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21) 동소문~동대문 ②] 고종 때도 ‘국정농단 무당’ 있었으니 나라 망하려면…

이한성 동국대 교수 기자 2018.12.03 10:12:10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나라의 중요 기관으로 자리를 확고히 했던 흥덕사(興德寺)가 어려움에 처하기 시작한 것은 유학(儒學)이 강조되기 시작하는 성종 때부터였다. 중신들은 유학으로 무장하기 시작했고 공맹(孔孟)과 주자(朱子)의 가르침이 아닌 것은 모두 이단(異端)으로 몰아가기 시작하던 때였다.

사실 이단(異端)이란 개념은 논어 위정편에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에서 나온 말이다. 해석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학문을 하는 데 “이상한 극단을 파고드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라는 평범한 공자의 말씀이었다. 이 말이 맹자와 정주(程朱; 정호, 정이, 주자)를 거치면서 척결해야 할 대상인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둔갑해 자신과 생각이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하는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성종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강력한 왕권에다 불교를 숭상한 세조 때까지는 납작 엎드려 있던 유생들이 예종(睿宗) 때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성종 때 쯤 이르면 임금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성종은 대비전의 세 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폐허처럼 남아 있던 수강궁 수리를 시작한다. 수강궁(壽康宮)은, 본래 1418년 왕위에 오른 세종이 생존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특별한 용도 없이 방치하다 보니 궁은 퇴락할 대로 퇴락해 있었다. 수리를 마친 수강궁은 창경궁(昌慶宮)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러다 보니 창경궁의 동쪽으로는 성균관과 흥덕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데올로기 승하면서 임금 말꼬리 잡히고, 절은 불타고

1489년(성종 20년) 초여름 성종은 말한다. “풍수설을 안 믿으면 모를까 건국 초부터 풍수를 믿어 왔는데 흥덕사 북쪽 고갯길은 창경궁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길이다. 이 길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 길이 패여 지기가 쇠해질 것이니 이 길을 폐쇄하도록” 지시를 내린다. 그랬더니 신료들이 들고 일어났다. 백성이 불편하니 안 된다는 이유가 아니었다. 임금은 불교 신자냐? 왜 절을 보호하느냐? 백성들이 모두 오해한다 등등 임금이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들은 떼거지로 임금에게 조목조목 반박을 해 대었다. 실록을 읽으면서 필자도 질린다. 아니 대신이라는 이들이 이렇게도 할 일이 없단 말인가? 임금이 불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은 막무가내로 몰아붙인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허계(許誡) 등이 와서 아뢰기를,

“신등의 전일 상소를 ‘여러 대신들에게 명하여 의논하도록 하겠다’ 하시고는 오래도록 회보(回報)가 없으니, 그 사유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승지 등이 조율(照律)할 때 오지 않아서이다. 오게 되면 마땅히 지시하겠다.”

하니, 허계(許誡) 등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부처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신 등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흥덕사 북쪽은 길을 개통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만약 궁궐을 범했다면 응당 수강궁(壽康宮)을 지을 때나 창경궁(昌慶宮)을 수리할 때에 어찌하여 막지 않았겠습니까? 이번에 유생들의 왕래로 인하여 막으라는 명을 내리시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성상의 뜻을 모르고 ‘성상께서 불교에 조금이라도 뜻을 두신다’고 할까 봐 신 등은 두렵습니다. 또 이곳을 외청룡(外靑龍)이라고 한다면 이현(梨峴)은 당연히 내청룡(內靑龍)이 될 것인즉, 만약 풍수설을 채택한다고 하면 마땅히 이현을 먼저 막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현은 버려두고 이 길을 막은 일은 사관(史官)이 사책(史策)에 쓰게 된다면, 후세 사람들이 어찌 전하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弘文館副提學許誡等來啓曰: “臣等前日上疏, 命議于諸相, 而久不報, 未知其由.” 傳曰: “承旨等照律, 時未來, 來則當有指揮耳.” 誡等啓曰: “上不好佛, 臣等固知之. 但興德寺北開路已久, 若有犯於宮闕, 則當初壽康宮之作, 昌慶宮之修, 何不塞之乎? 今因儒生往來, 乃命塞之, 臣等恐愚惑之民, 不識聖意, 以爲少留意於佛敎云爾. 且以此爲外靑龍, 則梨峴當爲內靑龍, 若用風水之說, 則當先塞梨峴矣. 今乃舍梨峴而塞此路, 若史氏書諸策, 則後世安知殿下之心哉?)


