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규상 칼럼] 특수부 검사로 엿본 전두환 비자금 세 장면 … 利로 똘똘 뭉친 그들?

문규상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 기자 2019.11.12 17:50:25

(CNB저널 = 문규상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 전두환 前 대통령(이하 ‘전 통’이라 함)이 온 나라를 다시 시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전 통은 2017년 4월에 출간된 <전두환 회고록>에서 “5. 18. 당시 계엄군은 헬기 사격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5. 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해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일 뿐”이라고 기술하여 고인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유족에 의해 고소되어 검찰의 수사를 받았고 2018년 5월 3일 불구속 기소되어 현재 광주지방법원에서 사자명예훼손죄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전 통은 그동안 재판 연기와 불출석을 반복하다가 지난 3월에야 처음으로 광주지방법원에 출석하였으나 그 후 전 통 측은 ‘고령이며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고 원거리 이동이 어렵다’는 이유로 재판부로부터 선고 전까지 불출석을 허가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 ‘알츠하이머를 앓아서 법정 출석이 어렵다’던 전 통이 최근에 강원도 홍천에서 골프 치는 모습이 공개되어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공개된 영상에 비친 전 통은 90세에 가까운 고령임에도 나이에 비해 상당히 건강해 보였고, 의사표현도 확실한 것으로 보여 광주학살 책임자인 전 통이 국민을 우롱하고 법정을 모독하였다며 ‘불출석 허가를 취소하고, 강제구인을 해서라도 구속해서 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인들과 함께 골프를 치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 영상은 서대문구 구의원인 임한솔 정의당 부대표 측이 촬영한 영상으로 전 전 대통령이 지인들과 함께 강원도 홍천의 한 골프장에서 라운딩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사진 제공 = 정의당

필자는 전 통이 대통령 재임 시 기업인들로부터 수천억 원대의 뇌물을 받아 비자금으로 관리했던 사건의 마무리 수사와 공판 단계에 참여했던 적이 있는데 짧은 기간이었지만 필자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3개의 단상이 강렬하게 남아있습니다.

첫째는 전 통 시절 경호실장과 안전기획부장을 역임했던 전 통의 심복 장세동과 관련된 기억이고, 둘째는 당시 전 통으로부터 압수한 비자금으로 관리되던 1억 원짜리 무기명 산업금융채권증서와 관련된 기억이며, 셋째는 전 통의 비서관 및 경호원들에 대한 수사 등과 관련된 기억인데 20년이 훨씬 지난 사건이라 기억이 다소 부정확할 수도 있지만 최선을 다해 기억을 더듬어 보겠습니다.

장세동 집의 ‘그분이 주신 30억’

첫째, 장세동과 관련된 기억입니다.

필자는 1996년 3월 검찰 정기인사에서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으로 발령받아 특수 3부(당시 부장검사 김성호/전 법무장관, 국정원장 역임)에 배치되었는데 당시 특수 3부는 전 통의 비자금 수사를 맡아 약 한 달 전인 1996년 1월 23일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죄로 구속 기소한 상태로서 앞으로 다가올 공판 준비와 마무리 수사로 매우 분주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서울지검에 부임한 첫날 검사실 캐비닛을 정리하던 중 약 30여 개의 예금통장과 막도장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꺼내보니 약 30여억 원이 예금되어 있었고, 예금주는 모두 장세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당시 저와 함께 근무하게 된 이 수사관에게 확인하였더니 이는 전 통 비자금 수사 시 장세동의 집에서 압수해 왔던 것인데 전 통이 재직 기간 동안 뇌물로 받은 돈을 장세동에게 약 30여 회에 걸쳐 개별적으로 격려금 등으로 준 것을 장세동이 ‘어른께서 주신 돈인데 함부로 쓸 수 없다’며 한 푼도 쓰지 않고 예금해 두었던 것으로 몰수의 대상이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그냥 캐비닛 속에 처박아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일단 예금통장과 도장들을 검찰청 내 압수물 창고에 임시 보관토록 지시한 후 위 통장에 예금되어 있는 돈을 몰수할 수 있는지 법리검토를 다시 해 보았으나 전 통이 기업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관리하는 과정에서 다른 뇌물과 섞이고 다시 여러 개의 예금으로 쪼개져 개발신탁예금, 수익증권저축, 기업금전신탁, 정기예금 등으로 분산예치하거나 양도성예금증서(CD) 또는 무기명 채권 등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누구로부터 받은 뇌물이 장세동에게 건너간 것인지 특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전 통이 장세동에게 위 돈을 격려금으로 주었고, 장세동이 다시 이를 은행에 예금하는 과정에서 그 돈의 소유권이 전 통에서 장세동으로 이전되었고 그 원형이 변형되었기 때문에 전 통의 뇌물 사건과 관련해서는 형법 또는 공무원범죄에 관한 몰수특례법에 의하더라도 장세동으로부터는 몰수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상당한 기일이 지나 상부에 보고한 후 장세동에게 위 예금통장들을 모두 되돌려 주었는데 매우 아까운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1억짜리 채권 수십 장 묶음들

