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태연하게 원조 받고 보답 않는 ‘북한식 인종주의’ 놔두고 남북경협 잘 될까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기자 2018.08.27 09:41:20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CNB저널 이번 호는 [남북경협 특집](30~37쪽)을 통해, 남북관계가 좋아지길 기다리면서 움직이고 있는 △국회의 관련 법안들 △증시의 기대감 △접경지역의 경제특구 조성 추진 △금융기관들의 준비 등을 다뤘다. 한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대북 특수’로 돌파하려는 움직임들이다. 


그러나 나온 지가 좀 되긴 했지만(2011년도 출간), 제목이 눈길을 끄는 책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를 읽으면 “북한과의 경제협력이 이번엔 잘 될까? 김대중-노무현 10년간의 햇볕정책처럼 돈을 퍼주고도 고맙다는 소리 한 번 제대로 듣지 못하는 전철이 반복되는 거 아닌가”라는 걱정을 하게 된다. 이 책은, 북한 사람들이 그러고도 남을 만한 세계관-인종관을 가지고 있다고 고발하기 때문이다.  


저자 B. R. 마이어스는 북한 문학 전문가로, 소설 분석 등을 통해 북한인들의 심리-문화적 상태를 극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마이어스 “북한은 일제시대 인종주의를 그대로 간직” 

책의 원제는 ‘The Cleanest Race(가장 순수한 인종)’이다. 북한인들은 자신들을 지구상에서 가장 순수한 인종으로 여기도록 북한 선전선동 당국이 세뇌해 왔으며, 대부분의 북한인들은 이를 믿고 있다는 고발이다. 독일 나치처럼 인종을 중시하는 게 극우파들의 트레이드마크이므로, ‘가장 순수한 인종’이란 영어 책의 제목을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로 옮긴 번역도 합당하다. 


극우라면 극좌에 해당하는 공산주의와는 가장 먼 개념이다. 따라서 우리가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국가로 알고 있는 북한이, 독일 나치나 구 일본제국주의 같은 극우의 나라라니, 당황스러운 제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마이어스의 이 책을 읽고 나면 그가 북한을 이렇게 규정하는 것이 절대 무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영어판 표지는 백두산 배경의 거대한 김일성 동상 앞에서 북한 사람들이 단체로 머리를 조아리는 사진을 넣었다. 이렇게 단체로 조아리는 사진을 어디선가 또 많이 보지 않았는가? 바로 조선총독부가 조선인들에게 강요한 궁성요배, 신사참배 장면이다. 일제시대 도쿄의 궁성(천황의 성)을 향해, 또는 남산의 거대한 조선신사(神社)를 향해 단체로 90도 허리를 꺾어 절하는 조선인들의 모습이다.

흰옷을 입은 순결한 인종들로 그려된 내(內: 일본 본토)와 선(鮮: 조선)이 힘을 합쳐(協力c一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종(世界優者)이 되자는 내용을 담은 일제시대 포스터. 일본인이 1등, 조선인이 2등 민족으로 그려졌으나, 나머지 중국인 등 3등 민족보다는 2등이 우월함을 강조한다.

저자 마이어스는 이렇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순수한 인종의 세계로 조선인들을 끌어들였지만, 1945년에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을 그 세계에서 쫓아내고 그들만의 순수 인종 세

계를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31쪽)


일본인 특유의 인종관은 잘 알려져 있다. 이를 마이어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나치가 아리안 족을 신체적·지적으로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고 일본이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역사적으로 그들을 보호해준 힘으로 간주”(171쪽)했다는 것이다. 나치 극우주의는 독일 민족의 뿌리를 아리안 인종이라고 주장하며, 아리안족이 신체적, 정신적으로도 가장 우수하므로 세계 모든 다른 나라-인종을 독일이 지배해야 한다고 선전선동했다. 한편 일본 극우주의는 신체적으로는 아니지만 도덕적으로 일본인이 가장 우월하고 순수하므로 하늘(가미)가 일본인을, 일본 천황을 보호해준다고 선전선동했다는 것이다. 몽고-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을 치려고 출항했을 때 두 번이나 태풍이 불어 선단을 침몰시킨 것을 일본인들은 가미가제(신의 바람)이라고 부르며 아직도 숭상하고 있다. 

