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드라마 ‘녹두꽃’의 옥의 티 ‘백이현 자진 처형’에서 한국 엘리트의 현재를 본다

최영태 기자 2019.07.19 16:55:27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녹두꽃’이라는 참으로 대단한 드라마가 종영했습니다. 드라마에서 착한 엘리트 백이현 → 동학군을 사살하는 도채비 → 엘리트지만 일본 군의 앞잡이가 돼 자기이익을 챙기는 오니로 탈바꿈하는 백이현(윤시윤 분)이 마침내 자살하는 장면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큰 ‘예상 외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민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유학파 엘리트가 결국 일본의 앞잡이가 돼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한다는, 참으로 한국 근대 개화기에서 낯익은 인물인 윤시윤의 자멸은, 극의 클라이맥스 중 하나였고, 첼로 선율이 낮게 깔리는 분위기도 비장하고 슬펐지만, 제가 보기엔 또한 굉장히 비현실적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의 자살, 즉 밥상 앞에 가족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어머니 앞에서 권총으로 하는 자살은 너무나도 비현실적(뉴스나 역사 책에서 본 적이 없는)이기 때문이지요.

 

(사진 = SBS 드라마 캡처)


물론, 극작가의 의도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로 살아야 성공한다’는 인생철학을 갖고 있고, 아들을 인간이 아닌 수단으로만 여기는 냉혈한 아버지에게 백이현이 마지막 교훈을 남긴다는 차원에 있었던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을 사랑해준 어머니 앞에서 권총 자살을 연출한다는 것은 사실감이 상당히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선례 없는 극화의 피곤함

저는 백이현 자살의 이러한 비현실성은 바로 ‘선례 없음’에서 왔다고 봅니다. 이 드라마가 감동을 준 이유는, △녹두장수 전봉준이라는 실제 인물과 그의 행적-발언들 △전봉준을 도와 봉기한 김개남의 비전(‘썩은 조선-서울은 이제 버리고 남쪽에 새 나라를 연다’는 의미를 지닌 그의 개명을 포함해)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동학군으로 죽창을 들고 일본군의 고성능 총 앞에 나선 농민군이라는 역사적 팩트가 있고, 그에 대해 극작가가 각색을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회에서 ‘일본 군인을 죽이고 의병대에 가담한 김구’의 짠한 카리스마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도, 김구 선생이라는 팩트가 있었기에 가능했지요. 김구라는 실체가 없었다면 이렇게 짠한 각색이 나왔겠습니까?

이처럼 팩트(현실)를 살짝 비틀어 바람직한 인물상을 보여주고,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데 바로 픽션의 재미가 있지요.

 

1분 30초가 채 안 되는 짧은 등장이지만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낸 김구(박훈 분). 국민 가슴 속에 박힌 김구의 강한 이미지가 없었다면, 극작가의 상상력만으로는 찰나에 이런 카리스마를 뿜어낼 수는 없다.(드라마 '녹두꽃' 캡처)


그런데, 백이현처럼 엘리트로서 일본의 앞잡이가 됐던 조선인 중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자결한 사람은 들어본 바가 거의 없습니다. 전봉준, 농민군, 김구 등은 역사적 실체가 있기에 살짝 비틀어 짠한 재미를 줄 수 있지만, 백이현처럼 반성한 엘리트는 실체와 기억이 전무하기에, 백이현의 자결 부분은 100% 극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며, 그만큼 임장감(현장에 임해 구경하는 듯한 재미)이 떨어지는 것이겠지요.

오니를 죽인 것은 과거의 착한 백이현이었습니다. 오니가 과거에 사랑했고 마지막으로 사랑의 불씨를 되살려보고자 했던 대상인 명심 아씨는 오니에게 선언합니다. “내가 사랑했던 건 백이현이었지만 그 백이현은 이미 죽었고 현재의 당신은 오니일 뿐이므로 사랑할 수 없다”고.

오니를 다른 길로 이끌지 못하고 자살시킨 뜻은?

