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그림 속 길을 간다 (7) 청풍계~세검정 上] 추사·송강의 청정기운 서린 청풍계 속으로

이한성 동국대 교수 기자 2018.04.16 09:27:49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오늘부터 갈 길은 서촌(우대)의 중심부를 포함하여 장동팔경첩과 한양진경을 그린 여러 그림들에 그려진 인왕산 주변 지역이다. 겸재가 태어나서 자라고 장동 김씨를 비롯한 지인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그림으로 한 시대를 대표할 수 있게 된 그의 터전인 곳이다. 


겸재를 키운 것은 인왕과 북악이었다. 그 산과 그 품에 살던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겸재가 있을 수 있었다. 이들과의 인연으로 맺어진 인왕산 아래 청풍계(淸風溪), 옥류동(玉流洞), 수성동(水聲洞, 仁王谷, 仁王洞)과 관련된 그림 속 길을 찾아 떠난다.


이미 언급한 그림들이나 북악산 쪽을 그린 그림을 제외하고도, 우선은 청풍계와 관련된 그림들이 있다. 청풍계도, 풍계유택(風溪遺宅)도, 동아대가 소장한 청풍계지각(淸風溪池閣) 같은 그림들이다. 청풍계를 그린 그림도 보물로 지정된 간송본을 비롯해 고려대본, 국립박물관본, 최근 나타난 공아트스페이스본 등 4개의 그림이 있다. 

 

추사가 어렸을 때부터 보았을 백송


고개를 하나 넘어 옥류동으로 넘어 오면 최근 나타난 세심대, 옥류동 고개를 넘는 옥동척강(玉洞陟岡), 삼승정(서원소정), 삼승조망(서원조망도), 청휘각(晴暉閣), 수성구지, 인곡유거, 인곡정사, 독서여가, 장동춘색(필운상화), 장안연우, 장안연월, 인왕산도 등이 있고, 또 하나 고개를 넘어 인왕동으로 들어오면 ‘수성동(水聲洞)도’가 있다. 다시 자락길을 걸어 백사실로 넘어가면 부채에 그린 ‘세검정(洗劍亭)도’가 우리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옛 지도 위에 표시한 답사 길. 

이제 출발은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시작하자. 복개된 백운동천 길을 따라 북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100여m 지나 버스정류장 지난 곳에 스타벅스 커피집이 나타나는데 이곳 골목길로 접어들어 첫 번째 좌측 골목으로 좌향좌해 나아가면 밑동이 잘린 커다란 고목을 만난다. 통의동 백송이다. 안내판을 보니 1962년 천연기념물 4호로 지정되었는데 1990년 7월 태풍으로 넘어져 고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음 아픈 것은 죽은 백송도 그렇지만 이 나무는 추사(秋史) 선생이 어릴 때부터 집안 나무로 늘 보았을 소중한 나무였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예산 추사고택에도 추사 선생이 연경(燕京)에서 씨를 가져다 심었다는 백송이 있는데 이보다 밑동이 훨씬 가늘어 보이니 아마 추사 선생이 이곳에 사실 때부터 이 나무는 어느 정도 큰 나무였을 것이다.(조사 결과는 1690년 경 심은 나무라고도 한다) 

추사 선생이 어릴 때부터 집안 나무로 늘 보았을 소중한 백송은 고사해 현재 밑동만 남아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사실 이 터전은 영조가 왕이 되기 전 연잉군 시절 살던 곳 즉 잠저(潛邸) 터다. 화억옹주, 효장세자, 화순옹주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말년의 영조 어머니 숙빈 최씨가 궁에서 나와 살기도 했다. 원래 이곳은 효종의 넷째 딸 숙휘공주의 남편 인평위 정제현의 옛 집이었는데 숙종이 이곳을 사서 넷째 아들 연잉군(후에 영조)에게 줬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병약하여 후사가 없자 1721년 연잉군이 왕세제가 되었다. 그는 궁궐에 들어와 살면서 기존의 사저는 창의문(彰義門) 이름을 따 창의궁(彰義宮)이란 이름을 붙였다. 영조는 창의궁 정당(正堂)에 ‘건구고궁(乾九古宮)’이란 현판을 걸었는데 이는 주역 64괘(卦) 중 첫 괘인 건괘(乾卦)의 의미를 살려 건구(乾九)는 숨어있는 용, 즉 잠룡(潛龍)을 뜻하므로 자신이 왕이 되기 전 살던 고궁이란 의미의 현판을 단 것이었다.