 

일제는 가미가제, 북한은 ‘나는 명중탄’ 정신


가미가제는 결국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 공군 조종사들이 전투기 자체를 미국 항공모함에 충돌시키며 산화하는 형태로까지 발전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현대 일본에서는 그런 가지가제 정신이 범죄적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북한에서는 최근까지도 그런 가미가제 정신이 유지되고 있다고 태영호 전 북한 주영국 대사관 공사는 최근 출판된 자신의 저서 ‘태영호 증언 -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전했다. 


 

모든 청소년들은 ‘장군님은 명사수, 나는 명중탄’ 정신을 배워야 했다.(515쪽)

김정일 장군님이 나를 탄환 삼아 발사하면, 나는 가미가제처럼 목표물을 파괴시키면서 나 자신도 파괴되는 그런 형태를 청소년한테 가르쳤다니, 가미가제 정신 그대로다.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깨끗하기에 일본인이 세계 최고이고 신의 민족’이라는 일본인의 믿음은,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인과 조선인은 한 몸), 동조동근(同祖同根: 선조가 같아 한 뿌리)라는 일제의 선전선동을 통해 식민시대 조선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아시아의 아메리카’ 격이었던 만주국(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만주족, 몽골족 다섯 민족이 협력해 만든다는 구호를 가졌던 나라)에서는 일본인에 이어 조선인이 두 번째로 대우받는 종족이었으므로, 이런 인종관이 조선인의 마음을 파고들었을 만도 하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오른쪽)과 영국 처칠 수상을 귀신과 짐승으로 그린 일제시대 선전 그림. ‘귀신과 짐승 같은 영국과 미국에 맞서 순결한 동양인을 일본이 앞장서서 지킨다’는 이른바 귀축영미(鬼畜英米) 구호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1968년 북한 원산 앞 바다에서 북한에 나포된 미군 푸에블로호 사건을 묘사한 북한의 포스터. 포로가 된 미 해군 장병들의 코를 ‘비열한’ 매부리코 형태로 표현한 데서 인종적 편견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이 보인다고 마이어스는 해석한다.

1945년 미국과 소련이 일본제국주의에 승리함으로써 식민치하의 조선인들은 ‘느닷없이’ 해방을 맞았고, 일본인들이 비운 그 자리, 즉 세계에서 도덕적으로 가장 깨끗한 민족의 자리에 자신들을 밀어넣었다는 게 마이어스의 진단이다. 


아직도 일부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생각, 즉 ‘서양인의 몸에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노린내가 지독하게 난다. 그래서 그들은 향수-방향제를 많이 쓴다’는 믿음은, 실제로 서양인들과 자주 접촉해보면 전혀 근거없는 낭설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악취론이 퍼질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서양인은 근본적으로(내적으로) 사악하고 일본-조선인은 고결하다’는 민족주의-인종주의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1)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 수업 전에 김일성-김정일 동상 앞에서 경배하는 모습을 비판한 영국 유학생을 보도한 KBS 뉴스화면과, 2) 일제시대 남산의 조선신사(神社) 앞에서 90도로 허리 숙여 경배하는 조선인 학생들의 모습은 경배의 대상만 다를 뿐 경배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똑같다. 3) 남한에도 이런 일제의 유산은 학교에서의 애국조회 등으로 유지됐었으나 남한의 국제화로 최근엔 많이 사라진 상태다. 

남한은 ‘인종적 민족주의’ 벗어나려 하지만, 북한은 ‘순혈주의’를 그대로 유지


일본인으로부터 배운 이러한 인종적 순결주의-순혈주의를 모든 조선인이(남북한을 가리지 않고) 물려받았지만, 그래도 남한인은 1960년대 이후 지속된 무역입국론-개방주의 등을 통해 극복해 가고 있다. 이러한 극복의 과정에 크게 기여한 것은, 국민의 힘으로 대통령을 최고 권좌에서 끌어내린 4.19혁명의 경험, 그리고 권력자가 국민을 총으로 쏴 죽일 수도 있으니 함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아픈 경험, 그리고 2016년의 박근혜 국정농단을 처단한 촛불혁명 등을 들 수 있다. 


