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 그림 길 (28) 목멱산 ③] 장충단 뭉개고 ‘이등박문 기림 절’ 세운 나쁜 뜻은

이한성 동국대 교수 기자 2019.03.18 09:38:53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오늘은 장충단에서 출발하여 남산둘레길을 걸으려 한다. 남산둘레길은 산을 오르지 않고 거의 평지에 가깝게 산을 돌아가도록 만든 산보길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길은 조금만 벗어나 계곡길로 접어들면 많은 역사와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길이다. 한양도성 안쪽을 바라보는 필동, 회현동, 묵정동, 예장동 쪽 골자기와 마을들을 옛부터 청학동(靑鶴洞)이라 불렀다. 일석(一石) 이희승 선생의 수필 ‘딸각바리’에서 보듯 이 지역은 남산골 샌님의 마을이었다. 연암은 허생전을 통하여 이 지역에 사는 양반의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동국여지승람에서는 한양의 아름다움 열 가지(十詠)를 읊으면서 목멱상화(木覓賞花: 남산 꽃구경)을 꼽았고, 남산만을 따로 뽑아 남산팔영(南山八詠)을 손꼽았다. 아픔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남산은 완전히 왜놈들 판이 되었다. 또 군사정권 시절에는 중앙정보부가 정권의 앞잡이로서 남산을 점령했었다. 이제 남산은 아픔을 치유해 가고 있다.

명성황후 시해 때의 충절 기린 장충단을…

다행히 겸재가 그린 남산을 빌미삼아 남산둘레길로 출발이다. 1901년 선교사 게일(Gale)이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한성부 지도를 기준으로 조선시절 도성도와 일본판이 되었던 일제강점기 때 지도도 함께 보면서 길을 가자. 한성부 지도에 써넣은 번호가 답사 지점이다. 1은 박문사 터인 신라호텔, 2는 동국대/동악시단, 3은 한옥마을, 4는 천년타임캡슐광장, 5는 국립극장, 6은 노인정 터, 7은 읍백당 구지, 8은 녹천정 터, 9는 통감부 자리, 10은 일본 헌병대 / 중앙정보부 자리, 11은 남소문 터다.

 

한성부 지도에 답사 장소를 표시했다. 
박문사 자리에는 1967년 정부가 영빈관을 세웠으며 현재는 신라호텔 시설이 되어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장충단 공원 앞길을 건너 신라호텔로 향한다. 장충단이 세워졌을 당시에는 물론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길은 없었다.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는 본래 장충단의 동쪽 언덕이었으니 당연히 길이 없었다. 옛 지도를 보면 남소문동천을 따라 국립극장 앞을 지나 언젠가 없어진 남소문을 지나 지금의 옥수동으로 통용되는 한강 쪽 독서당으로 통하는 소로 길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던 장충단이 된서리를 맞은 것은 1932년이었다. 일제는 갑자기 장충단(獎忠壇)의 동쪽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 이름 붙이고 그 아래에 터를 잡아 박문사(博文寺)라는 절 겸 사당을 지었다. 무엇을 하자는 심산이었을까?

짐작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춘무(春畝)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호(號)이며 박문사(博文寺)라는 이름은 이토의 이름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왔으니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 겸 사당을 조선 땅 한가운데, 그것도 일제에 의해 죽음을 당한 이들의 충정을 기리는 장충단에 세웠던 것이다. 박문사는 이토의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에 완공되었다. 낙성식에는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와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을 비롯하여 1천여 명의 무리가 참석하였다 한다. 박문사는 정무총감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가 발기하여 세워진 曹洞宗(소토슈) 사찰로 건평은 387평이었는데, 조선을 일체화하는 것이 목표였던 그들은 설립 목적을 ‘조선 초대총감 이토 히로부미의 훈업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 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기 위해’라고 내세웠다.