영조는 사랑하는 딸 화순옹주가 혼인을 하자 이 창의궁을 딸과 사위 김한신(월성위)에게 주었다 한다. 그 후 이곳 이름이 월성위궁(月城尉宮)이 되었다. 사실 창의궁은 왕실 사당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창의궁 지역이 100% 월성위궁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아마 일부 겹치지 않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월성위 김한신은 추사의 증조부였기에 추사는 12세에 이곳 월성위궁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곳을 알리는 안내판은 경복궁역 4번 출구를 나와 청와대 방향으로 좌회전한 곳에 ‘김정희 본가터’, ‘창의궁 터’라고 100여m 간격을 두고 표시가 세워져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일제강점기 때 이 터가 동양척식회사로 넘어가 그들의 사택 단지로 사용되다보니 이곳이 월성위궁이었음을 알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죽은 백송의 밑동뿐이다.  다행히 이 나무의 솔방울에서 발아한 어린 백송들이 이곳에서 자라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영조가 끔찍이도 아끼던 화순옹주였는데


한편 예산 추사고택 곁에 평안히 잠들어 계시는 화순옹주 부부에게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월성위와 옹주는 13살 동갑내기로 혼인해서 25년을 사랑하며 살았다. 월성위가 병으로 죽자 옹주는 식음을 전폐하고 따라 죽기를 결심했다. 이 소식을 듣고 영조는 임금의 체면도 잊고 딸네 집으로 달려 왔는데 끝내 딸은 아버지 말을 따르지 않고 음식을 끊은 지 14일 만에 남편의 뒤를 따랐다. 신하들은 옹주의 정절을 기려 정려문을 세울 것을 주장했으나 영조는 거부하였다. 애비 앞에서 죽은 딸은 불효인데 어찌 정려하겠느냐는 주장이었다. 고모 사후 25년 뒤 정조는 고모를 위해 열녀문을 세우도록 했다. 지금도 예산 추사고택에는 이 열녀문이 그날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영조가 지극히도 사랑했던 딸 화순옹주와 그녀의 남편 월성위가 묻힌 묘역. 사진 = 이한성 교수

월성위궁터를 돌아 나와 자하터널 방향으로 북진한다. 잠시 후 길가 안쪽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오랜 교회를 만난다. 이 길을 그렇게 다녔는데 언제 이곳에 이런 교회가 있었던가 하고 여겨지는 옛 교회다. 이름은 자교교회(慈橋敎會). 통인시장 바로 건너편 위치다. 안내판을 보니 감리교회인데 창립을 1900년도에 했고 배화학당 내에 건물을 갖고 목회 활동을 하다가 이곳에 건물이 준공된 것은 1922년이라 한다. 참 오랜 교회구나. 붉은 벽돌 교회당, 이곳 분위기에도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교회다. 그런데 왜 자교교회일까? 자교(慈橋)가 천국으로 가는 다리라도 되는 것일까? 

자수궁교가 있던 곳이라 하여 자교교회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옛 지도를 보면 1920년대 복개되기 이전에는 이 앞을 흘러 청계천으로 들어가는 백운동천에 3개의 다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창의문도에서 설명했듯이 금천교시장(체부시장) 앞 금청교(또는 금천교, 안경다리), 군인 아파트 자리에 있던 자수궁(慈壽宮)으로 가기 위한 다리 자수궁교(慈壽宮橋), 선희궁으로 가기 위해 새로 놓은 다리 신교(新橋)가 그것이다. 여기 자교교회란 이름은 바로 자수궁교에서 나온 이름이다. 서울 시경 앞에 있는 종교교회도 종침교 앞이라 그리 이름 지었다 한다.  