더구나 IMF 외환위기를 극복해내면서 남한인들은 “경제적으로는 한국인도 서양인과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체감했으며, 이는 최근 남한의 이른바 ‘다문화 시대’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시각이 보편화되지 않으면 외국인과 피를 섞는 국제결혼이 보편화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북한인들은 4.19도, 5.18도, 촛불혁명도, 무역개방도, 거리의 외국인 물결도, 국제결혼 물결도 겪어본 적이 없다. 그들의 경험은 △1950~60년대의 숙청(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유격대만을 유일한 정통으로 보고, 항일-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나머지 남로당, 소련파, 연안파, 갑산파 등을 모두 이단으로 숙청)과 그 이후 진행된 김일성 일가 숭배 △1966년 인구조사 이후 북한 주민들을 출신성분에 따라 ‘핵심’ ‘동요’ ‘적대’ 3계층으로 나눈 것 △1994년 1차 핵 위기 이후 일상화된 피난-전쟁 훈련 △1990년대 후반에 최소 30만~최대 200만 명이 굶어죽었다는 ‘고난의 행군’ △그 과정에서 굶어죽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장마당에서의 거래를 통해 먹을 것을 조달하고 생활비를 마련한 경험 △마지막으로 최근 김정은의 ‘핵 보유 강성대국’론으로 이어지는 흐름 등이었다. ‘장마당 경험’을 제외하고는 항상 상부의 지시로, 결단으로 뭔가가 일어나고 낙착됐을 뿐, 국민의 힘으로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 게 북한인들이다. 

 

한설야, 김사량 등의 북한 소설을 통한 분석


마이어스는 문학 연구가답게 북한의 인기 작가 한설야, 김사량 등의 작품을 분석하며 북한인들의 마음을 읽어낸다.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주체사상이니 하는 ‘개념어’ 또는 북한이 공식적으로 내거는 구호(실제와는 다를 수 있는 대외용 선전선동의 문구들)에 매달리기 쉬운 정치-사회학자와는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이다. 사실 개인의 내밀한 마음, 국민의 집단심리를 분석해내는 데는 구체적인 개인을 내세워 그 개인이 말하도록 하는 문학 쪽이 훨씬 구체적-사실적일 수 있다. 그래서 마이어스의 ‘문학을 통한 분석’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구미 고향마을의 90여 가구 중 가장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난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서의 우수한 성적으로 일본육사까지 나오면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조선 시대라면 출세와 무관했을 그에게 일제 통치는 굴욕이었을까, 아니면 기회였을까? 

1945년 해방 시점에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1910년 이전, 즉 일제통치 이전의 조선인의 삶(왕을 모시고 산 조선왕국의 백성들)의 삶을 거의 완전히 잊었음을 마이어스는 다음의 문장으로 전달한다. “1945년,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일본 통치 이전의 삶을 기억하지 못했다.”(26쪽)


사실 일제치하 조선인들의 경험을, 대한민국의 교과서들은 일률적으로 “엄청난 폭력과 수탈을 당했다”고만 가르치지만, 과연 그럴까?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가장 큰 성공을 맞본 고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를 보자. 경북 구미의 고향마을 90여 가구 중 가장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 박정희는, 아마 계속 조선 왕이 통치하는 세상에 태어났다면, 돈도 가문도 없으므로 출세할 그 어떤 기회도 잡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게 하버드대학의 한국사 전문 카터 에커트 교수의 진단이다.(‘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642쪽 참조) 

 

일제시대 경험, 계층 따라 달랐는데, 왜 한 쪽만 보여주려 애쓰나? 


‘1932년부터 (조선의) 학교에 배속된 조선군의 일본인 장교들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할 것을 조선 학생들에게 권유’(위 책 640쪽)했으며, 이런 기회를 이용해 청년 박정희는 신설된 만주군관학교를 최고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까지 진학해 일본군 장교로서 출세 가도를 밟아 결국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박정희 같은 입장에서야 조선 왕의 통치(양반 자제 아니면 모든 기회가 봉쇄되는)가 아닌 일본 식민지 통치(양반이 아니더라도 기회가 주어지는)가 그야말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1) 서울의 일제시대 이름인 경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많이 나오고 있다는 KBS 1TV의 화면과 2) 일제말 징용을 당한 조선인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는 같은 방송의 화면. 한국 매체는 전혀 다른 이 두 모습 중 어느 하나만 선택해 보여줄 뿐, 둘 모두를 동시에 보여주지는 않는다. 

일제 치하라도 상대적으로 달콤한 경험을 많이 한 계층은 △전통 양반 명문가들(통치를 위해 조선총독부가 혜택을 주어가며 회유) △지식인 계층(역시 통치를 위해 조선총독부가 우대)이었던 반면, 서민 계층은 징용, 징병, 위안부 동원 등으로 뼈아픈 경험을 한 것 역시 사실이다. 


