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 그림 속 길 (14) 옥류동~세검정 ③] 멸문 당한 안평대군 집, 효령 차지 됐으니

수양대군에 멸문 당한 안평대군 기리며

이한성 동국대 교수 기자 2018.08.20 09:43:35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안평은 39세에 형 수양에 의해 교동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요즈음 기준으로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어느 큰 기업의 회장이 젊은 나이에 병사하고 어린 조카가 회사의 회장 자리에 올랐다. 큰삼촌이 기업을 넘보다가는, “원로 경영인(김종서, 황보인)들과 아우(안평, 금성)들이 회사를 탈취하려는 모략을 꾸민다”는 이유를 내세워 제거하고, 끝내는 어린 조카까지 제거하고 자신이 회장에 오른다는 드라마를 상상해 보자. 수양의 할아버지 태종 방원도 이런 흐름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곳 수성동의 주인 안평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세조 때 쓰여진 단종실록을 살펴보자. 단종 1년(1453년) 5월 조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이용(李瑢; 안평대군의 이름)이 모의하여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였다. 여러 무뢰배를 모으고, 이현로(李賢老)의 말을 듣고서 무계정사(武溪精舍)를 방룡소흥(旁龍所興: 방룡이 일어나는 자리)의 땅에 지었으니, 이는 마땅히 미리 막아야 할 일이었다.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종 김보명(金寶明)이 풍수설(說)을 빌어 용(瑢: 안평대군)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보현봉(普賢峯) 아래에 집을 지으면, 비기(秘記)에 이른바 명당(明堂)인데, 장손(長孫)에 이롭고 만대(萬代)에 왕이 일어날 땅입니다” 하니 이에 용(瑢)이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짓고서 말하기를, “나는 산수를 좋아하고 홍진(紅塵)을 좋아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뒤에 김보명(金寶明)이 죽자, 용(瑢)의 계집종 약비(若非)가 자성 왕비(慈聖王妃: 문종비 현덕왕후)에게 아뢰기를, “잘 죽었습니다. 살았으면 매우 큰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백악산(白岳山) 뒤쪽은 왕이 일어날 땅이라 하고 장손(長孫)에 이롭다고 일컬었는데, 실은 의춘군(宜春君)을 가리킨 것이었다. 용(瑢)이 널리 조사(朝士)와 결탁하려고 시가(詩家)라고 부르니, 이현로(李賢老)ㆍ이승윤(李承胤)ㆍ이개(李塏)ㆍ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 등이 교류하면서 마음으로 굳게 맹세하고 문하(門下)라고 칭하고, 모두 도서(圖書)의 헌호(軒號: 堂號)를 지어서 서로 일세의 문사임을 자랑하였으나, 모두 농락(籠絡)당한 것이었다. 이현로 등이 용(瑢)을 칭하여 사백(詞伯)이라 하고, 또 동평(東平: 後漢 광무제의 여덟째 아들로 글과 선행에 뛰어났던 사람, 황제의 아들이므로 동평왕이라 했음)이라고도 칭하였다. 김종서(金宗瑞)가 매양 용(瑢)에게 글을 보낼 때 맹말(盟末)ㆍ맹로(盟老)라고 자칭하고 같은 편으로 대하니, 용(瑢)의 거짓된 명예가 이미 넘쳐서 임금의 자리(神器)를 엿보게 되었다. 이에 권세 있고 부유한 것을 가지고 사람을 멸시함이 아주 많았고, 참람(僭濫)하는 물건을 많이 만들어 착용하였으며, 계(契) 모임에서 시문을 지어서 등급을 매기고, 큰 인장(印章)을 만들어 찍었다. 일이 많이 이와 같았고, 또 마음대로 역마(驛馬)를 사용하기에 이르러, 한때 용(瑢)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용(瑢)에게 글을 보내는데 한결같이 계서(啓書;보고서)와 같이 하여, 용비(龍飛)ㆍ봉상(鳳翔)ㆍ번린(攀鱗)ㆍ부익(附翼)ㆍ계운(啓運)ㆍ개치(開治) 등과 같은 용어를 쓰고도 의혹하지 않았으며, 혹은 신이라 칭하는 자도 있었다. 정난(靖難: 계유정란. 수양대군이 원로대신과 안평 등을 역도로 몰아 제거한 일) 뒤에 많이 얼굴을 바꾸고 꼬리를 흔들었으나, 세조는 모두 불문에 붙였다.


