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26) 목멱산 ①] 청계천 준설토 꽃산(방산)에 세워진 방산시장

이한성 동국대 교수 기자 2019.02.18 09:17:07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겸재의 그림 속에 목멱산(남산)이 보이는 작품은 여럿 보인다. 본격적으로 목멱산을 대상으로 그린 목멱조돈(木覓朝暾)을 비롯하여 목멱산이 배경으로 깔린 그림으로는 서원조망(西園眺望 또는 三勝眺望), 장안연우(長安烟雨), 장안연월(長安烟月), 필운상화(弼雲賞花), 은암동록(隱巖東麓), 취미대(翠微臺) 등 여러 그림이 있다.

오늘은 오간수문에서 시작하여 남소문동천(南小門洞川) 길을 가보려 한다. 청계천 박물관에서는 마침 지난해 겨울부터 금년 2월말까지 남소문동천 특별전을 열고 있다. 어느 길, 어느 골목, 어느 물길인들 이 땅에서 먼저 살다간 이들의 흔적이 없을까 보냐. 필자도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이 흥인문에서 남산에 이르는 길은 순성길을 통해서 갔다. 그러나 목멱의 동쪽 끝 소남문에서 시작하여 이간수문(二間水門)을 거쳐 청계천으로 이르는 물길은 잊고 지내고 있다. 원경(遠景)이기는 하지만 겸재의 서원조망도에는 인왕산 동쪽 끝에서 바라본 이곳이 아련히 남아 있다.

잠시 오간수문을 떠나기 전에 돌아보아야 할 것이 있다. 준천(濬川)이란, 나라에 얼마나 중대한 일이었을까? 우리 시대 한 20, 30년 전을 돌아보면 준천의 의미를 생생히 느끼게 된다. 비만 오면 물구덩이가 돼서 도저히 살기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마포 종점은 은방울 자매의 애절한 노래와는 달리 장마만 지면 물이 들어왔다. 한때 망원동도 교통이 두절되고 집집이 물에 잠겼다. 일산은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 한강 둑에 구멍이 생겨 온 지역이 물에 잠겼다. 지금은 서울의 금싸라기 지역이 되었지만 개포동, 대치동, 방배동도 장마철에는 물구덩이를 면치 못했다. 그러던 곳을 최고의 주거지로 떠오르게 한 공로는 바로 치수(治水)였다. 둑을 막고 수문을 만들고 내린 빗물을 배출해 내는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해진 일이다.
 

겸재 작 ‘서원조망도’.

청계천 따라 남북으로 나뉘었던 한양

이제는 서울이 한강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지만 조선 시대에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만일 지금 한강 둑이 터지고 한강 바닥에 토사가 쌓여 물이 넘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집과 신변의 안전도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의 한양은 청계천의 준설 즉 준천으로 도시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생생한 기록은 준천사실(濬川事實)에 기재됐고 광통교 난간과 수표교 난간에 새긴 글자로 남아 있다.

그 뜻을 정조도 이었다. 정조 13년(1789년) 4월 일성록을 보자.

“정조: 이번 준천(濬川)은 어떻게 조처하였는가?

이문원: 오래도록 준천하지 못하여 모래흙이 많이 찼습니다. 모래를 먼 지역에 다 버리려고 하면 필시 재력을 많이 소비하게 될 것이니 태평교(太平橋) 아래쪽의 좌우 빈곳에 모래를 운반하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정조: 지금의 상황은 ‘경진지평(庚辰地平)’ 글자를 보기에 어떠한가? 근래 들으니 모래흙이 가득 차서 경(庚) 자 하나만 드러나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이문원: 10자(尺) 되는 수표(水標) 중 모래 위로 나온 것은 4자도 안 됩니다.

정조: 이것은 금영(禁營)의 자내(字內)이니 특별히 감동하고 신칙하여 ‘경진지평’ 네 글자가 예전처럼 드러나게 하라.”

 


今番濬川何以措劃乎.
文源曰: 濬川久曠沙土多塡如欲棄沙遠地必多費財力太平橋以下左右空曠運沙無難矣
予曰: 卽今形便視庚辰地平何如 近聞沙土塡塞只露一庚字云然否
文源曰: 水標十尺出沙上者未滿四尺矣
予曰: 此是禁營字內另加董飭使庚辰地平四字依舊露出.

 

네 글자 중 어디까지가 보이는지로서 청계천의 물 높이를 측정했던 경진지평(庚辰地平) 글자. 

