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회담-선거에 시든 월드컵 마케팅…한국 승리하면 급변?

“불붙는 건 순식간…기업들의 비상 플랜 지켜볼만”

윤지원 기자 2018.06.15 16:37:57

2018 러시아 월드컵 개막일인 6월 14일(현지 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 앞에서 축구팬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2018 러시아 월드컵이 개막했는데 재계의 열기는 예년 같지 않다. KT, 현대자동차 같은 일부 공식후원사 외에는 특별한 광고나 이벤트를 준비한 기업이 거의 없다. 심지어 올해는 공식후원사조차 적극적이지 않다. 이번 월드컵 마케팅이 조용한 이유는 대중의 관심이 북미 평화회담과 지방선거 등의 정치적 이슈에 집중된 데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앰부시(매복) 마케팅 규제가 엄격해진 때문으로 분석된다. 업계에서는 2002년 이후로 한결같았던 월드컵 마케팅에 대해 새 고민이 필요할 때라는 지적도 나온다.

 

지구촌 최대의 축구 이벤트가 시작됐다. 2018 러시아 월드컵 개막식이 14일 11시 30분(한국  시각) 러시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이번 월드컵은 7월 15일까지 32일 간 진행된다. 한국은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국으로서, 18일 스웨덴, 24일 멕시코, 27일 독일을 상대로 조별 예선 경기를 치른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국제스포츠행사는 기업들에게 마케팅의 빅이벤트다. 4년 전이나 8년 전 이맘때는 TV만 틀면 ‘오 필승 코리아’ 멜로디가 들렸고 가로등마다 거리 응원 이벤트 홍보 광고물이 넘쳤다. 올초 2018 평창동계올림픽 때에도 온갖 올림픽 관련 이벤트와 프로모션가 홍수를 이뤘었다. 롯데쇼핑의 ‘평창 롱패딩’을 사려고 백화점 앞에서 이틀 밤을 샌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은 기업들이 잠잠하다. TV의 월드컵 관련 방송은 기업의 광고가 아니라 지상파 3사의 중계 경쟁 자체 홍보가 가장 많다. 백화점이나 마트를 가 봐도 월드컵 이벤트 상품이 과거보다 훨씬 적다. 올해는 월드컵 공식후원 기업들 말고는 특별한 마케팅을 아예 기획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식후원 기업들 중에도 적극 나서지 않는 기업들이 많다.

 

KT는 2018 러시아 월드컵을 맞아 대한민국 대표팀 경기가 열리는 18일, 23일, 27일에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 일대에서 대한축구협회 및 붉은악마와 함께 거리응원을 진행할 예정이다. (사진 = KT)

KT는 대규모 거리응원…SKT·LGU+는 침묵

 

월드컵 마케팅에 가장 적극적인 기업은 KT와 현대자동차다. KT는 대한축구협회 공식 후원사이고, 현대자동차는 FIFA 공식 후원사로, 거리응원을 기획하는 기업은 이 두 곳뿐이다. 월드컵 관련 TV 광고도 이 두 기업이 가장 많이 내놓고 있다.

 

KT는 이번 월드컵에서 이동통신 업계 중 유일하게 거리 응원 이벤트를 연다. 한국의 조별 예선 경기가 열리는 18일(스웨덴 전), 24일(멕시코 전), 27일(독일 전)에 광화문광장, 서울광장, 신촌 등지에서 대한축구협회 및 붉은악마와 함께 거리응원을 진행한다. KT는 홍보 부스 및 포토 행사 등의 이벤트를 진행하고, 응원 티셔츠와 응원 도구도 제공할 계획이다.

 

흥을 북돋울 연예인들도 함께 한다. 24일에는 월드컵 응원 앨범의 타이틀곡 ‘위, 더 레즈(We, The Reds·우리는 하나)'를 부른 빅스의 레오와 구구단의 세정을 비롯해 트랜스픽션, 락킷걸 등 가수들이 출연하는 사전 공연을 펼친다. 24일 신촌에서는 개그맨 박명수가 DJ로 나서는 공연이 준비돼 있다.

 

KT는 한국 대표팀의 훈련복도 지원 중이다. 이 훈련복 상의 한가운데는 KT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나머지 이통사들은 한 발 물러나 있다.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는 “올해는 특별히 계획된 이벤트가 없다”고 밝혔다. 월드컵 기간 중 거리 응원으로 트래픽이 급증할 것을 대비해 기지국을 점검하고 특별상황실을 운영한다는 정도다. SK텔레콤은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부터 거리 응원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월드컵 때마다 최고의 수혜 기업으로 꼽혀왔던 터라 올해의 침묵은 이번 러시아 월드컵이 얼마나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는지를 상징한다.

