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 그림 속 길 (15) 옥류동 ~ 세검정 ④] 아리따운 운영 낭자 건넜을 기린교 복권을 기대하며

이한성 동국대 교수 기자 2018.09.10 10:49:09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이제 이곳 수성동 비해당을 배경으로 전개된 운영전(雲英傳: 일명 수성궁몽유록/壽聖宮夢遊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운영전은 한문 소설로 유려한 문장과 사이사이 삽입되어 있는 많은 한시(漢詩)가 있고, 스토리가 탄탄한 소설이다. 그러면서도 안평대군 시절 대군의 화려한 생활상과 경직된 상하 남녀의 사회적 제약을 보여주고 있고 그런 영화(英華)가 또한 덧없음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작자는 미상인데 아마도 공부는 벼슬을 해도 열 번은 더 했을 어느 양반이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하고 뜻은 펼 길이 없으니 하릴없이 구상하고 써 내려간 소설일 것이다. 


이 스토리가 인기가 좋아 규방의 여성들도 스토리를 알게 되었는데 이들을 위해 상업적으로 한글판도 나타났으니 조선은 바야흐로 연애 소설, 영웅 소설의 전성시대로 접어들었다. 글 모르는 이들이나 재미있는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 청중들을 위하여 나중에는 ‘전기수(傳奇叟)’라 하여 이야기책을 직업적으로 배우 연기하듯 읽어주는 이른바 ‘책 읽어주는 남자’도 나타났다. 무성영화가 나오면서 나타난 변사(辯士)는 이들의 후신이라 할 만하다. 


또 근세에는 육전소설(六錢小說)이라 하여 단돈 6푼만 내면 사 볼 수 있는 딱지본(딱지만한 사이즈 문고판) 책도 나타나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올렸으니  우리 한국인은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었다.

  

스토리텔링에 목말라했던 한국인


지금도 생각해 보면 할머니들이 해 주시던 옛날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큰 누나가 창작해서 들려주던 앞뒤도 안 맞는 이야기는 또 얼마나 재미 있었고. 듣고 듣고 몇 번을 들어도 또 재미있어 누나를 졸랐던 기억이 난다. 

 

수성동에서 바라 본 인왕산의 모습. 산과 숲이 잘 어우러져 청량감을 준다. 사진 = 이한성 교수

그때 들었던, 비오는 날 소복을 입고 댕댕댕 괘종시계가 자정을 알리면 망우리 고개에서 택시를 탔던 처녀 귀신은 집은 잘 찾아 갔는지? 엄마 찾아 낯선 땅을 헤매서 어린 내 눈물을 자아냈던 복남이는 엄마를 찾아 갔는지 아직도 걱정이 된다. 


각설하고, 운영전은 이렇게 시작한다.


壽聖宮 則安平大君舊宅也. 在長安西城仁王山之下, 山川秀麗 龍盤虎踞 社稷在其南 景福在其東. 仁王一脈 逶迤而下 臨宮阧起 雖不高峻 而登臨俯覽 則通衢市廛 滿城第宅 碁布星羅 歷歷可指 宛若絲列分派 東望則宮闕縹緲 複道橫空 雲煙積翠 朝暮獻態 眞所謂絶勝之地也. 一時酒徒射伴 歌兒笛童 騷人墨客 三春花柳之節 九秋楓菊之時 則無日不遊於其上 吟風咏月 嘯翫忘歸.

 

수성궁은 안평대군의 옛집이다. 한양의 서성 인왕산 아래 있는데 산천은 수려하여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것 같았다. 사직단은 그 남쪽에 있고 경복궁은 그 동쪽에 있다. 인왕산 한 줄기가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수성궁에 이르러 우뚝해졌는데 비록 높지는 않지만 올라가 내려다보면 사방으로 툭 트여 상점들과 성 가득한 집들이 바둑판처럼 펼쳐 있고 별처럼 널려 있어 역력히 가리킬 수 있고, 마치 실가닥 갈라진 듯 완연하였다. 동쪽을 바라보면 궁궐이 아득한데 다시 길은 허공에 가로 방향으로 비껴 있고 구름과 이내는 푸르게 쌓여 아침저녁으로 모습을 드러내니 이른바 참으로 절승의 땅이었다. 당대의 술꾼, 활꾼, 노래하는 이, 피리 부는 이, 시인 묵객들은 삼춘 꽃피는 봄날, 구추 단풍드는 가을에는 그 위에서 놀지 않는 날이 없었고 음풍영월 즐기느라 돌아갈 줄 몰랐다.

