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17) 이동기] “고정된 의미를 담지 않지만 의미 발생은 중요하다”

대중문화가 들어가면 밝고 가볍다는 상식을 깨다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기자 2018.12.03 10:12:10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이동기의 작업을 논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키워드들은 대중문화, 정체성, 차용, 고급과 저급, 네오 팝(Neo-Pop) 등이다. 작가의 선택과 (재)창조로 대중문화의 이미지들이 예술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의도적으로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고, 대중문화를 작업의 소재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작가를 둘러싼 또 하나의 환경이었다. 자연스러운 삶의 반영이었을 뿐이다. 지난주 수요일, 미키 마우스(Mickey Mouse)가 내한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말 그대로 오래 된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성인이 된 지 오래지만 미키 마우스는 여전히 친숙하고 익숙한 존재다. 아토마우스(Atomaus)는 필자와 유사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그리고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사회를 반영하며 진화해왔다. 두 개의 캐릭터가 겹쳐지면서 직관적인 동시에 은유적인 메시지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대중문화의 이미지가 등장하는 작품들은 밝고 즐거운 내용만을 담아낼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이동기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그의 작업은 인간 삶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우리가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는 사회의 이면까지 파고든다.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 현대인의 실존, 실재와 가상(복제)에 이르기까지 내러티브는 끝나지 않는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강조되는 절충주의(eclecticism)적 회화에 이르면 이야기의 폭과 깊이는 더욱 확장된다. 그 맥락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정보의 과잉이라 여겨질 정도로 이미지들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편집하고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이동기는 ‘작품의 의미는 관객이 만든다’는 이야기를 자주 해왔다. 뜻을 전달하기에 가장 직접적이고 효율적이라 여겨지는 언어(말)로도 자신의 뜻을 완벽히 전달할 수 없는데, 상징들로 가득 찬 작품을 통해 작가의 메시지를 완벽히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화폭 위의 단어까지도 언어의 영역을 넘어서는 이미지이자 상징이다. 이미지와 이미지의 관계, 작품과 관객 사이의 관계가 더 중요해지는 이유다.

 

‘버블(Bubbles)’, acrylic on canvas, 130 x 180cm, 2017 ⓒLee Dongi / PIBI GALLERY

이동기 작가와의 대화
“내가 생각하는 의미 발생 방식, 영화 ‘숏 컷’과 비슷하다”


- 그동안 정말 많은 인터뷰를 했을 텐데 여태까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무엇인가? 혹시 너무 많이 받아 더 이상 받고 싶지 않은 질문이 있나?

딱히 받고 싶지 않은 질문은 없다. 가장 많이 받아온 질문 중 하나는 ‘당신이 팝 아트 작가인가? 당신의 작품이 팝 아트 맞나?’인 것 같다.

- 그런 질문에는 뭐라고 답을 해왔는가? 이동기는 1990년대 이후 한국 네오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다. 물론 오늘날은 한 작가의 작업을 특정한 사조나 장르로 한정짓지 않는다. 나 역시 ‘이동기 = 팝 아트’라는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팝적인 성격을 갖는 작업인 것은 분명하다.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개의치 않는다’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나의 작업을 단순히 팝 아트라는 단어로 규정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차라리 네오팝이라는 용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팝 아트라는 용어는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담는 것 같지만 일반적으로는 앤디 워홀(Andy Warhol)과 같은 작가가 중심이 되는 1960년대의 미술 사조를 뜻한다. 따라서 지금 현재 일어나는 상황을 팝 아트라고 정의하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또한 나의 작업에서 팝 아트적인 성격만 찾아내는 것은 지나치게 좁게 해석하는 것이다. 한두 개의 단어로 나의 작업을 범주화할 수는 없다. 카테고리를 정하고 분류하면 감상하기가 편해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기 작업의 의미를 한정짓는 것을 싫어한다.
 

작가 이동기. ⓒLee Dongi / PIBI GALLERY

- 이동기의 아토마우스는 한국의 현대 사회를 함축하는 매우 중요한 아이콘이다. 필자 역시 주말에는 미국, 평일 오후에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보며 성장했다. 1980년대는 한국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시대이지만 실제로 우리를 둘러쌌던 문화의 많은 부분은 미국과 일본의 것이었다. 오늘날 많은 작가들이 과연 닫힌 의미로 순혈적인 한국적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본인이 생각하는 한국적 정체성, 민족적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아토마우스를 처음 발표했을 때에는 한국의 사회정치적인 상황을 반영하거나, 풍자하는 작업이란 해석이 많았다. 그런 해석도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작품이 그런 의미만 담아내는 것은 아니다. 앞선 답변과 연결되는 것 같다. 나는 내 작업의 의미가 고정되는 것에 반대한다. 입체적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아토마우스에는 사회적인 부분과 개인적인 부분이 혼재되어 있다. 나의 대학시절, 그리고 내가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할 무렵에는 미술이 (순수한) 한국적 정체성을 명확히 보여줘야 한다는 담론이 강했다. 그러한 담론이 나오게 된 역사적 맥락은 이해하지만 나는 그런 방향보다는 조금 보편적인 의미를 생성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한국적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정체성과 혼종성, 문화적 영향 관계 등을 말하고 싶었다. 또한 나는 한국적인 문화의 영향만을 받으며 성장하고 작가가 된 것은 아니다.
 