여기에서 준설한 흙을 쌓겠다던 태평교(太平橋)는 어디이며 과연 그 흙은 쌓여졌을까? 태평교는 오교(午橋)라고도 했는데 지금의 마전교(馬廛橋)다. 이 다리 남쪽 너른 장마당에서 오전이면 우마(牛馬)를 사고팔았다 한다. 훈련원과 가까워서 넓은 공터가 있었기에 이곳에다 준설한 토사(土砂) 쌓자 한 것이다.

옛 지도를 보면 청계천 남북으로 작은 동산을 그려 놓은 지도들이 있다. 규장각 소장의 도성도(都城圖: 1788년 제작 추정)에는 오간수문 옆쪽으로 두 개의 자그마한 푸른 산을 그려 놓았다. 왜 마전교 옆에 그리지 않고 동쪽에 떨어져 그렸을까? 정조가 준천하기 한 해 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인데 이미 토사를 쌓아놓은 두 개의 작은 산이 있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영조의 경진준천(庚辰濬川: 영조 36년 1760년) 때 쌓아 놓은 것이다. 영조 41년(1765년) 제작한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에도 이 두 개의 작은 언덕이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정조 때 준천한 토사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동대문역사공원의 옛 흔적들. 하도감 관련 시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 이한성 교수
동대문운동장 아래에서 홀연히 나타난 이간수문. 사진 = 이한성 교수

정조 때 준설한 흔적, 아직도 남아

아직도 그때 준천한 토사의 일부가 남아 있는 곳으로 여겨지는 곳이 있다. 마전교 동쪽에 나래교와 전태일교가 있고 그 두 다리 사이 종로 쪽으로 동대문 시장의 일부인 신진시장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신진시장 입구(문2)에서 시작하여 약 80m의 작은 언덕이 낡은 건물 뒤에 숨어 있다. 최종현, 김창희 님의 저서 ‘오래된 서울’에 의하면 이곳이 준천한 토사를 쌓은 곳이라 한다. 영조 때 준천한 토사는 지도에서 보듯이 청계천 북쪽은 지금의 동대문 종합시장, 메리어트 호텔 쪽에 쌓여 있었고, 남쪽은 옛 덕수상고, 메디칼센터 쪽에 쌓여 있었다. 지금으로 보면 두타몰, 밀레오레, 현대씨티아울렛, 국립의료원 쪽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이 토사는 지금의 동대문역사공원 자리에 있던 공원과 운동장 조성과 종로 거리 보수에 사용되었다 한다.

 

옛 ‘도성도’에 준설토를 쌓아둔 듯한 가산(假山)이 보인다.

정조 시대에 준천한 토사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그때는 나래교, 전태일교가 없었으니 랜드마크가 되는 지명으로 태평교(마전교)를 이야기했고 그 이하(以下) 좌우 빈터(左右空曠)에 쌓자 한 것이다. 풀이를 하면 마전교 하류 남쪽과 북쪽 빈 터에 쌓자 한 것이다.

이렇게 토사를 쌓은 언덕을 가산(假山)이라 불렀다. 가짜 산이기보다는 임시로 만들어진 산이란 뜻으로 썼을 것이다. 세월이 가면서 이 언덕에는 풀꽃도 피고 나무도 자랐다. 사람들도 꽃을 심었다. 그래서 꽃 같은 산이 되었다.

이른바 芳山(방산). 그 후 이 동네는 방산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방산시장을 둘러보면서 열심히 살고 있는 이 분들이 꽃다운 삶을 살 수 있게 장사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원을 품고 이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간다.

 

동대문역사공원은 한양도성과 만나는 지점에 설치됐다. 사진 = 이한성 교수

한양도성이 역사공원 한가운데로 지나간다. 아니 역사공원이 한양도성 한가운데를 눌러 타고 앉아 있다. 역사공원 자리는 조선시대 하도감(下都監) 자리였다. 하도감을 설명한 자료에 의하면 조선 후기 훈련도감에 속한 관청의 하나라 한다. 훈련도감은 임진란이 발발한 뒤 1593년 류성룡의 주도 하에 설치하여 화약무기(조총)를 다루는 군사들을 두었다 한다. 본청 이외에 서영(西營), 남영(南營), 북영(北營)이 있고 하도감, 염초청(焰硝廳) 등을 부속 관청으로 두었다 한다. 효종 때는 지대가 낮은 한양의 동쪽이 부실하다 하여 지금의 역사문화공원 자리에 하도감을 만들어 군사를 주둔시켰다 한다. 조총과 화약을 저장하고 화기도 제작하고 훈련하였다. 건물 규모는 390칸으로 제법 큰 규모였다 한다.

