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35) 안산 무악재 ①] 겸재가 그린 무악재의 전별과 치욕과…

이한성 동국대 교수 기자 2019.07.01 09:45:55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겸재 정선이 안산과 무악재 주변을 그린 그림은 두 점이 전해진다. 하나는 양천 현령 시절 양천관아(궁산, 소악루) 주변에서 안산을 바라보며 그린 안현석봉(鞍峴夕峰)이며 또 한 점은 모화관(慕華館) 앞길을 걸어 사행길(使行길: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 길)에 오른 사신 일행의 행렬을 그린 서교전의(西郊餞儀, 또는 전연餞筵. 그림의 마지막 글자가 마모되어 儀인지 筵, 宴인지 명확하지 않다)도이다. 오늘은 우선 서교전의도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그림인데 그림 제목은 西郊餞儀(筵)이라 쓰여 있고 辛亥季冬作(신해계동작)이라 기록했으니 신해년(1731년, 영조 7년) 늦겨울인 12월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작가 자신의 호는 쓰지 않고 낙관만 찍었다. 그림 제목에서 서교(西郊)란 한양도성 밖 서쪽 지역을 의미하는 말로서 여기에서는 독립문, 영천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전의(餞儀), 전연(餞筵, 宴), 전별(餞別)은 길 떠나는 이를 위해 열어주는 환송 파티를 뜻한다. 누구를 위한 환송 파티를 그림으로 그린 것일까? 이 해에 청나라로 떠나는 진위사행(陳慰使行: 방문국에 슬픈 일이 있을 때 위로차 방문하는 사신 행차)단이 있었는데 사신단 부사(副使)는 이춘제(李春躋)였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바로 이 그림은 이춘제를 위해 그렸다고 한다.

‘단골’ 이춘제를 위해 그린 ‘서교전의’

이춘제는 누구일까? 필자의 졸고 겸재 길 9에서 소개한 옥동척강도(玉洞陟崗圖) 편을 보면 이춘제가 소개되어 있다. 간단히 리뷰하면, 겸재가 인왕산 아래 옥동(옥인동)으로 이사한 후 담을 나란히 하다시피 한 이웃으로 겸재 그림 애호가이자 최대 고객 중 하나였다. 그 결과 이춘제의 의뢰에 의해 그린 겸재의 그림이 여러 점 남아 있으니 이춘제는 의도하지 않게 우리 미술사에 공헌한 셈이다.

 

겸재 작 ‘서교전의도’에 기사 속의 여러 위치를 숫자로 표시했다.

이제 그림을 곰곰 들여다보면 현재 독립문역이 있는 무악재 아래 마을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그림에 번호로 표시했다. 1은 안산(鞍山), 2는 사현(沙峴), 3은 소현(小峴)이다. 지금은 고갯길이 무악재 하나뿐이지만 이른바 신작로(新作路)가 뚫리기 전까지는 두 개의 고갯길이 있었다. 옛 지도와 옛 그림에는 하나같이 이 두 고갯길이 그려져 있다.

 

오늘날의 무악재 소현. 사진 = 이한성 교수
옛 무악재 沙峴의 현재 모습. 사진 = 이한성 교수

안산 쪽 등성이를 타고 높게 뚫린 고갯길이 사현(砂峴)인데 지금도 이 고갯길로 여겨지는 고갯길이 남아 있다. 독립문역 5번 출구를 나오면 독립공원인데 무악재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공원이 끝나는 위치에 한국전력 관리소가 자리 잡았고 이 건물이 끝나는 지점에는 현저2 재개발 지구가 시작된다. 지금은 사람은 살지 않고 아직 개발은 시작되지 않았는데 현저교회 안내판 좌측 마을이 시작되는 곳에 안산 방향으로 오르는 층계가 나타난다. 아마도 이 층계길이 사현의 옛 흔적일 것이다.