둘째, 1억 원짜리 무기명 산업금융채권증서에 관한 기억입니다.

전 통 재판이 시작될 즈음에 당시 전 통으로부터 압수해 온 산업금융채권증서를 법원에 뇌물 관련 증거로 제출하기 위해 다시 이를 정리하는 작업을 특수 3부 소속 각 검사실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압수영장에 의해 압수물을 압수해 오면 먼저 압수번호를 매기는데 본래 압수물 1개 당 압수번호 1개가 부여되므로 1억 원짜리 산업금융채권증서도 1장마다 압수번호 1개가 부여되어야 함에도 어떤 압수번호에는 1억 원짜리 산업금융채권증서 10장이 들어있었고, 또 어떤 압수번호에는 1억 원짜리 산업금융채권증서가 2장, 3장씩 뭉쳐있었을 뿐만 아니라 채권번호도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누가 몰래 이를 가져가더라도 아무도 알 수 없고, 흔적도 남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를 일일이 다시 모두 확인하여 압수번호 1개마다 산업금융채권증서 1장씩만 남겨두고, 남는 산업금융채권증서에는 1장마다 다시 압수번호 1개씩을 매기고 채권번호를 모두 적어 넣어 특정을 시킨 다음 증거로 제출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그대로 법원에 보냈다면 큰 혼란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많았을 것입니다. 법원에 보내기 전에 이를 발견할 수 있어 큰 다행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12일 오후 서울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오월을사랑하는모임, 5·18민중항쟁구속자회 등 5·18 관련 시민단체가 연 전두환 전 대통령 규탄 기자회견에서 한 관계자가 전 전 대통령모형 허수아비를 앞에 두고 자유발언을 하고 있다.

“수고했다”며 강남 아파트 4채 값을

셋째, 전 통 비서관과 경호원들에 대한 수사와 관련된 기억입니다.

전 통 비자금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전 통이 재임 기간 중에 기업인들로부터 받은 뇌물 액수(대법원에서 확정된 금액 2205억 원)에 비해 전 통으로부터 압수하여 회수한 돈은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533억 원)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틀림없이 압수된 재산 이외에도 전 통이 몰래 숨겨 둔 재산이 많이 남아있을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이에 착안하여 전 통 측에서 숨겨두었던 무기명 산업금융채권증서를 당시 명동 사채시장 등에서 할인하는 방법으로 몰래 현금화해 갈 것이라고 추측하고 명동 사채시장의 사채업자들에게 누군가 은밀히 사채시장에서 채권을 할인하려 하면 즉시 검찰에 신고하도록 사전에 조치를 취해 두었습니다. 당시에는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무기명 채권을 할인하지 않고 사채시장에서 몰래 할인하는 경우에는 형법상의 업무방해죄로 처벌하던 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그러나 그 후 대법원에서 이런 경우 업무방해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무죄 확정되었음)

그러던 어느 날 명동 사채시장으로부터 급히 연락이 와서 수사관들을 보냈더니 오랫동안 전 통의 운전수로 일했던 자가 명동 사채시장에서 1억 원짜리 무기명 산업금융채권을 몰래 할인하려다가 검거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을 상대로 추궁한 결과 전 통이 골목 성명(1995년 12월 2일)을 발표하고 합천으로 떠나기 전 날 자신에게 1억 원짜리 산업금융채권증서 10장(10억 원)을 그동안 수고했다며 주었는데 이것을 보관하고 있다가 자신의 건강이 나빠져 그 중 1장을 몰래 명동 사채시장에서 현금화하여 사용한 적이 있는데, 전 통이 구속되자 전 통 가족들의 생활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나머지 산업금융채권을 현금화하여 이순자 씨에게 갖다 주려다가 검거된 것이었습니다.

