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규상 법 칼럼] 양승태 보석재판에 비친 불평등한 ‘무기 대등의 원칙’

문규상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 기자 2019.04.01 09:46:06

(CNB저널 = 문규상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자신의 보석심문기일에서 검찰을 향해 아무런 메모도 없이 13분간에 걸쳐 200자 원고지 16장 분량의 날선 비판을 작심하고 쏟아내면서 방어권 보장을 이유로 불구속 재판을 받게 해 달라며 요청하였으나 기각되었습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아직 재판을 시작도 하기 전이라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보았거나, 사법부 수장이 사법행정권을 남용하는 등 혐의가 중대한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관련 보도를 보면 “검찰은 영민하고 사명감에 불타는 수십 명의 검사를 동원하여 법원을 이 잡듯 샅샅이 뒤져 내 앞에 장벽처럼 가로막고 있는 20여만 쪽의 증거서류를 찾아냈고, 조물주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300쪽에 달하는 공소장을 만들어냈다”, “무소불위의 검찰과 마주서야 하는데, 내가 가진 무기는 호미 자루 하나도 없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으면 된다고 하나 본인도 모르는 걸 변호인이 어떻게 알겠느냐”, “정의의 여신상이 들고 있는 ‘천칭’의 의미가 ‘공평이 없는 재판에서는 정의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공평과 형평이라는 형사소송법 이념이 지배하고 정의가 실현되는 법정이 되길 원할 뿐이다”는 등의 말을 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양 전 대법원장이 13분간에 걸쳐 쏟아낸 말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형사소송법 상 양쪽 당사자인 검사와 피고인이 법정에서 법적 다툼을 하려면 대등한 지위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무기대등(武器對等)의 원칙(原則)’을 주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피고인에게 묵비권을 인정하는 이유

형사소송에서 국가기관의 힘을 위임받은 검사는 막강한 수사권과 방대한 법률지식을 갖고 있는 반면에 반대 당사자인 피고인은 법률지식은 물론 모든 면에서 검사에 비해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어 대등한 입장에서 맞서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형사소송법에서는 피고인에게 법률적 지식을 갖춘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를 보장해 주고,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은 하지 않을 권리, 즉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 등을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피고인에게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를 인정해 주면 검사와 피고인 측의 무기가 대등해지고 형평과 공평의 관점에서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는 더 심도 있게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와 관련하여 통상의 경우 ‘변호인’에는 피고인이 선임 비용을 부담하는 ‘사선 변호인’과 국가에서 무료로 변호인을 선정해 주는 ‘국선 변호인’이 있는데 “피고인이 구속된 때, 미성년자인 때, 70세 이상의 자인 때, 심신장애의 의심이 있는 자인 때, 사형, 무기 또는 단기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기소된 때에 피고인에게 변호인이 없는 경우”에만 법원이 직권으로 ‘국선 변호인’을 선정해 주도록 법에 규정(형사소송법 제33조 제1항)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필요적 변호 사건’이 아닌 경우에는 ‘변호인 없이’ 재판이 진행되는 경우도 있어 ‘무기대등의 원칙의 사각지대’가 생길 수 있으며, 국선 변호인이 선임되는 사건의 피고인은 대체로 사회적 지위가 열등하고,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으며, 자기 방어를 기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국선 변호인의 법조경력이 ‘사선 변호인’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짧고, 사건에 대한 열의에도 차이가 나서 높은 양질의 서비스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는 세평이 많기에 무기대등의 원칙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도 현실입니다.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혐의를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월 23일 오전 서울 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여전히 존재하는 변호의 사각지대

뿐만 아니라 ‘사선 변호인’을 선임하는 경우에는 통상 ‘변호인의 조력’을 통하여 ‘무기대등’의 위치에 설 수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이 또한 엄밀히 말하자면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의 경우처럼 공소장이 300쪽에 이를 정도로 범죄혐의가 방대하고 쟁점이 많은 사건이거나, 증거기록이 20여 만 쪽에 달하여 이를 500쪽짜리 책으로 제본한다면 400권이 넘는 분량이라서, 읽어보는 데 걸리는 시간만 하더라도 계산이 안 될 정도의 사건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입니다.