과거의 착한 백이현이 일부라도 살아남아 현재의 오니를 죽일 힘이 있었다면, 오니가 스스로 개과천선-반성을 하고, 그래서 조선을 점령한 일본 수뇌부에 대한 접근권을 이용해 조선 민족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도 있으련만, 어쨌든 이 극에서는 오니는 가족 앞에서 처참한 꼴을 보이고 맙니다.
 

들이대는 총 앞에서도 초연한 '오니' 사또. 극작가는 이런 오니를 자살 이외의 다른 길로 이끌 수는 없었나? '전례'가 없기에 극화도 힘들었을 듯 싶다. (SBS 드라마 '녹두꽃' 캡처)

 

이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친일파였다가 반성한 선례를 우리가 안다면, 오니로 하여금 반성 뒤 새 길을 걷게 하는 ‘극적 비틀기’를 원작자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실례가 전무하니, 오니를 반성케 해봐야 극작가가 완전히 창작해내는 수고를 해야 하고, 그런 수고를 해봐야 별 재미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김구라는 실체가 있으니 김구를 살짝 비튼 마지막 회의 장면이 재밌는 것이지 김구라는 사람이 아예 없었다면 그런 재미가 나올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사정이 이러니 원작자 입장에서는 차라리 오니로 하여금 스스로 일생을 끝맺게 하는 게, 속편하고 자극적인 스토리가 될 수 있을뿐더러, 또 한 편으로는 “이렇게 스스로를 처벌한 ‘뼛속까지 친일파’가 역사 속에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염원을 TV 전파에 뿌려보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0.01%라도 있었다면 극화가 쉽지만…

우리가 드라마 속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실제의 역사 속 인물과는 아무래도 다르게 마련입니다. 황 진사처럼 일본에 저항하다 사망한 양반도 물론 있기는 있지만 역사 속에서 보면 극소수입니다. 송 객주처럼 반일독립운동을 도와준 상인도 있기는 있었지만 극소수(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사실상 0%가 됨)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나쁜 길을 간 사람 99.99% 대 옳은 길을 간 사람 0.01%가 역사적 팩트라 하더라도, 극화(dramatizing)를 하는 사람은 그 0.01%에 집중 조명을 함으로써 “이게 옳은 길이었고, 앞으로도 이런 길을 가야 옳다”고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게 극화의 의미이고 재미입니다.

 

친일-고문 경관으로 유명했던 노덕술(왼쪽)이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돼 법정으로 들어서는 장면. 이승만의 비호를 받은 그는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헌데,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시대까지의 기간 동안, 이른바 한국의 엘리트 또는 유학파 출신으로서 한반도 안에서 친일을 통해 영달을 누린 사람 중에 백이현처럼 진지하게 반성을 한 경우는 0%에 가깝다고 기억합니다.

 

드라마 '녹두꽃'의 첫 장면은, 일본 유학에서 금의환향하는 백이현이 길에서 죽어가는 조선 유랑민을 만나 적선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젊어서부터 친일과는 다른 길을 걸어간(독립운동에 헌신한) 조선 엘리트들이야 물론 많았지만, 친일 길을 달려 일본 권력의 핵심부와 접선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뒤에 뒤늦게라도 “아, 내가 일본에 속았구나”라는 깨달음에 이르러(이런 깨달음은 분명 있었습니다. 영원히 승리할 것만 같았던 일본군은 1942년 태평양 과달카날 해전에서 미국에게 패하면서 패색이 짙어졌고, 일본의 상층부 또는 조선인 일본유학생 중에는 ‘이제 일본 패망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던 사람들이 꽤 많았음을 여러 기록들이 증언합니다), 자살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말이나 글로라도 진지하게 반성한 조선인 엘리트는 찾아보기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백이현이 걸어갔던 것과 똑같은 길을, 한국인들은 생생하게 봐왔습니다. 80년 전에는 조선독립선언서를 썼던 이광수-최남선이 결국 골수 친일파가 되는 모습을 통해, 그리고 20세기-21세기초에는 ‘과거 한때 학생운동-민주화운동에 전념했으나 이후…’라고 경력 소개가 되는 사람들을 통해서입니다.