‘골목성명’ 전날 하사한 100억+알파

이를 계기로 전 통이 골목 성명을 하고 합천으로 내려가기 전날 다른 비서관과 경호원들에게도 틀림없이 격려금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전 통의 사저에 붙어있는 경호동을 압수수색하고 전 통의 비서관과 경호원들을 모두 긴급체포하여 수사를 시작하였습니다.

필자에게 배당되었던 사람은 송 모라는 비서관이었는데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예비역 중령으로 키가 180센티미터를 훌쩍 넘어보였고, 체격이 매우 건장한 40대 초반 정도로 보였습니다. 송 비서관과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처음에는 산업금융채권증서를 받은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하였으나 인간적으로 접근하여 밤새워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필자를 믿게 되었는지 긴급체포 시한 48시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에 골목 성명 전날 전 통이 자신을 불러 자신이 구속되면 챙겨줄 수 없다고 하면서 그동안 수고했다며 대봉투 1개를 주기에 받아 자신의 방으로 와서 확인해 보니 1억 원짜리 무기명 산업금융채권증서 10장이 들어있어 깜짝 놀랐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서울 강남의 30평형대 아파트 3~4 채를 거뜬히 살 수 있을 정도였으니 현재 금액으로 따지면 어마어마한 금액에 해당될 것입니다.

필자가 자백을 받은 후 다른 검사실에서도 차례로 자백을 받았는데 당시 경호원들과 비서관들이 자백한 내용을 종합하면 전 통은 골목 성명을 하고 합천으로 내려가기 전날 밤에 자신의 비서관과 경호원들을 차례로 불러 각 1억 원짜리 무기명 산업금융채권증서 10장씩을 대봉투에 넣어 주었는데(당시 얼마나 급했던지 제대로 세지 않고 집히는 대로 주는 바람에 어떤 사람은 11장이 들어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전 통이 바로 구속이 되자 이를 사용하지 못하고 보관하고 있다가 전 통의 변호사비와 가족들의 생활비 등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자신을 포함한 거의 모든 비서관과 경호원들이 명동 사채시장에서 이를 현금화하여 이순자 씨에게 갖다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비서관과 경호원들에 대한 수사를 마친 바로 다음날부터 전 통 측을 압박하여 비서관과 경호원들이 가져다 준 현금을 내놓지 않으면 전 통의 주거 공간인 사저를 압수수색 하겠다며 전 통 변호인들을 통하여 넌지시 알리는 한편, 전 통 변호인들이 변호사 수임료를 거의 한 푼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더욱 더 비서관과 경호원들로부터 받은 현금을 내놓으라고 압박을 가하였고, 언론을 상대로도 전 통의 사저에 대한 압수수색을 할 수도 있다는 언질을 주어 계속해서 관련 보도가 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당시 전 통의 변호인으로 활동하던 이00 변호사가 김성호 부장을 찾아와 현금을 갖다 줄 테니 사저에 대한 압수수색은 말아 달라고 요청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이00 변호사가 가져온 것은 현금이 아닌 1억 원짜리 무기명 산업금융채권증서 60여 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국 집 뒤진 2019년 검찰과
전두환 안방 방치한 1995년 검찰


비서관과 경호원들이 현금화해서 갖다 준 돈만 하더라도 100억 원이 훨씬 넘었으므로 1억 원짜리 무기명 산업금융채권증서 130장 정도는 받았어야 했지만 전 통 측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더 이상 내놓을 채권이 없다고 딱 잡아떼고 있다가 1억 원짜리 산업금융채권증서 60여 장을 내놓은 것을 보면 전 통 측은 어딘가에 현금이나 채권 등을 더 숨겨놓았던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당시 떠돌던 소문으로는 전 통의 사저 안방을 파서 만든 큰 지하창고 속에 현금과 채권, 귀중품 등을 숨겨두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확인하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웠습니다.