층계 길로 남은 옛 사현 흔적

층계를 오르면 안산 자락 길이 이어지고 새로 지은 정자 앞에는 무악재역으로 내려가는 길이 연결되어 있다. 옛 사현(砂峴)은 이렇듯 고개를 넘어 갔을 것이다. 한편 사현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이 고개를 넘으면 만나는 개울이 홍제천인데 이 지역 사람들은 모두 모래내(砂川)라 부르니 이 고개 이름도 자연스레 사현이 되었을 것이다.

사현이란 이름은 상당히 오래된 것 같다. 이 고개 아래 홍제시장 쪽에는 고려적 절 사현사(砂峴寺)가 있었다. 그 절에 서 있었던 5층 석탑은 국립박물관 마당에, 불상은 진관동 사현사라 이름 붙인 절에 아직도 남아 있다. 한편 작은 고개 소현(小峴)은 깎고 깎아 지금의 무악재가 되었다.

모래고개 넘어 만나는 모래내

다시 ‘서교전의도’로 돌아가면 4는 인왕산, 5는 영은문(迎恩門)이다. 지금도 독립문역 앞 서대문독립공원에 가면 독립문 앞에 영은문 석주 두 개가 서 있다. 석주 두 개만 남은 영은문은 본래 어떤 모습이었을까? 다행히 구한말 찍은 사진 여러 장이 남아 있다. 사찰의 일주문처럼 두 돌기둥 위에 문루(門樓)를 높이 올리고 迎恩門(영은문)이라고 편액하였다. 은혜를 베푼 이들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환영을 받고 이 문을 통과한 이들은 얼마나 뿌듯했을까? 그들이 대체 누구였기에? 조선 명종이 즉위한 해인 명종 1년(1546) 1월의 실록 기사를 보자.
 

독립문 앞에는 영은문의 두 석주만이 현재 남아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승정원이 아뢰기를, “조사(詔使: 명 황제의 조칙을 전하러 온 중국 사신)의 행차가 이미 미륵원(彌勒院) 앞들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이에 대가(大鴐: 임금의 가마)가 궁궐을 나아가고 백관이 호종하여 돈의문(敦義門)을 경유하여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렀다.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 이홍남(李洪男)이 와서 아뢰기를, “조사가 이미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여 옷을 바꿔 입고 앉아서 시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사시(巳時)에 신하들이 소복(素服)을 벗고 조복(朝服)으로 갈아입고서 기다렸다. 상이 검푸른 단령포(團領袍)에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모화관에서 나아가 걸어서 노상의 막차(幕次)에 이르렀다. 조사가 사현(沙峴)에 당도하여 두목(頭目: 사신을 수행한 상인) 등으로 하여금 모두 말에서 내려 가도록 하였다. 두 사신이 당도하려 하자 상이 막차에서 나가 배위(拜位)에 섰다. 조사인 태감(太監) 유원(劉遠)과 행인(行人) 왕학(王鶴)이 영은문(迎恩門)에 이르러 조칙(詔勅)을 받들어 용정(龍亭)에 안치하고 서쪽을 향하여 서니, 상이 오배삼고두례(五拜三叩頭禮)를 행하였다.

(政院啓曰: ‘詔使之行, 已至彌勒院前郊矣.’ 於是大駕出宮, 百官扈從, 由敦義門, 至慕華館. 遠接使從事官李洪男來啓曰: ‘詔使已到弘濟院, 易服而坐, 以待時刻矣.’ 巳時, 群臣去素衣, 服朝服以俟. 上御鴉靑(圓)〔團〕領袍, 具翼善冠, 出自館中, 步至路上幕次. 詔使到沙峴, 令頭目等, 皆下馬以行. 兩使將至, 上出次立拜位. 詔使劉太監遠, 王行人鶴, 至迎恩門, 奉詔勑, 安於龍亭, 西向立, 上行五拜三叩頭禮)


치욕스런 사대주의 … 지금은 다른가?

