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국민연금 ‘마중물 효과’가 두려운 이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 개미들과의 시너지가 핵심

손정호 기자 기자 2019.04.15 10:01:07

재계와 금융투자업계에서 국민연금의 첫 번째 ‘스튜어드십 코드’ 시행에 대한 평가가 한참 진행되고 있다. 국민연금의 반대로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이 대표이사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보통 5~10%대의 주식을 갖고 있는데, 다른 소액주주들이 합세할 경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말 대한항공 주주총회장 모습. 사진 = 연합뉴스

(CNB저널 = 손정호 기자)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주주권행사지침)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의 사내이사 자리를 잃게 되면서, 내년 슈퍼주총 시즌(3월)에 이 제도가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한 관심이 벌써부터 높아지고 있다. 한차례의 소나기로 끝날까, 아니면 변화의 시작일까.

현재 재계와 금융투자업계에서는 국민연금공단의 첫번째 ‘스튜어드십코드(SC·Stewardship Code)’에 대한 평가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스튜어드십코드’는 주인의 집을 지키는 집사(Stewardship)처럼, 국민의 돈을 관리하는 연기금이 투자한 기업의 주주총회에서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도록 한 자율지침을 이른다. 국민연금은 작년 말 이 제도를 도입했고, 지난달 주총시즌에 처음으로 이를 시행했다.

재계에서는 이를 두고 우려와 안도가 교차하고 있다. 우선 우려는 대한항공 주총에서 총수인 조양호 회장이 낙마 한데서 기인한다.

대한항공의 정관은 참석주주의 3분의2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사내이사 연임안을 승인하도록 하고 있다. 대한항공의 지분구조를 살펴보면, 지주사인 한진칼(29.96%) 등 특수관계인 지분이 33.34%다. 국민연금은 2대주주(11.56%)다.

조 회장 일가는 두 딸(조현아 전 사장·조현민 전 전무)과 부인(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의 갑질과 횡령논란 등 여러 가지 악성이슈들이 이미 퍼진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국민연금이 조 회장의 연임에 반대하면서, 이 안건은 찬성 64.1%, 반대 35.9%로 부결됐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국민연금(11.56%) 외에도 24% 넘는 주주들이 반대표를 던졌다는 점. 이는 시민사회와 노동계, 개미주주들의 반발이 상당이 컸음을 방증한다. 이런 점에서 국민연금이 여론에 못이겨 반대표를 던졌을 가능성도 있다.

이로 인해 조 회장은 20년만에 대표이사 자리를 잃었다. 연기금의 반대에 낙마한 첫 번째 총수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반대로 재계가 안도하는 이유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미풍(微風)으로 그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실례로 최태원 SK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은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통과됐다. 국민연금의 지분율이 미미해 의견이 관철되지 못한 것.

 

금융투자업계에서는 국민연금의 첫 번째 ‘스튜어드십 코드’ 시행이 가져올 변화에 대해 기업이 시장과 소통하려고 하는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관치금융이라는 우려는 지나치지만, 제도적 보완장치를 마련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지난 2일 서울 국회에서 열린 ‘국민연금 스튜어드십코드 무엇이 달려졌나’ 토론회 모습. 사진 = 연합뉴스

국민연금은 사외이사와 감사선임안 등에도 반대의사를 많이 표명했지만, 회사의 입장대로 통과된 경우가 많았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분식회계 논란으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국민연금은 전체 안건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지만, 모두 원안대로 통과됐다. 다른 주주들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는 얘기다.

기아자동차는 한국전력 땅 매입 당시 문제로, 남모 가천대 석좌교수가 표적이 됐지만 이 또한 유야무야 넘어갔다.

현대건설은 분식회계 감시 소홀 논란으로 사외이사 2명(박성득·김영기)이 반대에 직면했지만 원안대로 통과됐다.

효성은 분식회계 감독 소홀의 이유로 손병두 전 경제인연합회 부회장과 박태호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의 사외이사, 최중경 공인회계사회 회장의 감사위원이 재선임에 곤혹을 치렀지만 결국 연임에 성공했다.

신세계는 원정희 법무법인광장 고문의 사외이사 선임이 문제였다. 광장이 신세계와 이마트의 온라인 사업부문 분할·합병 업무를 맡아 독립성을 헤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안대로 처리됐다.

소나기일까, 변화의 시작일까

이처럼 국민연금의 첫 도전이 1승과 많은 실패로 끝난 가운데,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앞으로의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국민연금 스튜어드십코드 참여 후 첫 주주총회 무엇이 달라졌나?’는 이런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금융투자업계와 언론 등 100여명이 참석해 관심을 보였다. 변화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우선 조명현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원장은 “국민연금이 나서면서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하는 등 시장과 소통하려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순기능에 대한 기대감도 높았다. 정상영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변호사)은 “이번 시도에 대해 연금사회주의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의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 문제를 해결하고, 투명한 책임경영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송민경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스튜어드십코드센터 센터장은 “기관투자자가 반대한 안건의 가결 여부만으로 성공 또는 실패라고 말하는 것은 설익은 판단”이라며 “우리 기업들은 계열사를 활용해 대주주의 지분율이 높다. 외부투자자의 주주제안이 성공하기 힘든 제약요소가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신(新) 관치경영으로 이어질까 우려도 제기됐다. 이에 대해 송 센터장은 “국민연금 내부기관 사이에서 주총시즌에 대비하기 위한 역할 나누기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며 “민간 운용사에 이를 위임할 때는 엄격하게 선정해 투명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원장은 CNB에 “스튜어드십 코드는 이번에 첫 발을 내디뎠다”며 “앞으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주주행동주의가 강화되고 소액주주의 주주제안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시장과의 지나친 마찰을 줄이는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일련의 흐름을 종합해보면, 국민연금 지분의 많고 적음을 떠나 어느 정도 ‘마중물 효과’를 내느냐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한항공의 경우 국민연금이 2대주주이긴 하지만 지분율이 11.56%에 불과했는데도 반대 주장을 관철시켰다. 결국 시민사회 및 개미주주들의 여론과 국민연금이 어떻게 시너지를 내느냐에 따라 어느 정도 폭발력을 가질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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