말꼬리 잡는 데는 조선의 신료들을 누가 당하랴? 이현(梨峴: 배오개)은 종로통 옆 큰 길인데 그곳을 마땅히 먼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임금을 몰아붙이고 있다. 이런 작태에 질려버린 성종은 드디어 그 꼬리를 끊어낸다.

“그대들은 이미 내가 부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어찌 말이 이와 같은가? 오늘 비가 와서 술을 마실 만하니, 물러들 가라.”

(爾等旣知予之不好佛敎, 何言之若此耶? 今日雨, 可飮酒而去)


성종, 멋진 답을 내었다. 그들의 이 같은 말꼬리 잡기는 혹시라도 임금이 불교에 우호적일까 하여 미리 단단히 못을 박는 데 있었다. 흥덕사는 경치가 아름다운 승경지이다 보니 유생들이나 백성들이 자주 와서 놀던 곳이었다. 이 유생들 중에는 이곳에 와서 패악을 저지르는 자들도 있었다. 성균관 생도들도 공부는 놓아두고 슬그머니 땡땡이를 쳐 바로 옆 구역인 흥덕사에 북쪽 산길을 거쳐 놀러 오는 일도 있었다. 성종은 좌청룡 길도 보호할 겸 이런 땡땡이꾼 생도들 출입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유학자인 신료들에게는 북쪽 길을 막는 것이 절은 보호하고 유생들이나 성균관 생도들은 제약하는 것으로 보여 심사가 틀어졌는지 이처럼 말꼬리를 잡아 몽니를 부렸던 것이다.

아름다운 흥덕사에 유생들은 놀러 가면서…

흥덕사,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던 듯하다. 세종대부터 성종 대까지 활동했던 이승소(李承召) 선생의 ‘삼탄집’에는 흥덕사에 가서 놀며 읊은 시들이 있다. 그 중 한 편을 읽는다.

연꽃 蓮
우연히 발길 닿은 절, 연봉오리 벌렸는데 偶到茄藍菡萏開
맑은 향 그윽하게 산기슭에 가득하네 淸香馥馥滿山隈
살짝 바람 불자 녹색 물결 찰랑이고 波搖鴨綠輕風動
소나기 내리니 잎엔 진주 흘러내리네 葉瀉蠙珠驟雨來
천년 후 기녀방에 꿈을 깨어나서 夢覺靑樓千載後
그 누가 고운 단장 한 번이라도 오게 할까? 誰敎紅粉一時回
만약 기녀들이 뱃가를 두르게 한다면 若能解語船邊繞
무정한 남정네 목석같은 마음도 필히 빼앗기리 定奪吳兒木石懷

흥덕사 못 연꽃은 장안에서 유명했다 하는데, 삼탄 선생도 이곳에 와서 연꽃 구경에 빠졌던 듯하다. 그런데 예쁜 연꽃을 보고 선생은 해어화(解語花: 말귀를 알아듣는 꽃이니 기녀를 예쁘게 부른 말이다)를 뱃전에 앉히고 싶어 한다. 풍류에는 역시나 사람 꽃이 있어야 했던 모양이다.

 

서울도성 지도에 표시한 답사길. 

이러 하던 흥덕사도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연산군일기 1504년(연산 10년) 12월 조에 의하면, “흥천사(興天寺)에 불이 났다. 전년에 불난 흥덕사(興德寺)와 흥천사가 모두 도성 안에 있어 양종(兩宗)이라 칭하였는데, 1년이 못 되어 모두 불탔다(興天寺災. 前歲興德寺災, 與興天寺俱在都城中, 稱兩宗, 未周歲皆災)”. 얼마 뒤 양주에 있는 대찰 화암사도 원인 모를 화재로 소실되었다. 왜 이렇게 대찰들이 비슷한 시기에 불탄 것일까? 물증은 없으나 심증은 있다.

명종실록 21년(1566년) 4월 20일자 기록을 보면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欲焚蕩檜巖)’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1503년(연산군 9년)에 불탄 흥덕사는 이듬해 7월 영영 사라지게 된다. 불탄 자리에 그나마 근근이 향불을 이어가던 흥덕사에 임금의 어명이 떨어졌다. “흥덕사(興德寺)를 원각사(圓覺寺)로 옮겨라(移興德寺於圓覺寺)”. 이렇게 흥덕사는 자취 없이 사라졌고 한성부 북쪽 대부분이 출입금지가 되는 금표(禁表) 속에 포함되었다.
 