 

기린교의 절벽 면. 사진 = 이한성 교수
복원되기 전 기린교의 다른 모습(자료사진).

수성궁 입지를 알려주는 ‘운영전’  


이렇게 시작하는 운영전은 문장 흐름이 도도하다. 수성동(水聲洞)에 있던 비해당을 절묘하게도 수성궁(壽聖宮)이라 하여 궁(宮)으로 칭하면서 이야기의 바탕을 단단히 한다. 궁(宮)이란 임금이 거처하는 경복궁, 경희궁처럼 법궁(法宮)이나 이궁(離宮)은 물론 왕족의 집이나 왕가의 죽은 이를 모시는 재실도 궁(宮)이라 했으니 수성궁이라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비해당을 어느 누구도 비해궁이나 수성궁이라 부르지 않았으니 이는 순전히 작자의 창작물이다. 


그런데 이 글에는 비해당 즉 수성궁의 입지에 대한 중요한 힌트가 있다. ‘인왕산 한 줄기가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수성궁에 이르러 우뚝해(仁王一脈 逶迤而下 臨宮阧起)’졌다는 것이다. 이곳은 ‘비록 높지는 않지만(雖不高峻)’ 여기에 올라 내려다보면 사방이 툭 트여 경복궁도 보이고 아랫마을의 길과 상점들이 바둑판이나 별들이 펼쳐져 있는 듯 모두 역력히 짚어낼 수 있을(歷歷可指) 정도였다는 것이다. 적어도 비해당은 지금 공원 안 정자가 있는 계곡 근처에 지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기린교가 있는 수성동 계곡 좌우 능선, 즉 언커크 능선이나 어린이집 뒤 누각골 능선이나 능선 기슭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옛 지도를 보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기린교 주변만이 수성동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아래쪽까지도 수성동(水聲洞)이라 지칭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비해당은 기린교보다 아래쪽 능선을 포함한 곳에 있지는 않았을까? 굳이 조선 초 빈 골짜기 끝까지 올라가 집을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 손가락으로 일일이 아랫마을 가게나 집들을 짚어낼 수 있었다면 “시내 쪽에서 그다지 먼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때는 1601년 춘삼월 16일(萬曆辛丑春三月旣望), 선조 임금 34년, 청파사인(靑坡士人) 유영(柳泳)이라는 이가 남루한 의상에 탁주 한 병 사들고(沽得濁酒一壺) 소문만 듣던 수성궁 옛터로 찾아든다. 청파사인(靑坡士人)이란 말은 용산방 청파계(靑坡契)에 사는 벼슬 못한 선비란 의미일 것인데, 한편으로는 변두리 푸른 언덕에 사는 그저그런 사람을 이르는 말일 수도 있다. 청파거사(靑坡居士)라 하면 편할 것인데 작가가 구지 사인(士人)이라 한 것을 보면 이 작가는 유학을 숭상하는 공자님의 제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스토리는 사랑을 끝내 잊지 못하는 귀신의 러브 스토리이며 분위기는 다분히 괴기스럽고 신선(神仙)적이며, 사후세계는 부처님 전을 찾아가 ‘비나이다’로 전념하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 선비들의 규범으로서의 생각과 삶 속에서의 생각은 어떠했는지를 단편적으로 읽을 수 있다.  


또한 주인공 운영 낭자와 김 진사의 사랑 이야기를 전하는 스토리텔러 역을 맡은 선비 유영(柳泳)이라는 이름도 곰곰 살펴보면 참 재미가 있다. 버들(柳)이 하늘하늘 헤엄치듯(泳) 한다니….


임진란 후 책임지는 이는 없고 정치는 무력해서 백성은 살기 힘들고 글 읽는 이들 벼슬길은 막히듯 했으니 가난하고 희망 없는 그들이 사는 방법이 무엇 있었겠는가?