조선 궁궐 뜯어내 박문사 건자재 삼았으니

가슴 아픈 일은, 건축 자재를 우리 궁궐과 관아 건물을 훼손하여 조달했던 것이다. 광화문의 석재를 뜯어다가 절 담을 쌓았고,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을 뜯어다 썼으며 남별궁의 석고각으로는 박문사 종 덮개로 사용하였다. 또한 어처구니없게도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은 뜯겨져 박문사의 정문이 되었다. 이토를 충정군(忠貞君)에 봉한 바 있는 일본 천황 히로히토(迪官裕仁)는 낙성식에 은제 대형 향로와 향화료(香華料)를 하사했다 하고, 일본 황족들은 꽃병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또 장충단은 놀이공원화 하는 한편 박문사는 성역화하는 수순을 밟았다.

1937년에는 일본군 ‘육탄 3용사’의 동상을 세워 대륙 침략을 위한 정신적 기지로 삼기도 하였고, 1939년에는 이토를 포함하여 이용구, 송병준, 이완용 등 경술국치(한일합방) 공로자를 위한 감사 위령제가 열리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의 본당. 자료사진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의 정문이 돼버린 홍화문. 조선의 궁궐을 뜯어다 박문사를 세웠으니 일제의 뜻을 알 만 하다. 자료사진
경희궁 홍화문이 박문사의 정문이 돼버렸으니, 망한 조선의 모습이 애처롭다. 자료사진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해방을 맞았고, 박문사 자리에는 1967년 정부의 영빈관이 섰다. 그러다가 1973년 기업에 불하되어 이제는 신라호텔이 되었다.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는 박문사가 있었던 터다. 옛 사진을 보면 박문사 오르는 돌계단이 있는데 지금 신라호텔 영빈관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아무리 보아도 그 계단처럼 보인다. 어찌 되었던 가슴 아픈 터가 이제는 결혼식도 열리고, 파티도 열리는 장소로 변했으니 땅은 본래 길지(吉地)와 흉지(凶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이제 길을 따라 남소문터로 향한다. 남소문은 이미 설명하였듯이 국립극장 방향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정상에 있었다. 차도를 끼고 걷기 싫으면 신라호텔 뒤로 돌아가 성벽을 끼고 가는 순성길을 이용해도 무방하다.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길 정상에 남소문터 표지판을 붙여 놓았다. 본래는 이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을 것인데 산을 깎아 길을 내었기에 낮아졌다. 남소문? 본 이도 없고 사진 한 장, 그림 한 장 남아 있지 않아 궁금하다. 다만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한때는 광희문이 남소문이라는 주장을 한 이들도 있었다.

 

겸재 작 ‘장안연월’에 이번 답사길을 표시해봤다. 
‘한양도성도’에 이번 답사 장소를 표시했다. 

남소문은 도성에서 한강 방향으로 통하는 직통코스였기에 지름길이었으나 지금과는 달리 고개도 높고 외져서 왕래하는 이가 적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도둑들이 자주 출몰하여 문제가 되었다. 옛 기록을 보자.

예종실록을 보면, 왕 1년(1469년)8월 25일 기록에 남소문 밖 도둑을 소탕하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형조(刑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어제 남소문(南小門) 밖에서 도둑의 무리가 상주(尙州)에서 번상(番上)하는 갑사(甲士) 손순생(孫順生)과 태인(泰仁)의 갑사 전영생(田永生)을 쏘고 보따리를 겁탈하고, 또 문을 지키던 선전관(宣傳官)을 위협하여 쫓았으니, 수색하여 체포하지 않을 수 없다. 잡아서 고(告)한 자를 논상(論賞)하는 사목(事目)을 속히 중외(中外)에 유시(諭示)하라’ 하였다. 그 사목에 이르기를,

‘능히 잡아서 고하는 자가 있으면, 양인(良人)은 2계급을 뛰어 올려 관직을 제수하고, 향리(鄕吏)-역리(驛吏)는 신역(身役)을 면제하고, 천인(賤人)은 영구히 양인이 되게 하고, 본디 관직이 있는 자는 2계급을 뛰어 올려 주고, 죄가 있는 자는 죄를 면제하고, 스스로 상을 받기를 원하는 자는 면포(綿布) 1백 필(匹)을 주며, 고(告)하는 자는 비록 주모자(首謀)일지라도 또한 죄를 면제하고 논상(論賞)한다’ 하였고, 병조(兵曹)에 명하여 손순생ㆍ전영생에게 1년을 복호(復戶)해 주게 하였다.


