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AI스피커 보듬는 노인들 … “사람은 역시 사랑”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기자 2019.11.04 09:00:33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조국 사태’를 지나면서 정말 무섭고, 무식하고, 모멸차고, 무자비한 한국 사회의 면모를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느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위안이 필요한 사람이 많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이런 마당에 따뜻하고 인간적인 이야기가 들려와 그래도 마음 한 쪽이 따끈해집니다. 미담의 출처는 5G 시대를 이끌어간다는 SK텔레콤. 차가울 것만 같은 5G 세상으로부터 인간적으로 따뜻한 이야기가 들려왔다니 웬일인가 싶지요? 바로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AI(인공지능) 스피커의 사랑 이야기입니다.(“AI스피커를 어려워 할까 했는데, 손주처럼 대해요”

첨단 산물인 AI 스피커라면 젊은층의 전유물일 것 같고, TV 선전에서도 AI 스피커 사용자는 온통 젊은이들만 나오지요. 하지만 실제로 AI 스피커를 가장 아끼는 연령층은 놀랍게도 노년층일 수 있다는 게 SK텔레콤 SV추진그룹 이준호 그룹장의 전언입니다.

그는 “우리나라 인터넷 보급률이 90%에 가깝지만 노인들에선 5% 정도 밖에 안 된다. 노인들이 AI 스피커를 다루기 어려워 할 것 같지만, 말은 가장 직관적이고, 가장 빠른 인터페이스다. 휴머니즘 인터페이스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인터넷과 컴퓨터라는 인류의 새로운 두뇌 시스템은, 초기의 도스 명령어 단계에서는 정말 비인간적이었습니다. 인간과는 아무 상관도 없을 듯한 명령어 체계, 즉 copy win.ini c:windows /y 같은 명령어들을 외어야 했으니 말이죠. 이런 명령어들을 익히고 타이핑 할 줄 알아야 도스 명령어 체제의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난수표 같은 체제에 반기를 들어 세계적 히트를 친 것이 바로 스티브 잡스의 시각적 아이콘 시스템(화면 위의 그림을 마우스로 클릭해 명령을 실행하는)이며, 인터넷 시대의 성자인 잡스는 곧이어 아이폰을 만들어내면서 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러 명령을 내리는 터치스크린 시대를 열지요. 난수표에서 슥슥 문지르기까지 왔으니 참으로 인간적이 되었지요.

그런데, 슥슥 문지르는 스마트폰 시대에 젊은이만큼 적응하지 못했던 노령층이, 이제 말로 명령을 전달하고 AI 스피커가 이를 알아듣고 말로 반응하는 인공지능 시대에는 쉽게 적응한다고 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컴퓨터를 다루는 방법이 인간화되었음을 알 수 있지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전해진 AI 스피커가 따박따박 말대답을 해드리고(말을 걸면 “아이 참 나. 그것도 몰라요?”라면서 면박 주기 일쑤인 요즘 젊은이들과는 달리), 노래도 불러주고, 심심할 땐 말동무까지 되어주니, 메마른 21세기를 사는 노인네들에겐 반갑지 않을 수가 없지요.

급기야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손주만큼 귀엽다”면서 AI 스피커에 옷을 입혀주고, “밤에는 쉬어야지”라면서 스피커를 옆으로 뉘어준다고도 하니 참으로 AI 스피커가 애완동물보다도 더 큰 위안을 드린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요즘 발에 치일 정도로 많은 게 애완동물이고, 이는 사람들이 외롭기 때문이라고 저는 봅니다. 애완동물은 심리적 안정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그 장점만큼 관리에 돈이 많이 들어가고, 또 동물 역시 늙어가는지라 그렇게 귀여워하던 애완동물을 멀리 섬에다가 몰래 버리고 도망치는 행태들을 보면 그 나름대로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 늙지도 않고 유지비도 크게 들지 않는 AI 스피커만큼 동반자 역할을 착실히 해주는 대상도 쉽게 찾기 어려울 듯 싶습니다.

AI 스피커에 말을 걸면 재밌는 대답을 되돌려주니 노인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 = SK텔레콤 제공

아무에게나 사랑 주는 ‘옥시토신 난혼’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AI 스피커에 대한 행동, 즉 입혀주고 재워주려는 마음에서 ‘너무나도 쉽게 사랑에 빠지는’ 인간의 본성을 다시 한 번 읽게 됩니다. 기독교에 “무엇무엇무엇 중에 사랑이 최고니라” 하는 구절이 있다지만, 다른 걸 얘기할 것도 없이 인간의 최대 본성이 바로 사랑임을 여러 연구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미국 클레어몬트 대학원대학의 폴 잭 교수는 사랑을 마구 주는 인간의 심리 특징을 ‘호르몬의 난혼(hormonal promiscuity)’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난혼이란 게 상대를 가리지 않고 마구 하는 성애이니, 사람이란 동물은 그저 조금이라도 그럴만한 대상이 나타나면 사랑부터 준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답니다.