 

물론 아직 변수는 남아 있다. 만약 한국 팀이 첫 경기인 18일 스웨덴전에서 승리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한 업계 관계자는 “북미회담, 지방선거 등에 밀려 월드컵 열기가 시들하지만 정작 대표팀 경기 결과가 좋으면 붐이 일어나는 건 순식간”이라며 “대부분 기업은 대표팀이 좋은 경기를 펼칠 때를 대비한 플랜을 마련해 놓고 있으며, KT 역시 이벤트 규모를 대폭 키울 준비를 끝내 놨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현대자동차는 2018 러시아 월드컵 기간 중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앞 영동대로 일대에서 다양한 월드컵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팬파크 빌리지를 운영하며, 대한민국 경기 날에는 최대 규모의 거리 응원을 펼칠 계획이다. 사진은 지난 '2014 브라질 월드컵' 당시 영동대로에서 열린 월드컵 거리 응원 모습.(사진 = 현대자동차)

현대차만 이례적으로 공동 마케팅까지

 

서울 강북의 거리 응원을 KT가 주도한다면, 강남에서는 현대자동차가 나선다. 현대차는 한국 경기 일정에 맞춰 강남구청과 함께 영동대로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거리 응원전을 연다. 현대차는 이를 위해 영동대로 7차선 580m 구간에 메인 무대와 3개의 대형 LED 전광판을 설치했고 SM타운 건물 외벽에도 국내 최대 규모의 전광판을 준비했다. 또한 윤도현밴드, 마마무, EXID, 장미여관 등 뮤지션들이 경기 전 축하 공연을 펼친다.

 

현대차는 또 코엑스 주변과 영동대로 일대에 다양한 월드컵 콘텐츠로 꾸민 ‘팬파크 빌리지’를 15~28일 운영한다. 팬파크는 경기장이 아닌 곳에 대형 스크린 등을 설치해 경기 관람 및 응원을 할 수 있도록 조성한 장소를 말한다. 코엑스 K팝 광장에는 ‘팬파크 빌리지 이스트’를, 코엑스 동쪽 광장에는 ‘팬파크 빌리지 웨스트’를 각각 운영한다.

 

팬파크 빌리지 이스트에는 풋살장을 조성해 오전 시간대에 어린이 축구 교실을 운영하고, 저녁 시간에는 일반인의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개방한다. 한국 외에 다른 나라의 경기를 관람하고 응원하고픈 사람들을 위한 '글로벌 응원전'도 개최한다.

 

팬파크 빌리지 웨스트에는 월드컵 공식후원사인 코카콜라, 아디다스, 카스와 협업해 예술 공간을 조성하며, 여기에 현대차는 벨로스터 앤트맨카, 벨로스터 N, 벨로스터 월드컵 랩핑카 등을 전시한다. 현대차가 이처럼 여러 월드컵 후원사들과 함께 대규모 공동 마케팅을 실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이번 월드컵 이벤트는 현대차가 공개한 러시아 월드컵 슬로건인 ‘다양한 FIFA 월드컵, 다양한 즐거움’의 일환이다”고 밝혔다.

 

코카콜라는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을 모델로 기용해 월드컵 마케팅 중이다. (사진 = 코카콜라)

일부 공식후원사조차 “쉬어 갑니다”

 

식음료 업계에서는 FIFA 월드컵 공식 후원사인 코카콜라와 글로벌 월드컵 공식 후원 브랜드 ‘버드와이저’의 국내 판매사인 오비맥주 등이 적극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 반면 공식 후원사임에도 특별한 움직임 없이 조용한 기업도 있다.

 

코카콜라는 현대차와 협업한 팬파크 빌리지 웨스트에 ‘코카콜라 2018 FIFA 러시아 월드컵 체험공간’을 운영, 한국 경기가 있는 날엔 이곳에서 응원 이벤트를 진행한다. 또한,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이 된 방탄소년단을 러시아 월드컵 캠페인 모델로 발탁한 데 이어 모바일 앱 코크플레이(CokePLAY)를 통한 다양한 이벤트도 진행하고 있다.

 

오비맥주는 국내 맥주 시장 점유율 1위인 ‘카스’ 브랜드의 월드컵 스페셜 패키지를 지난 4월부터 선보였다. 로고를 거꾸로 디자인하여 ‘뒤집어버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독특한 패키지로, 이는 조 편성도 불리한 데다 예선전 및 평가전에서의 부진으로 기대치가 낮아진 대표팀이 좋은 경기를 펼쳐 세상의 평가를 뒤집어버리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다. 5월에는 인기 힙합레이블 AOMG와 함께 공동 제작한 신곡 ‘뒤집어버려’를 발표하고, 차범근과 안정환 등 국내 축구 전설들을 모델로 기용한 CF도 진행했다.

 

FIFA와 오랜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버드와이저도 적극적이다. 버드와이저는 전 세계 TV로 방영되는 스페셜 광고를 만들어 글로벌 캠페인을 전개한다. 미국의 세인트 루이스에서 브라질, 상하이, 런던을 거쳐 러시아 모스크바로 버드와이저를 배달하는 드론의 여정을 담은 광고다. 또한 월드컵 스페셜 패키지 및 전용 잔을 출시하고, 한국 경기가 있는 날에는 매번 다른 이색 공간에서 상대 나라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콘셉트 응원 파티를 열 계획이다.

