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32) 목멱산 ⑦] 남산 아닌 북산만 그린 이유는 “돈 탓”?

이한성 동국대 교수 기자 2019.05.20 09:07:19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옛 자료를 보면 남산에는 적지 않은 정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온전한 정자들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정자는 그만 두고라도 옛터라도 남아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 또한 사라졌다. 어디 그뿐이랴. 인왕과 북악의 정자들은 겸재를 비롯하여 많은 화인(畵人)들이 그림으로 남겼지만 남산의 정자들은 그 그림조차 남아 있는 것이, 아니 애초에 그린 것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림의 속성은 예나 지금이나 작가의 영역이 아니라 애호가의 영역인 듯하다. 내 그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류(類, 流)를 따르거나 걸출한 능력이 있는 이는 아예 애호가가 좋아할 류(類, 流)를 만들어 나가는 것 같다. 겸재 또한 그런 이였을 것이다.


그의 그림을 완상(玩賞)하고 소장해 줄 사람들은 주로 북악(北岳)과 인왕(仁王) 아래 사는 이들이었다.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이 그랬고, 겸재 그림 애호가 이춘재(李春躋), 장동 김씨네가 그랬고, 가까이 했던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이나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이 그랬으며 그의 그림을 애호해 준 이들은 대부분 이 북쪽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겸재가 굳이 관심을 끌지 못할 목멱산을 그릴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요즈음 관점으로 말하면 그는 팔릴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한미(寒微)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에게 부(富)와 사회적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게 한 바탕이 그림이었기에 그는 그런 면에서 프로 의식이 강했던 것 같다. 필자가 본 것으로 그나마 목멱산을 주인공으로 그린 그림은 강 건너 양천에서 원경으로 그린 목멱조돈(木覓朝暾)과 백납병풍 속에 특징도 없이 그려진 한 조각 목멱산이 있을 뿐이다. 나머지 목멱산이 등장하는 그림들은 다른 그림의 배경일 뿐이다. 참으로 아쉬운 일은 겸재의 뛰어난 필치로 목멱과 그 속에 자리잡았던 정자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점이다.

남산이 일본인 천지 되면서
많았던 정자들 자취없이 사라져


불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임진왜란 때 한양에 주둔했던 일군(日軍)은 남산 기슭 예장(藝場)에 주둔했고 남산에 그들 나름대로 왜성도 쌓았다 한다. 1800년대 말 조선에 대한 발언권이 커진 일본은 곤도(近藤眞鋤) 대리공사를 앞세워 조선 정부로부터 진고개 일대에 대해 1885년 일본인 거류지역 허가를 얻어냈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군과 함께 일군은 이들 진압에 나섰으며, 이어서 조선의 패권을 청(淸)과 다투게 되면서 청일전쟁을 일으켰는데 다음해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때부터 조선의 지배권을 확보한 일본은 남산 기슭에 자리를 잡고 그들의 거류민 주거지를 펼쳐나가기 시작하였다.

매천 황현 선생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녹천정을 빼앗아 일본공사관으로 삼은 후로 주동, 나동, 호위동, 남산동, 난동과 종현, 저동, 진고개 일대를 점거하여 남촌 50개 동 가운데 30개 동이 일본인 촌이 되었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청계천 주변 마을 중촌 이남은 일본인 판이 되었다. 을지로 거리인 구리개(銅峴)는 고가네쬬(黃金町)가 되었고, 진고개(泥峴)는 혼마찌(本町), 동쪽 마른내 묵정동 지역은 신마찌(新町)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남산 아랫마을에 있던 조선 500년의 삶의 유산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갔다. 기록에 남은 이곳에 있던 많은 누정(樓亭)도 그들의 거류지가 점하다 보니 사라져 갔다. 지금 그 자리의 위치도 불명확하고, 초석 하나 찾을 수 없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기록에서 만나는 천우각, 귀록정, 노인정, 쌍회정, 홍엽루, 홍엽정, 재산루, 화수루, 녹천정, 비파정, 백운루, 남구정, 송송정, 칠송정, 칠덕정….

 

<사진 1>. 일제강점기 남산 주변 지도. 일본인 주택이 일대를 삼켜 버렸다.

