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22) ‘지희킴 - 낮의 뜨거운 포옹과 밤의 걱정들’] 책 속 단어와 만나고 헤어지는 드로잉

이문정(미술평론가, 리포에틱 대표) 기자 2019.03.04 09:36:11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리포에틱 대표)) 영화 ‘세렌디피티(Serendipity)’(2001)의 이야기는 우연에서 시작된다. 백화점에서 우연히 만나고 서로에게 끌리는 조나단(Jonathan)과 사라(Sara). 사라는 헌책방에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책을 팔 테니 그 책을 찾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우연에서 시작된 인연은 운명이 되었다. 우연적 운명은 영화에서만 가능한 일일까? 우리 모두는 수많은 사건 사고, 만남과 헤어짐을 겪으며 살아간다. 인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결과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도 벌어진다. 우리의 삶은 논리적이기만 할 수 없다. 나 혹은 세상이 정해놓은 규칙대로 살아지지도 않는다.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도 우연성은 작동한다.

지희킴의 북 드로잉은 우연에 근거한다. 작업을 위해 도서관으로부터 기증받을 때 작가는 어떤 책들을 만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연 혹은 필연에 의해 이 책들을 거쳐 갔는지 알 수도 없다. 책을 손에 넣은 후에도 마찬가지다. 즉흥적으로 손길이 가는 페이지를 펼친 작가의 눈에 발견된 글자는 읽히지 않고 보여진다. 문단은 이미지들의 군집이 된다. 시선이 맺히는 지점이 발견되면 거기에서부터 기억과 상상의 힘이 작동하고 내밀한 이미지가 그려진다. 추상적 개념이나 지식과는 사뭇 반대된다고 여겨지는 몸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이다.

 

‘위로에 관하여’, 디지털 드로잉, 160 x 110cm, 2018. 도판 제공 = 카이스트 리서치 앤 아트 갤러리 ⓒ지희킴

인간은 태어나 말을 배우면서 사회화되고 성장한다. 문명은 언어에 근거한다. 언어는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질서를 담고 있다. 개인이 사회, 사회 속 사람들과 관계 맺고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아주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우리는 언어 없이 살 수 없다. 그러나 때로는 언어의 세계가 담아내는 규범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기도 한다. 정해진 규칙에 맞게 일관성을 유지하는 언어의 세계는 보편적 질서와 생각, 가치를 고수한다. 그러나 세상 속 개인들은 우연과 필연 속에서 서로 다른 자신만의 문맥에 위치한다. 모두 같을 수는 없다.

 

‘스토커 2’, 기부받은 책 페이지에 색지, 콜라주, 34.3 x 27.8cm, 2014. 도판 제공 = 카이스트 리서치 앤 아트 갤러리 ⓒ지희킴
‘Hand to Hand’, 기부받은 책 페이지 위에 과슈, 홀로그램, 35 x 28.3cm, 2016. 도판 제공 = 카이스트 리서치 앤 아트 갤러리 ⓒ지희킴 

언어의 세계이자 정신, 지식을 상징하는 책에 그려진 지희킴의 드로잉은 언어의 세계에 언어 외적인 세계를 침투시킨다. 약간의 혼란과 불안정함이 감지되는 리듬과 감각을 전달하는 드로잉들은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변화의 움직임을 이끌어낸다. 지희킴의 몸짓이 더해진 책은 더 이상 보편적 의미체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수한 차이들을 생성시키는 공간으로 전환된다. 한정적인 의미 구조를 넘어서는 특별한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지희킴은 책의 프레임(frame)을 완전히 허물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작가 역시 원하지 않는 일이다. 보편적 언어의 세계를 완전히 부정한다는 것은 어떤 소통도 하지 않겠다는 의미와 같기 때문이다. 언어의 세계 일부를 세련되게 해체하는 지희킴의 작업 역시 언어의 세계에서 읽히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책(의 상징)이 완전히 해체되면 작가의 작업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역설을 잊지 않기에 작가는 그 상징의 안과 밖을 때로는 폭풍처럼 격렬하게, 때로는 조심스럽게 넘나들기를 계속한다.