버들 가지처럼 하늘하늘 날리고, 물고기 헤엄치듯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 그런 것들을 이름 하나에 담았음이 보여진다. 현실로 돌아와 어제 오늘의 우리나라도 인구는 감소하고 청년 백수는 늘어가면 끝내 Hey Young(泳)! 이렇게 인사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날까 쓸데없는 걱정도 해 본다. 


다시 운영전으로 돌아와, 유영은 사람 발길 뜸한 서쪽 정원으로 들어가 소동파 시구 한 수 읊으며 사가지고 온 술을 거나하게 마신다.

 

我上朝元春半老 (아상조원춘반로)
滿地落花無人掃 (만지낙화무인소)
조원각에 올라 보니 봄은 반은 지나갔고
마당 가득 꽃은 졌는데 쓰는 이는 없구나

 

이렇게 흥에 취해 바위를 베고 누었는데 잠시 지났을까 술 깨어 살펴보니 사람 자취는 벌써 없고 동산에 달은 둥실 떠 있었더라. 이때 어디선가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뭔 일이지? 다가가니 한 소년과 절세의 미인(絶世靑蛾)이 마주 앉아 있다가 유영을 맞이한다. 이렇게 김 진사와 운영 낭자, 그리고 안평대군을 모시던 10 궁녀 중 녹주(綠珠), 송옥(宋玉)을 만나게 된다. 안평대군은 10 궁녀에게 시문과 음악을 가르치며 경쟁도 붙여 경지에 이르게 한다.

 

멋의 극치를 추구한 안평대군도 실수를…


예술과 사치의 극치를 이루고자 하는 대군의 품성을 고스란히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이 혹시라도 한 눈을 팔까 보아 특히 혹시라도 밖에 남자들에게 관심이라도 보일까 봐 눈길을 떼지 않는다. 그 와중에 터진 일이 김 진사와 운영의 러브스토리다. 


다시 유영에게로 돌아오면, 어찌 이런 모임에 술이 빠질 수 있겠는가. 그 귀한 유리 술병에 유리 잔, 술은 자하주(紫霞酒)에 안주는 인간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진귀한 것들로 채워진다. 또 미인들은 품격 있는 노래로 분위기를 그윽하게 하는데….

 

重重深處別故人 (중중심처별고인)
天緣無盡見無因 (천연무진견무인)
깊고 깊은 심처에 고운님을 여의옵고
하늘의 인연 끝없는데 만날 길 전혀 없네

 

대군의 권하(眷下)에서 살아야 하는 그녀들의 처연한 마음이 배여 있는 내용들이다. 작가는 그녀들의 입을 통해 인간 세상에 태어난 남녀는 짝을 찾아 정을 나누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하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만나 운영과 김 진사의 사랑 이야기를 듣게 된다. 시문에 뛰어난 김 진사는 연소한 나이에 대군에게 그 능력을 인정받아 대군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는데 어느 날 대군 앞에서 김 진사가 시를 짓던 날 이 자리에서 먹을 갈던(奉硯) 운영은 그만 김 진사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김 진사 역시 운영을 돌아보며 미소를 머금고 눈길을 그칠 줄 몰랐으니 이날 한눈에 둘은 눈이 맞아 버린 것이다.


(妾以少年女子 一見郎君 魂迷意闌 郎君亦顧妾而含笑 頻頻送目)


대군이 연소하고 반듯한 김 진사에 대해 방심하여 손님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했던 궁인들을 자유롭게 와서 노래도 부르고 먹도 갈게 했다가 사람 마음을 미처 몰랐던 대군의 실수라면 실수였다. 궁인들은 대군의 여자이니 대군의 입장으로 보면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그 뒤로 운영은 잠도 잘 들지 못하고 잘 먹지도 못하는 사랑병이 깊어졌다(寢不能寐 食減心煩).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김 진사가 오는 날 문틈으로 훔쳐보는(每從門隙而窺之) 방법밖에 없었는데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운영은 벽에 구멍을 뚫어 러브레터를 전달한다(穴壁作孔而窺之… 從穴投之). 이 소설을 읽으면 억눌려 살았던 조선 낭자들의 절규가 한 방에 터져 나오는 것 같은 시원함을 느낀다. 사랑 앞에 조선의 규수인들 어찌 상사병만 앓다가 죽을 수 있겠는가? 현실 속에서 할 수 없었던 일을 이야기 속에서 감행토록 하는 작가들의 본능 발산을 보게 된다. 