 

자수궁교 사라졌지만 교회 이름으로 남았으니


자수궁교는 이곳 신한은행 앞에 있었다는데 표지석도 안내문도 없어 아쉽다. 이제 신교(新橋)가 놓였던 곳을 찾으러 올라간다. 청운초등학교 앞 4거리에 신교가 있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충실하게 서 있다.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가 돌아가자 영빈 이씨를 제사지내기 위해 지은 사당이 선희궁(宣禧宮)인데, 선희궁이 있던 곳이 농학교 자리였다. 궁궐에서 선희궁을 가려면 백운동천을 건너야 했기에 놓은 새 다리가 신교였던 것이다. 1920년대에 백운동천을 복개하면서 다리는 해체되어 그 부재는 복개천 밑에 갇히었고 난간석 6개는 청운초등학교 교정에 놓여 있다. 

백운동천 위에 놓였던 신교(新橋)는 1920년대에 해체되었고, 난간석 6개만 현재 청운초등학교 교정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청운초등학교 앞 큰길에는 정철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고 학교 담에는 정철의 문학 작품 사미인곡, 성산별곡, 관동별곡, 훈민가 등을 돌에 새겨 세웠다. 건너편 길은 ‘송강로’로 명명하였으니 이 지역은 송강 정철을 기리는 지역이 되었다. 문학 활동으로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정치적 행동에 대해서는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은 이. 언젠가 이야기하기로 하고 청운초등학교 뒷담을 끼고 청풍계(淸風界)로 올라간다. 

 

오랑캐의 침입에 장렬히 순절한 김상용


청풍계를 생각하면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이 생각난다. 선원은 ‘가노라 삼각산아’의 청음 김상헌의 형님 되는 이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두 형제는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투쟁하였다. 선원은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조정의 빈궁과 원손을 모시고 강화도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나 수군이 약할 것이라던 청나라는 염하(鹽河)를 건너와 강화성을 함락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에 선원은 강화성 남문에 화약을 터뜨려 어린 손자와 장렬히 순절하였다. 


인조 15년 1637년 1월 인조실록을 보자.


“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죽었다. 난리 초기에 김상용이 상(上)의 분부에 따라 먼저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적의 형세가 이미 급박해지자 분사(分司)에 들어가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는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올라가 앞에 화약(火藥)을 장치한 뒤 좌우를 물러가게 하고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었는데, 그의 손자 한 명과 노복 한 명이 따라 죽었다.(前議政府右議政金尙容死之。 亂初, 尙容因上敎, 先入江都. 及賊勢已迫, 入分司, 將欲自決, 仍上城南門樓, 前置火藥, 麾左右使去, 投火自燒. 其一孫、一僕從死)”


요즈음의 가치관으로 보면 무책임한 행위로 보일 수도 있으나 조선의 가치관으로는 최고의 충절을 보인 것이다. 그가 살던 집이 이 청풍계 골짜기에 있었다. 

겸재의 ‘청풍계’ 그림(간송본).

또 그와 함께 척화파의 선봉에 서서 주전론을 내세우다 청나라로 잡혀간 아우 청음 김상헌이 있어 충절의 짝을 이루니 이 가문은 병자호란 이후 조선을 대표하는 가문 중 가문으로 떠올랐다. 이른바 장동(壯洞) 김씨(金氏)의 시대를 활짝 연 것이다. 겸재를 이해하고 그가 왜 장동 김씨와 관련된 그림을 많이 그렸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이들 장동 김씨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장동 김씨란 효자동, 청운동, 신교동 등 지금의 청와대 서편 지역에 살던 안동 김씨 일족을 이르는 말이다. 달리 장동이라는 본관(本貫)이 있는 것은 아니다. 


창의문을 일명 장의문(壯義門)이라 했는데 장의문 아랫동네라서 장동(壯洞)이라 했고 그곳에 와서 산 안동 김씨라서 장동 김씨라 불렀는데 이들은 조선초부터 창의문 아래 북악산과 인왕산 지역에 권역을 형성하며 자리 잡았다.

