그림이나 낙서가 그려져 있을 때도 있다. 입양자의 직업, 연령, 지역적, 민족적 차이에 따라 다양한 변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획일화되고 무미건조한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일상은 사실 변신한 코끼리 인형들만큼이나 다채롭다. 소중하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뭉클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Silk Road, 넥타이, 바느질, 160 x 1600cm, 2015 

이처럼 코끼리 인형을 통해 서로 아무 관련성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게 되는 ‘Round Trip’은 작가가 지향하는 삶 속의 미술, 소통의 미술을 실천한다. 다양한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고 시간과 시간이 연결된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지원자들에게 보내는 코끼리 인형 하나하나를 독립된 작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전시를 마친 후 참여자들에게 인형을 돌려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 안에 담긴 개념과 전 과정,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 모두가 한 몸을 가진 작품이다.

 

개인의 삶이 얽힌 수많은 넥타이를 엮고,
그 위를 밟으면서 새로운 삶을 엮고   

 

‘Round Trip’ 이후 작가는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작업들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인 ‘Portable Museum’(2014)은 관객의 일상으로 침투하는 미술관이다. 이정윤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여행용 가방(The Box in a Valise)’(1935-1941)에서 착안해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미술관을 제작했다. 뒤샹은 자신의 작품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가방 안에 보관했다. 단, 이정윤의 이동식 미술관은 뒤샹의 ‘여행용 가방’과 달리 전시될 때마다 다른 작품들이 채워진다. 이정윤의 미술관에서는 무엇이든 작품이 될 수 있고 누구든 작가가 될 수 있다. 미술관이 적극적으로 대중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는 동시에 대중 역시 미술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이동식 미술관이 처음 전시되었을 때에는 7명이 배우들이 그 안에서 차례로 공연을 선보였고, 이후에는 밴드가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점차 관객들이 그 안을 채우게 되었다. ‘Portable Museum’ 외에도 이정윤의 많은 작품들은 미술관뿐만 아니라 공원, 모래사장, 공항, 건물의 꼭대기 등 예상치 못한 곳에 놓인다. 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경우에도 2017년 헬로우 뮤지움(HELLO MUSEUM)에서의 개인전, 벗이 미술관에서의 2인전처럼 관객과의 소통을 가장 중요시한다. 그리고 작업이 진행될수록 감정적 교감은 깊어진다. 

Portable Museum, 공기조형물, 600 x 250 x 250cm, 2014
Traveling Cacti, 장지 위에 혼합재료 드로잉, 54 x 64cm, 2018

‘Silk Road’(2015) 역시 대중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실크 로드’는 사람들에게 넥타이를 기증받아 손바느질로 엮어 만든 16미터 길이의 카펫이다. 작가는 ‘Round Trip’ 때처럼 SNS를 통해 작업을 위한 넥타이가 필요하다고 요청했고, 예상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아무 조건 없이 참여해주었다. 작가는 그것들을 모아 커다란 비단길을 만들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 여정을 상징한다. 또한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평범한 사람들의 매일을 함께 하던 넥타이는 그렇게 예술 작품이 되었고, 소통의 창구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작품이 완결되는 것은 아니다. 미술관에 전시된 이 카펫 위를 사람들이 걸으며 체험하는 것까지가 작품이기 때문이다.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었던 실크로드가 그랬듯 이정윤의 ‘Silk Road’는 다양한 여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이어준다. 관객들은 넥타이 실크 로드 위에 서서 누군가의 삶을 상상한다. 그리고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나아가 나의 미래를 상상한다. 


이정윤은 이상주의자다.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고 행복해지길 원한다. 자신의 작업을 통해 때로는 지루하고 평범하고 힘든 삶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보낼 수 있으면, 자신의 삶이 의미 있고 아름다운 것임을 느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작가에게 예술은 그런 것이다. 

 

 

“타인의 여행에서 내 안의 여행으로 이동 중”
작가와의 대화 

 

Q. 작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코끼리와 하이힐이란 소재를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하이힐을 신은 코끼리는 이정윤의 상징처럼 되었다. 코끼리는 공동체(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하이힐은 현대인들이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의무와 규범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 의미가 변하거나 확장되지는 않았는지 궁금하다. 


A. 의미가 크게 변하거나 전환되지는 않았다. 그 동안 나의 작업에서 코끼리와 하이힐이라는 키워드가 많이 이야기 되었는데, 사실 이 두 소재의 바탕에는 여행이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Round Trip’이나 ‘Traveling Cacti’ 같은 근작들을 보면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이라는 내러티브 없이 단순한 상징으로 코끼리나 하이힐을 다뤘다면 다른 동물이나 사물들도 소재로 활용했을 것이다. 코끼리를 나 혹은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몸이자 매개로 인식하고 작업을 진행해왔다.  

 

Q. 익숙한 이미지를 사용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선명한 편이다. 동시대에 활동하는 작가들 중 많은 수가 작품에 중의적이고 양가적인 의미를 담아낸다. 때로는 작품에 담긴 의미를 알려주지 않거나 모호하고 흐릿하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불필요하게 난해한 작업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작가가 메시지를 너무 선명하게 전달할 경우 작품의 의미가 얕아지고 좁아질 위험도 있다. 그런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본인이 추구하는 삶 속의 미술을 위해 대중과의 거리감을 좁히려는 노력으로 보이기도 한다.  


A. 물론 나의 작업을 가볍게 느끼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관객이 더 많았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의 작품이 가볍게 혹은 무겁게 해석되는 것에 신경 쓰거나 의미를 두지 않는다. 코끼리나 구두, 여행 가방처럼 명확하고 친근한 이미지가 감정 이입과 동화를 도와주어 더 깊은 생각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익숙하고 편안한 것과 가벼운 것은 다르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렇게 복잡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작품이 관객과 만나는 첫 순간에 뚜렷한 메시지가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첫 만남에서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이 관객이 다양한 해석과 상상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이 평면적이거나 일차원적인 의미만을 생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후 관객이 펼쳐내는 감상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관객이 스스로의 경험에 대입해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히려 난해하고 어려워서 공감이나 피드백을 끌어낼 수 없는 경우가 문제라 생각한다.  
     
Q. 미술관이 아닌 일상의 공공장소에 설치하거나 관객(대중)이 참여하는 작품이 많기 때문에 전시 중 난처한 상황이나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 


A. 작품을 산책로 등의 일상 공간에 설치했는데 쳐다보지 않고 지나가거나 심지어 발로 차고 지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취객들이 작품을 완전히 훼손시킨 적도 있었다. 작품 훼손이 가장 슬픈 기억이다. 아직까지 미술 작품은 전시장에 있는 게 익숙하니까 작품이라는 인식 자체를 못해서 그런 것 같다. 그러나 경험들이 쌓이면 일상에서 작품을 만났을 때 그것이 예술인지 아닌지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단기간에 되진 않겠지만 급하게 마음먹지 않는다. 천천히, 조금씩, 예술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작업한다. 그리고 다행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한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감동을 받는 관객들도 있다. 그래서 희망을 갖고 관객들이 참여하는 작업을 계속 하게 된다.  

 

Q. 현재 작업을 하면서 가장 집중하고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인가? 


여태까지는 타인의 일상 혹은 보편적인 의미의 인간의 삶에 대해 다뤄왔다. 지금은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 나에게 여행은 여전히 매력적인 주제다. 내 안의 의식에 귀 기울이고 내 안의 세계를 여행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뿌리 내리지 못하는 선인장을 주제로 한 작업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한두 개의 단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종착지 없이 증식하는 나의 내면 이야기를 표현하려고 노력 중이다. 

 

(정리 = 최인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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