(瑢謀危社稷, 群聚無賴, 聽李賢老之言, 作武溪精舍于旁龍所興之地, 當預防之. “誠寧大君奴金寶明假風水之說, 誘瑢云: “作宅于普賢峯下, 則是秘記所云明堂, 利於長孫, 萬代興王之地也.” 故瑢作武溪精舍, 托言: “吾好山水, 不樂紅塵.” 後寶明死, 瑢婢若非白慈聖王妃曰: “善死矣. 生存則受莫大之罪矣.” 以白岳山後爲興王之地, 而云利於長孫, 以紿輿聞, 而實指宜春也. 瑢欲廣結朝士, 托以詩家, 與賢老、李承胤、李塏、朴彭年、成三問等, 結爲心契, 稱爲門下, 皆作圖書軒號以相誇詡, 一時文士, 皆爲所籠絡. 賢老等稱瑢爲詞伯, 又稱東平; 金宗瑞每遺瑢書, 自稱盟末、盟老, 僚侍, 瑢僞譽旣洽, 竊覦神器. 乃以豪富, 蔑人爲異量; 多造僭擬之物, 以爲服用; 於契會, 作詩文而等第之, 造大印, 印之, 事多類此. 又至擅用驛騎, 一時謟瑢者, 通書於瑢, 一如啓書, 如龍飛、鳳翔、攀鱗、附翼、啓運、開治等語, 用之不疑, 或有稱臣者. 及靖難之後, 多革面搖尾, 世祖皆不問.)

 

봄날의 수성동 풍경. 안평대군의 사저 ‘비해당’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사진 = 이한성 교수

“꼬리 흔든다”고 비난하며 제 꼬리도 흔든 사관


이 글을 읽으면 철저히 수양대군 편에 서서 역사를 정리한 사관(史官)에 대해 분노의 마음이 일어나는데, 나중 세조에게 협조한 사람들을 ‘꼬리를 흔들다(搖尾)’라고 쓴 것을 읽으니 웃음이 절로 난다. 그 시대에도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이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눈에는 이 사관 또한 꼬리를 열심히 흔들고 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으랴. 영화배우 이영애 씨는 어느 영화에서 “너나 잘 하세요”라 했다는데, 남 이야기할 것 없이 “나나 잘 하세요”로 바꾸어 봄직하다.


한편, 백악산 뒤편 무계정사는 앞으로 이야기할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서 꾼 꿈을 실현한 곳인데, 이곳이 역모를 도모한 곳이라는 역모의 근거 중 하나로 쓰였다. 이현로가 말한 동평왕(東平王)은 황제의 아들이니 당연히 왕(王)이라 불렸고, 그는 글과 선행으로 모든 이들의 사랑과 칭송을 받았는데, 글과 행동을 이야기한 내용을 ‘왕(王)이란 글자’에 올가미를 씌워 역모로 몰아갔으니 본질은 놓아두고 말꼬리로 상대를 곤경에 모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 같다.


안평이 이처럼 비운에 지자 후세 사람들 마음에는 모두 안평에 대해 애석한 마음이 가득했다. 아마도 김동인(金東仁)의 ‘대수양(大首陽)’을 빼고는 수양대군을 옹호하는 스토리텔러는 없었던 것 같다. 과연 수양은 악(惡)이고 안평은 일방적 피해자, 가련한 선(善)이었을까? 답은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최고위 한량의 삶을 산 안평대군


정치적 관점은 제외하고 근세에 안평에 대해 소개한 글이 있다. 1928년 발행된 오세창 선생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우리나라 서화에 대해 밝힘)’에 소개된 내용이라는데 인용하여 보자. 아마도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를 옮긴 것 아닌가 한다.


