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4) 김현경] 공 쌓아 그린 묵죽화를 불태워버리는 서늘함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기자 2018.04.09 10:14:06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김현경은 대나무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을 토대로 작업한다. 자신만의 심리적 경험을 위해 작가는 담양 죽녹원에 자주 간다. 대나무 숲을 찾아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계획하고 가든, 불시에 즉흥적으로 가든, 대나무는 항상 다른 모습으로 작가를 기다린다. 같은 장소라도 계절, 날씨에 따라 풍경의 기운이 달라진다. 작가의 감정 상태에 따라 대나무의 인상도 바뀐다. 기억을 담기 위해 작가는 화첩에 드로잉을 하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어떤 날은 머릿속에 이미지를 담으며 글을 쓴다. 시어를 나열할 때도 있다. 작업실로 돌아온 작가는 자신이 쓴 글을 보며 기억을 떠올린다. 대나무를 처음 그리기 시작했을 때에는 사생을 많이 했지만 작업이 진행될수록 기억의 축적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내면(작가의 생각이나 감정)이 담기기 시작했다. 대나무를 보고 체득한 시적 정취가 차곡차곡 작품에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스레 대나무의 형상은 희미해졌고 대나무 숲의 깊이는 깊어졌다. 그래서일까. 흐릿한 대나무의 형상 앞에 서 있음에도 관객들은 실제 대나무 숲에 온 것 같은 심리적 경험을 하게 된다.  

 
사군자(四君子) 중 하나인 대나무는 회화뿐 아니라 문학과 예술 전반에서 사랑받았다. 사군자는 아주 익숙하면서도 어려운 장르다. 대나무는 친근하다고도, 친근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는 소재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대나무를 그리는 것일까? 김현경의 목표는 우리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평범하면서도 쉽지 않은 길이다. 작가는 묵죽화(墨竹畵)를 통해 내면을 정화시키는 비움의 세계를 지향한다. 일체의 세속적인 욕심, 지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세상을 관조하는 상태인 허정(虛靜)에 집중하는 것이다. 

 

글로가우에어 오픈스튜디오(GlogauAir  Open Studios) 전시 장면, 베를린. 도판 제공 =김현경 작가 

먹을 수십번까지도 쌓아올리는 작업 방식


먹을 쌓아올리는 작업 방식 역시 이런 이유에서 선택되었다. 작가는 아주 연한 먹에서부터 시작해 칠흑 같이 까만 먹에 이르기까지 계속 쌓아올린다. 일반적으로 수묵화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방식은 아니다. 먹을 머금은 붓이 한 번 지나가면 작가는 먹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 다시 먹이 올라간다. 먹은 30번 이상 겹쳐진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 번 겹쳐도 먹은 탁해지는 법이 없다. 깊어질 뿐이다. 한지는 무한대로 먹을 포용한다. 이 모두는 한지와 먹이기에 가능한 작업이다. 이런 이유로 김현경은 한지와 먹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사실 작가 자신도 정확히 몇 번이나 붓질이 오고가는지 모른다고 한다. 또한 반복되는 횟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행위 그 자체와 행위가 지속되는 시간이 중요하다. 물론 한 번의 붓질로 완성되는 묵죽화가 아니라 전통 채색화처럼 여러 번 겹쳐 칠해서 완성되는 묵죽화는 낯설다. 수묵의 현재적 변용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필(筆)의 기운이 약해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적묵(積墨)의 지난한 과정 중에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평정을 경험한 작가는 대나무를 그리는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이에 적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필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끝없이 탐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 역시 작가에게는 수행이다. 

 

‘Creation & Extinction’, 장지. 수묵, burning, 가변설치, 2017. 도판 제공 =김현경 작가 

그림만으로 대숲에 들어온 듯한 경지까지


최근 들어 작가는 비워냄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자신이 완성한 묵죽화를 태우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작가는 생성과 소멸이라는, 역시 가장 평범하면서도 불변하는 세상의 이치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지향해오던 바와 달리 무언가에 집착하고 괴로워하는 경직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작가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작품을 태우게 되었다. 재가 되어 사라지는 그림을 보며 작가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자유와 평온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만의 숲속에 머무르던 대나무는 작가와 우리가 머무르는 일상의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공간과 호흡하게 되었다. 그렇게 김현경의 대나무 숲은 더 울창해졌다. 비워낼수록 더 깊은 울림을 가진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재로만 남아도 그 역시 내 작품”
작가와의 대화 

 

- 전통 수묵화나 문인화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면서도 먼 장르다. 전통적인 문인화가 오늘날의 관객들과 어떤 부분에서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군자 중 하나인 대나무를 그림으로써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또한 문인화는 유교의 정신, 정말 간략히 말하면 ‘스스로를 갈고닦아 널리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를 바탕으로 하기에 글(서예)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정신적 교감을 통해 서로의 학식과 인품을 발전시키는 것은 전통 문인화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이다. 그런데 김현경의 작업에는 글이 없다. 