 

소산 김씨와 장동 김씨의 차이는?


본래 안동 소산을 세거지로 해서 소산김씨(素山金氏)라고도 했던 이들 김씨는 선원과 청음의 증조부 김번 때 형님 김영과 같이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고향인 소산을 떠나 서울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김영은 청풍계(淸風溪)[靑楓溪]에, 김번은 장의동(壯義洞)[壯洞]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다. 이 지역은 백부 되는 학조대사와 연관된 땅이었다. 


그렇게 서울살이 하던 김영은 자신의 당대에는 서울에 살았으나 손자 김기보(金箕報, 원주목사) 때 풍산으로, 일부 후손들은 예안·교하 등지로 이주하였다. 이에 김영의 집은 종증손 선원 김상용에게 인도되고 장의동 쪽 무속헌은 아우 김상헌의 소유로 굳어지니 청풍계·장의동 일대는 김번 후손들 즉 김상용, 김상헌 형제의 터전이 되었고 소산 김씨 대신 장동김씨(壯洞金氏)라 부르게 되었다.


필자의 친구들 중에는 안동 김씨들이 있는데 그들은 구안동과 신안동이라고 자신들을 구분하고 있다. 본래 안동을 세거지로 하는 안동 김씨를 스스로 ‘구안동(본안동)’이라 부르고 장동에 자리 잡은 안동 김씨를 ‘신안동’이라 불러 구분한다. 아마도 세도정치에 앞장섰던 장동 김씨들과는 구분 짓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어려서는 국사 교과서 한 과의 제목이 아예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였으니 구안동으로서는 억울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 골짜기에 자리 잡은 선원 김상용은 靑楓溪란 이름을 淸風溪로 바꾸고 자신의 취향에 맞게 집을 짓고 정원을 꾸몄다. 청풍계 골목으로 오르다가 인왕빌라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김상용 집터라는 표지판을 만난다. 아마도 여기서부터 위쪽으로 김상용의 집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손자뻘 되는 김양근(金養根)이 남긴 풍계집승기(楓溪集勝記)에는 건물과 연못이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 설명이 자세하고, 겸재가 그린 4장의 청풍계도와 동아대가 소장한 또 하나의 그림이 자세히 남아 있어 그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청풍지각 대들보에 선조의 어필을 둘렀으니


그림을 곰곰 살피기 위해 풍계집승기를 간략히 소개한다.


짚으로 우뚝하게 한 정자는 태고정(太古亭), 정자 좌우로 네모난 못이 세 개인데 맨 위 이름은 조심당(照心塘), 가운데 함벽당(涵璧塘), 아래는 척금당(滌襟塘)이다. 대일명월(大日明月)이라 쓴 바위 뒤는 선원을 모신 사당 늠연사(凜然祠).


백세청풍(百世淸風)을 쓴 바위 이름은 청풍대, 빙허대(憑虛臺), 천유대(天遊臺).


회심대(會心臺)는 천유대 아래이면서 늠연사 오른쪽 돌계단 앞. 탄금대 왼편으로는 두칸, 네칸의 방이 있고, 방 앞 빈 마루는 청풍지각(淸風池閣). 


청풍지각의 휘호는 한석봉 글씨. 대들보에는 선조의 어필로 청풍계라는 비단을 둘렀다. 대일명월은 우암의 글씨, 백세청풍은 주자의 네 글자를 새겼다. 1790년에는 정조가 육상궁(칠궁)을 들려 보고 태고정에도 행차를 하였다. 이런 기본 정보를 가지고 청풍계도를 살펴보자. 다행히 집터 표지석을 돌아 나와 청풍계 언덕길(예전 청풍계 계곡을 포장한 도로)을 오르면 좌로는 현대청운아파트, 우로는 높은 대(臺) 위에 빌라들이 자리한 곳 오른쪽 바위에 백세청풍(百世淸風) 각자가 나타난다. 