특히 최근 적폐수사와 관련해 검찰 수사기록만 10만 쪽이 넘어가는 이른 바 ‘트럭기소’가 이어지면서 종이 기록 문제는 피고인과 변호인의 방어권을 제약하는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수사기록을 복사하기 위하여 법원, 검찰의 복사기를 예약하는데 예약이 밀려 2-3 주가량 기다려야 하는 일이 빈번하고, 편철된 수사기록을 해체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방대한 분량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복사해야 하고, 기록이 끈으로 묶여 있어 접히는 부분은 제대로 복사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본 기록에 컬러로 된 사진 증거 등은 복사하면 모두 흑백이 되기 때문에 이들 증거를 확인 분석하는데도 어려운 점이 많은 점 등을 거론하며 ‘수사기록조차 제때 제대로 보기 힘든 피고인과 변호인이 무슨 수로 막강한 공권력과 수사인력을 등에 업은 수사기관에 대응해 맞설 수 있겠느냐’면서 수사기록의 전자화 도입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최근 법률신문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사법행정권 남용혐의로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사건은 20만 쪽에 달하는 수사기록을 복사하는 데만 2주 이상의 시간이 걸렸고, 복사비만 1,000만 원 이상 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수사기록 복사와 관련된 불만을 모두 무시하더라도, 만약 1명의 변호사가 20만 쪽에 달하는 수사기록을 모두 읽고, 증인신문사항을 작성하고, 1주일에 3-4회씩 열리는 재판에서 직접 증인신문을 하려 한다면 매일 밤낮을 꼬박 새워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양 전 대법원장 사건에서 검찰의 수사를 받은 전, 현직 판사만 100명에 달한다고 하니 100명에 대한 진술조서와 관련 증거자료의 검토, 100명의 증인에 대한 신문사항 작성 및 100명의 증인에 대한 법정에서의 직접 신문이 구속기간(통상 1심은 6개월, 2심 및 3심은 각 4개월, 최장 각 심급 6개월) 이내에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론 재판’ 아니라 ‘무죄 추정 원칙’ 지켜져야

그러나 검찰은 그동안 구속기소한 이후에도 추가수사를 계속하여 먼저 기소된 범죄사실에 대한 법정 구속기간이 만료될 즈음에 추가수사에 의해 확인된 범죄사실에 대해서 추가로 병합기소를 하고, 법원은 추가 기소된 범죄사실에 대해서 다시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방법으로 사실상 법정 구속기간을 늘리는 편법을 사용하여 왔고, 이는 국정농단, 적페수사 사건의 피고인들에 대한 재판 등에서도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물론 피고인이 많은 숫자의 사선변호인을 선임하여 역할을 분담하여 재판에 임할 수는 있겠지만 그 비용은 기업이나 재벌 급 정도의 피고인이 아니라면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에도 ‘무기대등의 원칙’이 제대로 지켜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의 경우 한 번도 재판이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보석청구’를 한 것이었기 때문에 국민감정 차원에서 이를 비난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나 우리 헌법과 형사소송법에는 ‘무죄 추정의 대원칙’이 엄연히 살아있고,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도 ‘형식적인 조력’이 아닌 ‘실질적인 조력’을 받을 수 있어야 정의의 관점에서 ‘형평’과 ‘공평’의 개념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증거인멸을 우려할 수 있으나, 형사소송법(95조)에서 요구하는 증거인멸 우려의 정도는 통상의 ‘우려’ 정도가 아닌 실제로 ‘죄증을 인멸하거나 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경우’와 같이 엄격한 요건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증거기록이 20여만 쪽에 이르는데 더 이상 인멸할 증거가 있을지 상상이 잘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련자들의 진술번복 시도에 대한 우려도 법에서 요구하는 바와 같이 ‘그런 시도가 있거나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에 대한 엄격한 증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기 대등의 원칙을 나타낸 14세기 중엽 독일의 그림. 결투를 하는 두 사람은 동등한 무기를 가져야 하며, 햇빛 역시 어느 한 쪽에 유리 또는 불리하지 않도록 고르게 비추는 장소를 택해야 한다는 점을 도해하고 있다.  

