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31) 목멱산 ⑥] 제갈량의 지혜와 조지훈의 詩情 기리는 남산길

이한성 동국대 교수 기자 2019.04.29 09:56:30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오늘은 ‘그림 1’로 표시한 남산둘레길을 중심으로 답사길을 나서 보려 한다.

이번에 알게 된 일인데 일제강점기부터 군사정권에 이르는 동안 어두웠던 남산의 역사를 되새기는 답사 일정이 많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마도 600년 남산 역사에서 최근 100여 년의 역사 길일 듯싶다. 필자도 시간 내어 한 번 참여해보고 싶다. 남산 전문가가 아닌 필자는 오늘 가는 길을 이분들의 자료와 중구문화원에서 발행한 여러 자료들에 힘입고 평소 필자가 관심 가지고 있는 옛 글들을 더듬어 가 보려 한다.

우선 오늘 살펴볼 길을 서울시가 펴낸 남산둘레길 지도에 표시해 보았다.

① 녹천정(綠泉亭) 자리인 기억의 터에서 출발하여 ② 읍백당(挹白堂) 터 ③ 지도에만 남은 남학(南學) ④ 중앙정보부 사무동이었던 서울시 소방재난 본부 ⑤ 중앙정보부장 관사였던 문학의 집, 산림문학관 ⑥ 통감부 터이며 김익상 의사 의거지였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 ⑦ 일제의 노기신사 터였던 리라초교 ⑧ 일제의 경성신사였던 숭의여대 ⑨ 반공청년운동비와 부엉약수 ⑩ 와룡묘 ⑪ 조지훈 시비를 돌아보는 코스로 정했다.

겸재의 ‘필운상화’에는 꽃피는 이 계절의 목멱산이 따스하게 자리잡았다. 일곱 선비는 이미 자리를 잡았고 한 선비는 사동을 데리고 방금 도착했다. 언덕 아래에는 두 선비가 말에서 내렸다. 담소 중인 선비들과 목멱산 사이에는 집들이 고요하다. 황사도 미세먼지도 없다, 아마도 다방골과 남산골일 듯 싶다.
 

그림 1. 이번 답사길의 그림 지도.

한명회의 집이 있었던 녹천정 일대

지난 번에 이어 기억의 터에 자리했던 녹천정 터를 떠난다. 녹천정 자료사진에 서 있던 노거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안내판에는 은행나무 400년, 느티나무 450년의 나이를 기록해 놓았다. 본래 이 자리 아래쪽에는 한명회의 집이 있었다 한다. 기록에는 이집 서쪽 언덕에는 석간천(石間泉)이 있었으며 물맛이 좋고 또 세조(世祖)가 마셨기 때문에 어정(御井)이라 하였다 한다. 그 위에는 소조당(素爛堂)의 유지(遺逃)가 있었는데 뒤에 후조당(後摘堂)이 되었다가 다시 녹천정(綠泉亭)이 되었다 한다.

이 후조당을 중심으로 한 일대는 한명회의 후손 및 종인(宗人)들이 살면서 이곳 남산기슭 경치 좋은 곳에 자주 모여 난정수계회(蘭亭修契會)를 하였기에 마을 이름을 난정이문동(蘭亭里門洞) 또는 난정동(蘭亭洞)으로 부르다가 난동(蘭洞)으로 약칭되었다 한다.

 

녹천정의 과거 모습 자료사진. 
녹천정 터의 노거수(늙고 큰 나무). 사진 = 이한성 교수

기억의 터에서 길을 따라 내려오면 작은 정자를 만난다. 안내 표지석에 읍백당(挹白堂) 터라 써 놓았다. 안내석 내용을 요약해 옮기면,

“광해군 때 영의정 박승종과 그의 차남 읍백당 자응(自凝)이 살던 집터이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을 극력 반대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경기도 관찰사였던 장남 자흥(自興)의 군사행동을 중지시키고 아들과 함께 자결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좋은 자리’를 자손들에게
몰아주려 장난치는 지배층의 못된 행태