안평대군(匪懈堂)은 왕자로서 학문을 좋아했는데 시문이 뛰어났으며 서법(書法)은 기이하고 절묘하며 천하제일이었다. 또한 그림 그리기와 거문고와 비파 타는 기예도 잘하였다. 성품은 들떠 잡되고 허황하였으며 옛것을 탐승(探勝)하기 좋아하였다. 북문 밖에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짓고 남쪽 못가(남쪽 한강변)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서책을 수만 권 모았다. 문사들을 불러 모아 12경시(景詩)와 48영시(詠詩)를 지었다. 등불을 켜고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거나 달밤에 배를 띄워 타거나 시를 짓거나 쌍육(雙六: 주사위 놀이)과 바둑을 두었으며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취하면 해학이 넘쳐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과 사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무뢰잡업지인(無賴雜業之人; 직업없는 이, 번듯한 일이 없는 이)들도 그곳으로 많이 갔다. 바둑알은 전부 옥으로 하였으며 금(金)으로 줄을 그은 바둑판을 사용했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가는 비단을 짜게 하여 붓을 휘둘러서 거기에 해서(楷書)와 초서(草書)를 써 내리고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그걸 집어 주었다. 이 같은 일이 많았다.

 

이대로라면 뛰어난 예술가이면서 법을 어기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빼면 영락없는 최고위 한량(閑良)의 삶이다. 사실 조선의 왕자, 왕녀, 종친은 물론이고 양반 계급 대부분은 부국강병(富國强兵),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같은 가치관을 실행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충(忠: 임금께 충성)과 효(孝)를 기본으로 하고 봉제사(奉祭祀; 제사 모시기)와 접빈객(接賓客; 손님맞이) 잘하는 것을 가치관으로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다. 

 

백성은 굶어죽어도 왕족은 섬세 취미생활


앞서 언급한 비해당 48영(詠)으로 돌아가 보자. 안평대군이 관심을 갖고 좋아했던 48개의 주제를 나열했다. 꽃, 나무, 열매, 괴석, 옥돌, 비둘기, 사향노루, 금계(金鷄) 등의 기호물 내지는 애완물인데, 대부분 희귀하거나 그 옛날 외국에서 들어온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이 시기 세종실록이나 문종실록에는 기근(飢饉)과 질역(疾疫)으로 백성들이 고통 받는 상황들이 실려 있다.


“기근과 질역이 발생하여 사망(死亡)하고 유리(流離)한 사람이 절반 이상이나 되어 민생(民生)이 쇠잔 피폐(疲弊)하고…(饑饉疾疫, 死亡流移者過半, 民生殘弊…)”. 


이러한 상황에서도 조선의 지도층은 아픔을 함께 하지 않았다. 그나마 48영 항목에 대숲 길 바람, 구름 갠 목멱산, 가산의 이내, 인왕산 저녁 종소리가 있어 덜 사치스러워 보인다.

 

한겨울에 인왕산에서 내려다 본 풍경. 아래로 수성동과 멀리 4대문안이 보인다. 사진 = 이한성 교수

그렇다 치고, 비해당 사십팔영(匪懈堂四十八詠)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전해졌을까? 집현전 학사 최항(崔恒)의 문집 ‘태허정집’ 연구자에 따르면, 비해당과 관련된 48개 주제를 선정하여 안평대군이 칠언율시(七言律詩: 7字씩 8句로 지은 정형시) 48수를 지었는데 집현전 학사 9명이 이 시를 차운(次韻: 운을 빌려 온다는 뜻. 한자는 平上去入 4聲이 있는데 이를 분류하여 106개 카테고리로 나누었다. 이를 106韻이라 한다. 여기에서 같은 韻을, 적어도 모든 짝수 구 끝에 배열한다)하여 각자 답시 48 수를 지었다. 이것을 엮은 책이 ‘비해당 사십팔영’이다.