傳旨于刑曹曰: “昨日南小門外, 賊徒射尙州番上甲士孫順生, 泰仁甲士田永生, 刼掠裝橐, 又刼逐守門宣傳官, 不可不搜捕. 其捕告者論賞事目, 速諭中外.” 其事目曰: “有能捕告者, 良人超二階除職, 鄕, 驛吏免役, 賤人永良, 元有職者超二階, 有罪者免罪, 自願受賞者, 給綿布百匹, 其告者雖首謀, 亦免罪論賞.” 命兵曹, 順生, 永生, 給復一年.

또한 옛 지도에는 남소문 밖에 두 개의 고개를 기록해 놓았다. 약수동 방향으로 난 고갯길은 벌아현(伐兒峴)인데 지금의 버티고개이다. 민간의 이야기를 빌리면 인수봉의 옛 이름이 부아악(負兒岳: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모양이라서)인데 업혀 있던 아이가 성 밖으로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하여 나가려 하면 벌을 준다는 뜻으로 벌아현이 되었다는 지명 해석이다. 또 하나 고개는 소설마현(小雪馬峴)이다. 한강 쪽으로 향하는 고갯길이다. 남산 중턱을 넘어 이태원을 지나는 고개는 대설마현(大雪馬峴)으로 기록하고 있다. 설마(雪馬)란 ‘썰매’의 어원이 되는 말로 남산의 슬로프를 활용하여 썰매를 탔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이다.
 

고즈넉한 남산둘레길. 사진 = 이한성 교수

남소문에 대한 ‘풍수지리적 폐지론’

각설하고, 이런 남소문이다 보니 남소문 폐지에 대한 의견도 많았다. 풍수적으로는 24방위에서 동서남북 사이에 있는 방위 즉 간방(間方)을 건곤간손(乾坤艮巽)으로 표현하는데, 순서대로 북서, 남서, 북동, 남동을 뜻한다. 그런데 남동(손: 巽) 방향이 열려 있으면 애(兒)가 빠져 나간다 했다. 왕자 중에 일찍 죽은 애는 남소문이 열려 있기 때문이라는 풍수학생들의 주장이 왕왕 힘을 얻으니 남소문 폐지에 대한 국론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남소문이 어느 날부터 닫혔는데 폐지에 대한 반대 의견을 강력히 주장한 유생(儒生)도 있었다. 과거라고는 초시(初試)에도 붙어 본 적이 없는 유생이 겁도 없이 상소를 올렸다. 지금 읽어도 그 논리의 딱 떨어짐이 혀를 두르게 한다. 조선은 언로가 열려 있던 나라였다. 그리고 유생은 생산성은 낮을지 몰라도 논리만은 대단한 이들이었다. 조선의 과거 시험은 암기형이 아닌 논술형이었기 때문이다. 시험관이 낸 주제에 대해서 답을 내는 이른바 ‘對策(대책)’을 제시해야 했기에 유생들은 논리가 정연하였다. 긴 상소문이라 지루할지 모르겠는데 조선 유생의 수준을 알 수 있는 상소문이기에 인용해 보려 한다. 여러분은 과연 남소문 폐지 문제에서 어느 편에 서시려 하는지?

 

남소문이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지석. 사진 = 이한성 교수
1910년대 일제강점기 때의 남소문 일대 지도. 

영조 1년 (1725)1월 11일 승정원일기를 보자.