일제 강점기 시절 남산 주변 지도를 본다(사진 1). 가운데 조선신궁(1)이 커다랗게 자리잡았고, 지금의 서울역인 경성역(2)이 서쪽에, 후암동 지역(3)은 일본인들 주택이 빽빽하다. 남대문(4)은 그 경계점에 있다. 지금의 신세계백화점이 된 미쓰꼬시(三越)백화점(5)이 보이는데 이는 이 지역 일본 거류민들을 위한 백화점이었다. 길 건너 북쪽으로는 조선은행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경성우체국이 자리잡았다. 백화점과 은행과 우체국 사이의 넓은 광장이 센긴마에 히로바(鮮銀前廣場)라 하여 이 지역 중심 광장이었다. 지금의 신세계 앞길이다.

남산 기슭에는 일본 절 동본원사(東本願寺) 경성별원도 보인다. 용문산 상원암의 동종을 옮겨다 이 절에 걸었었다. 국보가 됐던 이 종(鐘)이 이제 다시 용문산 상원사로 돌아왔는데 아무래도 일본 종의 모작품(模作品)이라고 괄시를 받고 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어떤 이들 말로는 본래의 종은 일본으로 빼돌리고 모조품을 걸어 놨을 것이라 한다. 지도에 7로 표시한 지역은 진고개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과 겨루는 하야시(林)의 나와바리(繩張, 영역)였다.

 

골목골목 남아 있는 적산가옥. 사진 = 이한성 교수

그런데 이 사이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는 것이 집들이다. 동쪽으로는 약수동, 장충동에서부터 묵정동, 필동, 명동, 회현동, 후암동, 청파동, 용산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본인들의 집이 가득했다. 지금도 이 지역의 뒷골목을 다니다 보면 골목골목 일본식 집을 만나게 된다. 이른바 적산(敵産)가옥이다.

‘조선 흔적’ 찾으려 수없이 올랐지만…

겸재 그림 길 글을 쓰면서 묵정동, 필동, 회현동 골목골목 길을 통해 남산 기슭에 수없이 올라 보았다. 혹시라도 조선의 흔적이 남은 곳이 있을까 해서였다. 아쉽게도 남은 흔적은 없었다. 일본인들이 50여 년 산 지역에서 조선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요즈음은 이 지역에 빌딩과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임금이 경복궁에서 바라보았을 남산, 서울의 안산(案山)인 남산, 겸재의 그림 속 배경이 되어 주었던 남산도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결국은 지자체(地自体) 자료에 기록된 지번을 찾아 가 보고 옛글을 읽는 것으로 사라진 조선의 길을 가 보려 한다.

지도에 갈 길을 그려 보면 1은 동래 정씨 세거지(世居地), 2는 재산루(在山樓) 터, 3은 한양공원 표석, 4년 쌍회정 터, 5는 조선신궁(朝鮮神宮) 터를 표시해 보았다.

 

<지도 3>. 한성부 지도에 재산루, 쌍회정이 보인다. 

지도 3은 한성부지도인데 쌍회정(雙檜亭)과 재산루(在山樓)가 아주 가까이 그려져 있다.

이제 지하철 4호선 회현역에서 하차, 1번 출구를 나와 잠시 동쪽 방향(명동 쪽)으로 나아가면 우리은행 본점 빌딩을 만난다. 그 옆으로는 작은 쉼터가 조성되어 있는데 고목이 된 은행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다. 수백 년 이 자리를 지키면서 영광도 보았고, 차마 겪지 못할 아픔도 견뎠을 것이다. 수령 475년이 기록되어 있다. 보호수 지정 일자가 1972년이니 이제는 500살이 넘는 은행나무가 되었다. 무슨 사연으로 이곳에서 500살이 넘도록 서 있는 것일까? 그 궁금증을 풀어줄 해답이 은행 담장벽에 붙어 있다.

 

정광필 집터 안내문. 사진 = 이한성 교수

“정광필 집터 鄭光弼家地: 정광필(1462~1538)은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이곳은 정광필 후손까지 12명이 정승 반열에 올라 속칭 ‘정씨 터’라고 불리고 있으며, 선조 때 좌의정 정유길의 외손자인 김상용, 상헌 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고종 때 정원용이 이 집을 호화롭게 가꾸면서 더욱 유명해졌다”는 내용이다.