이런 하도감이 위기를 맞은 것은 교련병대(敎鍊兵隊, 지난 역사 책에서 별기군別技軍이라 했었음)의 창설에서 시작되었다. 더 이상 구식 군대로서는 서구 열강에 대처할 수 없게 되자 신식 군대 교련병대를 창설하고 하도감은 1881년 9월 삼청동에 있던 북창(北倉)으로 이전했다가 이듬해 1882년 10월 영원히 폐지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터는 교련병대의 훈련장이 되었다.

그러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구식 군대는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한편 이곳 교련병대 훈련장으로 몰려들었다. 흥분한 구식 군인들은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堀本禮造)를 살해하고 신식 군인들을 사상케 하는 등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접어들었고, 대원군의 재등장, 민비의 도주, 청나라와 일본의 내정간섭 등 조선의 앞날은 회오리바람 속에 휩싸였다. 청나라는 이후 조선에 들어와 하도감터에 진영을 구축한다. 노골적인 내정간섭이 시작된 것이다. 이 주둔지에 고종이 두 번 방문한 기록이 고종실록에 전해진다.

 


고종 21년(1884년) 1월 24일 기록: “경우궁(景祐宮: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사당)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남연군(南延君) 사당에 들러 전배한 다음 본궁에 전알(展謁)하였다. 환궁(還宮)할 때 하도감(下都監)에 거둥하여 청(淸)나라 특사 오장경(吳長慶)을 접견하였다.


(二十四日. 詣景祐宮, 展拜. 歷拜南延君祠宇, 仍覲本宮. 還宮時, 歷御下都監, 接見淸國欽差吳長慶)

 


고종 21년(1884년) 10월 17일에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이 발발하였다. 놀란 고종은 북묘로 피신했다가 오장경 진영으로의 피신을 거쳐 원세개가 주둔한 하도감에 와서 안전을 의탁했다. 전하는 말로는 3일을 있었다 한다. 그날의 기록이다.



10월 20일(신묘) 맑음


하도감(下都監) 청사마(淸司馬) 원세개(袁世凱)의 영방(營房)으로 이차(離次)하였다. 시임대신(時任大臣)과 원임대신(原任大臣)을 소견(召見)하였다. 문안하였기 때문이다.


(二十日. 離次于下都監淸司馬袁世凱營房. 召見時原任大臣. 承候也).

 

이 지역에 훈련원이 있었음을 알리는 안내석. 사진 = 이한성 교수
현재의 훈련원공원에서 청소년들이 자전거 묘기를 부리고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동대문운동장 아래서 홀연 나타난 이간수문

불과 100여 년 전, 일신의 안전을 청나라 주둔지나 러시아 공사관에 의탁한 이 땅의 지도자를 생각하면 연민을 금할 수가 없다. 나라가 힘 없으면 이처럼 초라해진다. 지금은 DDP의 세련된 건물이 서 있는 이 땅은 그 후로도 수난을 당했다. 일제가 1919년 9월 훈련원 자리에 훈련원 공원을 조성하고, 1922년 하도감 자리와 한양도성을 헐어 야구장과 육상 경기장을 건설한 후, 이어서 1925년에는 경성운동장으로 확장하면서 하도감 자리는 흔적도 없어지고 이 구간 한양도성과 청계천으로 연결되던 또 하나의 수문 이간수문(二間水門)도 사라졌다.

그렇게 이 자리에 세워진 경성운동장은 해방이 된 1945년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잠실운동장 등 서울에 더 큰 운동장들이 들어서자 서울운동장이라는 이름도 잃고 1985년 동대문운동장이 되었다. 그러던 운동장도 더 이상 운동장으로서의 활용도가 낮아지자 다시 공원으로 바꾸는 공사가 기획되었는데 그 전에 사전조사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2008년 지하 3~5m 야구장 아래 묻혀 있던 이간수문이 드러나고 이 수문과 연결된 한양도성도 드러났다. 복원해 놓은 이간수문은 거의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두 개(二間)의 둥근 아취 형 돌문이다.

 

동대문역사공원이 들어선 옛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 일대의 자료사진. 

