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기술탈취’에 무너지는 스타트업 생태계… 중기부, 규제 강화한다지만

스타트업 “현실적 지원 필요" vs 대기업 “스타트업과 상생 원해”

김수식 기자 2018.11.05 10:17:02

서오텔레콤이 특허심판원의 판정에 대한 공익감사청구서를 제출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탈취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여전히 중소기업 기술 탈취 피해 사례는 늘고 있지만 속 시원한 대책이 나오고 있지 않아 중소기업은 물론, 스타트업, 벤처기업은 좋은 기술을 가지고도 성장동력에 제동이 걸린다. 이들을 달래고자 여러 규제안이 나오고 있지만 업계는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보는 분위기다.

 

성장하는 중소기업 짓밟는 ‘대기업 기술 탈취’

 

지난 10월 15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의 공정거래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김성수 서오텔레콤 대표는 “LG가 중견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우리 회사의 기회를 박탈했다”고 성토했다.

 

서오텔레콤은 2002년경 LG의 요청으로 2회에 걸쳐 LG그룹을 방문, 자사의 특허기술을 설명하고 관련 자료를 참석자들에게 전달했는데, 1년이 지나 LG가 서오텔레콤에서 제공한 기술과 동일한 ‘알라딘 폰’을 출시한 것을 TV광고로 알게 됐다는 것.

 

기술탈취를 알게 된 김 대표는 특허심판원에 이를 밝혔지만 억울함만 쌓였다. 그는 “LG는 특허심판원의 쌍방 대질 기술설명회(2015년 1월 7일)에서 특허침해 사실을 숨기려고 제품 기능을 조작해 시연했다”며 “이는 심판관들에게 발각돼 자백까지 받았지만 특허심판원은 사건을 덮었다”고 말했다.

 

이어 “위법 판정에 대해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감사원에 공익감사청구를 했으나 묵살됐다”고 토로했다.

 

김성수 서오텔레콤 대표가 국정감사에서  LG의 '알라딘 폰'은 서오텔레콤의 기술을 탈취해 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 연합뉴스

이처럼 기술설명회를 악용해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탈취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갑을관계를 기반으로 하청업체의 기술을 탈취하는 사례도 있다.

 

지난 2015년 두산인프라코어는 납품업체인 ‘이노코퍼레이션’에 공기압축기 납품 가격의 18% 인하를 요구했다. 이노코퍼레이션이 이를 거부하자 두산인프라코어는 제품 도면을 다른 업체에 넘겨 기술을 탈취했다. 도면을 넘겨받은 업체가 납품을 시작하자 두산인프라코어는 이노코퍼레이션과의 거래를 단절했다.

 

두산인프라코어의 기술탈취는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공정위 조사 결과, 두산인프라코어는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동안 30개 하도급업체들을 대상으로 ‘승인도’라는 이름으로 부품 제조에 관한 기술 자료를 서면 요구 없이 382건을 임의로 제출받아 보관한 것으로 드러났다.

 

현행법 상 원사업자는 하도급 업체에 ▲요구 목적 ▲비밀 유지 방법 ▲권리귀속관계 등이 명시된 서면 자료를 남기고 자료가 오가야 하는데 두산인프라코어는 이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중기부 "기술탈취하면 추정 가치의 10배 배상 물을 것"

 

송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받은 실태조사 보고서를 살펴보면 지난 6년 간 중소기업의 기술유출 피해 건수는 총 701건, 금액은 9566억 원에 달한다. 하지만 기술 유출 발생 뒤 대기업을 고발, 수사 의뢰,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는 19.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치를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유출의 입증이 어려워서’다. 무려 66.6%의 피해자들이 이에 해당했다. 중소기업이 기술탈취를 입증하려면 자사의 기술 자료와 대기업이 제조하는 물폼의 제조 기술이 동일한지 증명해야 하지만 기술탈취를 한 대기업의 계열사끼리만 유통되는 기술탈취 물품을 입수할 수 없어 손해배상 청구의 기초가 되는 금액 산정 등을 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송갑석 의원은 “기술탈취 증거 입증을 중소기업에만 책임지게 하는 현행 소송 방식으로는 대기업의 기술탈취를 막기 어렵다”며 “증거 입증 책임을 완화하기 위해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요구한 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있는 제도와 공인된 기관을 활용해 피해 금액을 명확히 산정하고 법적 증거로 활용할 수 있는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기업의 기술탈취 근절을 위해서는 갑질을 행한 정부와 공공기관에도 그와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한 간담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 중소벤처기업부

중소벤처기업부는 지난 9월 5일 ‘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 태스크포스(TF) 2차 회의’를 열고, 범부처 차원의 기술탈취 근절 대책 마련 진행 상황을 논의한 바 있다.

 

TF는 하도급 관계가 아니라도 대기업, 부처, 공공기관이 중소기업 기술을 탈취하면 추정 가치의 10배를 배상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하고, 입증책임 전환을 위해 올해 안에 부처별 기술보호 관련 벌률 개정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또 대기업과 협력사 간 전자 시스템이 기술탈취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위험성을 검토하고 실태 점검에 나설 방침이다.

 

홍종학 중기부 장관은 “기술탈취는 민간 벤처시장을 교란하고 기술 기업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문제가 있다”며 “관계부처의 협조 아래 비밀유지협약서 체결 의무화 등 해결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스타트업에 손 내미는 대기업… 망설이는 스타트업

 

업계의 이런 흐름에 대기업들은 좌불안석이다. 대기업들은 최근 개방형 혁신(오픈 이노베이션)을 앞세워 스타트업 육성을 위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데 현 상황이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삼성, LG, SK 등 국내 주요 그룹은 최근 스타트업과 상생을 통한 개방형 혁신에 적극 나서고 있다.

삼성은 임직원을 대상으로 했던 사내 벤처 프로그램 C랩을 사외 스타트업까지 확대하기로 결정했으며, SK텔레콤은 ‘트루 이노베이션’이라는 브랜드로 오픈 콜라보 센터를 열고 자율주행 등 5G 관련 10개 분야의 스타트업을 지원 중이다.

 

또 LG는 한국무역협회와 함께 공동으로 지난 22일 마곡 LG사이언스파크에서 ‘스타트업 테크 페어’를 열고, 참가한 스타트업 중 선정해 LG사이어스파크 내 개방형 사무실 및 연구 공간을 제공하고, 기술 컨설팅, 투자 등을 지원할 계획이다.

 

스타트업 기업들은 대기업의 이런 움직임을 기술력과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있다. 대기업이 가진 경험을 바탕으로 상생할 수 있는 부분이 크다는 점도 인정하는 분위기다. 다만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서울대 공동연구소에 위치한 C랩 라운지에서 C랩 과제원들이 아이디어를 교류하고 있다. 사진 = 삼성전자

스타트업 관계자는 “중소기업 기술탈취 등의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정부가 관련 규제를 내놓겠다지만 얼마나 실현 가능할지 의문이다”라며 “스타트업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자금지원 등을 넘어 해외 제품·서비스 수출을 함께 하거나, 인수합병(M&A)을 하는 등 현실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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