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전시] 2017 촛불 ‘광장에, 서’를 이은 이응노의 ‘군상’

가나아트센터, ‘군상 – 통일무’전

김금영 기자

임옥상 작가의 '광장에 서'가 설치됐던 가나아트센터 전시장에 고암 이응노의 '군상' 시리즈가 설치돼 있다.(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내 그림은 모두 제목을 ‘평화’라고 붙이고 싶어요. 모두 서로 손잡고 같은 율동으로 공생공존을 말하는 민중그림 아닙니까?”

 

1988년 10월 일요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고암 이응노(1904~1989)는 자신의 작업에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았음을 밝혔다. 1904년 충청남도 흥성에서 태어나, 1922년 서화계 대가인 김규진의 문하에서 문인화와 서예를 배우며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고 이응노. 이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묵죽화로 여러 차례 수상했으나, 여기에 안주하기보다는 193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선택을 한다. 일본에서 가와바타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남화의 대가 미쓰바야시 제이게츠에게 가르침을 받은 그는, 묵화 위주의 문인화에서 벗어나 사실주의적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응노 군상(群像) - 통일무(統一舞)'가 열리는 가나아트센터 전시장.(사진=김금영 기자)

이토록 그림을 그리는 데 배움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응노 그림의 중심에 인물이 서기 시작한다. 그것도 춤을 추는 듯 자유롭고 힘이 넘쳐 보이는 인물의 몸짓. 1980년대 ‘군상’ 시리즈는 평화를 염원하고 끊임없이 외친 이응노의 작업의 근간을 이루는 토대다.

 

이응노의 ‘군상’ 시리즈에 주목하는 ‘이응노 군상(群像) – 통일무(統一舞)’ 전시회가 가나아트센터에서 5월 7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군상’ 연작 40여 점을 비롯해 이응노가 옥중에서 제작한 조각 2점까지 총 6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를 위해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과 여러 명의 개인 소장가들이 소장하고 있는 이응노 작품을 제공했다.

 

이응노, '구성'. 한지에 수묵담채, 34 x 34cm. 1981.(사진=가나아트)

전시를 마련한 (재)가나문화재단의 김형국 이사장은 “올해는 고암 이응노의 도불 60년이 되는 해다. 프랑스에서 고암에 대한 체계적인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이응노 기증작 개인전이 열렸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응노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 가운데 국내에서도 이응노의 대표작인 ‘군상’ 시리즈를 다시금 주목해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했다”고 전시 기획 의도를 밝혔다.

 

이응노의 작업들은 그간 ‘추상’이라는 의제를 통해 주로 평가돼 왔다. 하지만 전시는 이응노의 궁극적인 관심이 늘 인간에게 향했음을 짚는다. 1945년 광복 전후 한국 화단을 풍미한 전통적 수묵 양식을 벗어나려는 의지와 새로운 조형언어 탐색이라는 노력의 중심에 인간이 있었다는 것.

 

이응노, '구성'. 한지에 수묵담채, 44 x 56cm. 1966.(사진=가나아트)

특히 1945년 광복 직후부터 1950년대 중반에 이르는 혼돈의 시대를 겪은 이응노는 그 안에 살아가는 서민들의 일상에 주목했다. 곤궁한 환경을 버티는 서민들의 모습에서 생동하는 기운을 발견한 이응노는 자유분방한 필묵으로 이 몸짓을 추상화시켰다. 그리고 이것이 ‘군상’ 시리즈의 기원이다.

 

그림 제목을 모두 ‘평화’라 붙이고 싶었던 이응노

 

이응노, '군상(People)'. 한지에 수묵담채, 35 x 34cm. 1987.(사진=가나아트)

인간의 형상은 1980년대 ‘군상’ 연작 속 ‘춤추는 인간’을 통해 더욱 역동성을 띠기 시작한다. 이응노는 1970~80년대 독재 정권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광장에 모인 민중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인간의 삶을 춤추는 군상으로 승화시키며 평화를 부르짖었다.

 

이런 이응노의 작품이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한다. 1967년 이응노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2년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됐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서유럽에 거주한 한국 교민과 유학생 중 194명이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에 들어가 간첩활동을 했다고 발표했고, 이응노가 간첩으로 지목됐다.

 

고암 이응노의 '군상' 시리즈가 설치된 전시장.(사진=김금영 기자)

그리고 50여 년이 지난 2016년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서도 이응노는 탄압받았다. 4월 11일 문화예술계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에 따르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이응노미술관장인 이지호 관장도 있었다.

 

이 관장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이응노 작가를 위한 재단 운영’을 했다는 이유로 정부 사업 전반에서 이응노미술관에 대한 지원이 철회됐고, ‘프랑스 내 한국의 해’ 사업 중 하나로 프랑스 세르누치 박물관이 주관한 ‘이응노에서 이우환: 프랑스의 한국화가들’(원제) 전시 또한 이응노라는 이름이 빠진 ‘서울-파리-서울: 프랑스의 한국 작가들’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응노, '군상(People)'. 한지에 수묵담채, 35 x 34cm. 1987.(사진=가나아트)

하지만 생전 이응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굴복하기보다는 오히려 평화에 대한 의지를 작업으로 잇는 데 노력했다.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옥중 생활할 때 그는 가장 괴로웠던 것을 다름 아닌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잉크 대신 간장으로 화장지에 데생을 하고, 매일 밥알을 모아 헌 신문지에 개어서 조각품을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서 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작품들도 볼 수 있다.

 

지난해 8월 민중미술 1세대 작가인 임옥상의 ‘광장에, 서’가 설치됐던 가나아트센터 전시장에 현재 이응노의 ‘군상’ 시리즈가 설치된 모습은 특별한 느낌을 준다. ‘광장에, 서’는 광화문 광장 가득히 쏟아져 나왔던 시민들의 촛불을 담은 작품이다. 당시 임옥상 작가는 “부패한 사회에 반성의 목소리를 높인 시민들의 의지를 기리는 뜻에서 만들었다”고 의도를 밝혔다.

 

이응노, '군상(옥중 조각)'. 밥알, 종이찰흙, 38cm(h).(사진=가나아트)

그리고 지금은 ‘광장에, 서’가 지나간 자리에 이응노의 작품이 설치됐다. 그의 화면 속 사람들이 일렁이는 촛불처럼 춤을 추고 있다. 작품에 모두 ‘평화’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는 이응노는 권력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예술가로서 작업혼을 불태우며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높였다. 시간이 많이 흘러도 이 의지는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 느껴진다.

 

가나문화재단은 이후로도 이응노의 작업에 주목하는 전시를 열 예정이다. 김형국 이사장은 “올해 고암 이응노 도불 60년에 이어서 내년에는 고암 타계 30년이 되는 해를 맞이한다. 이번 도불 60년 기념전에 이어 내년에 또 대규모 전시를 선보일 예정”이라며 “정치적 상황 속 이응노는 억압받고 생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예술의 정신은 초이념적이라 생각한다. 고암 이응노의 평화에 대한 빛나는 정신을 기릴 것”이라고 말했다.

 

고암 이응노.(사진=가나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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