퇴우당(退憂堂) 박승종(朴承宗, 1562~ 1623)은 역사에서 거의 지워진 인물로 우리에게는 낯설다. 그는 광해군 때 권력을 쥔 집권파인 대북(大北)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다. 강경파 이이첨의 딸은 그의 며느리였으며 큰아들인 자흥(朴自興, 1581~1623)의 딸은 광해군의 세자빈이었으니 권력의 핵심 중 핵심이었다. 그의 아들 자흥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 대북파 자제들이나 연관된 인물들이 대거 급제하였다. 그 과거 합격자들에 대해서는 ‘자서제질사돈방(子壻弟姪査頓榜)’이라는 야유의 말들이 떠돌았다. 아들, 사위, 동생, 조카, 사돈인 급제자 방(榜: 명단)이란 말이다. 요즈음 언론에 오르내리는 OO씨 자제 부정 취업 같은 사건이란 이야기인데,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의 행태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온건파였던 박승종은 이이첨과는 달리 인목대비를 옹호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반정이 일어나자 관찰사였던 아들과 함께 광주에서 목매어 자살하였다. 아마도 반정 군을 저지하기 위해 군사행동에 나서려던 이들을 저지했던 것 같으며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결하였다.

 

읍백당 터에 세워 놓은 작은 정자. 사진 = 이한성 교수

그 후 그의 집은 지켜지지 못했는데 200여 년 뒤 정조 18년(1794) 7월 일성록에는 읍백당 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집터는 민가들의 집터가 되었다가 군영(軍營)의 활터가 되었던 것이다. 내용을 보면 이곳에 세워진 총융청의 활터가 호화판이라고 심하게 씹은 부수찬 이석하(李錫夏)의 상소에 대한 총융사 정민시(總戎使 鄭民始)의 반론이다.

“이곳은 읍백당(挹白堂)의 옛터였으니 이곳에 민가를 설치한 지는 이미 수백 년이 지났습니다. 중간에 수어청이 영문을 설치하면서 이곳에 사정을 건립하고 담장을 둘러 경계를 정하였다가 광주(廣州)로 출진(出鎭)할 때에 영해(營廨)는 균역청으로 이설(移設)하고 사정은 사가에 팔았는데, 사정 앞에 다시 집 한 채를 지어 번갈아 살아온 지가 또한 여러 해 되었습니다. 옛사람들은 지금 사람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주도면밀하고 신중하였으니 만약 조금이라도 타당하지 못하거나 불편한 단서가 있었다면 결단코 이 땅에다가 터를 닦고 집을 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신이 설치한 것은 애당초 영사(營舍)를 넓혀서 지은 것이 아닙니다. 사정은 옛 수어청의 사정을 수리한 것이고 담장은 수어청의 옛터를 따라서 수축한 것입니다. 땅은 하나인데 옛날에는 읍백당이었고 중간에는 수어청이 되었으며 근래에는 민가가 되어 서로 전해 온 지가 수백 년이지만 상소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일이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此蓋挹白堂舊基則是地之設置家舍已過數百年中聞守禦廳之設營也建射亭於此繚以垣墻定其經界及出鎭廣州之時營廨則移設均廳射亭則賣與私家而更建一屋子於射亭之前遞相奠居亦多年所古人之周詳謹愼不比今人苟有一分未安未便之端決不當開基建舍於此地今臣之所措置者初非廣設營舍射亭卽守廳之舊亭而修葺之垣墻從守廳之舊址而修築之地是一也古而爲挹白堂中而爲守禦廳近而爲私家相傳累百年未聞有云云之說)

4부학당 중 남학 있던 남산

이렇게 내려오던 읍백당 터는 일제 치하에서는 일본인들의 집터가 되었다가 해방 후 우리 손에 돌아왔다.