경기 용인의 유학(幼學) 안탈(安梲)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생각건대, 남소문(南小門)은 곧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신무(神武)로 화란(禍亂)을 평정하고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실 때에 승려 무학(無學)과 나옹(懶翁) 같은 무리가 모두 태조를 시운(時運)에 응하는 신인(神人)으로 여기고서 팔문(八門)의 제도를 창건하여 흉함을 피하고 길운으로 나아가는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한양에 개국한 이래로 수백 년 동안 국가가 태평하고 남북이 편안하며 훌륭한 왕손들이 번성하고 누대에 번창하여 국운이 길함만 있고 흉함은 없었으니, 이때처럼 융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종조(中宗朝)에 와서 적신(賊臣) 김안로(金安老)가 처음으로 남소문을 닫았는데, 이후로 공족(公族)이 번성하지 못하고 섬나라의 오랑캐가 창궐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거듭 남방(南方)에서 나오니 세상에서 지리(地理)를 말하는 자들이 모두 이것이 길한 문을 닫아서 생긴 재앙이라고 말합니다. 광해조(光海朝)에 이르러서는 요승(妖僧) 성지(性智)라는 자가 나와서 서북쪽의 위치에 새 문을 열었는데, 갑자년(1624, 인조2)의 난리와 정묘년(1627)ㆍ병자년(1636)의 호란이 연이어 서북쪽에서 나왔으니, 세상에서 산수(山水)를 논하는 자들이 모두 이것은 흉한 문을 열어서 생긴 결과라고 하였습니다.

아, 지리의 설은 미묘하여 알기 어려우니 지금 옛 문을 닫고 새 문을 여는 것을 가지고 국조(國朝)의 화복(禍福)이 모두 여기에서 연유한다고 한다면 신은 감히 그 설을 살펴 믿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전후 여러 번의 병화가 일어난 것이 모두 증험된 명확한 증거이니, 대저 국초(國初)에 신묘한 안목으로 정한 제도를 마음대로 고칠 수 없는 것은 이와 같은 점이 있어서입니다. 또 도성의 부실함과 실함, 백성과 물산의 이로움과 해로움으로 말한다면, 옛 문을 닫기 전에는 한강(漢江) 이북으로부터 낙동(駱洞) 및 동성(東城) 안팎 수십 리에 이르기까지 조그마한 땅도 공터가 전혀 없이 여염집이 즐비하고 사람과 물산이 번성하여 서성(西城) 못지않았던 것은 대개 장삿배들이 한강에 모여들어서 남소문 안팎부터 동성까지 모두 어물과 소금을 다루는 시장이 조성되어 생계를 위해 이익을 만드는 장소가 크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소문이 닫히게 된 뒤에는 그곳에 사는 백성들이 생업을 잃어버렸고, 사람들이 집을 짓는 것도 모두 동쪽을 피하여 서쪽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남쪽으로 한강부터 북쪽으로 관동(館洞)에 이르기까지 사람과 물산이 날로 쇠퇴하여 평시의 여염집들이 대부분 빈터가 되었습니다. 한 도성에서 동쪽과 서쪽이 부실한 것과 실한 것이 고르지 못하여 이익과 손해가 현격하게 다르니, 지리의 길흉은 논하지 않더라도 국가에서 도성 백성을 위하는 방도에서 특별히 실하거나 부실한 것에 대해서는 변통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몇 년 전에 이 문을 다시 열자는 의논이 있어서 임금께서 자문하시니 모두 찬성하여 일이 반드시 함께 이루어질 상황에 이르렀는데 삼강(三江)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그들의 생업이 분산될까 걱정하여 술사(術士)에게 몰래 뇌물을 써서 훼방하게 하여 결국 중지되었다’라고 합니다. 신은 본래 시골 유생이라서 그 당시의 실상은 모르지만 과연 이처럼 되어 버리니 도성 안 백성들이 억울하게 여기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지금도 그치지 않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새로 교화를 펴는 시기를 맞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두루 물어서 혼조(昏朝 광해군/光海君) 때의 흉문(凶門)을 막고 태평성세 때의 길문(吉門)을 연다면 한 성의 동쪽과 서쪽이 부실한 것과 실한 것이 고르게 될 뿐만 아니라 도성 백성들의 이해(利害)나 일의 체모가 합당한지 의혹을 품는 단서도 모두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길흉의 응함에서도 지난날의 명백한 증험이 있으니, 국가의 무궁한 기반이 다시 오늘날부터 시작될는지 또 어찌 알겠습니까.