이렇게 고통과 행복이 동시진행된 것이 식민 치하의 현실이었으므로, 한국의 영화나 TV 드라마에서는 두 모습이 번갈아가며 노출된다. 하나는 이른바 ‘경성 구락부’로 상징되는 장면들로, 종로 클럽에서 삐루(맥주)를 마시며 선남선녀가 희희락락하는 모습이다. 다른 하나는 일제의 총칼 아래 무참히 희생되는 징병-징용-위안부의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한국 TV나 영화는 대개 이 두 장면 중 하나만을 선택한다. 즉 일제시대를 무대로 삼는 특정 드라마나 영화는 화려한 경성 ‘댄디보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또 다른 영화나 드라마는 뒤의 참상만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모습 다 진실이다. 하지만 일제시대를 그리는 한국의 소설가나 영화감독은 둘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 둘을 섞는 것은 금기사항이다. 


박정희에서 노태우로 이어지는 30년 군사독재 시대를 살아본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예컨대 전두환 시대에는 광주사태 뒤에 이어진 분신과 고문의 끔찍한 장면도 있었지만, 프로야구가 시작되고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화려한 모습도 있었다. 각자 선택한 위치에 따라 경험은 다르겠지만, 전두환 시대에 전원이 희희락락한 것도, 반대로 전원이 고통에 신음한 것만도 아니다.  

 

일본의 상징물들을 교묘하게 김씨 일가 개인숭배로 바꿔치기 한 북한


1945년 해방 당시의 대부분 조선인들이 정체성이 ‘난 일본 국적의 조선인’이었다면, 그걸 잘 활용하는 게 통치를 위해서는 제일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북한의 선전선동 담당자들은, △천황 → 김일성 △후지산 → 백두산 △궁성요배-신사참배 → 김일성 동상에 대한 참배로 치환하는 데 성공했다는 게 마이어스의 결론이다. 

 

1) 마오쩌둥(가운데)과 함께한 덩사오핑(오른쪽). 마오는 문화혁명을 얘기했고 인민 경제를 중시하지 않았지만 덩은 인민 경제를 얘기하고 추진했다. 북한의 김씨 3대 중 김일성은 인민 경제 향상을 얘기했고 아들 김정일은 인민의 실생활 문제를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나선 적이 없으나, 3대 김정은은 “계속 허리띠를 졸라매게 해 자책을 느낀다”고 할아버지처럼 다시 경제 책임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공산 사회에서 경제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위험부담을 지는 행위다. 마오쩌둥-덩사오핑 사진 = 위키미디아

이러한 치환은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김정일 치하에서 적게는 30만 명에서 최대 200만 명까지 죽었다고 하는 90년대말 ‘고난의 행군’(즉, 굶주림과의 전쟁)을 거치면서도 북한 이탈자는 극소수에 그쳤다. 

 

남한에서는 2011년 굶어죽은 것으로 보였던 최고은 작가 사건, 2014년 가난해서 자살한 ‘송파 세 모녀 사건’ 등으로 시끄러웠다. 국민을 굶어죽게 만드는 건 정부의 책임이기에 남한에서라면 수십만 명은커녕 수십 명 또는 수백 명만 굶어죽어도 당장 정권이 뒤집힐 판이다. 아니면 “이런 나라에서는 못 산다”며 대규모 국외 탈출이 벌어질 게 분명하다. 그런데, 북한에선 수십만, 수백만이 죽어도 정권은 떵떵거리며 호의호식을 계속했다. 고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숨겨놓은 일본인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는 자서전 ‘김정일의 요리사’에서 “당시 북조선 각지는 홍수 때문에 심각한 식량난에 처해 있었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정일은 수상 오토바이 시합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고 사정을 전했다. 국민은 굶어죽어도 최고권력자는 수상 오토바이 시합에 전념해도 되는 나라다.  

 

서방 은행들이 북한에 빌려준 돈의 30%만을 받고 탕감해주기로 했다는 내용을 보도한 1988년 6월 3일자 동아일보 지면. 북한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는 물론, 한국으로부터도 수많은 지원과 식량차관 등을 받아갔으나, 그러한 지원에 보답을 하려는 노력은 거의 한 바가 없다.