읍백당 터 표지석이 있는 정자에는 또 하나의 표지석이 있다. ‘남학동 마을마당’이라 쓴 표지석이다. 무슨 말일까? 옛 지도를 보면 읍백당 아래에 남학(南學)이 표시되어 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남학이라는 국립 중고등학교쯤 되는 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건국 후 유학을 이념으로 하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교육기관 건립에 힘을 기울였다. 대학, 대학원에 해당하는 성균관을 만들고 한양 땅 동서남북 중앙에 5부학당을 두려고 기획하였다. 결과적으로는 북학(北學)은 세우지 못하고 동학(東學), 서학(西學), 남학(南學), 중학(中學) 이렇게 사부학당(四部學堂)을 두는 데 그쳤다.

세조실록에 보면 1466년(세조 12년)에 “동부 유학(東部儒學)을 동학(東學)으로 일컫고, 겸교수관(兼敎授官)을 고쳐서 교수(敎授)로 하고, 겸훈도관(兼訓導官)을 훈도(訓導)로 하여서 모두 녹관을 만들었다. 남학(南學)·서학(西學)·중학(中學)도 같았다.(東部儒學稱東學, 兼敎授官改爲敎授, 兼訓導官爲訓導, 竝作祿官. 南, 西, 中學同)”.

이와 같이 일찍이 교육 시스템을 정비하고 국비로 인재를 키웠던 것이다. 지금도 교보문고 뒤 작은 개울을 중학천(中學川)이라 부른다. 엣 수성국민학교 쯤에 중학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내려온 길을 거슬러 다시 남산 쪽으로 방향을 튼다. 옛 교통방송 자리는 한창 땅을 파내고 공사 중이다. 그 앞쪽 우뚝한 건물은 서울시 소방방재본부다.
 

통감부 터에 대한 재건축 공사가 진행 중이다. 사진 = 이한성 교수
현재 소방재난본부로 쓰이고 있는 옛 중앙정보부 건물. 사진 = 이한성 교수

중정 행정 건물에도 유치장 있었다니

앞쪽으로는 적십자사 건물도 보인다. 이 건물들도 중앙정보부 건물들이었다고 한다. 가장 오픈되어 있는 위치라서 상대적으로 행정 업무를 보던 곳이라 한다. 그럼에도 재난본부 건물에는 유치장까지 있었다니 참으로 어두운 시대의 산물이구나.

재난본부 뒤로 돌아가면 전원주택 풍의 주택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가 중정 부장 관사라 한다. 이제는 문학인의 집, 산림문학관으로 쓰이고 있다. 벽에는 서울시의 미래유산 판이 붙어 있다.

 

조선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통감부가 있던 자리였음을 알리는 표지석. 사진 = 이한성 교수

여기서 내려와 소파로를 따라 좌로 움직이면 이내 옛 드라마센터를 만나고 그 옆으로 서울애니메이션센터를 만난다. 이제는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지을 모양인데 발굴 조사를 병행하고 있다. 이곳이 일제 36년 지배가 시작되던 통감부(統監府) 터다. 본래는 일인들이 남산 아래 자리 잡으면서 은사기념과학관(恩賜記念科學館)으로 지었다가 을사늑약 후에는 통감부로 쓰고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는 총독부가 되었다 한다. 1926년 새 총독부 건물(경복궁 속 중앙청)이 지어질 때까지 총독부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1921년 이곳 총독부에서 의열단원 김익상 의사의 의거가 있었다. 그날의 일을 콘텐츠진흥원의 자료로 소개하고자 한다.
 

재치와 용기로 총독부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고 또 멋지게 빠져나간 김익상 의사의 의거를 기리는 표지석. 사진 = 이한성 교수

한 편의 영화 같은 김익상의 쾌거

1921년 9월 12일 오전 10시경, 남산 왜성대倭城臺)의 총독부 통용문 앞에 전기공 차림으로 나타난 김익상은 전기설비 수리신청을 받고 온 사람인 양 가장하여 헌병을 속이고 유유히 청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민첩한 동작으로 2층에 올라간 그는 첫 번째 방이 보이자 총독 집무실에 폭탄을 던져 넣었지만 터지지 않았다. 이에 그 다음 방회계과 문을 열고 두 번째 폭탄을 힘껏 던지니, 요란한 폭음과 함께 마룻바닥이 패이고 파편이 날아들어 벽과 탁자, 유리창 등이 산산이 부서졌다.