 

갇힌 가운데 사랑 찾던 옛 여인들


김시습의 금오신화(金鰲新話)를 구성하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나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속 여인들, 나말여초의 이야기인 최치원과 무덤 속 자매를 보면, 비록 이승을 떠나 혼령만 남은 그녀들도 적극적으로 사랑을 찾아 구애 활동을 벌인다.


운영전은 안평대군을 통해 조선 시대 양반들이 점했던 여성 독과점 현상의 모순도 보여 주고, 통제의 대상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억누르고 살아야 했던, 소유 당했던 여자들의 열망도 보여 준다.


그럼 러브레터를 받은 김 진사는 어떻게 했을까? 귀공자 타입의 김 진사였건만 그도 사랑 앞에는 과감했다. 수성궁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바로 무녀였다. 김 진사는 조선 시대 선비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감행한다. 은밀히 무녀의 집을 찾아간다. 그런데 인물 좋고 인품 좋은 것도 문제였다. 30이 넘은 무녀 눈에 김 진사가 풋풋한 ‘아이돌’로 보인 것이다. 에구 망측해라. 결국은 역경을 뚫고 10궁녀가 삼청동 개울에 빨래 나오는 날 무녀의 집에서 두 사람은 만난다. 모두 자리를 피해 주었다. 아 얼마나 달콤한 시간이었을까?

 

수성동 언덕에서 본 서울 시내. ‘운영전’의 배경과는 많이 다르다. 사진 = 이한성 교수

그 뒤 이야기는 지난 호, <겸재 그림길 14>에 요약했듯이 이승에서는 슬프게 끝을 맺었고, 영혼의 세계로 돌아간 후에는 두 사람이 수성궁에 들러 얼굴 마주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짧게 소개하려 했던 운영전 이야기가 길어졌다. 비록 소설이지만 수성동에서 돌아보아야 할 것들, 안평대군의 귀공자적 삶, 억눌린 여성들, 그리고 이루고자 하는 일에 대한 순수함과 정열, 어느 세상에나 있는 사특한 인간상…. 이런 것들이 살아 있는 옛이야기이다 보니 마음을 빼앗겼다. 내년 춘삼월 기망(旣望: 음력 3월 16일)에는 나도 술 한 병 사들고 수성동에 올라야겠다. 혹시 인연 닿으면 운영 낭자와 김 진사를 만나려나.

 

옥류동 계곡을 가르는 능선 위에 자리 잡은 해맞이 공원에 올라 기린교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아쉬움을 남기고 이제 수성동을 떠나 인왕산 자락길로 접어들어야겠다. 안평대군이 이곳 수성동에서 꿈꾼 무릉도원 이야기는 이곳 수성동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으니 무계동에 가서 시작하려 한다. 남아 있는 옥인시범아파트 위로 오르면 자락길이 이어지면서 해맞이 동산에 닿는다. 수성동 계곡과 청휘각이 있던 옥류동 계곡을 가르는 능선(언커크 능선, 송석원 능선) 위에 자리 잡은 주민들 쉼터이자 체육시설이 있다. 여기에서 기린교가 있는 수성동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가련다.  

 

저 기린교가 과연 그 기린교인가


겸재 그림 속에 그려진 저 다리, 지금 수성동 공원 안에 제 모습을 찾은 저 다리가 과연 기린교(麒麟橋)가 맞는 것일까? 필자도 이 연재물을 쓰면서 기린교라 했고 거의 온갖 자료들이 기린교라 하는 저 다리가 정말 기린교인가?

 

겸재 그림 속의 기린교.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설치된 다리임을 알 수 있다.

궁금하여 지나간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2009년 9월 14일자 신문과 방송에는 일제히 기쁜 기사가 떠올랐다. 옥인시범아파트 단지 내에는 그 동안 없어진 것으로 여기던 기린교가 원형 그대로 비록 시멘트 아래이지만 제 모습을 지닌채 보전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그 근거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제택조(第宅)라 하여 효령대군의 집을 설명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 인왕산(仁王山) 기슭, 넓은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으니 바로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의 호)의 옛 집터이다. 시내가 흐르고 바위가 있는 경치 좋은 곳이 있어서 여름철에 노닐고 구경할 만하고,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麒麟橋)라 한다.” 이후로 이 내용은 무수히 많은 자료들에 인용되고 있다.