어떤 상황을 기록한 것일까? 명나라 사신이 조칙을 가져 오자 영은문까지 임금과 백관이 맞이하러 나아가 명 황제의 조칙을 안치한 용정(龍亭: 조칙을 실어 온 가마/輿) 앞에서 황제가 있는 서쪽을 향해 오배삼고두(五拜三叩頭)의 예를 올렸던 것이다. 아마도 한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禮)를 다섯 세트 행했을 것이다. 인조의 삼전도 치욕보다 두 세트 더 많은 예를 올린 것이다. 태평관으로 자리를 옮긴 후 또 한 번 오배례(五拜禮)가 행해졌다. 명나라 사신이 말한다.

“사군(嗣君: 왕위를 이어받은 임금)은 공경과 예절을 아십니다.(嗣君知敬識禮)”

아, 가슴이 답답하다. 힘없는 나라 조선은 이렇게 나라를 유지해 갔던 것이다.

문득 21세기의 한국이 떠오른다. 우리는?

다시 서교전의도를 보면 영은문(그림에 표시한 5) 서측 안산 줄기 금화산(승전봉) 쪽으로 규모있는 기와집이 보인다. 모화관(慕華館)이다(6 표시). 중화 즉 중국을 흠모한다는 뜻을 가진 건물이다.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세운 건물인데, 새 임금이 즉위하여 중국 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모화관까지 나오는 것이 상례였다.

영은문 이름도 명나라 사신이 지어

1407년(태종 7)에 고려 때 상황을 본받아 송도에 있던 영빈관을 본떠 모화루를 세웠다가 1430년(세종 12)에 모화관으로 개칭하고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다 한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金安老) 등 3정승의 제안에 따라 모화관 홍살문을 없애고 문을 만들어 청기와를 얹고 영조문(迎詔門)이라고 편액했었는데 1539년 명나라 사신 설정총(薛廷寵)의 의견을 따라 영은문(迎恩門)으로 이름을 고쳤다.

임진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06년(선조39) 문을 재건한 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왔을 때 그의 글씨로 액자를 다시 써서 걸었다. 그 액자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청일전쟁 후인 1896년 모화관은 독립관(獨立館)이라 고쳐 부르고, 영은문을 김홍집 내각 때 헐고 독립협회 주도로 성금을 모금하여 독립문을 세웠다.

 

조선 시대의 길은 현재 골목길로 남아 있고, 대로는 만초천 위를 포장한 길이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이제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영은문의 초석은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독립문 앞에 있다. 본래 독립문이 지금의 독립문역 사거리(독립문 고가차도 아래)에 세워졌고 영은문은 그보다 남쪽에 있었으니 지금의 영천시장 앞쪽 복개된 만초천 개울 동쪽에 있었다. 우리은행 독립문 지점 앞쪽쯤 될 것이다.

사진 7 영은문 자료사진에 표시된 숫자의 1 방향은 무악재 방향, 2 방향은 서대문 방향, 3 방향은 현재의 영천시장과 그 뒤 금화산 기슭의 모화관이 있던 방향이다. 4는 안산에서 흘러내리는 산줄기(금화산, 승전봉)인데 지금은 능안정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 7. 영은문 자료사진.

모화관과 독립문 옛 자료사진(사진 8)을 보자. 1은 모화관이며 2는 독립문이다. 그 독립문 뒤로는 요즈음 유명한 도가니탕집이 생겼고, 대신고등학교도 자리 잡았다. 독립문 앞에 있을 영은문의 돌 기둥은 모화관 지붕에 가려 자료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 독립공원에 서 있는 영은문 돌 기둥은 독립문에 바짝 붙어 있는데 본래는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8. 옛 모화관과 독립문의 자료사진. 