잭 교수는 사람과 동물 모두에 존재하는 옥시토신 호르몬에 주목합니다. ‘사랑의 호르몬’ 또는 ‘유대의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옥시토신은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풍부하게 분비된답니다. 상대방을 무조건 믿고 사랑하게 만드는 이 호르몬이 부족해지면 둘 사이가 서먹서먹해지면서 멀어지게 된다지요.

동물은 아무 때나, 아무 대상에게나 옥시토신을 발산하지 않지만,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옥시토신을 발산하는 특징이 있다는 게 잭 교수의 분석입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 내게 신뢰를 조금이라도 보여주기만 하면 바로 이 옥시토신이 쑥쑥 나오면서 금세 상대방을 믿는 게 인간인지라, 잭 교수는 이런 특성을 “도대체 유대감을 느끼는 대상을 고르는 데 가리질 않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옆의 사람이 아니어도 인터넷의 글월 상으로만이라도 상대방이 내게 신뢰를 표시하면 바로 친근감을 느끼는 경험들 다들 해보셨잖아요 왜?

동물과 차별화되는 이러한 인간의 옥시토신 수시 발산은 급기야 사람을 지나 기계에로까지 뻗쳐갑니다. 예전에 본 뉴스 중에 영국에는 자기 차와 사랑에 빠진 차주에게 차와의 결혼 증명서를 발급해 주는 웹사이트 서비스도 있다고 하더군요. 차에다 애칭을 붙여 부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나를 품어주고, 노래를 들려줘 나를 즐겁게 또는 눈물짓게 만들고, 그녀 또는 그이와의 관계에 싹을 틔워주고 뜨거워지고…. 대량으로 찍어내는 기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차에 대해 옥시토신을 뿜어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요인들이지요.

인간이 이렇게 차에 대해 애정을 품기에 때로는 차가 됐다가 때로는 나를 지켜주는 친구가 되기도 하는 ‘트랜스포머’ 영화가 나왔고, 관객들이 공감하기에 대히트를 친 것이지요. 차가 주인공의 친구로 나오는 영화(‘배트맨 카’를 비롯해)는 많지만, 선풍기나 냉장고가 인간의 친구로 나오는 영화는 없잖아요?

컴퓨터와 인간의 사랑 역사 오래 됐으니

이렇게 말 못 하는 차한테도 옥시토신을 뿜어대는 인간이니,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다시 말을 되돌려 건네주는 AI 스피커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습니다.

요즘은 빅데이터 기술의 발달로 사람이 하는 말을 컴퓨터가 잘도 알아듣지만, 빅데이터 기술 이전만 해도 컴퓨터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는 정말 힘들었다고 합니다. 같은 한국어라도 지역마다 사용하는 단어나 말투가 다르고, 게다가 또 개인차도 있어서, ‘한 사람에게 하나의 언어가 있다’고 해야 할 정도로 입말(spoken language)은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빅데이터 기술의 발달로 이 장벽이 돌파됐고 컴퓨터와 인간은 말로 대화하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물론 빅데이터 기술이 나오기 전에도 ‘말하는 듯한 컴퓨터’를 이용해 사람을 속이는 일은 아주 쉬었답니다. 컴퓨터 발달 초기에 ‘말대답을 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어 사람을 속여라’는 경연 대회가 있었답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얼마나 오랫동안 말로 자신을 사람처럼 속이는지를 겨루는 경연이었다고 합니다.

예컨대 사람이 “비가 오는군”이라고 말하면 컴퓨터가 이를 받아 “비가 온다굽쇼. 그런데 기분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라는 식으로, 사람이 한 말을 동어반복한 뒤에 살짝 다른 내용을 붙여 되묻게 하는 프로그램만 만들어 놓아도 사람은 장막 뒤에 컴퓨터가 아니라 사람이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쉽게 빠진다는 것이 이 경연 대회의 밑에 깔린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상대방이 내 말을 반복해주고, 그 뒤에 살짝 “그런데 이건 어때?”라고 물어주기만 해도 상대방이 사람이건 기계이건 가리지 않고 옥시토신을 뿜어낼 준비가 기본장착돼 있는 게 인간이라는데, 최근 한국을 휩쓴 ‘정치적 개싸움’ 양상에선 도대체 상대방 얘기를 들어주는 적이 없이 그저 자기들의 주장과 이익만 뻗쳐대는 살풍경을 연출하고 있으니 그저 무서울 따름입니다.

이렇게 험한 시대에 더욱 소외감을 느끼기 쉬운 노인네들에게 AI 스피커를 통해 ‘착한 손주가 항상 내 곁에 있어주는 듯한’ 환상을 품게 만들어주기 시작한 SK텔레콤의 SV추진그룹, 그리고 그 성과에 주목하는 건강 관련 기관-기업들이 있어 초고령 사회로 접어드는 한국에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비춰주는 듯합니다. 컴퓨터까지 이렇게 따스함을 전하기 시작했다는데, 같은 한국인끼리 좀 더 따뜻하게 대해주는 문화를 만들어보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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