구한말 구식군대와 별기군의 모습. 자료사진. 

고종이 기댄 북관묘가 세워진 흥덕사 자리

흥덕사 자리가 다시 역사의 표면으로 떠오른 것은 조선말 고종 때였다.

바로 이 자리에 관운장을 모시는 북관묘(北關廟)가 세워진 것이다. 그 내력을 찾아가 보자. 조선 말 급격히 변해가는 대외정세에 위협을 느낀 조선 정부는 신식 군대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식 군대는 차별을 받게 되고 13개월이나 월급이 밀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월급으로 곡물이 지급되었는데 태반이 썩은 데다가 양을 불리느라고 모래를 섞었으니 구식 군대원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정부의 태도는 시정함 없이 냉랭했으니 급기야는 폭발하는 분노가 군란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1882년 발발한 임오군란(壬午軍亂)이었다.

이때 정치 세력은 민비를 비롯한 민씨 일가였는데 위협을 느낀 중전 민씨는 궁궐을 탈출해 장호원으로 피난하였다. 이 틈을 타서 흥선대원군이 권좌에 복귀하였는데 민비는 안전에 중대한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중국 청도(成都) 무후사(武侯祠)에 안치돼 있는 관운장의 모습. 사진 = 이한성 교수
제갈량 상. 서울도성 길 구간에 ‘와룡’ 즉 제갈량을 뜻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왜 이 구간에 와룡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궁금하다. 사진 = 이한성 교수

피난해 숨어 있던 중전 민씨는 일가 민응식의 소개로 ‘관운장의 딸’이라고 칭하며 관운장을 모신다는 한 무녀를 만나게 된다. 무녀는 민비가 환궁할 수 있겠다 하면서 그 날짜도 예언해 주었는데, 군란 수습을 한다는 명분으로 한양에 출병한 청나라 군대가 대원군을 납치해 중국 천진으로 압송해 버린다. 드디어 다시 중전 민씨의 세상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무녀 이씨는 정확한 점괘를 낸 덕에 진령군(眞靈君)이라는 군호를 받았으며 이 진령군을 위해 고종은 내탕금을 내어 북관묘를 흥덕사 터에 세워주게 된다.

중전 민씨 못지않게 고종의 진령군에 대한 믿음은 컸다. 고종실록을 보면, 왕 20년(1883년) 9월 조에 “북묘(北廟)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친히 행할 것이니, 해당 부서는 그리 알고, 날짜는 다음 달 보름쯤으로 택하여 들이라(當詣北廟, 親行奠酌禮矣, 該房知悉. 日字來月望間擇入)”는 기록이 보인다.

고종 때의 농단 실세는 진령군

고종은 쇠해져 가는 국운을 관운장을 통해 일으키고 싶었나 보다. 이듬해(1884년)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에는 임금이 북관묘로 피신하였다. 다행히 정변은 수습되고 환궁한 후로는 더욱 진령군에 대한 믿음도 컸다.

이렇게 되니 진령군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 줄을 섰다. 벼슬을 얻으려는 자들로부터는 뇌물을 받고, 자신의 뜻대로 국사를 농단하고 전횡하는 세도를 부리기 시작했다. 북관묘에는 그녀의 눈도장을 받고자 온갖 뇌물을 가져온 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궁중에선 굿판을 벌여 불야성을 이루었고, 전국의 명소에는 진령군이 보낸 무당과 광대가 모여서 왕실의 번영과 세자의 무병장수를 비는 굿을 했다.

재정은 피폐해졌고, 조병식, 이유인, 이범진, 홍계훈 같은 고관들은 진령군과 의가족(義家族)을 맺으려는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졌다. 지난 대통령 시절 최OO라는 여자의 일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언론들은 “현대판 진령군이 나타났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니 충정어린 신하들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사간원 정언 안효제(安孝濟)는 1893년(고종30) 7월 관우(關羽)의 신녀(神女)라고 자처하는 요무(妖巫)가 왕후의 총애를 얻어 진령군(眞靈君)이라는 참란한 호칭을 받고 날마다 궁중에 출입하며 국정을 어지럽히니 이 요무를 참수하라고 상소문(請斬北廟妖女疏)을 올렸다가 유배되기도 했다.