 

‘낮의 뜨거운 포옹과 밤의 걱정들’ 전시 전경. 도판 제공 = 카이스트 리서치 앤 아트 갤러리 ⓒ지희킴

큐레이터 정소라와의 대화
“텍스트와 그림이 만나며 생기는 새 의미에 주목”


Q. 지희킴 작가의 전시를 기획하게 된 배경을 듣고 싶다. 작가의 작업에 드러나는 어떤 점에 주목했는가? ‘북 드로잉’과 감각적인 회화 작업으로 알려진 작가다.

A. 내용(비물질적인 의미)을 전달하는 책 위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 자체에 흥미를 느꼈다. 작업 과정에서 책의 고유성을 배제시키지만 동시에 책에 인쇄된 단어들이 드로잉의 출발점, 기폭제가 된다는 역설이 재미있었다. 작가가 창출하는 기억의 연쇄작용도 결국은 책에서 발견한 단어 하나에서 시작된다. 작가가 단어를 순수하게 이미지로 보았다고 해도 결국 책과 연결된다. 어찌 되었든 특정한 책의 특정한 페이지에 인쇄된 글자이기 때문에 의미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일상에서 사용되는 해당 단어(이미지)의 의미로는 존재할 수 없다. 작가는 차단한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의미의 한 가닥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드로잉이 삽화가 되지 않기 위해 책의 내용을 읽지 않는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또한 작가가 배제했다고 해도 작품을 마주한 관객은 책의 고유성이나 인쇄된 텍스트를 배제하기 어렵다. 한편 폐품을 전혀 다른 새로운 용도로 사용한다는 작가의 이야기를 확장시키면 버려질 위기에 있던 책들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으며 소생한 것, 생명이 연장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차단이 아니라 여태까지의 관계를 이어가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읽히도록 만든 것이라 생각한다. 드로잉에 등장하는 세부적인 이미지보다 이런 부분들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서로 전혀 만난 적 없었던 책의 저자와 지희킴이 책을 매개로 만남과 충돌, 화합을 이끌어내며 공존한다는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지희킴의 작업에 대한 이전까지의 해석과는 다른 시선을 보여주고 싶었다.

 

‘A=[1,2,0]’, 기부받은 책 페이지에 과슈, 홀로그램, 24 x 32.6cm, 2016. 도판 제공 = 카이스트 리서치 앤 아트 갤러리 ⓒ지희킴

Q. 이번 전시에는 지희킴의 작업 중 상대적으로 스케일이 작은 작품들이 주로 소개되었다. 남다른 의도가 있었는가?

A. ‘카이스트 리서치 앤 아트 갤러리(KAIST Research & Art Gallery)’에서 전시를 기획할 때에는 작가가 공간을 해석하고 구상해온 부분들을 최대한 반영하는 편이다. 이 공간의 주 관람자층이 미술 전문가나 애호가들이 아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다양한 작가의 다양한 작업을 고르게 보여주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나는 매 전시마다 작가 개개인의 개성(차별성)이 충분히 드러나길 원한다. 또한 장소특수성을 생각해야 하는 설치미술이 아닌, 상대적으로 변형의 여지가 적은 회화라는 점도 기획자의 개입을 최소화한 채 작가의 계획을 구현하게 만들었다. 이번 전시의 경우 작가가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작품과 신작을 소개하고 싶어 했다. 또한 이 공간에는 자신의 작품 중 정제된 작은 작품들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희킴 작가와의 대화
“손에서 읽는 성격과, 아름다운 몸의 체액”


Q. 기증받은 책 위에 드로잉을 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북 드로잉이 많이 전시되었다. 북 드로잉의 출발점은 작가만의 고유한 기준에 근거해 선택한 페이지의 (이미지로 읽히는) 글자이다. 작업 방식이 많이 우연적이고 즉흥적이다. 작가의 작업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누군가는 이런 작업 방식이 너무 모호하고 막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A. 내 작품에서 우연성은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나는 우리의 삶에서 우연성(의 힘)이 등한시되는 게 아쉽다.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친 책이 나에게 온 우연, 나에게 온 수많은 책들 중에서 특정한 한 권의 책을 내가 선택하게 된 우연, 그리고 내가 그 책의 특정한 페이지에 다다르게 된 우연, 그 페이지의 어떤 단어가 시각적으로 내 눈에 걸리게 된 우연, 그런 우연들이 모였을 때 그것이 가진 힘이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나의 북 드로잉이다. 왜 내가 갖고 있는 수많은 기억들 중 특정한 순간의 기억이 떠오르고, 그 기억이 다른 기억을 길어 올리는 것일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연쇄적인 과정들이 모여 탄생한 것이 나의 작품이다.
 

‘Actual Shadow’, 기부받은 책 페이지에 색지, 매니큐어, 23.5 x 31.2cm, 2015. 도판 제공 = 카이스트 리서치 앤 아트 갤러리 ⓒ지희킴

Q. 물론 북 드로잉의 작업 과정에서 작가의 통제와 계획이 작동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우연한 선택인 것은 분명하지만, 특정한 페이지나 특정한 기억을 선택하는 행위에는 작가가 문제시하는 이슈나 취향 등이 담길 수밖에 없지 않나? 또한 완성된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으면 공통점이 발견된다. 잘린 얼굴과 손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도 있다.