계단을 뛰어내려가던 김익상은 놀라 달려온 경비병에게 “위험하다. 위험하다”고 소리치며 만류하는 시늉까지 해보이고는 뒷문을 통해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검문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일본인 요리집을 골라 들어가서 철공원으로 변장한 그는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까지 가서 ‘삼전신(三田神)’이라는 이름의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며칠간 유숙하였다. 다시 신의주를 거쳐 국경을 통과하여 1주일만에 북경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단 본부로 귀환하여 김원봉 앞에 나타났다. 실로 비상한 담력, 기민한 판단력과 임기응변의 민첩한 행동, 활달한 성품과 뛰어난 언변, 교묘한 변장술 등,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봄직한 인물형과 스토리를 김익상이 감쪽같이 구현해 낸 것이었다.


아쉽게도 자금은 건물이 철거되어, ‘한국통감부, 조선총독부 터’ 표지석과 ‘김익상 의사 의거 터’란 표지석을 볼 수가 없다.
 

숭의여대와 리라초교 건물 앞을 스쿨버스가 지나가고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일본 군인 기리는 신사 있던 곳

이어지는 건물은 리라초등학교와 숭의여대이다. 일본신사와 관련하여 아픈 기억의 장소이다. 일제는 1898년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을 만들 것을 기획하고 1928년 숭의여대 자리에 경성신사(京城神社)를 짓고 그 경내인 지금의 리라초등학교와 사회복지법인 남산원 자리에 일본 군인 노기 마레스께(乃木希典)를 모시는 노기신사(乃木神社)를 지었다 한다. 아울러 경내에는 도하신사(稻河神社), 천만궁(天滿宮), 팔반궁(八幡宮)도 지었다 한다.

 

남산 기슭에 세워진 반공 청년 운동비. 사진 = 이한성 교수

신사의 기억을 떨치고 소파로를 따라 가면 반공청년운동비를 만난다. 남산을 배경으로 우뚝 선 비다. 해방 후 애국청년단체에 투신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목숨 바친 1만 7274명의 영령을 봉안한 비라 한다. 머리 숙여 인사드린다.

이 비 옆 골짜기는 예부터 남산에 유명한 부엉바위약수가 있다. 일명 법바위 약수인데 위장에 특히 효험이 있다고 한다. 장충단약수, 수복천약수, 용암약수, 불로천약수, 잠두봉약수, 후암약수 등 남산의 유명 약수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이곳에서 기도하는 이들이 있어 화재 방지를 위해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이 물맛을 기억하는 이들의 아쉬움이 남는다. 경성에 수돗물이 귀할 때 이른바 북청물장수로 대표되는 물장수들이 길어다 팔던 물 중 하나였다 한다. 전설도 가지고 있다. 중구문화원 자료를 인용하여 소개해 본다.

은혜 갚은 ‘지네 여인’의 뜻

조선 후기 영조(英祖) 때 한은석(韓恩錫)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일찍이 관직에 있다가 사도세자(恩惟世子)의 죽음을 보고 환멸을 느껴 벼슬을 그만두고 초야에 묻혔다. 그러나 거느리는 식구는 많고 살림은 몹시 가난하여 생각하다 못해 죽기로 작정하고 어느 날 밤 부엉바위 위에 올라갔다. 마침 이 바위 아래쪽에 목을 매기에 알맞은 나뭇가지가 있어 목을 매기로 결심하고 나무로 오르는 순간 ‘사람 살리라’는 여인의 비명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 왔다. 어둠을 헤치고 그 여인을 찾던 중 삼십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여인이 나타나서 밤중에 길을 잃었으니 도와 달라고 하였다. 한은석이 그 여인에게 어디 사시는 누구냐고 물었다. 여인은 문안에 복숭아를 가지고 갔다가 날이 어두워 길을 잃고 말았는데 금방 귀신이라도 나올 것만 같아서 급하게 소리를 외쳤는데 이제 살펴보니 알 것도 같다고 하고 혹 바쁘시지 않으면 저의 집이 요 너머 과일 밭이니 좀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북청물장수의 물 공급원이었을 정도로 물맛이 좋았다던 부엉바위약수 쪽으로 내려가는 길. 사진 = 이한성 교수