답시를 쓴 이들은 최항, 신숙주, 성삼문, 이개, 김수온, 이현로, 서거정, 이승윤(李承胤), 임원준(任元濬) 9인이다. 현재 뒤 4인의 시는 없어졌고, 최항, 신숙주, 성삼문, 김수온, 서거정의 시가 전해진다. 최항, 성삼문, 김수온의 시는 48수 모두 전해지고 있으나 신숙주의 것은 2수가 사라져 46수가 전해지고 있다. 서거정은 45수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서거정의 ‘사가집(四佳集)’에는 이름도 바꾼 영물 43수(詠物四十三首)라는 이름으로 43수가 모습을 바꾼 형태로, 게다가 목멱청운(木覓晴雲; 목멱산 개인 구름)은 남산제운(南山霽雲)으로, 인왕모종(仁王暮鐘; 인왕 저녁 종소리)은 북사모종(北寺暮鐘)으로 바뀌어 따로 수록되었다고 한다.


안평과 가까이 지내다가 세조 정권에 가담하게 된 이들에게는 딜레마가 컸을 것이다. 정치적 노선 변경(변절?)의 길을 걸어야 했던 그들의 번민과 두려움이 서거정의 사가집을 통해 생생히 전해진다. 위에 열거한 이름들에는 끝까지 수양에게 항거하다 멸문지화(가족이 몰살되는 화)를 당한 사람들, 반대로 협조하여 자손 대대로 영달의 길을 간 사람들이 섞여 있다. 우리는 언제나 크건 작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내가 이들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남의 이야기는 언제나 쉽다.

 

아내-딸을 빼앗아 동료들에게 줘버리니 


결론만 전하면, 세조에 항거하다 발각된 이들은 자신의 죽음은 물론, 그 아내와 딸들, 첩실들은 전리품처럼 어제까지 한 자리에서 국사를 논하고 시를 짓던 동료들에게 하사되었다. 세조실록을 보자.  


성삼문의 처 차산, 딸 효옥은 운송부원군 박종우에게 내려졌다(成三問妻次山ㆍ女孝玉賜雲城府院君 朴從愚). 이개의 아내 가지(加知)는 우참찬 강맹경에게, 이현로의 처 소사(召史)는 우의정 이사철에게 내려졌다. 


이렇게 수십 명의 남자들이 처형을 당했고, 그 아내와 딸들, 첩실들은 분배되었다. 물론 재산도 몰수되어 분배되었다. 안평대군의 비해당은 둘째 큰아버지 효령대군에게, 한강변 담담정은 비해당 48영의 차운시를 쓰던 신숙주에게. 


“수성동이 효령대군의 집터였다”는 글을 읽으면 필자는 마음의 평화가 깨진다. 후손들이 그렇게 쓰는 것은 경우가 아니다. 필자는 세조실록을 읽으며 물었다. 과연 조선은 동방예의지국인가?


이제 마음을 내려놓고 비해당 48영 시 한 수 읽고 가자.

 

‘48영’ 한시에 답한 성삼문의 답시가 실린 ‘성근보집’. 자료사진

성삼문의 성근보집(成謹甫集)에서 찾아보았다.

 

7. 雪中冬栢(설중동백: 눈 속 동백꽃)


高潔梅兄行  고결매형항    
       고결함은 매화의 항렬이라네
嬋娟或過哉  선연혹과재    
       예쁘기는 혹 더할까 몰라
此花多我國  차화다아국    
       우리나라에 많은 이 꽃
宜是號蓬萊  의시호봉래    
       의당 봉래화라 불러야겠지

 

예쁘게 쓴 시로 보인다. 안평대군의 시가 평성(平聲) 灰(회) 운(韻)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차운(次韻: 운을 받아서)하여 평성 회운인 哉(재), 萊(래)로 시를 썼다.