엘리트의 변절이 일상사가 되는 이유

엘리트 출신은 이런 변절의 길을 가기 쉽습니다. 첫째, 지배층(과거에는 조선총독부, 이후에는 군부독재정권)이 엘리트들을 적극 포섭하려 나서고(0.1%의 엘리트만 포섭하면 나머지 99.9%는 포섭이 쉽기 때문에), 둘째 엘리트가 마음먹기에 따라 장래의 생활에 너무나 엄청난 변화(옥중에서 생을 마치느냐 아니면 부귀영화를 누리느냐 하는)가 초래되기 때문입니다.

 

민비 측근으로부터 "왕비께 천거해 한양으로 보내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크게 동요하는 백이현. 평민은 받지 못하는 이런 제안을 엘리트들은 받고 또 변절에 따른 보답이 크기에 엘리트는 변절하기 쉬운 주체이기도 하다. 

 

반면 서민들에게는 이런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을 뿐더러(엘리트 아닌 서민을 조선총독부나 군부정권이 포섭해봐야 별 도움이 안 되므로), 설사 변절했다 하더라도 장래 삶에 큰 변화가 주어지지도 않습니다(전봉준의 은신처를 당국에 밀고한 극중 김경천의 그 이후를 보면 알 수 있지요. 김경천이 뭔 변절을 하건 그에게 백이현처럼 고부 사또가 되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객관(포섭하려는 권력층)과 주관(“나는 엘리트니까 걸맞게 살앙댜 한다”는 마음)이 만나 이뤄지는 엘리트의 변절이 일상사일지라도, 드라마 ‘녹두꽃’은 우리 사회에 수없이 존재하는 빛바랜 엘리트들(이력에 ‘과거에 ~~를 했으나 현재는’이라는 단서가 붙는 사람들)을 국민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주기는 합니다.

토착왜구도 오니도, 명문대 나왔으니까 밀어줘야 한다고?

반성한 후의 백이현을 “그래도 배운 게 많은 엘리트니까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해줄 거야”라며 기대하고 따르는 것은 가능합니다. 친일 행각을 철저하게 반성한 뒤니까요. 하지만 백이현이 아무리 잘나고, 심성 착하고, 명문 게이오대학을 졸업했다 하더라도, 반성하기 전의 백이현은 도채비 또는 오니에 불과하고, 도채비 또는 오니 단계에 머물러 있는 인물을 “그래도 명문대를 나오고 배운 게 엄청 많은 엘리트인데”라며 존중하고 따르고 기대하는 건, 그냥 악(惡)을 도와주는 행동에 불과합니다.

 

일본군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출세 가도를 달리는 '오니'. 이런 앞잡이라도 명문대 출신, 엘리트라면 "그래도 배운 사람인데"라면서 기대를 해야 하나? 


명문대를 나온 것 말고는, 겉보기에 훌륭한 엘리트 코스를 달려온 것 말고는 ‘인간적-정치적 장점’이 거의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도, 선거철 한국에서는 “그래도 서울대 나온 사람인데” “출세한 사람인데”라는 이상한 이유를 대면서 찍어줘야 한다고 거품을 무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명문대 나온 것에 왜 그리들 엄청난 비중을 두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최근 한국에 ‘토착왜구’라는 논의가 활발한데, 한국인이면서도 왜구 같은 행태를 보이는 엘리트라면 그에 대한 기대나 지지는 접어버리는 게 평민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이력서에 ‘한때 ~~였으나 지금은’이라는 단서조항을 달고 있는 엘리트들에게 “그래도 서울대를 나왔는데…” “그래도 하버드를 나왔는데…” “그래도 판사 출신인데…” “아무러면 고시 합격자인데…”라는 철없는 기대를 더 이상 품지 말라는 당부를, 백이현이라는 인물을 통해 훌륭하게 펼쳐준 드라마 ‘녹두꽃’ 제작진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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