3 방향은 사직터널 방향이다. 그때는 인왕산에서 돈의문(서대문)으로 내려가는 산줄기만 있었을 뿐이다. 한양도성은 저 산줄기 위로 흘러 내려간다. 4 방향은 금화터널이다. 5는 지금의 서대문 로터리로 향하는 방향인데 돈의문 방향이다. 화살표 5와 모화관 사이에는 흰색으로 보이는 길 한 줄기가 있다. 아마도 이 길 위에 펼쳐졌던 난전이 지금의 영천시장이 됐을 것이다. 6은 무악재로 향하는 길이다.

이별과 송별의 정 나눈 고갯길

이제 다시 겸재의 서교전의도로 돌아오자. 그림에는 희미하지만 말을 타고 가는 이, 걷는 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영은문 방향으로 무악재를 향하여 가고 있다. 영조 7년(1731년) 섣달에 연경(燕京, 北京)으로 떠나는 사신 일행의 모습이다. 물론 겸재의 지인 이춘제의 모습도 그려져 있을 것이다.

중국 사신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모화관에서 전별연(餞別宴)을 여는 것이 상례였다 한다. 그러나 조선의 사신단이 중국으로 사행(使行)을 떠나면 공식적 전별연은 경기감영(京畿監營)과 모화관(慕華館)이 중심이 되어 주로 반송정(盤松亭)에서 행해졌다 한다. 그 공적(公的) 행사가 끝나면 친구나 가족들이 열어주는 사적인 전별연이 있었는데 모화관을 지나 사현(沙峴)을 넘는 서교(西郊) 부근에서 이루어졌다. 영은문을 지나 홍제원까지 가는 길가에 가족이나 친우들이 천막을 치고 잠시 이별의 정을 나누었다. 5개월여 다녀오는 먼 길에 무사안녕을 빌어주고 차나 술을 나누어 마시며 송시(送詩)도 지어 전하고 송서(送書)도 전해주며 덕담도 나누었다. 이러한 송별연은 주로 서교에서 이루어졌지만 길게는 벽제관에 이르는 길까지도 행해졌다 한다.

조선에서 청나라 연행 길에 올랐던 사행단이 250여 년 간 500회가 넘었다 하니 서교에서의 전별연은 일상적 큰 행사였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와 관련된 글도 많이 남아 있고 그림도 남아 있다. 사행 길을 떠난 이들의 여행기인 연행록(燕行錄) 또는 조천록(朝天錄)이 500종이 넘는다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연암 박지원이나 담헌 홍대용의 기록만이 아니다.

문 열고 트레머리 한 여인은 무엇?

조선 후기 소향관(小香館) 박제신(朴齊臣)의 서교전별도(사진 10)를 보면 모화관과 영은문을 배경으로 개미의 움직임 같은 사행사의 행렬이 보인다. 모화관 옆과 뒤로는 민가가 빼곡히 자리했고 모화관 동남쪽으로는 수양버들이 축축 늘어졌다. 이곳이 안산에서 발원하여 인왕산 서쪽 골짜기 물과 합쳐져 서대문, 의주로, 청파, 원효로를 지나 한강(용산강)으로 나가는 만초천(蔓草川)의 최상류라서 개울가에 수양버들이 늘어졌음을 알 수 있다. 참게도 심심치 않게 올라왔다는 개울인데 이제는 모두 길 밑으로 들어갔으니 개천이 있었음을 아는 이도 드물다.

 

사진 10. 박제신 작 ‘서교전별;.  

기왕 서교에서의 전별연 이야기가 나왔으니 또 하나 그림을 보고 지나가자. 조선 후기에 누군가가 민속화풍으로 그린 서교전연(西郊餞筵, 사진 11)도다. 서교전별도라면 빠지지 않는 모화관과 영은문이 없으니 오히려 신선하다. 사행길이 아닌 개인 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전별연을 맞아 움직이는 사람들 모습도 신기하다. 탈것으로는 말, 나귀, 가마(駕轎)가 보이고 특이하게 바퀴가 달린 초헌(軺軒)도 보인다.

사진 11. 작자 미상 ‘서교전연’. 