겸재의 작품 ‘청풍계’가 탄생한 현장답게 암석에 ‘백세청풍’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이 바위가 천유대, 빙허대, 청풍대로구나. 그러나 아쉽게도 청풍계도에서 보이는 모습은 하나도 남아 있지를 않다. 주택지 개발이 너무 철저히 이루어져 옛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퍼즐을 맞추듯이 청풍계도 속에서 그 이름을 맞추어본다. 간송본 청풍계도에서 가운데 우뚝한 바위가 백세청풍 각자가 남아 있는 천유대, 그 앞 건물이니 선원의 사당 늠연사다. 좌측 나무 사이에 있는 초가는 당연히 태고정, 우측 아래쪽 기와 건물은 청풍지각이다. 청풍지각의 오른 쪽 건물은 소오헌(嘯傲軒), 소오헌 오른 쪽 온돌방은 와유암(臥遊菴)인데 와유명산(臥遊名山)으로 누워서 명산유람이란 뜻이다. 방 남쪽 창 위로는 소현세자의 시를 걸었다. 세 연못은 세 군데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다. 

 

겸재가 우리에게 던진 의문부호


그런데 그림에서 문도 없는 문을 나서는 저 사람은 누구일까? 발 모양을 보면 분명 나서는 모양새인데 모자는 갓이 아니다. 상모에 북을 메고 있는 것일까? 겸재는 우리에게 궁금증을 더 하는 의문부호를 던지고 있다.


한편 형님은 돌아가시고 청(淸)의 심양으로 끌려간 청음 김상헌은 태고정과 돌아가신 형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근가십영(近家十詠)에 담았다.

 

청풍계 태고정은
淸風溪上太古亭
우리 형님 사시던 곳
吾家伯氏此經營
숲과 골짜기는 그대로 수묵화이고
林壑依然水墨圖
절벽은 절로 청옥병풍 이루었네
巖崖自成蒼玉屛
우리 부자 형제 한 당에 앉아서
父子兄弟一堂席
풍월과 琴酒로 언제나 즐거웠네
風月琴樽四時樂
그 좋던 일 이제 다시 하기 어렵겠지
勝事如今不可追
지금 이 마음 그 누가 알아줄까
此時此情何人識

 

청음은 심양 쓸쓸한 북감옥(北監獄)에 갇혀 살아 돌아올 기약 없는 세월 속에서 이곳을 그리워하며 시를 읊었다.


이제 청풍계 태고정 옛터를 지나 우측 유진인재개발원 쪽으로 가본다. 가야 할 길은 언덕길 끝 철문이 닫힌 정주영 가(家)에서 좌측 남쪽으로 길을 잡아 옥류동으로 내려 와야 하지만 청풍계와 주변 경관을 보기 위해 유진인재개발원 쪽으로 간다. 백세청풍 바위 위는 빌라가 자리 잡고 있어 청풍계의 본 모습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 축대로 인해 대명일월 각자도 훼손된 것 같다. 유진 인재개발원에서 자락길 산으로 오르는 아주 좁은 층계길이 있는데 건물 담 안쪽으로는 淸雲山莊 각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쪼아낸 글자를 보면 일제강점기에 새겼던 글일 것 같다. 층계를 다 오르면 자락길로 이어지는데 이곳에도 바위에 조그만 성혈(星穴) 새겨져 있다. 누구의 기원이 새겨진 것일까.


이제 선희궁터를 향하여 올랐던 길을 되돌아 내려온다. <다음 회에 계속> 

 

(정리 = 최인욱 기자)

 


교통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걷기 코스: 통의동 백송 ~ 자교교회 ~ 청운초교 ~ 백세청풍 각자(청풍계) ~ 맹학교(세심대) ~ 농학교(선희궁터) ~ 우당기념관 ~ 옥류동(청휘각, 가재우물, 송석원, 벽수산장 흔적) ~ 인곡정사터 ~ 박노수 미술관 ~ 백호정터 ~ 택견전수터 ~ 수성동 계곡 ~ 백사실 ~ 세검정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9008-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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