또 신이 삼가 생각건대, 국가의 많은 창고가 모두 도성에서 10리나 15리 밖의 강가에 설치되어 있으니 혹시라도 중대한 일이 있게 되면 어떻게 성안으로 실어 들여서 나라의 비용에 보탬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목멱산(木覓山) 남쪽 산기슭에 대부아현(大負兒峴)과 소부아현(小負兒峴)이 좌우에 우뚝 솟아 지세가 험하고 가팔라서 절로 천연의 견고한 성이 되었는데, 남소문(南小門)은 바로 양쪽 사이에 있습니다. 그 문에서 한강과의 거리는 1, 2리쯤에 불과하며 문밖에서 강변까지 또한 수백 칸의 창고를 둘 수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두 고개 위에 작은 성을 쌓고 두 고개 사이에 창고를 설치하여 당년(當年) 경비(經費)로 쓰는 곡식은 옛 창고에 두더라도 군량으로 보관해 둘 곡식은 모두 새 창고에 저장해 둡니다. 그런 다음에 곧 남소문을 열어서 난리에 임하여 수송할 수 있도록 한다면 군량을 멀리에서 수송하는 곤란함이 없고 병사들의 식량이 부족할 염려가 없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청야(淸野)의 방도로도 삼을 수 있을 것이니, 이 어찌 가장 좋은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백성이 곤궁하고 재정이 고갈되어 갑자기 성을 쌓기가 어려우면 그 창고만을 옮기고 그 문만을 열더라도 멀리 도성에서 10리나 15리 밖에 저장해 두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습니다. 갑(甲)과 을(乙)이 품은 마음이 달라서 모두 변통하기 어렵다면 비록 성안으로 수송해 들여서 빈터에 노적(露積)하더라도 멀리 강가의 창고에 두어서 도적들의 식량에 이바지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후략)

且臣竊伏念南小門, 卽我太祖康獻大王神武定禍亂, 定鼎于漢陽時, 則有若僧無學·懶翁之徒, 俱以應時之神人, 創開八門之制, 以爲避凶趨吉之地, 而自漢陽開國以後, 數百年間, 國家昇平, 南北晏然, 螽斯麟趾, 赫世繁昌, 國運之有吉無凶者, 莫此時爲盛, 而逮至中廟朝, 賊臣金安老, 始閉南小門, 自是以後, 公族不繁, 島夷猖獗, 壬辰丁酉之亂, 疊出南方, 世之談地理者, 皆以此謂閉吉門之所祟也. 至于光海朝, 妖僧性智者出, 又闢新門於西北之位, 而甲子·丁卯·丙子之亂, 繼出西北, 世之論山水者, 皆以此爲闢凶門之所致也. 噫, 地理之說, 微妙難知, 今以閉舊門闢新門, 謂國朝之禍福, 一竝由此, 則臣不敢考信其說, 而至於前後累度兵禍之起, 皆有已驗之明證, 則大抵國初神眼之定制, 其不可任意更改者, 有如是矣. 且以都城之虛實, 民物之利害而言之, 舊門不閉之前, 則自漢江以北, 至駱洞及東城內外數十里之間, 寸地尺土, 無一空墟, 閭閻之櫛比, 人物之繁盛, 不下於西城者, 槪以商船賈舶, 分集漢江, 而南小門內外, 以及東城, 皆作渙鹽之市, 大爲生計之利窟也. 及至門閉之後, 則居民失其生理, 凡人作舍者, 皆避東而趨西, 故南自漢江, 北至館洞, 人物日就凋殘, 平時閭巷, 率多空基, 一城東西, 虛實不均, 利害懸殊, 則地利之吉凶, 有不暇論, 而在國家爲都民之道, 其偏實偏虛, 不可無變通之擧也. 臣聞頃年, 有此門還開之議, 詢謀僉同, 事至必偕, 而三江居民, 悶其生理之有分, 潛賂術士, 使之沮毁, 竟爲中止云. 臣本鄕生, 雖不知其時實狀, 果是如此, 而都下民心之憤菀痛惜, 至今未已. 伏願殿下, 當此新化之日, 廣詢僉議, 杜昏朝之凶門, 開盛世之吉門, 則不但一城東西, 應實均齊, 至於都民之利害, 事體之當否, 竝無疑惑之端, 而其在吉凶之應, 亦有旣往之明驗, 則又安知國家無疆之基業, 復自今日而始乎? 且臣竊伏惟我國家許多倉廩, 盡置於江上十里十五里之外, 脫有事機, 則其何能輸入城中, 以補其國用乎? 臣竊觀木覓山南麓, 有大小負兒峴, 雄峙左右, 地勢險傾, 自成天作之金城, 南小門, 卽其兩間也. 自其門距漢江, 不過一二里許, 自門外至江邊, 亦可容累百間倉舍, 臣意以爲, 築小城於兩峴之上, 設倉庫於兩峴之間, 當年經費之穀, 雖捧舊倉, 而捧留軍餉, 則盡儲新倉, 卽開南小門, 以爲臨亂轉輸之地, 則糧無遠輸之艱, 兵無乏食之患, 而一以爲淸野之道矣. 玆豈非萬全之良策乎? 如以爲民窮財竭, 猝難築城, 則雖祗移其倉, 祗開其門, 猶勝遠儲於十里十五里之外也. 如其甲乙携異, 皆難變通, 則雖輸入城中, 露積于空地, 決不可遠置江倉, 以資其盜糧也.(후략)
 