사람들은 양반님네와 아랫것이 보인다. 양반님네는 큰 갓을 쓰고 말이나 나귀를 타고 움직이거나 아니면 가마를 탈 요량인 듯 보이고, 아랫것들은 가마꾼, 마부, 초헌꾼이다. 한결같이 벙거지를 쓰고 말을 끌거나 가마와 초헌 옆에서 양반님네 모실 대기 상태다.

재미있는 것은 우측 상단에 문이 활짝 열린 집들에 앉아 있는 아낙들이다. 애를 데리고 전빵을 벌린 아낙은 이해가 되는데 진열한 물건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남자들만 가득한 길거리를 향해 앉아 있는 저 아낙들은 무엇 하는 사람들일까? 더욱이 헤어스타일은 유행에 앞선 트레머리다.

이제 이런 궁금증은 내려놓고 사행 길을 나서거나 의주대로를 나섰던 이들이 갔던 길을 잠시 둘러보련다. 길을 떠나려면 우선 필요한 것이 말이다. 사진 9는 수선전도(修善全圖)에서 서교 주변을 확대한 것이다.

 

사진 9. ‘수선전도’의 의주대로 길 부분.   

의주대로 길을 나서려면 남대문(숭례문)이나 서대문(돈의문)을 나서서 무악재를 넘어야 한다. 말을 타고 가려면 어찌 해야 할까? 한양도성에서 말을 소유한 사람은 거의 없을 터이니 나라의 말을 이용해야 한다.

지도에 표시한 8번에 고마청(雇馬廳) 표시가 있다. 지금의 이화여고 구내에 해당하는 곳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말을 고용한다(빌린다)는 의미다. 그 일을 하는 관청이 고마청인데 민간의 말을 빌려 쓰고 관리하는 기관이었다. 물론 삯은 지불했다. 30리 길을 가는 데 쌀 한 말 반, 또는 두 말을 지불하는 그런 형태였다.

민간의 말을 정부가 빌려 썼으니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고마청동(雇馬廳洞)이라는 동명이 나온다. 지금의 서대문 네거리 주변 동네 이름이다. “돈의문 밖 경기감영 주변이다. 현종 때 경기감사(京畿監司) 화곡 이도억(李度億)이 감사가 되어 육우관(六郵館)을 세우고 이곳에 역마를 두었으며 고마법을 만들었기에 동명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한다(在敦義門外畿營傍 顯宗朝 李華谷度億爲圻伯刱立六郵館以處驛馬 又刱雇馬法 故洞名自此始云).”

이곳 고마청에서 말을 제공받은 일행은 의주대로 길을 통해 북으로 간다. 길은 지금의 서대문 사거리를 지나 독립문으로 향하는 대로가 아니라 지금의 대로 뒤로 간간히 남아 있는 골목길이다. 지금의 대로는 대부분이 만초천이 흐르고 있던 하천이었다. 서대문 네거리에는 돌다리(사진 9에서 7번 표시 부분)가 있었는데 경교(京橋),또는 경고교(京庫橋)라 했다. 김구 선생께서 귀국 후 머물러 계시던 경교장은 경교에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서지 터 위에 자리 잡은 금화초등학교. 사진 = 이한성 교수

북으로 길을 재촉하면 기영(圻營; 경기감영)과 냉동을 지나 연못(池)와 천연정(天然亭)을 만난다. 지금의 금화초등학교와 동명여고가 자리한 터전이다. 금화초등학교 담 아래에는 이곳에 있었던 3개의 사적 안내판이 있다. 천연정 터, 경기중군영 터, 청수관 터다. 경기중군영 터에 대해서는 ‘조선후기 경기도 순영(巡營)에 지휘관인 중군이 있던 터’란 설명이 있고, 청수관 터(淸水館터)에 대해서는 ‘1880년(고종 17년) 하나 부사가 이 건물에 입주하면서 일본공사관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 공관인 이 건물은 1882년(고종 19년) 불타 없어졌다’는 설명이 쓰여 있다. 1882년은 바로 임오군란의 해였으니 성난 구식 군대는 이곳 일본공사관과 별기군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사상(死傷)을 입혔던 것이다.