남산에서 청계천으로 유입되는 물길은 여럿 있는데 다른 물길은 모두 도성 안에서 청계천으로 유입되지만 남산 동쪽 끝에서 발원하는 남소문동천(南小門洞川)의 동쪽 줄기는 이간수문을 통해 도성 밖에서 청계천과 조우한다.

이 물길의 시작은 남소문(한남동 넘어가는 고개) 아래에서 발원하여 국립극장 ~ 장충단 공원 ~ 태극당 앞 ~ 광희빌딩(두 갈래로 나뉘어짐. 서쪽 줄기는 도성 안에서 청계천 합류) ~ 국립의료원 동쪽 ~ 밀레오레 뒤 ~ (길 건너) ~ 이간수문 ~ 청계천으로 이르는 물길이다.

광활한 옛 훈련원 터에 들어선 시설들

지금은 장충단 공원 지나면 모두 맨홀 아래 갇힌 물길이 되었다. 물론 평소에는 건천(乾川)으로 물이 거의 없는데 해방 전만 해도 이 물길에서 빨래를 했다 한다.

역사문화공원을 한 바퀴 둘러본다. 파괴된 한양도성도 발굴해 놓았고 하도감 건물들의 흔적도 발굴해 놓았다. DDP 전시관에는 볼만한 기획전이 많이 열리고 있다. 이제 밀레오레나 두타를 보며 길을 건넌다.

여기서부터는 훈련원터에 포함되는 지역이다. 뒷골목은 남소문동천이 흘렀던 물길 따라 길이 나 있다. 동천길(골목길)을 잠시 버리고 국립의료원으로 들어간다. 앞마당 화단에 훈련원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훈련원의 영역은 지금의 국립의료원, 그 옆 훈련원공원, 밀레오레·두타·현대씨티가 있는 동대문 패션 상가, 미군 부대 지역 등 이 지역 대부분을 점하는 넓은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 시대 군인 양성소가 바로 훈련원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군사 인력 발굴과 교육을 목표로 하는 기관이었다. 지자체가 세워놓은 훈련원터 안내문을 읽어 보자.

이곳 훈련원터에는 병사의 무술 훈련 및 병서, 전투 대형 등의 강습을 맡았던 훈련원이 있었다. 훈련원은 조선 태조 원년(1392년)에 설치되어 처음에는 훈련관으로 불렀는데 태종 때 이곳으로 옮겨 청사 남쪽에 활쏘기 등 무예 연습을 하고 무과 시험을 보는 대청인 시청을 지었으며 세조 12년(1466)에 훈련원으로 고쳤다. 많은 무장이 이 훈련원에서 오랫동안 시험과 봉직의 과정을 거쳤는데 충무공 이순신이 별과 시험에서 말을 달리다가 실수로 낙마해서 왼쪽 다리에 상처를 입은 곳도 훈련원이고, 봉사, 참군 등 하위 관직에 여러 해 동안 복무하던 곳도 훈련원이었다. 중종반정(1506년) 때 박원종 등이 훈련원에 모여서 장사들을 나누어 배치하고 밤중에 창덕궁 진입로에 진을 친 일도 있었다.


(중략)


1907년 8월에 체결된 한일신협약(일명 丁未 7조약)에 의해 훈련원에서 군대 해산식이 거행되고 한국 군인들에 대한 무장해제가 집행되었다.


(후략)

 


이미 아는 바대로 이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함으로써 1907년은 의병 활동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해이기도 했다.
 

훈련원터에 새로 들어서는 장군상의 주인공은 충무공인가 윤관인가? 사진 = 이한성 교수

훈련원과 충무공의 사연

그러면 말에서 떨어져 다시 도전한 충무공의 과거 시험은 어찌 되었을까? 충무공의 젊은 날을 잠시 살펴보자.