1995~1996년 당시 검찰의 전 통 비자금 추적 팀이 전 통의 비자금 규모가 적어도 2000억 원이 훨씬 넘었던 것으로 파악하였으나 700~800개 정도의 가·차명 계좌에 3~5억 원씩 쪼개 넣고 수시로 입출금하는 방법으로 자금세탁을 하는 바람에 사실상 추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중도에 중단한 바 있었으나, 2013년에 다시 자금추적을 하면서 수백 억 원 규모의 재산을 찾아내어 추징한 점에 비추어 보면 전 통의 사저 안방에 비밀창고가 있었다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당시 전 통의 사저를 압수수색 하지 않은 것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하지 못한 것인지 제 위치에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최근 현직 법무장관의 자택을 11시간에 걸쳐 압수수색한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필자와 이틀 밤을 꼬박 새며 함께 했던 송 비서관은 현직 군인 신분으로 청와대 경호원으로 차출되었다가 전 통이 퇴임하면서 함께 퇴직하고 비서관으로 전직했는데 그가 맡은 업무는 전 통의 일정을 관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전두환이 내란수괴 등 혐의로 구속되기 직전인 1995년 12월 2일 자택 앞 골목에서 검찰 소환 방침에 정면 반박하는 2쪽 분량의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는 모습. 사진 = 연합뉴스

퇴임 후 패거리들과 깨알같이 골프 회동

그로부터 압수한 업무일지 3~4권에는 전 통이 퇴임 직후부터 구속되기 전까지 5공 때 장관을 하였거나 참모총장급 인사 등 20여 명과 5~6 개 팀을 만들어 전국의 골프장을 다니면서 기업인들의 후원 하에 골프를 친 사실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멤버는 다양한 인물들이 번갈아 가면서 참가하였고, 스폰서를 하겠다는 기업인들이 미리 예약을 하고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업무일지는 비자금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에 몰수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2~3 개월 보관하다 송 비서관의 계속적인 반환 요청이 있어 되돌려 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복사라도 해 둘 걸 하고 후회되는 점도 있지만 법적으로는 되돌려 준 것이 옳은 결정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앞에서 보았던 사례들을 종합해 보면 전두환이라는 인간의 됨됨이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장세동과 전 통의 비서관과 경호원들에 대해서 전 통이 조건 없이 거액을 줄 정도로 배포가 크고 부하들에 대한 애정과 배려심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고, 그에 대응하여 장세동과 전 통의 비서관과 경호원들도 전 통에 대한 충성심이 무한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국가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라기보다는 사적인 모임의 우두머리로서 알량한 의리를 앞세운 것으로 보여질 뿐입니다.

공자가 논어 위정편(論語 爲政編)에서 “군자는 義(의)로 사귀며 利(리)로 사귀지 않으나 소인은 利로 사귀고 義로 사귀지 않는다(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라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전 통은 소인에 불과하고 사리사욕을 앞세운 협량한 인간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골프장 식당에서 마주친 全 패밀리

그 밖에도 필자가 전 통을 면전에서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1992년 여름 휴가철을 맞아 검사 네 가족이 함께 용평으로 휴가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휴가 기간 중 용평에 있는 9홀짜리 퍼블릭 골프장에 예약을 하고 새벽 티오프 시간 전에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중 출입문 쪽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일어났다가 잠시 후 우루루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전 통이 부인,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등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일어나거나 쳐다보자 “식사하세요, 식사하세요”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앉아있으라는 뜻으로 한쪽 손을 들고 흔들면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전 통 부부가 백담사에서 거의 2년 간 칩거하다가 속세로 나와 있던 때였고, 5공 비리 청문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좁은 퍼블릭 골프장의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기가 내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일행도 마침 식사가 끝났기 때문에 잠깐 앉아 있다가 바로 일어났습니다. 존경받지 못하는 대통령 패밀리와 한순간 바로 옆자리에서 식사를 함께 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이 장면과 함께 그 후 법정에서 전 통이 수의를 입고 경호실장이던 안현태, 국세청장이던 성용욱, 안전기획부장이던 안무혁, 재무장관이던 사공일, 은행감독원장이던 이원조 등과 나란히 서서 재판을 받던 장면이 아직도 필자의 뇌리에 뚜렷하게 새겨져 남아있습니다.


법무법인 대륙아주 문규상 변호사는 1978년 서울법대 졸업, 1987년 검사로 임용되어 ‘특수통’으로서, 변인호 주가 조작 및 대형 사기 사건, 고위 공직자 상대 절도범 김강용 사건, 부산 다대/만덕 사건, 강호순 연쇄 살인 사건 등을 맡아 성과를 냈고, 2003년의 대선 자금 수사에서도 역할을 했다. 2009-2014년 대우조선해양의 기업윤리경영실장(부사장)을 역임하며 민간 부패에 대한 경험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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