국경이 헐렁해져도 북한 인구유출 적었던 이유


‘고난의 행군’ 당시 북한과 중국 사이의 “북쪽 국경이 허술해졌는데도 안정적으로 인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모두 이 이데올로기 덕분이라 할 수 있다”(14쪽)고 마이어스는 썼다. 수십만, 수백만 명이 굶어죽고 군인들도 먹을 걸 찾느라 국경 경비가 허술해져도 국경을 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놀라운 현상이다. 그 이유를 마이어스는 북한의 이데올로기, 즉 지독한 인종 순혈주의에서 찾는다. 그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그는 “북한의 이데올로기는 별로 복잡하지 않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조선인들은 혈통이 지극히 순수하고, 따라서 매우 고결하기 때문에 어버이 같은 위대한 영도자 없이는 이 사악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13쪽)이란다. 어버이 같은 김씨 일가의 영도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북한을 떠나지 못한다는 이데올로기다. 


이 진단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게, 예전 1980년대에 읽었던 한 일본 작가의 ‘아시아人론’이다. 그 책에서 그 일본 작가는 “해외에 나가보면 현지 체류 일본인들은 다 초라한 모습들이다. 놀라운 것은 해외 체류 한국인들이다. 해외 체류 일본인들이 다 비루먹은 표정들을 하고 있는 반면, 해외 체류 한국인들은 모두 당당한 표정에다가 현지에서 교수나 상인으로서 성공한 인생들을 살고 있더라”는 게 그의 경험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천황으로부터의 거리로 등급이 정해지는 일본인의 무의식’이라는 진단을 본 기억이 있다. 천황 일가를 모시고 사는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천황에게 가까울수록 등급이 높은 사람이고, 반대로 멀어질수록 질이 낮아진다. 그러니 일본 땅에서 살지 못하고 해외로 나가 살아야 하는 재외 일본인의 처지에선 심리적으로 더욱 위축되는 게 당연하다. 


실제로 미국에서 보면, 일본 기업이나 주재원들의 경제적 파워는 대단하지만, 일본인 재미교포의 숫자는 아주 소수임을 알 수 있다. 중국, 한국, 인도, 베트남 등은 미국 곳곳에서 거대한 교민사회를 이루고, 미국 사회 안에서도 제대로 목소리를 내면서 살고 있지만, 재미 일본인들은 워낙 숫자가 적고, 그야말로 ‘쥐 죽은 듯이’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궁성’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열등인간 되는 일본과 북한


‘궁성으로부터의 거리로 판정되는 사람 등급’이란 일본의 공식은 그대로 북한에도 적용된다. 김일성-김정일을 안치한 금수산기념‘궁전’ 근처에 사는 평양 시민들은 1등 시민이며, 평양에서 멀어질수록 등급은 떨어진다. 객관적 판단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이 사는 곳을 ‘낙원’으로 생각하는 일본인이나 북한인이나 모두 낙원을 떠나기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들은 설사 어떤 계기로(예컨대 북한의 ‘고난의 행군’ 때) 낙원을 떠났다가도 사정이 조금만 바뀌면 다시 자신들만의 낙원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1) 평양의 성역인 금수산 태양궁전과 2)도쿄의 성역인 황거(皇居: 천황의 거처). 이 두 나라에선, ‘궁전’으로부터의 거리가 바로 신분을 측정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황거 사진 = 위키피디아

‘평양 시민’이 얼마나 대단한 지위인지는, 중국으로 탈출한 북한 사람들을 현지에서 인터뷰한 책 ‘사람과 사람, 김정은 시대 북조선 인민을 만나다’(강동완-박정란 저)에 생생한 증언이 나온다. 


한 탈북자가 말하길, “한국에는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에 해당하는 북한 말이 있으니 바로 ‘나 평양에서 온 여자야’”라는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공민증 색깔부터 평양 사람과 지방 사람이 달랐다고 말했다. 또한 지역 이동에 대한 허가를 받을 때 국경여행증에는 한 줄만 표시되지만 평양을 방문할 때는 여행증에 두 줄이 표시될 정도로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개인의 사적인 용무로 지방 사람들이 평양에 들어오는 경우는 매우 어려웠다고”(208쪽)라는 북한 출신 사람들의 말을 이 책은 전한다. 해외로 나가는 여행 허가증에는 빨간 줄이 하나지만, 지방민이 평양으로 들어가는 여행증에는 빨간 줄이 두 줄이나 표시되니, 해외 나가기보다 평양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고 말할 만도 하다.