충무공은 스물두 살 때부터 무과를 준비하여 스물여덟 살에 첫 시험을 치렀다. 6년이나 준비한 것이다. 물론 시험은 이곳 훈련원 마당에서 열렸다. 태어나서 자란 건천동에서 가까운 곳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순신은 첫 번째 과거 시험을 보다가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다. 그러나 의연히 일어나서 버드나무로 다친 다리를 묶은 뒤 끝까지 시험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충무공은 낙방했다. 4년 뒤인 1572년 2월에 치러진 과거에 다시 응시, 29명 중 12등으로 합격한다. 그다지 훌륭한 성적은 아니다. 아무튼 서른두 살에 처음으로 군인이 되어 나라의 녹(祿)을 먹게 된 것이다. 내려진 자리는 ‘권지훈련원 봉사’. 권지(權知)라는 말은 실습생이라는 뜻이니 요즈음으로 친다면 비정규직이거나 인턴 사원이 된 것이다. 춘향전의 이몽룡은 과거에 급제하자마자 암행어사가 되어 대단한 위세를 떨치지만 우리의 충무공께서는 겨우 인턴 사원이라니. 조선시대에는 과거 합격자 수에 비해 벼슬자리는 좀처럼 나지 않아 세 손가락 안에 들거나 고령의 합격자가 아니면 즉시 발령받을 수 없었다. 그런 뒤 그해 12월에 겨우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발령받았으니 종구품 무관이 된 것이다.

이제 국립의료원과 나란히 자리 잡은 훈련원공원으로 간다. 경성사범학교(서울사대 전신) 터였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모두 다 훈련원터에 세워진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고종과 순종의 인산(因山: 황제, 황후의 장례)은 훈련원 공원에서 있었다. 체육을 겸한 공원이다 보니 자전거나 롤라보드 묘기 훈련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지금 한창 장군상 동상을 세우고 있다. 충무공 동상을 세우나 보구나. 공원에 나와 있는 이가 있어 짐짓 물어 보니 잘은 모르겠는데 윤관 장군 동상을 옮겨 온다는 말이 있다 한다. 윤관 장군? 공사 설명판이 없어 잘은 모르겠다. 고려 장군상을 조선 훈련원에 터에 세울 리가 있겠는가.

 

외국어 간판이 많이 보이는 중앙아시아 거리의 모습. 사진 = 이한성 교수

훈련원공원을 돌아 나와 다시 국립의료원으로 온다. 그 동쪽에서 길을 건너 골목길로 접어든다. 맨홀 뚜껑이 많이 덮여 있다. 남소문동천 위에 생긴 길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골목길에는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많이 자리 잡았다. 코리아 드림을 안고 와서 끼리끼리 모여 독특한 문화 양식을 선보이는 곳이다. 필자도 지난 번 친구 따라 이곳에 있는 음식점에 들려 보았다. 그다지 입맛에 맞는 것은 아니지만 가성비가 괜찮은 메뉴가 많았다. 다시 한 번 가 보리라.

중앙아시아 골목의 끝은 광희빌딩을 만나는 곳이다. 옛 지도를 보면 이곳에서 동소문동천은 좌우 두 갈래로 갈라진다. 본류는 우리가 걸어 온 길이고, 갈라진 다른 한 물길은 훈련원 서쪽 부분으로 흘러 청계천 본류에 합류한다. 이간수문을 만들 때 물길이 갈라지지 않고 본류 하나로 흐르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 기록이 실록에 실려 있다.

 


영조 30년(1754년) 6월의 기록인데,

어영대장 홍봉한이 임금께 아뢰기를,


이간수문(二間水門) 상류의 물길을 파서 트더라도 곧 메워지는데 이는 광희문으로 바로 가는 길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훈련원 앞을 가로 흘러 오간수문(五間水門)으로 돌아가는 것은 참으로 이 때문입니다. 작은 돌다리를 설치하면 이 폐단을 없앨 수 있으므로 (후략)


(御營大將洪鳳漢白上曰: “二間水門上流水道, 雖爲疏鑿, 而此是光熙門直路, 故旋卽塡塞, 從此橫流於訓鍊院前而歸於五間水門者, 良以此也. 排置小石橋, 然後可無此弊).

 


지금의 이정표를 기준으로 말하면, 남소문동천이 흘러 내려오는 중간에 광희문으로 가는 길과 만나는 지점(지금의 광희빌딩 앞)에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다 보니 물길이 자주 메어져 갈라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긴 지류는 훈련원 쪽으로 흘러 청계천으로 들어가 오간수문 쪽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어영대장 홍봉한은 이를 폐단이라 하고 있다. 그렇다. 한 줄기로 흘러 이간수문으로 빠지면 물길 관리도 쉽고 빨래터 등 이용도 편리할 것인데 갈라져 흐르니 폐단이란 말이다. 그래서 이 길에 다리를 놓자고 하고 있다.

지금은 거기 어디 물길이 있나?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골목길인데 조선 시대에는 임금께 아뢸 만큼 비중 있는 물길이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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