또 한 분, 상소의 결정판은 종두법을 시행한 지석영 선생이었다. 고종 31년 갑오(1894) 7월 기사에는,

전(前) 형조 참의 지석영(池錫永)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중략) 신이 온 나라의 만백성을 대신하여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정권을 전횡하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들을 착취하고 오직 자신을 살찌우고 윤택하게 함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핍박하여 소요를 초래하고 구원병을 불러 난리를 빚어냈으면서도 외국 군인들이 궁궐 안으로 침범해 들어오자 장차 먼저 도망하려 하였으니, 간신(奸臣) 민영준(閔泳駿)은 온 세상 백성들이 그의 살점을 먹고 싶어하는 자입니다. 신령스러움을 빙자하여 지존(至尊)을 현혹시키고 기도를 핑계로 국가의 재산을 축냈으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여 농간을 부리고 방백(方伯)과 내왕하며, 화복(禍福)으로 백성을 무함하고 총애로 세상에 방자하였으니, 요사스런 여자 이른바 진령군(眞靈君)은 온 세상 사람들이 그의 살점을 먹고 싶어하는 자입니다. 아, 저 일개 간신과 일개 요녀는 나라에 해독을 끼친 원흉이고 백성을 좀먹은 대악(大惡)입니다. 그런데 하나는 안치(安置)하고 하나는 죄를 따져 묻지 않으시어 마치 사랑하여 보호하듯 하셨으니, 백성의 원통함이 어떻게 풀릴 수 있겠습니까?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상방보검(尙方寶劍)을 내려 종가(鍾街)에서 이 두 죄인을 죽여 도성 문에 목을 매달도록 명하신다면 민심이 비로소 시원해질 것입니다.

(臣請代彼全國億兆之口而詳陳之. 專擅政柄, 壅蔽聰明, 刮剝生靈, 惟事肥潤, 迫民致擾, 招援釀亂, 外兵犯內, 爲將先逃, 奸臣閔泳駿, 而[乃]擧世人民欲食其肉者也. 憑藉神靈, 眩惑至尊, 稱托祈禱, 消融國財, 竊弄樞要, 出納方伯, 威福誣民, 榮寵傲世, 妖女, 所謂眞靈君, 而擧世人民之欲食其肉者也. 噫, 彼一奸一妖, 蠧國元惡, 蟊民大憝, 一則安置, 一則不問, 有若愛而護之, 民冤何解乎? 伏願殿下, 亟下尙方寶劍, 命于鍾街, 戮此二罪, 懸首都門, 則民心始快矣)

높은 지대에 우뚝 서 있는 현재의 혜화문. 사진 = 이한성 교수
혜화문의 옛 사진. 자료사진

‘국정농단 실세 없애라’ 상소 올렸다가 유배

이렇듯 강력한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의 분노를 사서 유배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런 일이 12년이나 이어진 후 김홍집 내각에 와서야 북관묘는 폐쇄되었다. 흥덕사와 북관묘가 있어 뜨거웠던 땅은 그 후 고요한 땅으로 돌아갔다.

그 땅에 이제는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 자리잡고 있다. 땅은 언제나 생명이 있어서 그 시대에 맞게 새 생명을 얻는다.

이제 골목길을 다시 오른다. 성균관로 17길이다. 100m나 올라 왔을까? 주택 사이 화강암 암벽에 ‘曾朱壁立(증주벽립)’이라고 쓴 각자가 확연하다. 이곳이 우암(宋時烈)의 서울집이 있던 곳이라서 우암이 새긴 글씨라 한다. 이 글씨는 제주 귤림서원이 있던 자리에도 있다. 우암이 잠시 귀양 갔던 땅이라 후에 우암을 서원에 배향하면서 판관 홍경섭이 서울에 있는 글씨의 탁본을 본으로 하여 새겼다 한다.
 

‘증자와 주자처럼 우뚝 서겠다’는 뜻을 밝힌 송시열의 옛 집터 글자. 사진 = 이한성 교수

증자와 주자가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그러면 이 글을 무슨 뜻일까? 직역하면 ‘증자(曾子)와 주자(朱子)처럼 벽 같이 우뚝 서다’라는 뜻일 것이다. 한 마디로 꺽이지 않는 강직한 지조를 보인 글이다. 도대체 증자와 주자가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우암은 자기 집 바위에 그 뜻을 새긴 것일까?