당파 싸움과 서쪽 연못, 동쪽 연못

금화초등학교와 동명여고 자리에는 서지(西池)라는 큰 연못이 있었다. 서지는 태종 7년(1407)에 모화루을 세우면서 누(樓) 남쪽에 연못을 파고 만초천 물이 흘러들게 하여 만든 연못이었다. 연못의 규모도 상당히 커서 길이 380척, 폭 300척에 깊이 2~3장이었다. 연못이 완성되자 개성 숭교사 못에 있던 연뿌리를 가져다 심었다 한다. 본시 이곳에는 아주 멋진 반송(盤松)이 있어 지명도 반송방(盤松坊)이었으며 정자 이름도 반송정이었다. 서지가 생기자 연못 이름도 자연스레 반송지(盤松池)라 하였으나 민간에서는 서대문 밖에 있다 하여 서지(西池)라 불렀다.

 

만초천에서 서지로 흐르던 물길은 이제는 맨홀 뚜껑으로 만난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이미 알다시피 한양에는 서지(西池) 이외에 동대문 밖에 동지(東池), 남대문 밖에 남지(南池)가 있었다. 서지는 이 중에서도 가장 크고 넓었으며 연꽃도 무성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흔히 서지의 연꽃이 무성하면 서인이 잘 되고, 동지의 연꽃이 무성하면 동인이 잘 풀리고, 남지가 그러면 남인이 잘 된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서지 가에는 반송정과 원관정이 있었다 하며, 못 서쪽 언덕에는 경기중영이 있었는데 천연정은 이곳에 있었다 한다. 반송정과 천연정은 전별연(餞別筵)을 열던 장소로 유명하다. 명나라 청나라로 떠나는 길에 공적인 전별연도 있었고, 친구나 가족들과의 사사로운 전별도 있었다. 택당 이식 선생은 사신 행차를 떠나는 이(李)와 윤(尹) 두 분을 반송정에서 환송하기로 했는데 나랏일에 매달리다 보니 전별 자리에도 늦고 전별시도 늦게 지어 전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李)와 윤(尹) 두 분 사신의 행차에 부쳐
성밖 전별(餞別) 자리 양해도 없이 늦었네 城外無端出餞遲
사동이 급히 전하기를 두 분이 떠났다 하네 郵童忽報二星馳
관직에 매여서 밤을 꼬박 새다 보니 官拘畫省仍留夜
송별시도 역시나 반송정에 늦었다네 詩到盤松亦後期
사행길 비 그치고 선들한 바람 부니 關路雨收凉吹動
대궐 숲 이른 가을 구슬픈 벌레 소리 禁林秋早候蟲悲
예부터 중년엔 떠나기 어렵다고 했는데 古稱中歲難爲別
하물며 두 분 이미 노인임에서야 何況諸公各已衰
(택당 선생 속집 제4권에서)

다산 선생도 서지(西池)에서 노닐던 일을 시로 남기고 있다. 몇 편의 시 중 한 편만 읽고 가련다.

서지에서 다시 노닐며(重游西池)
숲 속 정자 아래에 말을 매어두고 繫馬林亭下
물버들 곁에서 바람을 맞네 臨風水柳傍
석양 빛은 연꽃에 깃들어 있고 夕陽棲菡萏
가을빛 못 속에 가득하구나 秋色滿池塘
담담해서 오히려 더욱 예쁜데 澹淡猶殊艶
잇달아 여러 향 짓는구나 連延作衆芳
술이 다해도 이대로 앉아 壺乾勿遽起
다시 맑은 향 누려 보리라 且復挹淸香
(다산시문집 제2권에서)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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