 

“부정하게 번 돈을 갖다 바치면 받아주마”인가?


마이어스가 말하는 북한의 아주 평범한 이데올로기(즉 ‘조선인들은 혈통이 지극히 순수하고, 따라서 매우 고결하다’는)는 곧바로 외국인에 대한 태도로 연결된다. 그는 북한인들이 해외의 원조를 얼마나 태연하게, 되갚을 생각도 없이 받아들이는 데 익숙한지를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1. 북한 정권이 보기에 자기 주민들이 자본주의와의 모든 타협을 단호하게 거부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많이 겪었으므로, 열등한 다른 민족들이 부정하게 얻은 이익의 일부를 공물로 바치듯 북한과 나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원조의 상당 부분은 차관의 형태로 제공되었지만, 북한은 갚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48쪽) 


2. 식민지 조선의 선교사들이 주사로 아이를 살해하고 있다. ‘미제 흡혈귀들’에 대한 복수를 외치고 있는 이 포스터는 미국이 북한에 대한 최대 원조 공여국이었던 1999년에 등장했다.


3. 미국이 북한에 대한 공포심으로 계속 떨고 있다는 신화를 이용해 북한 정권은 1990년대 중반에 들어오기 시작한 식량 원조를 배상금의 형태로 그럴 듯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이 핵 시설로 의심되는 곳에 대한 사찰 권리를 얻는 대가로 곡물을 보상하는 것으로 그려진다.(148~149쪽)


4. 서구가 군축에 대한 대가로 북한에 원조와 지원을 약속하는 것이 괜한 헛수고가 되는 것(169쪽)


5. 원조 공여국들에 대한 적대감, 테러 모험주의와 불법 마약거래, 무역거래에서 발생한 채무와 다른 부채에 대한 태평한 무관심 (170쪽)


6. 남한이 햇볕정책이란 명목으로 10년간 무조건적인 원조를 퍼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북한으로부터 쥐꼬리만 한 호의도 얻어내지 못했다는 사실 (172쪽)


해외의 원조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이러한 태도는, 소련과 중국이라는 두 인접 공산주의 강대국으로부터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끊임없이 원조와 투자를 받고 되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아온 이래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햇볕정책에 대한 비난도 결국은 북한의 우월적 태도가 발단


마이어스가 든 여섯 사례 중 남한인에게 가장 뼈아픈 것은 6번이다. 즉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호의어린 10년간 원조에 대해 북한 정권 또는 북한인들은 ‘받았으면 되갚아야 한다’는 태도를 적극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태도는 남한의 보수-극우 세력으로 하여금 “핵 개발 비용만 댔다”는 비난을 무차별적으로 가하도록 유도했으며, 남한 정치가 다시 극보수로 회귀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됐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첫 남북정상회담 때 북한의 내부 선전방송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의 사회주의 포기를 설득하려고 평양에 왔지만, 오히려 김정일의 지략에 말려들어 북남협력에 동의했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김대중이 남한에 장기 수감돼 있던 남파 간첩을 송환한 것은 북한의 우월한 힘과 결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라고 선전했다고 마이어스는 책에서 전한다. 햇볕정책이 결국 실패로 단정된 데에는, 북한의 이러한 왜곡 선전이 일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지구상의 가장 순수한 민족이며, 자기들은 고생하며 사회주의를 지키고 있으니,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외국(남한 포함)은 돈을 갖다 바치는 게 당연하다는 인종주의를 북한 당국과 국민들이 계속 유지한다면, 도대체 앞으로 남북경협이 활성화되면서 들어가게 될 막대한 남한 돈은,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의 10년과 얼마나 다른 대접을 받을지 궁금해진다. 받을 건 받되 줄 건 주지 않는 북한인들의 인종 우월주의적 태도가 계속된다면 또다른 아픈 추억만이 만들어질 수 있다. 


요즘 일본에서 큰 시비거리가 되고 있는 일본의 이른바 ‘평화 헌법’은, 1945년 일본을 점령한 미군정 치하에서 당시 미국 국무부를 지배하고 있던 진보적 담당자들이 만들어서 일본에 부과한 헌법이라고 한다. 전체주의 밖에 모르던 일본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심기 위해 만든 ‘평화 헌법’이었지만, 전체주의에 너무나 익숙한 일본인들은 헌법이야 이렇건 말건, 자민당에 전권을 몰아줘 자민당 일당독재를 수십년 간 허용하고 있고, 앞으로 바뀔 조짐조차 없다. 


