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12) 정필승 작가] ‘쓸모있게, 만져지는 소확행 회화’ 추구하는 귤 창고지기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기자 2018.09.03 09:41:26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개인 취향의 문제겠지만 필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중, 과거와 미래, 의식과 무의식, 과학(지식)의 한계, 그리고 존재와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를 인상적으로 읽었다. 이 소설에는 인간의 정체성을 ‘기억이 축적되면서 만들어지는 독자적인 사고 시스템’이라 설명하는 구절이 나온다. 내가 어떤 사람(존재)인지 판단하는 데에는 기억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나를 나일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바탕은 바로 나의 기억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의 의식 혹은 무의식 어딘가에 쌓여 있다고 생각되는 기억들이 나를 구성한다. 나의 사회적 정체성을 만드는 것 역시 기억이다. 이 경우 내가 어떤 기억을 하고 있는가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으며, 나에 관한 타인(사회)의 기억도 중요해진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나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가가 그들의 기억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기억을 이야기하다보면 축적되거나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유한성을 떠올리게 된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하다보면 자연스레 하루하루의 소중함으로까지 이야기가 확장된다.  

   
나의 삶이 행복한지 아닌지 판단할 때에도 내가 어떤 기억을 하고 있는가는 중요하다. 나의 하루하루의 기억이 행복하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 반대라면 나는 불행한 사람이 될 것이다. 행복의 느낌이란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귤이랑 미술창고’ 전시 전경. 도판 제공 = 정필승, 사진 촬영 = 김성용

‘창고’를 마주하자마자 떠오른 ‘소확행’


그런데 행복과 관련해 최근 들어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하는 ‘소확행(小確幸)’이다. 이 단어의 시작은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한스 섬의 오후’(1986)이다. 소확행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된다. 획일화된 가치평가의 기준을 벗어나 내 인생의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고, 때로는 살기 힘든 세상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자기 위안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 쪽의 해석이든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길 원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살기 편하면 편한 대로, 조금 힘들면 힘든 대로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귤이랑 미술창고’를 마주하며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가 바로 소확행이었다. 이 공간은 무엇보다 작가 자신의 삶의 의미와 행복을 위해 만들어졌다. 작가 정필승은 사람(관객)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데에서 작업의 의미를 찾는다. 그러다 자연스레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공간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방을 꾸미듯 갤러리와 아트숍을 만들어나갔다. 자신의 하루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경험과 감성의 나눔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귤이랑 미술창고’ 전시 전경. 도판 제공 = 정필승, 사진 촬영 = 김성용

거창한 기획 아니라 사람들이 편안한 공간


필자와의 대화 중 작가가 가장 강조했던 것은 ‘거창한 기획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된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만의 아지트라고 느낄 정도로 편안한 공간이 되길 바란다’였다. 그래서일까. 번화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외진 곳도 아닌 장소에 위치한 ‘귤이랑 미술창고’는 편안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낯선 전시장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지인의 집에 방문했을 때의 기분이다. 전시 공간을 채우고 있는 크고 작은 작품 역시 작가 그리고 작가와 오랜 시간 교류를 해왔던 작가(친구)들의 것이다. 전시에 대한 미학적 담론을 풀어내지도 않는다. 참여 작가를 소개하는 화려한 수식어도 없다. 그냥 보고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든 관객이든, 그 누가 되었든 편안하게 머물다 가면 그만이다. 집으로 돌아가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 이 아담한 공간에서의 기억이 행복한 기억을 만드는 데에 조금이라도 일조하길 바랄 뿐이다. 

 

정필승 작가. 도판 제공 = 정필승

“회화도 설치라 생각하며 작업”
정필승(필승) 작가·대표와의 대화

 

- 작가이기 때문에 먼저 작업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다. 이전의 작업을 보면 분홍색이 주조 색인 경우가 많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모란미술관의 전시 ‘예술을 사용하다’(2016)에서 소개되었던 <변화를 추구하는 미적 표현방법 - Yellow Flower>(2014)의 경우 벽에 걸린 회화 작품인데도 관객들이 만지고 위치를 바꿀 수 있게 했다. 조금 자세히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

 
“분홍색 자체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우연적인 선택이었다. 나의 첫 작업이 프라 모델(pla model) 재고 상품을 이용한 것이었는데, 상품 자체의 색이 분홍이었다. 