 

47. 木覓晴雲(목멱청운: 남산의 맑은 구름)


盥櫛坐淸晨  관즐좌청신   
       세수하고 머리 빗고 앉은 맑은 새벽
焚香讀周易  분향독주역   
       향을 사르고 주역을 읽지
讀罷倚南窓  독파의남창   
       읽기를 접고 남창에 기대 보니 
山腰一帶白  산요일대백   
       산허리엔 한 줄기 흰 구름일세

 

그림 같은 시다. 비 그친 어느 새벽 수성동 골짜기. 옷매무새 바르게 하고 향 살라 주역을 읽다가 문득 내다본 남쪽의 목멱산. 흰 구름 한 줄기가 산허리를 감싸고 있다. 입성(入聲) 陌(맥)으로 운(韻)을 삼았다. 자주 쓰지는 않지만 易(역), 白(백)은 106韻에서 입성 맥(陌) 운에 속하는 글자들이다. 안평대군의 시가 맥운을 썼기에 차운했을 것이다.

 

48. 仁王暮鍾(인왕모종: 인왕산 저녁 종 소리)


日落仁王洞  일락인왕동   
       해진 인왕골에
鍾聲報有期  종성보유기   
       종소리가 때를 알리는구나
隱几自無事  은궤자무사   
       팔걸이에 기대 절로 별일 없으니  
滿城人定時  만성인정시   
       도성 모두 사람 발길 끊긴 시간

 

한겨울 눈 내리는 날의 인왕산 석굴암 앞. 사진 = 이한성 교수

해 떨어진 수성동 골짜기에 때를 알리는 종소리만 들려온다. 인왕산 안의 절 석굴암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였을까? 팔걸이에 팔을 얹고 비스듬히 기대앉으니 절로 한가롭다. 벌써 28번 인정 종소리는 들려왔고 사람 발자국 소리라고는 모두 끊겼다. 고요 속으로 들어간다. 평성(平聲) 支(지)로 운(韻)을 삼았다.

 

해 떨어져도 종소리 안 들리는 수성동


이제 잠시 수성동을 돌아보자. 수성동공원 구역에 포함되지 않은 옥인시범 아파트들이 보인다. 이곳이 공원이 되고 나서 살기 좋은 아파트가 되었다고 한다. 응당 값도 많이 올랐다는 풍문이 있다. 그 아파트 앞쪽 돌층계를 오르면 철거한 아파트의 잔해 한 벽면을 남겨 놓았다. 이랬었구나. 

 

기린교 뒤로 옥인시범아파트가 보인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일부러 남겨 놓은 옥인시범아파트의 흔적에 이 지역의 주거 역사가 남아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잠시 수성동 복개천을 따라 내려갔다가 되돌아온다. 옥인교회 옆 언커크 능선 끝자락 언덕에는 불국사(佛國寺)란 이름의 절이 있다. 인왕산 치마바위 아래 예부터 자리 잡은 석굴암(石窟庵)이 있으니 경주처럼 짝을 맞추려고 불국사라 명명한 것인지…. 잠시 복개천을 따라 내려가면 ‘윤동주 하숙집 터’라는 안내판이 붙은 집을 만난다. 윤동주라는 시인이 주는 이미지에 비교하면 아무런 감흥이 없다. 윤동주 시인은 앞으로 갈 길에서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문학관에서 만날 것이기에 다시 수성동으로 되돌아온다. 

 

시인 윤동주가 하숙했었다는 ‘윤동주 하숙집 터’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이제 안평대군이 떠난 후 약 200년 뒤 폐허가 된 대군의 집터 비해당 터에서 듣게 되는 사랑 이야기 ‘운영전(雲英傳)’ 속으로 들어가 보련다. 선행 연구자들이 간추린 내용을 인용하여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유영을 전국 떠돌게 한 운영의 한 많은 사연


‘운영전’은 임진왜란 직후인 1601년, 뜻을 이루지 못한 유영이라는 선비가 안평대군의 수성궁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유영은 그곳에서 술에 취하여 잠이 들었다가 깨어 안평대군 시절의 궁녀인 운영과 그녀의 정인인 김진사를 만난다. 유영은 그들에게서 안평대군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를 듣는다.