아, 이 은행나무는 정광필 집 마당에 심은 나무였구나….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에 가면 공자님이 학문을 닦고 제자를 키운 공부(孔府)가 있는데 그곳에는 공자님이 제자들을 키운 행단(杏壇)이 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은행나무는 학문을 닦는 곳의 표상이 되었다. 어느 가을 노란 은행나무가 서 있던 향교나 서원 풍경을 떠올리면 된다.

 

남산 3호터널로 들어가는 길. 이 계곡 양옆으로 동래정씨 가옥과 재산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 이한성 교수

그리고 안내판의 글은 조금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4호선 대야미역에서 내려 수리산으로 가다 보면 동래정씨 종택을 만난다. 그 옆 산은 이들 동래 정씨 선영이다. 조선초 문신인 정난종을 시작으로 큰아들과 둘째아들 정광필(회현동 은행나무 집 주인)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큰아들 광보는 서울살이 후에 아버지 묘소가 있는 이 마을로 와서 종택을 이루었으며, 둘째 광필은 회현동에 뿌리를 내렸다. 정광필의 손자가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정유길(鄭惟吉)인데 그는 장동 김씨 김극효를 사위로 맞는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율곡의 아버지가 강릉으로 장가들어 애들 낳고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신부집에서 살았던 것과 같이, 아마도 김극효도 처갓집인 이곳 회동 처가에서 지냈던 것 같다.

 

동래정씨 선영. 사진 = 이한성 교수
동래정씨 종가 명패. 사진 = 이한성 교수

이때 태어난 아들이 김상용, 김상헌이었던 것이다. 실로 두 명문가인 회동 정씨(동래 정씨 중 정광필 가문을 이르는 말)와 장동 김씨(신안동 김씨 중 김상용, 김상헌 가문을 이르는 말)의 결합이니 김상용, 김상헌 형제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였다.

남산 길을 오르다 보면 벽에 써 놓은 임당유고(林塘遺稿, 임당은 정유길의 호) 속 정유길의 시를 만난다(내용은 45쪽 사진 참조).

정광필 가문은 단순히 잘 나가는 집안이 아니라 존경도 받았다. 인조 15년 9월 승정원일기에는 정광필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평가가 실려 있다. 100명의 보통 관리는 한 명의 정광필만 못하다는 평가이니 큰 영광이었을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정유길의 시.

방백(方伯)의 직임을 잘 수행한 자는 육경(六卿)으로 올리도록 하라고 임금의 말씀이 있으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방백의 직임을 잘 수행했다면 반드시 육경의 직임도 잘 수행할 것입니다. 그래서 선왕(先王)의 조정에서 양계(兩界)의 감사(監司)로서 재상의 반열에 들어간 자가 있었으니, 이원익(李元翼)이 평안 감사로서 재상의 반열에 들어갔습니다. 중묘조(中廟朝)에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도 함경 감사로서 재상의 반열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백 명의 김응기(金應箕)가 한 명의 신용개(申用漑)만 못하고, 백 명의 신용개가 한 명의 정광필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上曰, 善於方伯之任者, 陞六卿, 可矣. 鳴吉曰, 善於方伯之任, 則必善於六卿之職, 故先王之朝, 以兩界監司, 至於入相者有之矣. 李元翼自平安監司入相矣. 中廟朝鄭文翼公光弼, 亦以咸鏡監司入相云矣. 且其時有百金應箕, 不如一申用漑, 百申用漑, 不如一鄭光弼之語.

이렇게 해서 12 정승을 냈다는데 여기에는 전설도 남아 있다.

 

회현동 정광필 집터의 500살 넘은 은행나무. 사진 = 이한성 교수

앞마당 은행나무(鴨脚樹)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서대(犀帶 정1품ㆍ종1품관이 띠던 띠) 열두 개를 이 나무에 걸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12 정승이 나왔으니 선조 때 좌의정 정유길(鄭惟吉), 선조 때 우의정 정지연(鄭芝衍), 인조 때 좌의정 정창연(鄭昌衍), 인조, 효종, 현종 때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효종 때 좌의정 정치화(鄭致和), 효종 때 좌의정 정지화(鄭知和), 현종 때 우의정 정재숭(鄭載嵩), 영조 때 좌의정 정석오(鄭錫五), 정조 때 우의정 정홍순(鄭弘淳), 정조 때 영의정 정존겸(鄭存謙), 철종 때 영의정 정원용(鄭元容), 순종 때 좌의정 정범조(鄭範朝)가 그들이라 한다.