맹자 공손추 장을 보면, 증자는 일찍이 공자의 말을 인용해서 자양에게 말하기를, “스스로 돌아보아 바르지 못하다면 상대가 비록 보잘 것 없는 천한 사람이라도 어찌 그를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스스로 돌아보아 내가 의롭다면 상대가 비록 천 명, 만 명이라도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다(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不惴焉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 했다.또 주자는 “지금 나에게 화를 피하라 하는 것은 본래 서로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만 길 벽처럼 우뚝 선다면 나의 도가 빛나는 데 이롭지 않겠는가”(今爲避禍之說者 固出於相愛 然得某壁立萬仞 豈不益爲吾道之光)라 했다.

노론의 영수로서 남인의 채재공, 소론의 윤증과 첨예하게 각을 세우며 시대를 풍미했던 우암에게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우암의 또 다른 글씨로 여겨지는 글씨들이 옛 흥덕사 북측, 지금의 서울과학고 안 천재암(千載巖) 바위에도 새겨져 있다. 古今一般(고금일반: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구나), 詠磐(영반: 시를 읊는 바위)라 쓴 글씨다.

좁은 길목이라도 터준 땅 주인의 고마움

이제 골목을 벗어나 서울도성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 우암 각자에서 북쪽 방향이 서울도성인데 집들이 길을 가로막은 듯이 보인다. 그러나 골목길 끝까지 가보면 다세대 주택 담 옆으로 사람 하나 다닐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 좁은 길에 처음 화가 나려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분명 개인 소유의 땅일 것 같은데 집을 지으면서 주민 편의를 위해 작은 길이지만 일부러 열어 놓은 것 같다. 이 길이 없다면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 길인데 그 배려가 고맙다.

 

이른 봄에는 산당화 붉은 꽃이, 늦가을에는 단풍이 길을 메우는 아른다운 순성길. 사진 = 이한성 교수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니 순성길 말바위~와룡공원 구간을 거쳐 혜화문 방향으로 가는 성벽 길을 만난다. 와룡은 제갈량을 일컫는 이름인데 이곳이 왜 와룡공원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마침 늦가을 단풍이 길을 메운다. 이른 봄 이 길을 지나다 보면 성벽 아래 심은 산당화(山棠花: 명자나무) 붉은 꽃이 아름다운 길이다.

 

서울도성의 성벽이 학교 담장(맨 위), 교회 벽(가운데) 또는 빌라(맨 아래)의 초석이 됐으니, 후손으로서 참으로 송구스러울 뿐이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성벽 따라 내려가면 잠시 후 혜화동에서 성북동 넘어가는 고개를 만난다. 아마 성종이 막은 흥덕사 북쪽 길에 여기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 고갯마루에 있는 애들이 좋아하는 돈까스집은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로 붐빈다. 잠시 성벽이 끊어진 고갯마루를 지나 나아가면 경신학교 담장 아래에 깔려 무너진 서울도성이 신음하고 있다.

이 길은 주택가 골목으로 이어지는 순성길인데 서울 성벽은 개인집 축대도 되었다가, 교회의 진입로도 되었다가, 빌라의 높은 축대도 되었다가, 예전에는 서울시장 공관 축대도 되었었다. 무지하고 가난했던 시절 소중한 문화유산을 이렇게나 많이 훼손했었구나.

서울성벽의 동소문이었던 혜화문이 다른 성문들과는 달리 이처럼 높은 지대에 설치된 이유를 알면, 우리 민족의 침략 당한 역사를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복원된 혜화문 천정의 봉황 그림. 사진 = 이한성 교수

핑계 대며 서울도성 혜화문 없애버린 일제

이렇게 걸어 드디어 혜화문에 도착한다. 겸재의 동소문도에 보면 혜화문은 고개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불행히도 큰 길에서 쫓겨나 길옆 언덕바지에 있다. 본래 이 혜화문은 문루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영조 20년(1744) 어영청(御營廳)의 군사들이 왕명을 받들어 문루를 재건할 때까지 문루가 없었다.

겸재의 동소문도는 이 문루가 만들어지기 전 모습인 것이다. 그 후 일제는 1928년 도시계획을 빌미로 문루를 헐었고, 홍예만 남아 있던 문도 일제는 1936년 경성부 확장이라는 명분으로 철거해 혜화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가 젊었을 때 그곳에는 산을 깎아 만든 길만 있고 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행히 1994년 10월 서울 도성 복원 사업의 하나로 혜화문을 복원했는데 그것이 지금 만나는 혜화문이다. 아쉽게도 본래 자리가 아닌 길가 언덕 위에 있다.

 

겸재의 동소문도.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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