그 밖에 국민감정을 앞세운 여론, 특히 ‘SNS’상에서의 비난 여론 등이 마음에 걸리겠지만 이를 이겨내야 사법부 독립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므로 이번 기회를 통하여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을 엄격하게 실행해 보려 했다면 어땠을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차제에 검찰 조서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은 후 조서열람에만 이틀에 걸쳐 13시간이나 걸려 화제가 된 바도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전례를 찾기 힘든 ‘1박2일 조서 검토’에 대해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에 대비한 ‘수사 내용 암기’라는 비난도 하지만 피의자와 변호인은 조사 중 메모는 가능하지만 이를 밖으로 가져가지는 못하고, 또한 재판에 넘겨지기 전까지는 검찰의 수사기록을 전혀 보지 못하는 점에 비추어 이를 마냥 비난만 할 게 아니라 형사소송법상 피의자의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내가 조사 당해보니
검찰 수사의 문제 알겠다”는 판사들


더구나 재판거래 및 사법농단 관련 수사를 받고 나온 판사들의 이야기가 실린 언론 보도에 의하면 검찰은 전 현직 판사들에 대해서 참고인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당신도 죄인이 될 수 있다’는 미묘한 언급을 통한 은근한 심리적 자백을 유도하거나, 진술조서를 작성하면서 본인의 진술 중 검찰에 유리한 부분만 기술하거나 실제 진술의 의미와 다른 뉘앙스의 진술을 한 것처럼 기재한 것 등을 언급하며 ‘설마 이럴 줄은 몰랐다’는 불만을 토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직접 경험해 보니 그간 변호인들이 지적한 검찰조서의 문제점을 오히려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검찰조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과거부터 많은 변호사들이 줄기차게 지적해 왔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검찰이 의도적으로 조서를 조작했다기보다는, 의뢰인이 자신의 다른 약점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검찰의 추궁에 부합하는 진술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사건에 휘말리기 싫어 조사받는 것을 귀찮게 생각한 나머지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에서 조서를 꼼꼼히 읽어보지 못한 데 기인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의외로 많은 의뢰인들이 본인의 진술임에도 자신의 의도는 이런 내용이 아니었다거나 강압에 가까운 추궁에 어쩔 수 없이 진술했다는 억울함을 토로한 것도 사실입니다.

‘없는 사람들’에게 무기 대등의 원칙을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 고민해야


그렇지만 법원은 그러한 변호인들의 주장을 수용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법원이 스스로 검찰의 수사 대상자가 되었던 경험을 통해서 형사법 원칙에 충실하게 재판을 진행해 준다면 형사재판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러니하지만 전적으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공(功)으로 돌려야 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검찰조서의 문제점은 이제 제법 많이 알려진 상황이라 대개의 사람들은 조사 단계에서부터 변호사를 선임하여 조사를 받고 꼼꼼히 조서를 체크하며 방어권을 행사합니다. 하지만 변호사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무방비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법적 불평등의 해소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실질적인 무기대등의 원칙’이 준수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 법무법인 대륙아주 문규상 변호사는 1978년 서울법대 졸업, 1987년 검사로 임용되어 ‘특수통’으로서, 변인호 주가 조작 및 대형 사기 사건, 고위 공직자 상대 절도범 김강용 사건, 부산 다대/만덕 사건, 강호순 연쇄 살인 사건 등을 맡아 성과를 냈고, 2003년의 대선 자금 수사에서도 역할을 했다. 2009-2014년 대우조선해양의 기업윤리경영실장(부사장)을 역임하며 민간 부패에 대한 경험도 쌓았다. 2013년 성균관 대학교 유학대학원, 2014년 이후 금곡서당에서 수학하며 유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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