안평대군은 인왕산 자락에 수성궁을 지어, 운영을 포함하여 재색을 겸비한 궁녀 10인을 두고 문장과 시를 가르친다. 궁녀인 그들은 그 속에서 법도에 맞는 생활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궁녀로서 자유롭게 남성을 만날 수 없었던 운영은, 우연한 기회에 안평대군을 찾아와 글재주를 보여주는 김진사의 시중을 들게 된다. 그가 붓을 들었을 때, 먹물 한 방울이 자신의 손가락에 떨어진 것이 계기가 되어 운영은 김진사에게 연모의 정을 가지게 되고 김진사 또한 운영을 마음에 두면서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된다. 김진사는 수성궁에 자주 드나드는 무녀를 통하여 단 한 번 운영에게 마음을 전한다. 그러나 궁궐의 법도는 그들의 사랑을 방해한다. 또한 그 일을 어느 정도 눈치 챈 안평대군이 10명의 궁녀를 두 패로 나누어 더욱 깊은 서궁과 남궁에 나눠 살게 함으로써 두 사람은 만나기가 더욱 어렵게 된다.


그렇게 안타까운 시간을 보내다가 매년 성 밖으로 나가 비단 빨래를 하는 날이 온다. 궁녀들은 어디로 나갈 것인지 분분하게 의견을 내다가 운영의 사정을 알고는 무녀의 집이 가까운 소격서동(지금의 삼청동)으로 장소를 정한다.

언커크 능선 끝에는 불국사가 있으니, 인근의 석굴암과 함께 마치 경주 같은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사진 = 이한성 교수

바로 그날, 운영은 무녀의 집에서 김진사와 짧은 만남의 시간을 가진다. 아쉬움에 운영은 김진사에게 그날 밤 자신의 거처인 서궁의 담을 넘어 오라 한다. 김 진사는 약속대로 담을 넘고자 하였으나 너무 높아 포기한다. 이때 김진사의 노비인 특이 돕겠다고 나선다. 특은 본래 잔꾀가 많고 사악한 사람이었지만, 별다른 수단이 없었던 김진사는 특의 도움을 받아들인다. 특은 접이식 사다리를 만들어 김진사가 담을 넘어 운영을 만날 수 있게 한다. 그럴수록 안평대군은 더욱 운영을 의심하면서 감시한다. 


김진사는 이러한 만남이 큰 화를 부를 것을 염려하여 특의 꾀대로 운영과 함께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몰래 궁에 있던 운영의 재산을 모두 옮겨와 특에게 지키게 한다. 그러나 특은 모든 재산을 자신이 차지하고는 ‘서궁에서 밤에 재물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헛소문을 퍼뜨린다. 이 말은 곧 안평대군의 귀에 들어간다. 사실을 확인한 안평대군은 운영을 가두는데, 이날 운영은 부끄러움과 참담함에 비단으로 목을 매어 자살한다.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김진사는 할 수 없이 특을 시켜 절에 올라가 운영의 명복을 빌게 한다. 그러나 특은 운영이 재생하여 자기와 함께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등 딴 짓을 벌인다. 김진사는 이 사실을 알고 특을 죽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고 결국 특은 함정에 빠져 죽는다. 그 후 김진사는 온몸을 정결히 하고 새 옷을 갈아입은 후 4일 동안 방안에 가만히 누워 있다가 죽는다.


이 이야기를 들은 유영은 세상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여 오늘 이렇게 슬퍼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화려하고 영화로웠던 안평대군의 위세가 퇴락한 것을 보니 안타깝다고 한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적은 책을 유영에게 준다. 유영은 다시 잠이 들었다가 산새 우는 소리에 잠을 깬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 때때로 그 책을 펼쳐보고 망연자실하여 침식을 폐하였다가 집을 나서 두루 명산을 돌아다녔는데, 그가 어디에서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