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규상 칼럼] 현장에 답이 있다

문규상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 기자 2020.01.13 09:04:59

(CNB저널 = 문규상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 1989년 3월, 이른 봄 무렵에 강원도 홍천읍에 있는 다방에서 종업원의 과실로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건물이 거의 전소될 정도로 재산 피해가 많아 실화죄로 입건하겠다는 취지의 수사보고가 경찰로부터 올라왔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경찰의 수사보고서에 편철되어 있는 수사기록을 꼼꼼히 읽어나갔더니 의심이 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다방종업원이 화재 현장에 쓰러져 있는 상태에서 발견이 되었는데 유독가스를 많이 마셔 조금만 늦게 발견이 되었더라면 아마 생명을 잃었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종업원은 정신이 회복된 후 받은 경찰 조사에서 과실을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의 수사보고서에는 종업원은 영업이 끝난 야간에는 다방에 딸린 내실에서 혼자 기거하였는데 화재가 발생한 날 새벽 무렵에 촛불을 켜놓은 채 잠이 드는 바람에 촛불이 넘어져 주변에 불이 옮겨붙어 화재가 커진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방 종업원의 말로는 자신이 영업을 마치고 혼자 있으면서 촛불을 켠 것은 사실이나 분명히 촛불을 끄고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매캐한 냄새와 ’타닥 타닥‘ 하는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어나 보니 불이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옮겨 붙어 번지고 있기에 놀라서 혼자서 불을 끄려고 애를 쓰던 중 유독 가스를 많이 마시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정신을 잃게 된 것이라고 하면서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다방 종업원은 이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18세의 어린 소녀였고 화상을 입어 얼굴과 팔 등 온 몸에 많은 화상을 입어 흉터가 남게 된 상태였습니다.

 

작년 12월 25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조사관 등이 포스코 광양제철소 폭발 사고 현장 감식을 하고 있다. 현장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진 제공 = 포스코

필자는 당시 경력이 일천하고, 화재 현장을 직접 검증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사법연수원에서 배웠던 교재를 꺼내 실화죄와 방화죄 등 화재 사건의 경우 특별히 참고해야 할 점이 무엇이 있는지를 다시 공부한 다음 화재 현장에 직접 나가서 현장검증을 해 보기로 마음먹고 경찰에 연락하여 현장에서 대기토록 지시를 하고 화재 현장인 다방으로 가서 처음 발화 지점으로 지목된 곳에서부터 불이 번져나간 경로 등을 꼼꼼히 확인해 나갔습니다.

18세 다방 여종업원과 현장검증

그러나 경찰의 추정과는 달리 발화 지점으로 지목된 다방 내실의 양초가 놓여있던 곳으로부터 불이 번져나간 것이 아니라 천장 바로 밑 벽에 부착되어 있던 전기 콘센트를 중심으로 천장과 벽 아래로 불길이 번져간 것으로 보였고, 연기 자국도 선명하게 남아있었습니다. 현장검증 결과 현장의 상황이 경찰의 추정과는 맞지 않고, 오히려 다방 종업원의 진술과 부합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경찰에게 화재가 누전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되니 다방 종업원에 대한 입건을 일단 보류하고 누전 여부에 대해 감정을 해 볼 것을 지시하였더니 그 뒤 누전으로 감식되었다는 보고가 왔기에 사건을 무혐의로 내사종결토록 지시하였습니다.

얼마 후 다방 종업원인 그 소녀로부터 볼펜으로 눌러 쓴 감사의 편지가 와서 저도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살라는 답장을 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도 몇 번 더 편지가 왔고, 제가 진주지청으로 발령을 받은 후에도 춘천지검으로 왔던 그 소녀의 편지를 전해 받은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더 이상 답장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답장을 끊었더니 그 후로는 연락이 끊겼습니다.

30년 이상 오래된 이야기지만 지금도 화재가 나면 그 소녀가 생각납니다. 이제는 쉰 살이 다 되었을 텐데 사회의 모진 풍파를 잘 견뎌내고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강호순이 2005년 당시 저지른 방화에 대해 수원지검 안산지청이 내놓은 현장검증 사진들.
연쇄 방화-살인범으로 붙잡힌 강호순의 2009년 2월 1일 현장 검증 당시 얼굴. 사진 = 연합뉴스

다방 화재 경험이 강호순에 대한 검거로

당시의 화재 현장에 대한 검증 경험은 그로부터 20년 후 필자가 안산지청장 시절, 연쇄 살인범 강호순이 거액의 보험금을 노리고 잠을 자고 있던 자신의 처와 장모를 방화살인을 한 사건을 밝혀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 사건 발생 당시 경찰이 현장검증 등 초동수사를 부실하게 하는 바람에 무혐의로 내사종결 되었으나 연쇄살인 사건을 계기로 3년 전에 내사종결 되었던 강호순의 처와 장모에 대한 방화살인 사건을 재수사하면서 다시 화재 현장 사진을 수집하고, 화재 감식 전문가 등의 도움을 받아 화재 원인을 복원할 수 있게 되어 강호순의 방화살인 범행을 밝혀내고 법원으로부터 유죄 확정을 받아내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30년 전 시골 경찰의 수사력과, 과학적인 수사 기법이 총동원되는 현재의 경찰 수사력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겠지만 ‘현장에 답이 있다’는 수사 격언은 지금도 불변의 진리입니다.


법무법인 대륙아주 문규상 변호사는 1978년 서울법대 졸업, 1987년 검사로 임용되어 ‘특수통’으로서, 변인호 주가 조작 및 대형 사기 사건, 고위 공직자 상대 절도범 김강용 사건, 부산 다대/만덕 사건, 강호순 연쇄 살인 사건 등을 맡아 성과를 냈고, 2003년의 대선 자금 수사에서도 역할을 했다. 2009-2014년 대우조선해양의 기업윤리경영실장(부사장)을 역임하며 민간 부패에 대한 경험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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