나는 벽에 걸려 전시된 (나의) 작품도 회화가 아니라 설치에 가깝다고 생각하며 작업한다. 워낙 소통과 교감에 관심을 갖다 보니 관객들이 만질 수 있는 작품을 만들게 되는 것 같다. 관객이 참여하고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일종의 장치 및 조건을 제공한다고 생각하며 작업할 때가 많다. 캔버스만 이용하지는 않는다. 소통에 중점을 둔 작품들의 경우 대부분 단어 그대로 설치 작업이다. 시멘트를 이용하기도 했고 점자를 이용해 손을 만지며 의미를 공유하는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향기가 나는 조형물을 만든 적도 있다. 다양한 오브제들을 사용해왔다. <변화를 추구하는 미적 표현방법 - Yellow Flower>는 벽에 못을 여유 있게 박아 관객들이 원하는 대로 회화 작품의 위치를 바꿔 걸 수 있도록 했다. 어떻게 하면 관객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나온 결과다.” 

 

‘귤이랑 미술창고’ 전시 전경. 도판 제공 = 정필승, 사진 촬영 = 김성용

-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터랙티브 아트의 외관을 하고 있지 않은 회화 작품인데도 그것을 만지게 하고, 작품이 전시된 상황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재밌다. 그렇지만 한계가 명확히 보이기도 한다. 관객이 자유롭게 참여한다고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작가가 못을 박은 범위, 즉 작가가 정한 범위, 즉 예측 가능한 범위를 전혀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결국 작가의 매뉴얼 안에서만 일어나는 매우 제한적인 소통이다. 혹시 참여했던 관객 중에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못을 새로 박아달라고 요청한 적은 없었는가?  


“못을 박아달라는 요청은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와 같은 요구가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또한 공간적인 제약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대치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본인이 생각하는 소통은 어떤 것인가? 


“체험을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작품을 통해 관객이 특별한 경험을 작가와 혹은 주변 관객들과 나누는 과정에서 소통이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식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만질 수도 있고 조작할 수도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눈으로만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나는 소통하는 미술이 쓸모 있는 미술이라 생각한다. 전통적인 의미의 미술 활동이 과연 오늘날의 대중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의문을 갖고 있다. 나를 포함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유의미하고 세상에 필요한 것이라 확신하면서 작업을 한다. 그러나 타인에게는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의 작품을 마주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쓸모 있는, 긍정적 영향을 주려고 고민하다보니 소통을 다루게 되었다.” 

 

- 그런 생각이 확장되어 ‘귤이랑 미술창고’를 연 것인가? 설명을 들어보니 말 그대로 복합 문화예술 공간이다. 작가의 생활공간이자 전시장이고 미술 작품과 아트 상품을 판매하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Artist Run Space)가 떠오른다.   


“당연히 소통을 중요시하는 나의 지향과 연결된다. 나는 관객이 미술 작품을 전시장에서 눈으로만 보고 감상을 끝내길 원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의 공간에도 예술적 정서가 스며들길 원한다. 아트 상품도 그래서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아트숍이 있다고 해서 상업적인 이윤을 최우선의 목표로 놓은 것은 아니다. 상업적이다, 비상업적이다라는 분류도 이제는 무의미한 것 같다. 아트 상품은 작가의 작업을 일상에서 소유하게 해주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대단하고 거창한 목표를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라 특별한 전략이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지는 않았다. ‘귤이랑 미술창고’는 예술가들의 아지트, 나아가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편안한 아지트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그냥 재미있는 예술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귤이랑 미술창고’ 외관. 도판 제공 = 정필승

- 다른 곳이 아니라 제주도에 소통을 위한 공간을 만들게 된 남다른 이유가 있는가? 내부 인테리어는 본인이 직접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름에도 담겨 있지만 귤 농장에 있는 창고 건물을 이용한 것이다. 현재 2채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전시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아트숍이다. 인테리어 관련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오가다 제주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제주도는 정말 매력적이다. 작년 말부터 혼자서 천천히 인테리어를 진행했다. 그래서 이 공간에 나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 ‘귤이랑 미술창고‘를 어떤 공간으로 만들고 싶은가?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고,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나의 작가로서의 지향에서도 이런 공간을 만들게 된 것 같다. 일반적으로 작가의 작업실은 폐쇄적인 공간으로 여겨져 왔다. 궁금하지만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에 둘러싸인 장소였다. 소통을 생각하다보니 작가인 나의 삶을 더 보여주고 싶었다. 또한 일반적인 전시장보다 편안하게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나 혼자만 이 공간을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작가들과 협업을 진행하면서 함께 공유하고 꾸려나갈 계획이다. 이 역시 거창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주변의 작가들과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편안하게 교류하는 지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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