풍수 하는 어떤 이들은 수리산 아래 있는 묘자리가 심상치 않다고도 한다. 철종 고정 연간에 활동했던 영의정 정원용은 동쪽에 화수루(花樹樓)를 지었다.
 

재산루, 누산정사가 있었을 것으로 비정되는 지역. 사진 = 이한성 교수

대동법 시행한 김육이 지은 재산정

이제 다음은 재산루(在山樓)다. 어디에도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옛글을 더듬어 그 위치를 비정해 볼 뿐이다. 한성부지도에는 쌍회정과 재산루가 그려져 있는데 재산루는 쌍회정 동쪽이면서 계곡의 동쪽에 그려져 있다. 이 계곡은 이제는 신세계백화점에서 3호 터널로 진입하는 도로가 되어 있으니 3호터널 진입로 동쪽 인도(人道)와 건물(프레티늄 아파트, 애니메이션 센터)이 점하고 있는 지역쯤 될 것이다(어느 자료에는 회현동 2가 18번지에 정자터가 있었다고 하였다).

재산정은 대동법을 시행한 잠곡(潛谷) 김육(金堉)이 지은 정자라 한다. 궁중을 지키는 호위무사들 훈련도 시켰다 한다. 활터로도 인왕산 사정들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잠곡 김육(1580~1684)은 문집 잠곡유고에 재산루기(在山樓記)를 남겼다.

무릇 천하의 일은 실재(實在)일 뿐으로, 이름은 실재에서 생기고 실재는 이름에 근본하는 것이다. 그 실재가 없는데 그 이름이 있는 것을 나는 옳은지 모르겠다.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洞庭湖)로 인해 장대해졌으나 그 실재는 작은 현의 성문일 뿐이며, 황학루(黃鶴樓)는 선인(仙人)으로 말미암아 기이해졌으나, 그 실재는 망치로 부순 옛 관(館)일 뿐으로, 그 이름을 얻어서 그 실재가 있는 것은 오직 재산루(在山樓)이다.

재산루는 종남산(終南山) 위의 태극정(太極亭) 아래에 있는데, 층진 바위가 솟아 있고 계곡의 물이 그 가운데로 흐르며, 서울을 굽어보고 삼각산(三角山)을 바라보며 읍하고 있다. 이에 지세가 높고 형세가 웅장하며 확 트인 것이 비길 데 없으니, 바로 편비(褊裨)들이 모여서 활을 쏘는 곳이다.

푸른 장송(長松)이 좌우를 감싸고 호위해 있어 마치 십만 명의 장부(丈夫)가 꼼짝 않고 서 있는데 장막(帳幕)은 첩첩이 있고 깃발은 휘날리는 듯한 것은 바람이 불 때의 풍경이다. 여염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중앙을 겹겹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마치 천 겹으로 은 갑옷을 입은 군사가 진을 치고 있는데 창칼이 삼엄하게 벌여 있고 전마(戰馬)가 내달리는 듯한 것은 눈이 온 뒤의 기이한 장관이다. 뭇 시냇물이 합류하여 한 골짜기로 치달려 마치 용감한 군사가 적진을 향해 나아가매 돌이 구르고 산이 놀라는 듯한 것은 폭포 물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흐르는 것이다. 버드나무 숲과 연꽃 밭에서 온갖 새가 울어 마치 영평(營平)이 군사를 정돈해 돌아오매 피리 소리와 북 소리가 서로 다투어서 울리는 듯한 것은 봄날에 만물이 화창한 모습이다. 사시(四時)에 따라서 변하는 자태가 이 한 누에 모두 모여 있어서 경치가 아주 뛰어나니 이름과 실재가 서로 부합한다. 그러니 어찌 이름과 실재가 서로 어긋나는 악양루나 황학루에 비교하여 논할 수 있겠는가.