외부에서 그 어떤 수혈을 해줘도, 현지인들의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대개는 무용지물이 되거나, 아니면 현지인들의 사고방식에 맞게 변형되고 만다는 진리를, 일본의 일당독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똑 같은 논리로, ‘일제시대 인종주의 그대로’를 북한인들이 유지해 간다면, 아무리 남한의 정치인과 시민단체와 기업들이 돈과 정성을 들여가며 북한이란 나라를 바꿔보려 노력을 한들, “당신들이 아쉬워서, 또는 당신들의 이익을 위해 돈을 쏟아붓는 것일 뿐이고, 우리는 그걸 받을 뿐이고” 식의 반응이 주로 나올 가능성이 더 높은 게 아닐까?

 

달라진 ‘장마당 세대’와 “내 책임” 공언한 김정은 


물론 변화의 조짐은 있다. 1994년 이전에는 북한의 모든 생활이 조선로동당에서 시작되고 끝났기에 당은 곧 어버이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그러나 1994년 이후 이런 배급제가 거의 완전하게 붕괴되면서 장마당을 통하지 않으면 굶어죽고야 마는 상황이 도래했다. 그래서 1994년 이후 세상을 경험한 이른바 ‘장마당 세대’는 북한 당국의 선전선동을 그 이전 세대처럼 곧이곧대로 절대 믿지 않는다는 한다. 즉 1994년 이전에는 ‘당 = 모든 것’있지만, 1994년 이후에는 ‘당 = 모든 것 아님’이 공식이 됐다는 소리다. 

 

2017년 신년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능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다”고 북한 최고지도자로서는 이례적인 언급을 해 안팎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국민들이 굶어죽을 때까지도 경제를 거의 등한시 한 아버지 김정일과는 상당히 다른 자세를 보여줘 북한의 변화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 당장 사회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신세대가 아니라 기성세대다. 장마당 세대가 올라오고는 있지만 아직도 북한의 주요 포스트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장마당 이전 세대들’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또 다른 큰 변화의 조짐은 김정은 위원장이 스스로 ‘경제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미 2012년에 김정은 위원장은 “다시는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도록 하겠다”며 식량 공급을 책임지겠다고 연설한 적이 있다. 2017년 신년사에서는 “능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다”며 아직도 인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도록 만드는 자신의 책임을 자신의 입으로 밝혀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그 전 김정일 시대에만 해도 북한의 사실상 ‘왕’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경제 파탄과 굶주림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자신의 입으로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질적 개선’ 언급한 김정은의 위험부담


마이어스의 책 53~54쪽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물질적 조건을 향상시키겠다고 한 소련과 중국은 경제적 문제들을 부인해야만 했고, 그 결과로 주민들의 신뢰를 잃었다. 그 반면에 정당성을 민족성에 근거를 둔 북한 정권은 나라가 경제적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북한 정권은 전체적인 식량 부족 정도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기근이란 말 자체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경제 붕괴에 대한 김정일의 책임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경제적 ‘어려움’이라 표현하며, 기상 악화와 미국의 제재조치, 게으른 중간급 간부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현실을 왜곡하는 선전이기는 해도 주민들이 믿기에는 진실성이 충분히 있었다. 특히나 미국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민족의 피해의식을 일깨움으로써 정권에 대한 지지를 강화시켰을지 모른다. [중략] 최악의 식량 위기가 끝난 1998년 무렵, 공식 매체는 “정권 붕괴에 대한 미국의 꿈을 좌절시켰다”며 김정일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경제의 향상, 즉 물질적 조건을 향상시키겠다고 공언했던 중국과 소련의 지도부는 그 성과가 미진할 때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그러나 아예 경제를 언급한 적도 없이 오로지 ‘적들의 호시탐탐에 맞서느라 경제를 돌볼 시간조차 없는 김정일 장군님’은 나라를 지키느라 국민을 밥 먹일 여유가 없었으며, 그래서 미국의 북한 붕괴 시도를 김정일이 막아냈다는 이상한 신화를 북한의 선전선동 당국은 북한인들의 마음속에 성공적으로 심어줬다는 설명이다.