원문은 무어라 쓰여 있을까?  궁금하여 책꽂이에서 동국여지승람을 꺼내 찾아보았다. 어? 아무리 찾아도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 내용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내용은 동국여지비고에 실려 있는 내용이었다. 동국여지승람의 최종판은 1530년(중종 25년) 국가에서 발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다. 적어도 여기에는 기린교에 대한 기록이 없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는 아쉽게도 저작자 미상, 발행년도 미상, 기록한 내용 출전이 불분명하다. 반계수록 내용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1770년 이후 발행된 것으로 보인다. 경조(京兆, 사대문 안)과 한성부(성 밖 십리)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한양도성도’ 속의 기린교 위치를 형광 마커로 표시해봤다.

또 하나 이때 기사와 관련하여 언급된 자료가 있는데 졸고 13회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1994년 간행된 ‘서울 육백년’에 실려 있는 김영상 선생의 사진이다.


‘수성동에 걸려 있던 돌다리’란 설명과 함께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 ‘걸려 있던’이라고 과거형을 쓴 이유는 선생은 이 지역이 개발되면서 이 다리가 이미 철거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진이 중요한 이유는 사진에 나타난 실물과 기린교란 이름을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진을 보면 필자에게는 의문이 생긴다.  다리의 모양은 현재 수성동에 걸려 있는 다리 같은데 어린이가 앉아 있는 곳의 지형이  다르다는 점이다. 겸재의 그림에서나, 현재의 위치에서나, 1994년 보도자료에서나 다리는 모두 깎아 세운 것 같은 절벽을 잇고 있는데 아이가 앉아 있는 곳은 편안한 흙길이며 현재의 뒤쪽 바위 모습은 찾기가 어렵다. 어찌된 것일까? 흙이 덮여 있었던 것일까? 위치가 옮겨진 것인가? 아니면 두 개 돌 기둥으로 만든 기린교가 다른 위치에 또 있었던 것일까?

 

현재의 기린교 모습. 김영상 사진 속의 기린교와는 주변 환경이 많이 다른 듯하다. 사진 = 이한성 교수
김영상이 촬영한 ‘서울 600년’ 속의 기린교 모습. 

전문가들의 고증 노력을 기대하며


기린교가 기록된 자료가 또 하나 있다. 1770년 영조 46년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리움 소장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다. 사진 자료에 표시한 위치에 기린교라 쓰여 있다. 정밀 지도가 아니니 잘 알 수는 없지만 수성동 물길과 누각동 물길이 갈라지는 지점 가까운 쪽에 그려져 있다. 지도대로라면 박노수 미술관 좀 위쪽에 그려져 있는 셈이다.


겸재 정선의 수성동 그림에 있는 다리는 현재 다리가 있는 위치인 것 같고, 공원 조성 전 옥인시범아파트 당시 다리 위치는 현재와 같으니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또 달리 기린교(麒麟橋)를 언급한 자료는 필자의 개인적 한계로는 찾지 못했는데 송석원 시사 멤버들의 시에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장혼의 ‘이이엄집’에는 주기린교(週麒麟橋: 기린교를 돌다), 중양일등기린교(重陽日登麒麟橋: 중양절에 기린교에 오르다)가 보이고, 박윤묵의 ‘존재집’에도 서산기린교청수성(西山麒麟橋聽水聲: 인왕산 기린교에서 물소리를 듣다)이 언급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필자가 만난 기린교는 영조 시대 후반 즉, 1700년대 후반부터 1800년대에 머물러 있다. 그 이전에는 다리가 없었는지? 아니면 있었는데 이름이 없었는지? 그도 아니면 다리도 있고 이름도 있었는데 자료를 찾지 못한 것인지 궁금하다. 비해당 48영에는 주변 아름다운 것 48개를 꼽았는데 왜 기린교는 없는지? 운영전에도 기린교 한 마디 있으면 좋으련만 없는 것이 아쉽다. 기린교? 겸재 그림에 있는 다리, 현재 수성동 공원에 있는 다리가 정확히 기린교였으면 좋겠다. 전문가의 연구를 거쳐 문화재로 등재될 날을 기다려 본다.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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