여인을 따라 밤길을 더듬어 나갔을 때 여인의 집은 남산 너머 후암동 복숭아 밭에 있었다. 그 집에는 여인이 혼자 살고 있었다. 한은석은 차려온 술과 음식을 배불리 먹고 그날 밤 여인과 함께 잠을 잤다. 아침이 되어 한은석이 돌아가려 하자 여인은 수십 냥의 돈까지 주었다. 몇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돈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부터 한은석은 밤마다 그 여인의 집을 찾아가서 달콤한 밤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이날 밤도 한은석은 후암동 여인의 집을 찾아가려고 남산 부엉바위 앞을 지나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당신은 오늘 밤 그 계집한데로 가면 죽고 마오” 하면서 “그 계집은 수천 년 묵은 지네로서 사람의 진을 빼먹는데 당신은 지금까지 그 계집한테 진을 빼앗겨 왔으니 오늘밤 담배를 피운 다음 담뱃진이 있는 침을 그 계집의 얼굴에 뱉으라”고 하면서 담뱃대 한 개를 주었다. 한은석은 괴이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노인이 시키는 대로 하기 위해 담뱃대를 입에 물고 여인의 집으로 갔다. 여인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한은석은 노인이 시키는 대로 여인의 얼굴에 침을 뱉으려고 하였으나 도저히 그러지 못하고 땅에 뱉어 버렸다. 여인은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하면서 자기는 노인의 말대로 지네가 맞지만 그 노인은 천 년 묵은 지렁이라면서 “제가 먼저 사람이 되는 것을 질투해서 서방님을 시켜 저를 죽이려 했던 것인데 서방님은 저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 은혜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여기 돈 만 냥이 있사오니 거두어 주십시오” 하고 돈을 내어 놓았다. 한은석은 꿈만 같았다. 그날 밤 또 여인과 단꿈을 꾸었다. 이튿날 그 여인의 집을 찾아 갔다가 깜짝 놀랐다. 어제까지도 분명히 이 자리에 집이 있었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 ‘지네의 변신인 그 여인이 사람이 되어 어디론가 가버렸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 뒤 한은석은 여인이 준 돈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렸고 그의 자손도 번창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보기 드문 ‘제갈량 와룡묘’

와룡골이라 부르는 층계를 오르면 제갈량을 모신 와룡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만나는 와룡묘이다. 전해지기로는 철종 때인 1862년에 세웠다 한다. 음력 6월 24일에 관운장과 함께 제사를 지낸다. 이제는 시내 한복판이 되었지만 1800년대만 해도 남산 속이었던 앰버서더 호텔 길 건너에는 관운장을 모신 관제묘가 현존하고 있다. 아마도 이 지역 사람들은 와룡 선생과 관운장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것 같다.

 

조지훈 시비에는 ‘파초우(芭蕉雨)’가 새겨져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오늘의 마지막 코스는 조지훈 시비(詩碑)다. 와룡묘에서 서쪽으로 잠시 가면 남산둘레길에 있다. 청록파 조지훈 선생에 대해 긴 말을 하면 사족이 된다. 시비에는 선생의 멋진 시 파초우(芭蕉雨)가 새겨져 있다. 파초에 떨어지는 빗소리… 운치가 있다. 읽고 간다.

외로이 흘러간 한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잎에 후드기는 저녁 어스름
창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