‘스누피(Snoopy), acrylic on canvas, 240 x 410cm, 2018 ⓒLee Dongi / PIBI GALLERY

- 아토마우스는 이동기라는 작가뿐 아니라 1990년대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때로는 그것이 한계나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음영이 존재할 것 같다. 그리고 믹톰(Mictom)의 근황도 궁금하다. 믹톰은 아토마우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1993년 아토마우스를 처음 만들었을 당시 우리나라에는 만화 이미지로 캐릭터를 만든 작가가 없었다. 내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아토마우스는 내가 진행하고 있는 여러 작품들(시리즈) 중 하나다. 처음 아토마우스를 그렸을 때에도 한 작품으로 끝내려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가졌고 많은 의미 생성이 일어났다. 그래서 나도 왜 그런 반응이 나왔는지 더 숙고하게 되었고 작업도 지속됐다. 믹톰은 잘 있다(웃음). 아토마우스와 믹톰 모두 작업실에서 드로잉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아토마우스에 집중하게 되었다.

- ‘절충주의’를 담아내는 ‘레이어드 페인팅(layered painting)’을 설명하면서 무작위 혹은 무의식적으로 선택된 이미지가 사용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필자의 눈에는 매우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보인다. 또한 작가의 작업에 무작위적 행위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 궁금하다. 엄밀히 말해 무계획은 불가능할 것 같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길 바란다.

한 작품 전체를 무작위적으로 혹은 무의식에 의존해서 완성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말로 정확히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작품의 어떤 부분은 오래 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것을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또 다른 부분은 직관적, 무작위적으로 배치한다. 둘 중 하나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다. 작업하면서 항상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요소와 논리적이고 계획적인 요소를 함께 도입하려 한다. 두 가지 모두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 나의 작품이다. 한 작품 안에 합리적인 부분과 비합리적인 부분이 항상 같이 보였으면 좋겠다.
 

‘이동기 2015~2018’ 전시장, 피비갤러리 ⓒLee Dongi / PIBI GALLERY

- ‘레이어드 페인팅’의 일부에서 제프 쿤스(Jeff Koons)의 <Antiquity>나 <Easyfun-ethereal> 시리즈가 떠올랐다. 작업의 방식이나 지향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그 결과물에도 일정 부분 교집합이 나올 수 있다. 쿤스의 작업이나 다른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나?

쿤스의 최근 작업을 많이 보진 못했다. 내가 대학생이던 1980년대에 서양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 부흥했고 국내 미술 잡지에도 많은 작가들이 소개되었다. 줄리앙 슈나벨(Julian Schnabel), 데이비드 살리(David Salle), 에릭 피슬(Eric Fischl), 신디 셔먼(Cindy Sherman) 등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내가 정체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셔먼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키스 헤링(Keith Haring), 장 미쉘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 등의 작업들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쿤스는 키치(kitsch)를 대표하는 스타 작가였다. 나 역시 키치, 대중문화, 차용 등에 관심이 있으니 공통점이 있다. 작가가 이미지를 창조하지 않고 차용한다는 것은 워홀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이는 원본(originality)에 대한 문제 제기이자 작가의 창조 행위에 대한 고민이다. 대학교 1~2학년 때까지 작가를 할지 확실히 결정하지 못했었다. 당시 한국 미술의 주류는 추상 미술 아니면 민중 미술이었다. 다른 미술을 시도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런데 3학년 때 포스트모던적인 작가들의 작업을 보면서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들의 작업을 보면서 나도 현재와 밀접한 작업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작품에 매우 많은 이미지들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이미지들을 재편집하고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그동안 작품의 의미는 관객이 만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왔다. 관객이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고는 하지만 작가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어느 정도는 전달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작가가 갖고 있는 철학이나 메시지지가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논리적인 단어(언어)로 대화를 해도 항상 오해가 생기는데 작품을 통해 작가의 철학을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의미는 작품 안에 담겨 있거나 작가가 부여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나에게는 작품을 통해 의미가 발생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워홀이 자신의 작품 이면에는 아무 것도 없으니 표면만 보라고 한 말도 자신의 작품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것은 고정된 의미가 작품 안에 담겨 있다고 믿었던 기존 관념을 뒤엎는 태도다. 따라서 나의 작품에서 의미가 발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로버트 알트만(Robert Altman)의 영화 ‘숏 컷(Short Cuts, 1993)’에서 내가 생각하는 의미 발생 방식과 근접한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레이어드 페인팅’, ‘더블비전(Double vision)’, ‘추상화(Abstract painting)’ 시리즈를 보면 일부 혹은 전체에서 추상표현주의가 연상되는 붓질이 등장한다. 이 역시 절충주의, 병치와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회화적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기 위한 방법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동기의 작업 중심에는 항상 회화가 있었다.

나는 회화 작업을 매우 좋아한다. 회화에 애착이 있다. 작업을 진행할수록 회화적인 느낌을 발전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새로운 매체를 다루거나 매체를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익숙한 형식이나 매체를 통해 새로움을 보여주는 작업을 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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