 

평창올림픽 때 적극적이었던 맥도날드는 '조용'

 

반면 FIFA 월드컵 공식 후원사인 맥도날드는 이번 러시아 월드컵과 관련해 별다른 마케팅이나 이벤트를 준비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맥도날드는 4년 전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어린이 축구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삼바 비프 버거를 출시하는 등 월드컵 푸드 이벤트를 열었었다. 지난 평창동계올림픽에서도 맥도날드는 햄버거 형태로 디자인된 기념 매장을 운영하고, 평창 한우 시그니처 버거를 출시하는 등 적극 나섰기에 이번 침묵이 더 눈에 띈다.

 

12일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TV로 시청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13일 전국동시지방선거 개표 결과 경남도지사에 당선된 김경수 당선인이 축하 화환을 걸고 승리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월드컵 누른 국내외 정치 이슈

 

이번 월드컵 열기가 예년보다 썰렁한 것은 국내외 여러 굵직한 이슈들로 인해 대중의 관심이 분산됐기 때문이다. 개막 이틀 전인 12일에는 북한의 최고 지도자와 미국의 대통령이 직접 만나 평화를 논하는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고, 하루 전인 13일은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열렸다.

 

따지고 보면 남북 관계, 북미 관계가 급진전을 보인 것은 평창동계올림픽부터다. 평창에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등 고위층 대표단이 방문하면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고, 정치적 이슈와 함께 평창올림픽의 흥행도 뒤따르면서 관련 기업들을 웃게 했다. 남북한은 이후 매일 드라마를 써 내려가더니 월드컵 개막 직전에 역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클라이맥스를 연출해냈다.

 

또한, 개막일 전날 열린 지방선거에도 유독 국민의 관심이 높았다. 60.2%로 23년 만에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을 정도다. 이번 지방선거는 촛불과 탄핵, 그리고 이어진 조기 대선에 의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첫 지방선거로, 이전 정권과의 청산을 확실히 끝내지 못한 보수 야당에 대한 단죄론이 힘을 쓴 선거였다. 남북 평화 기조와 함께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유래 없는 고공행진을 보였다. 그밖에도 김문수-안철수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이슈, 김경수 경남도지사 당선인 관련 드루킹 논란, 이재명 경기도지사 당선인 관련 스캔들 논란 등이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정치 뉴스 외에도 언론은 월드컵에 지면을 허락하지 않았다. 문화계에 만연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바람이 한바탕 휩쓸고 간 자리에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일가의 갑질과 관련된 수많은 폭로가 들어섰다. 이 와중에 한국 대표팀은 올해 1월 전지훈련 이후의 여러 평가전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다. 3월 북아일랜드전 1-2 패배를 시작으로 1승 1무 4패의 성적을 보이며 연이은 실망만 안겨줬다. 자연스레 16강 진출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며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이슈의 중심에 설 기회를 대표팀 스스로 차버린 셈이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 선수들이 훈련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2002 한일월드컵 국가대표 '노장'들이 5월 31일 오후 서울 월드컵경기장 풋볼팬타지움 이벤트 풋살 경기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번 행사는 러시아 월드컵에 출전하는 신태용호 후배들의 선전을 기원하고, 월드컵과 대표팀을 향한 국민적 관심을 얻기 위해 마련됐다. (사진 = 연합뉴스)

‘앰부시 마케팅’ 엄격 규제

2002년 같은 열기는 이제 없다

 

이런 썰렁한 관심 속에 공식후원사들의 마케팅도 예전보다 주춤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공식후원사가 그럴진대 나머지 기업들이 월드컵 특수를 노릴 분위기는 더욱 아니다. ‘월드컵’ 간판을 내걸고 홍보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님은 물론이고 간접 마케팅, 일명 ‘앰부시 마케팅’을 시도하기도 어렵다.

 

업계 관계자는 “월드컵 흥행에 대한 기대감이 낮아진 데다 앰부시 마케팅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어 적발되면 FIFA로부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축구팬들도 자조적인 분위기여서 마케팅 비용 대비 매출 효과도 보장하기 힘들다”며 “후원사가 아닌 기업은 괜히 모험할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또한 “동계올림픽과 월드컵이 매번 5~6개월 간격을 두고 열리는데,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은 2002년 월드컵 이후 16년 만에 국내에서 열리는 초대형 이벤트였던 만큼 기업들은 월드컵보다 평창에 무게중심을 두고 마케팅을 집중했을 것”이라며 “마케팅 예산의 합리적 배분 외에도 대중이 과도한 스포츠 마케팅에 피로감을 느낄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한 “피로감이라는 맥락에서 2002년 기적적인 4강 진출의 신화 역시 유통기간이 다 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라며 “붉은악마, 거리 응원, 오 필승 코리아처럼 월드컵 하면 떠오르는 몇몇 상징적인 마케팅 코드는 대부분 16년 묵은 것이다. 지금의 축구 팬들은 K-리그보다 유럽 리그를 본다. 대중이 축구를 즐기는 방식이 달라진 만큼 마케팅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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