‘사실상의 왕’은 경제 문제에 신경을 쓰지도, 언급을 할 필요도 없으며, 경제에 문제가 생기면 아래 간부를 처벌하면 된다는 식의 해법을, 한국인은 ‘사실상의 여왕 대접을 받은’ 박근혜 치하에서 이미 경험했다. 따라서 김정은 위원장이 경제 문제를 적극 언급하는 태도는 ‘김씨 왕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다. 

 

“왕에는 잘못 없다”는 속임수도 가능하지만…


물론, 다른 해석도 가능하기는 하다. 한설약 작 ‘과도기’라는 북한 소설이 있다.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인 당 일꾼 ‘경우’는 김정일 장군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원인은 지도자 김정일이 인민을 실망시킨 것이 아니라, 경우를 포함한 인민이 김정일을 실망시켰음을 경우가 깨닫기 때문이다. 소설 속 김정일은 말한다. “바로 일꾼들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나라-국방을 지키는 ‘선군 장군님’이며, 경제를 들떠 일으키는 책임은 인민과 당 간부들에게 있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불철주야 노력으로 국방은 지켜지지만 경제는 일꾼과 인민의 나태 탓에 잘 되지 않는다는 교묘한 왜곡이다. 


김정은이 신년사를 통해 “책임을 통감한다”고 공언하자, 곧바로 북한 전역에서는 당 일꾼들의 눈물의 참회 행렬이 이어졌다고 북한 소식 전문 매체인 데일리NK는 2017년 1월 16일자 기사 [北, 김정은 신년사로 주민자책 유도 확인…“책임전가 의도”]를 통해 전했다. 


기사는 “원수님(김정은)이 책임을 통감하는데 그건 우리 당 간부들이 책임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며 당과 행정의 일꾼(간부)들이 자책의 눈물을 흘렸다는 글들이 북한 내부에서 줄지어 나타났다고 전했다. 

 

따라서 김정은 위원장의 자책이 어떻게 풀려나갈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책임 정치’를 강조하는 민주 사회라면 경제를 일으키겠다고 공언했다가 실패한 정치인은 책임을 져야 하지만, 사실상의 왕인 김정은 입장에서는 1. 스스로 책임을 질 수도 있지만, 2. 데일리NK의 보도나 소설 ‘과도기’에서처럼 경제가 안 된 책임을 당 일꾼 또는 인민에 전가하는 가능성이 둘 다 열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 어느 방향을 택하건, 어쨌든 김정은 위원장이 자신의 입으로 “경제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고 발언하는 것은, 김씨 왕가 입장에서는 위험한 행동이기는 하다. 


장마당 세대라는 새로운 경험을 가진 신세대의 대두,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의 자책 발언 등은 북한 사회에 변화 가능성을 아주 작게라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규모 민주화 운동을 통해 대통령을 몇 번이나 갈아치운 경험이 있는 남한 사회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미국이 심어준 민주주의, 한국과 일본에서 완전히 다르게 발전


미국식 민주주의는 미군의 점령과 군정이라는 형태로 일본에도, 한국에도 이식됐다. 그러나 제대로 민주주의가 개화한 것은 남한에서 뿐이다. 이처럼 같은 씨앗이라도 떨어지는 땅에 따라서 귤이 되기도, 또는 민의 체질 자체가 보수-우익적인(천황을 모시므로) 일본에서는 탱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대규모의 사회변동을 겪지 못해 천황을 보듯 김씨 왕조를 바라보는 북한에 대해 앞으로 문재인 정부가 과거의 햇볕정책에 버금가는 경제적 원조에 나설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과연 북한인들이 남한인들처럼 민주주의와 새로운 세계화 시대를 ‘타는 목마름으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여태껏 그랬듯 외부의 원조를 응당 받아야 하는 것으로 심드렁하게 받아들일지에 따라 문재인 정부의 대북사업의 성공과 실패가 갈릴 것 같다. 대북 경협 사업의 성공을 위해선 참으로 할 일이 많을 듯 한데, 과연 우리는 어떤 전략으로 이를 성공시킬 수 있을지, 남한 사회의 역량은 이런 과업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돼 있고 여력을 갖추고 있는지, 심각하게 점검해봐야 하리라. 그래야만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10년 햇볕정책이 남긴 떫은 뒷맛을 또 한 번 보지 않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