남산둘레길 지도에 이번 답사 코스를 표시해봤다. 
필동 길의 이정표들. 사진 = 이한성 교수

논리를 풍수지리-모략이 이기다

안탈 같은 이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남소문은 결국 닫히고 말았다.

이제 남소문 터를 떠나 남산둘레길을 걷는다. 그 동안 다녀 보았던 성벽 따라 걷는 순성길은 버리고 둘레길과 그 사이 사이 골짜기를 다녀 보려 한다.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여러 기록에 이 골짜기에서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길은 편안하고 아름답다. 눈이 오면 눈 온대로, 낙엽지면 낙엽진 대로, 꽃필 때면 화사해서 좋은 길이다.

 

조선 시대 당시에 노인들이 많이 모였다는 노인정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 사진 = 이한성 교수
노인정 표지석 건너편 산기슭 바위에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국립극장 지나고, 석호정도 지나고, 동국대 갈림길도 지나고, 두 번째 충무로역 1km 이정표가 나타나면 이정표 따라 골자기 길로 내려가자. 첫 건물이 나타나면서 건물 앞에 ‘노인정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을 만난다. 조선말 풍양 조씨 세력의 중심에 섰던 조만영(1776~1846)의 정자가 있었던 곳이다. 조만영은 고종을 왕으로 뽑아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종식시킨 신정왕후 조대비의 아버지이다. 조만영의 집은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자리였지만 문우와 교유하기를 좋아해 남산에 정자를 짓고 주로 여기서 시간을 보냈다 한다. 정자는 많은 노인이 항상 모였다고 해서 노인정(老人亭)으로 불렸다는데 노인정에서는 청일전쟁(1894~1895)이 일어나기 2개월 전, 일본의 강요로 7월 10일부터 7월 15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조선 대표 신정희(申正熙)와 일본의 오오토리(大鳥圭介) 공사 간에 회담이 진행되었던 갑오경장의 주내용이 되는 안건이 정해졌다 한다. 이를 가리켜 ‘노인정 회담’이라 부른다 한다.

표지석 건너편으로는 연합유통이라는 회사가 있고 그 회사 건물 뒤편 산기슭 바위에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다. 탁본을 뜨지 않고는 해독(解讀)이 어려운데 다행히 선행 연구자의 자료가 있어 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 이 각자 아래쪽 연립주택 뒤 산비탈에는 ‘조씨노기(趙氏老基)’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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