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민족기업 교보생명, FI와 풋옵션 한판승부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vs FI 분쟁 내막 들여다보니…

정의식 기자 2019.04.10 14:35:53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기념해 광화문에 위치한 교보빌딩 외벽에 독립운동가들의 그래피티가 설치됐다. 사진 = 연합뉴스

올해 IPO(기업공개)를 준비 중인 교보생명이 신창재 회장과 어피니티 등 재무적 투자자(FI)들과의 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노조와 소속 설계사들 사이에서는 지난 2012년 신 회장이 ‘백기사’로 영입한 FI들이 당시 합의된 풋옵션을 빌미로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제시해 사실상 교보생명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반면, FI측은 신 회장이 약속된 계약을 차일피일 미뤄 풋옵션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과연 교보생명은 위기를 이겨내고 IPO 성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교보생명 설계사 “백기사가 흑기사로 돌변했다”

지난 3월 20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자신을 교보생명 설계사라고 밝힌 조용신 씨의 “60년 민족기업 교보생명이 투기자본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조씨는 “교보생명은 현 신창재 회장의 조부인 신예범, 부친 신용호 교보생명 창업자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1958년 창립 이후 민족기업으로 60년 보험 외길을 걸어왔으며, 교육보험, 교보문고 등을 통해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힘써온 민족기업”이라며 “상속과정에서도 1840억 원이라는 역대 최고 상속세액을 성실 납부한 타의 모범이 되는 회사”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러다 보니 대주주로서의 지분이 감소되어 백기사 역할을 자처한 FI들을 주주로서 받아들였는데, 풋옵션을 구실로 이제는 흑기사로 돌변하여 멀쩡한 60년 민족기업을 하루 아침에 경영권까지 위협하는 만신창이로 만들었다”며 “민족기업 교보생명이 투기자본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FI들이 풋옵션을 철회하도록 국민청원에 동참해주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교보생명 설계사의 청와대 국민청원. 사진 = 청와대

그간의 청와대 청원들이 대개 경영진의 전횡과 갑질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던 것과 달리 이 청원은 종업원이 오너 일가의 경영권 보호를 요청하는 형태라 눈길을 끌었다. 20일 올라온 이 청원에 4월 10일 현재 4600여 명이 동참했으며, 최근에는 노동조합도 합세해 여론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

5일 교보생명 노동조합은 신창재 회장과 투자금 회수 문제로 중재 절차에 돌입한 재무적 투자자(FI)들을 규탄하는 대국민 서명운동에 돌입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서 노조는 거액의 풋옵션(특정 가격에 팔 권리)을 행사한 FI들을 ‘단기차익을 노리는 악덕 투기자본’으로 규정하고,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으로 회사를 삼키려 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60만 명의 서명을 받아 청와대에 전달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FI에 넘긴 지분 24%, IPO 늦어지며 갈등 증폭

노조 측의 주장처럼 교보생명은 현재 창업주 2세인 신창재 회장과 어피니티 등 FI가 진행 중인 풋옵션 분쟁에 휘말려있다.

분쟁의 발단은 지난 2012년 대우인터내셔널이 포스코에 인수되면서부터다. 원래 교보생명은 대우그룹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왔고, 대우그룹은 교보생명의 지분 24%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공식 해체되면서 이 지분은 대우인터내셔널 소유가 됐다. 대우인터내셔널은 1999년 워크아웃에 돌입한 ㈜대우가 2000년 무역 부문을 독립시켜 설립한 종합상사 기업이다. 하지만 대우인터내셔널 역시 부침을 겪었고, 결국 2012년 포스코에 인수돼 포스코대우(현 포스코인터내셔널)가 됐다.

 

이 과정에서 포스코는 대우인터내셔널이 보유한 교보 주식 24%를 시장에 매물로 내놨다. 국내 보험업계 3위인 교보생명의 경영권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의 지분이 매물로 나오자 눈독을 들인 건 메리츠, 한화 등 경쟁 생명보험사들이었다. 이에 교보생명은 경영권 보호를 위한 ‘백기사’로 어피니티 등의 FI를 끌어들이는 방안을 선택했다.

교보생명 주주 현황. 사진 = 교보생명

2012년 9월 신 회장은 어피니티에퀴티파트너스(지분율 9.05%), IMM(5.23%), 베어링(5.23%), 싱가포르투자청(4.50%) 등 4곳의 FI와 주주간 계약(SHA)를 체결했다. 4곳의 FI는 대우인터내셔널이 보유한 교보생명 지분 24%를 주당 24만 5000원(총 1조 2054억 원)에 각기 인수한 상태였다. SHA의 골자는 △신 회장이 3년 이내에 교보생명의 IPO를 성사시켜 FI들이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도록 하고, △만약 교보생명이 2015년 9월까지 IPO를 하지 못할 경우, FI들은 일정한 가격에 해당 주식을 신 회장에게 되팔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교보생명의 IPO는 차일피일 미뤄졌고, 결국 지난해 10월 FI들은 주당 약 40만 9000원의 가격을 적용해 총 2조 122억 원에 주식을 되사라는 내용의 풋옵션을 신 회장에게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신 회장은 이 금액이 지나치게 높다며 응하지 않았다. 신 회장 측은 풋옵션 행사 당시의 시세인 주당 20만 원 내외가 적정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양측의 지리한 협상이 이어졌지만 타협은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지난 3월 20일 FI들이 신 회장을 상대로 대한상사중재원에 중재를 신청하면서 교보생명의 IPO는 미궁에 빠져들게 됐다. IPO를 위해서는 금융당국의 사전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대주주 간 갈등은 결격 사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중재 패소하면 신 회장 경영권 지키기 어려워…

일반적으로 대한상사중재원의 중재결과는 항소가 불가능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법원의 확정판결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중재 절차는 최소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걸리므로 올해 안으로는 중재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상사중재원에서 신 회장에게 불리한 중재결과, 이를테면 풋옵션 계약에 따라 FI들이 요구하는 2조 원 내지 그에 준한 가격으로 해당 지분을 신 회장이 되사야 한다는 판결이 나온다면, 신 회장은 이를 이행해야 한다. 이 경우 신 회장은 자신이 보유한 33.78%의 지분 중 일부를 처분해야 할 가능성이 높고, 이는 교보생명 경영권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신 회장은 중재보다는 FI들과의 협상에 방점을 찍고 있다. 앞서 신 회장은 자산담보부채권(ABS) 발행, FI 지분의 제3자 매각, IPO 후 차익보전 등 3가지 타협안을 FI측에 제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신 회장은 계속 협상을 진행한다는 입장이고, 합의가 이뤄질 경우 중재절차는 중단된다.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사진 = 교보생명

이외에 신 회장은 SHA 무효 소송을 제기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 회장이 교보생명 대주주지만 IPO 결정 권한은 이사회에 있으므로, SHA의 IPO 조항 자체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조항이었다는 주장이다.

신 회장의 지분을 신한‧KB‧KEB하나 등 대형 금융지주사에 매각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으나, 이들 역시 교보생명 규모의 거대 보험사를 인수할 경우 국제회계기준(IFRS)에 따른 BIS 비율 맞추기가 쉽지 않아 난색을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신 회장이 여러모로 불리한 입장에 처했다고 보는 분위기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매번 IPO를 시도할 때마다 시장 상황 등으로 연기됐던 것이 결국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며 “이제라도 양측이 합의해 IPO를 성사시킨 후 이익을 나누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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