지금 나와 함께 이 누각에 있는 자들은 모두 큰 뜻을 품은 사방의 무사들로, 버드나무 잎을 뚫는 재주를 가지고 계수나무를 꺾는 열(列)에 올랐다.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을 이곳에서 익히고, 천 근의 활을 쏘아 이 사이에서 재주를 겨루어 서로 읍하여 사양하면서 사단(射壇)에 오른다. 이들은 모두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하여 들어가서는 임금의 심복(心腹)이 되어 밤낮없이 가까이에서 시위(侍衛)를 하고, 나가서는 용맹한 장수가 되어 변방에서 날쌔게 내달려서, 호랑이나 표범이 산에 있는 기세가 있어 국가를 간성(干城)처럼 지킬 자가 실로 이 가운데에서 나올 것이다. 이 누각이 사람을 저버리지 않는데, 사람이 어찌 이 누각을 저버리겠는가.

남산의 누각을 짓는 데에 노부(老夫) 역시 힘을 적지 않게 들였다. 흰 달이 허공에 떠 있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 백 척 높이의 누각에 올라가 기둥에 기대어 맑게 휘파람을 불어 천고의 평온치 못한 기운을 펴고, 일생의 펴지 못한 회포를 쏟았다. 이에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림을 금치 못하겠으니, 이는 실로 마음속의 감정이 발한 것이다. 제군들 가운데 혹시라도 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있는가. 병신년(1656, 효종 7)에 77세 노인은 기(記)를 쓴다.


大凡天下之事. 實而已矣. 名生於實. 實本乎名. 無其實而有其名者. 吾不知其可也. 岳陽樓. 以洞庭而壯. 其實小縣之城門也. 黃鶴樓. 由仚人而奇. 其實槌碎之舊館也. 得其名而有其實者. 其惟在山樓乎. 樓在終南山上太極亭下. 層巖突起. 澗水中流. 俯瞰長安. 平挹華山. 地高而勢雄. 顯敞而寡仇. 乃褊禆會射之所也. 長松蒼翠. 擁護左右. 如十萬丈夫凝立不動. 帟幕磊砢. 旌旆飛揚者. 風中之光景也. 閭閻櫛以. 兼匝中區. 如千重銀甲魚鱗雜襲. 槍刀森列. 介馬奔馳者. 雪後之奇觀也. 衆泉合流. 趨於一壑. 如勇士赴敵. 石走山驚者. 瀑流之喧豗也. 柳營蓮幕. 百鳥和鳴. 如營平振旅. 笳鼓相競者. 春物之駘蕩也. 四時之變態. 咸萃於一樓. 景致殊絶. 名實相副. 豈可以論於岳陽,黃鶴之乖名爽實者哉. 今我在樓諸君. 皆有志四方之士也. 以穿楊之才. 登折桂之列. 六韜三略. 誦習於此中. 千匀兩石. 較藝於其間. 揖讓而升. 文武兼資. 入則爲心爲膂. 夙夜乎周廬. 出則如熊如罷. 超騰乎漢塞. 有虎豹在山之勢. 爲國家干城之衛者. 實出於此樓. 不負於人. 人寧負於樓哉. 南樓之興. 老夫亦不淺矣. 白月當空. 涼風乍起. 登百尺之上. 倚柱淸嘯. 舒千古不平之氣. 瀉一生未展之懷. 自然橫墮之不禁者. 此實中情之感發也. 諸君倘或有知我者乎. 柔兆東臘. 七七老人. 記.

 

맨홀 아래 묻힌 남산 물길. 사진 = 이한성 교수

손자 청성군(淸城君) 김석주도 여기에서 살았다. 청성이 어렸을 때 얼굴의 생김새가 범 같았는데, 범은 의당 산에 있어야 한다고 여겨, 드디어 거처하는 누대를 재산(在山)이라고 이름하였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그런데 할아버지 김육의 글 재산정기가 있으니 김석주가 이름 붙인 것은 아니고 재산정 주인으로 살았기에 생겨난 말일 것이다. 담장 밖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김석주가 손수 심은 소나무라 한다. 19번 꺾어진 폭포가 있고 그 아래 우물이 있는데, 맛이 매우 향기롭고 차다 했다. 우물이 푸른 석벽 위에 창벽(蒼壁)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다.