“전통적으로 대나무가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표현하고 싶었다. 곧음이나 단단함, 한결같은 꼿꼿함을 작품으로 표현함으로써 내 삶의 가치를 확립하고, 나의 삶을 이끌고 싶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대나무의 형태도 많이 와해되었고 추상화되었지만 작업의 기본 바탕은 동일하다. 관객들에게 그러한 메시지를 주입하거나 강요하려는 것은 아니다. 관객들 중 일부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오직 시각적인 면만 바라볼 수도 있다. 나에게 전통은 익숙한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무언가가 현 시대에 맞게 변화하면서 소통 가능한 접점들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젊은층에서 한복을 입고 인증 사진을 찍는 것만 봐도 그렇다. 멀게 느껴지는 전통이 희소성 있는 것으로 재해석되고, 대중적으로 재해석되면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서예(문자)의 경우는 연구 중이다. 어떤 시제(詩題)를 담을지, 그림에 대한 내용을 어떻게 언어화할지 오래 전부터 고민해왔다. 쉬운 일은 아니다.”

 

‘Untitle..see’, 장지에 수묵, 190 x 130cm, 2016. 도판 제공 =김현경 작가 

- 오늘날 동양화가로 불리는 작가들도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형식 실험을 하고 있다. 그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동양화의 정신이 담겼다면 전통 동양화의 재료를 사용하지 않아도 동양화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전통 그대로의 매체를 고수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본인은 후자로 보인다. 수묵만을 고수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


“나는 먹과 전통 한지가 최고의 조합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재료들이 가진 독특함에 푹 빠져있다. 그래서 다른 재료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최소한 지금 생각으로는 ‘적묵(積墨), 한지(장지), 수묵’의 조합은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 매우 현대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정신적인 부분에서 고전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전통은 그저 옛것이 아니다. 과거 선조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 살아가는 방식을 공부하다보면 그 지혜로움에 놀라곤 한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깊이가 있다.”

 

- 작업 과정에 대한 작가의 설명을 듣고 놀랬다. 일필에 완성되는 수묵화라고 생각했다. 가장 진한 부분은 약 30회까지 먹을 중첩시킨다고 했는데, 처음부터 진한 먹을 사용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또한 작가가 아닌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굳이 그런 방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만 예민하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한 번에 진하게 올리면 색종이를 오려놓은 것 같다. 종이와 먹이 한 몸이 되지 못하는 것 같고 그냥 빤질빤질해 보인다. 나는 먹과 종이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둘이 정말 하나가 되길 바란다. 그래서 천천히 쌓아올리면서 먹이 한지에 최대한 스며들어 우러나오게 한다. 물감을 쌓아올리는 것과 먹을 쌓아올리는 것은 분명 다르다. 먹은 한지에 스며든다. 또한 나에게 먹을 바르고, 마르길 기다리고, 다시 바르는 과정은 수행과 같다. 기다림의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은 그 기다리는 과정까지도 작업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전시 ‘Time & Untitle’(2016. 2. 18-28), 금호미술관 전경. 도판 제공 =김현경 작가 

- 최근, 베를린에서 전시했던 작품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결과물을 보니 작업에 큰 변화가 온 것 같다. 한지를 정말 과감하게 태웠다. 설치 방식을 보면, 작품이 현실 속 공간과 호흡하면서 확장되어 흥미롭다. 어찌 보면, 작가가 작업 초기부터 추구해온 허정의 세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실행한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순간부터 돌고 도는 순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작년 겨울을 보내며 하나 둘씩 비워내고 나를 내려놓는 과정을 겪었다.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고, 죽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이 부질없고, 소유하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왜 인간은 끝없이 욕심을 내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며 인간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변화를 겪으며 나의 작품을 바라보니 너무 꽉 차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래서 온전한 완성품으로 존재하던 나의 작품들을 태웠다. 그 중에는 전시에서 발표했던 작품도 있었다. 주로 최근작들을 태웠다. 온전했던 작품의 일부가 불타 재가 되었다. 그러나 비워지고 사라짐으로써 또 다른 창조가 이뤄졌고 새로운 작품으로 태어났다.”

 

- 그렇다면 이전에 전시도 했던 완성된 작품들이 사진으로만 존재한다는 말인가? 자기만의 이름(제목)도 있던 작품들이 불타고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게 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허무함이 극에 달한 것 같기도 하고, 세속적인 욕심을 벗어나고픈 작가의 진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작가가 태우기에 심취해서 모든 작품이 다 불타버리면 어떻게 하나? 


“맞다.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물론 어찌 보면 무모해 보일 정도의 용감한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작품들이 아무리 잘 보존된다고 해도 영원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순환의 흐름을 조금은 앞당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 작품이 다 타버렸다면 그 재를 전시했을 것이다. 실제로 불타기 전의 작품 사진과 재를 함께 전시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태우기(burning) 작업을 더 발전시켜 나가면서 앞으로 다양한 방식이 구체화될 것이다.”
           
- 동양화가로 불리길 원하는가? 화가, 예술가, 작가 중에 어떻게 불리길 원하는가?


“화가로 불리든, 예술가로 불리든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동양화가로 불리길 원한다기보다 그렇게 불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작업을 하는 훌륭한 작가들을 보며 탄복하기도 한다. 감동도 받는다. 그러나 나의 작업만 놓고 보면 나는 동양화가다.” 

 

(정리 = 최인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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