A. 내 작업의 핵심은 즉흥성이다. 나의 작업을 ‘드로잉’이라 명명하는 것도 이와 연결된다. 또한 나는 완성된 작품들이 모였을 때 어떤 규칙이나 통일성을 갖는지 등을 생각하며 작업하지 않는다. 개별 작품은 독립성을 우선적으로 갖는다. 물론 그려진 이미지들 중 반복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의 기호(taste)가 반영된 것이다. 나는 내밀하고 사적인 내러티브가 많은 그림을 그린다. 웬만하면 그 내용을 밝히진 않지만 북드로잉의 경우 하나하나의 이미지에 담긴 이야기들을 다 기록한다. 연상을 통해 내러티브를 끌어내는 시간과 그것을 기록하는 시간이 실제 드로잉을 하는 시간보다 더 길다. 잘린 얼굴은 우리가 왜 아름다운 외모에 굴복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체액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신체의 부위는 아름다움에 굴복한 몸에서도 우리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무언가가 나온다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손은 조금 다른 차원인데, 개인적으로 나는 손이 얼굴 다음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손의 표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내가 집중하는 신체 부위 중 하나다.

Q. 파편화된 몸과 비정형적 형상들이 뒤섞여 있는데도 매우 감각적이고 경쾌하다. 드로잉의 힘일 수도 있겠다. 눈의 이미지가 반복되어 초현실주의, 그리고 바타유(Georges Bataille)가 떠오르기도 했다.

A. 나의 작품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이다. 무섭다는 반응도 많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객관성을 잃는다. 그래서 나의 작품에 대한 모든 반응이 다 흥미롭다.

Q. 작품에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해석할 거리가 많아진다는 거다. 등장하는 이미지들 모두가 의미를 담아내는 상징으로 읽히길 원하는가? 만약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면 작가가 담아낸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도록 힌트를 많이 주는 방식, 관객이 자유로운 연상작용을 통해 의미를 생성하는 방식, 둘 중에 어디에 해당하는가?

A. 나는 관객들이 개별 이미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감상하길 바란다. 그리고 내가 부여한 의미와는 별개로 관객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게 현대미술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때로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신선한 해석을 들려주는 관객들이 있는데, 그들의 이야기가 다음 작업에 영감을 주기도 한다.
 

‘わたし’, 기부받은 책 페이지에 색지, 19.5 x 28.2cm, 2016. 도판 제공 = 카이스트 리서치 앤 아트 갤러리 ⓒ지희킴 

Q. 본인의 북 드로잉으로 인해 주로 남성인 저자가 쓴 책의 의미가 사라진다. 글에 물질과 이미지가 더해진 상황, 회화의 전형과도 같은 캔버스를 벗어난 드로잉, 유화가 아닌 과슈(gouache)의 사용, 파편화된 신체와 체액 등은 동시대 미술에서 주요하게 다뤄졌거나 다뤄지는 이슈들을 떠올리게 한다. 동시대적 담론들을 의식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A. 완성된 나의 작품이 어떤 관점에서 읽히든지 괜찮다고 생각한다. 해석에 대한 부분까지 내가 관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의 작업은 순수하게 나 자신만을 들여다본 것이다. 매우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을 다룬다. 나는 오히려 ‘내가 너무 사적인 이야기를 담아내기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시의성을 너무 담아내지 않는 것은 아닌가?’와 같은 생각을 한다.

Q. 책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이분법적으로 나뉜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권력을 갖고 있던 존재 혹은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그런데 막상 완성된 작품을 보면 책의 기본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책의 낱장으로 전시된 작품들은 액자 안에 넣어졌다. 사각의 프레임을 유지하는 거다.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편화된 이미지들 역시 작가가 정한 프레임 안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것도 아니고, 경계 안에 위치한다는 인상이 강하다. 물론 책을 찢어버리거나 불태워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A. 책은 평균적인 형상을 갖는다. 그래서 책에 드로잉하는 작업은 형식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정형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프레임은 북 드로잉뿐 아니라 나의 다른 회화 작업에서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 고민을 담아 작년에 진행되었던 개인전에서는 프레임과 그것의 상징을 벗어나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았다. 프레임 안에 머무르는 것도 나고, 그것을 넘고 싶은 것도 나다. 그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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