화려해서 오해 샀던 화수루

이렇게 이어져 오던 재산정은 순조 때에 이웃 회동 정씨 정원용(1783~1873)에게 넘겨졌다. 정원영은 이곳에 화수루(花樹樓)를 지었다. 자못 화려했기에 오해도 있었다. 정원영과 가까이 지내던 조인영도 오해를 했었는데 오해가 풀리자 자신의 문집 운석유고(雲石遺稿)에 화수루기(花樹樓記)를 남겼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조인영(1782∼1850)은 정원용에게 묻는다. “이곳은 기이한 돌과 이름난 꽃으로 덮였고, 아름다운 나무에 특이한 새들이 날아오며, 멋진 창문과 굽은 난간이 이어지고, 시원한 누대와 따뜻한 방이 늘어서서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곳인데, 평소 검약하며 외부와는 끊고 지내던 공께서 어찌하여 이러한 정원과 정자가 필요합니까?” 이에 정원용은 “나의 루(樓)에는 없는 꽃이 없고, 없는 나무가 없으며, 돌과 새가 없는 것이 없으나 모두가 산 속 자연이니 사치가 아닙니다. 내 여러 종형제들이 모두 이곳에 살고 있으므로 한 곳에 작은 건물을 지어 예사롭게 모임을 갖고자 하여 花樹(화수)라 한 것입니다. 이는 당나라의 시인 위용물의 화수종법회의 고사와 같은 것으로 이름을 모방한 것이며, 그 뜻이 꽃나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조인영은 오해를 풀고 화수루기를 남긴다.

花樹樓記
木覓之北. 從左順數至第幾岡. 有樓曰在山. 卽潛谷金文貞公舊基也. (중략) 吾之樓. 非無花也. 非無樹也. 非無石與禽也. 皆山中恒有物. 豈如子所夸侈哉. 子獨不以峰瀑雲月不待價而得者. 又爲之鋪張. 何也. 無或以址之隘室之陋. 反辭而譏之歟. 我羣從兄弟. 皆此坊人. 故欲以一區小築. 作尋常會. 而花樹也者. 韋家故事也. 倣以名焉. 其意不在花樹也. 子何疑焉. 余起謝曰. 鄙人愚鹵. 實不知我公敦宗族若是也. 請以此問答. 付之壁. 以解衆惑. 且備木覓下一勝事可乎. 公又笑曰. 諾.

 

다산 정약용 초상화.

그런데 이곳 재산루(후에 화수루) 아래에는 다산 정약용이 이사해 와서 살았다. 송재소 교수의 ‘다산 시선’ 연보를 보면 15세가 되던 1776년 아버지가 호조좌랑으로 복직됨에 따라 서울 명례방(明禮坊)으로 이사왔다(竹蘭舍). 21세 되던 1782년에는 창동(倉洞, 남창동 북창동 지역) 체천(棣泉)에 작은 집을 마련했다(棣泉精舍). 22세 되던 1783년 회현방(會賢坊) 재산루 아래로 거쳐를 옮기고 누산정사(樓山精舍)라 이름했다. 큰아들 학연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다산시문집에는 이때의 글이 실려 있다.

여름날 누산정사(樓山精舍)에서 지은 잡시

이때 나는 회현방(會賢坊) 재산루(在山樓) 밑으로 집을 옮기고 그 이름을 누산정사라 하였다. 집은 북향이고 문은 서쪽으로 났는데 개울 동쪽에 위치하였다.
夏日樓山雜詩 時余徙宅于會賢坊之在山樓下 名之曰樓山精舍 舍蓋北向門西向 在澗之東

이 잡시는 모두 여덟 수로 되어 있는데 두 수만 읽고 가련다.

산 속이라 흰 널판자 사립문이 쓸쓸한데 山裏蕭然白板扉
작은 시내 내린 비에 풀들이 무성하다 小溪新雨草菲菲
앉아서 한 가닥 석양빛을 보노라니 坐看一片斜陽色
푸른 이끼 나그네 옷 살짝 물들여 비추네 輕染蒼苔照客衣

맑은 낮 산중 누각 객이 뜰에 가득 모여 淸晝山樓客滿庭
다순 햇살 잔바람에 푸른 과녁 활을 쏘네 輕風煖日射帿靑
잔디 마당 삼청동에 뒤지지를 않고요 莎場不讓三淸洞
솔바람은 도리어 백호정보다 낫다오 松籟還勝白虎亭
(기존 번역 전재)
<다음 호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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