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포스코 등, '총수도 예외 없는' 준법 시스템 도입

독립성 강화한 감시기구 신설 … 갑질 계약 방지하는 AI 시스템 구축

윤지원 기자 2020.02.11 15:50:21

삼성전자와 포스코의 깃발. (사진 = 연합뉴스, 포스코)

2020년 새해, 국내 기업들은 시무식에서 ‘새로운 미래 10년’의 대비를 공통적으로 강조했다. 기술 발전에 의한 혁신과 융합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기업 활동에도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그만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고 있다.

‘법률 및 규제를 준수한다’는 의미의 컴플라이언스(compliance)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특히 우리나라의 몇몇 글로벌 대기업이 중대한 불법 이슈들로 인해 대외 신뢰도가 하락하는 등 준법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은 재계 당면 과제로 여겨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롯데그룹, 한진그룹 등이 지배구조를 개선하면서 컴플라이언스 시스템을 강화한 바 있고, 올해에도 한화그룹은 기존 컴플라이언스 위원회를 확대하고, KT는 비상설이던 컴플라이언스 위원회를 상설화하면서 최고준법감시책임자(CCO: Chief Compliance Officer)를 선임하기로 하는 등 변화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삼성그룹과 포스코는 2020년에 들어서며 준법 관리 시스템 개선을 위한 특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사법기관의 조언에 따라 이사회 등 최고 경영진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된 준법감시위원회를 출범시키는가 하면, 협력사와의 거래 약관의 불공정 조항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찾아내기 위해 딥러닝 인공지능(AI)을 이용한 자동 검출 시스템을 개발하기도 했다.
 

5일 서울 삼성생명 서초타워에서 열린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첫 회의에서 김지형 위원장(오른쪽)이 다른 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삼성, “총수도 예외 없는” 준법감시委 출범

삼성그룹은 CEO, 이사회 등 최고 경영진을 포함한 모든 임직원의 불법 행위를 근절하고 준법경영을 강화하기 위해 독립된 외부 기구로 ‘준법감시위원회’를 올해 신설했다. 해가 바뀌자마자 발표된 준법감시위원회는 삼성전자·삼성생명·삼성물산·삼성전기·삼성SDI·삼성SDS·삼성화재 등 7개 그룹사가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협약'을 공동으로 체결하고, 최근 각 계열사 이사회 의결 절차를 거쳐 정식으로 설립되었으며, 2월 5일 서울 서초동 삼성생명 사옥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을 담당한 정준영 서울고법 형사1부 부장판사가 지난해 10월 첫 심리에서 삼성에 '내부 준법감시제도' 설치를 고려해보라는 조언에 따라 만들어졌다. 사실상 발등에 불이 떨어진 데다 더 나은 대안이 없는 상황이었던 것.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해 7월 일본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김지형 전 대법관이 초대 위원장으로 위촉됐고, 곧 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회에는 고계현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사무총장, 권태선 환경운동연합 대표, 김우진 서울대 경영대 교수, 봉욱 변호사, 심인숙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이 외부 위원으로, 이인용 사회공헌업무총괄 고문이 삼성그룹 내부 위원으로 참여한다.

5일 첫 회의에서 준법감시위원회는 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과 권한에 관한 규정을 제정해 공개하고, 9명으로 구성된 사무국을 설치한다고 밝혔다. 규정에 따르면 위원회는 협약을 체결한 관계사가 대외적으로 후원하는 돈에 대해 사전 또는 사후에 통지받아 모니터링을 실시한다. 합병 및 기업공개를 포함해 관계사들과 특수관계인 사이의 각종 거래와 내부거래, 조직 변경 등에 대해 보고를 받고 의견을 제시한다. 위원회는 또 최고 경영진이 준법 의무를 위반할 위험이 있다고 인지하면 이를 이사회에 고지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특히, 위원회는 최고 경영진의 준법 의무 위반행위가 발생하는 경우 직접 해당 사안을 조사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외부 전문가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

위원회는 이와 같은 권한의 실효적 확보를 위한 장치도 마련했다. 관계사가 위원회의 준법경영과 관련한 시정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재차 권고하고, 재요구도 수용하지 않으면 위원회 홈페이지에 게시해 공표할 방침이다.

이날 첫 회의를 약 6시간 동안 진행한 위원회는 13일 오전에 2차 회의를 열 예정이라고 밝혔다. 13일은 이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공판 준비 기일 전날이다.
 

김지형 전 대법관이 지난달 9일 서울 서대문구 지평 회의실에서 삼성그룹 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직 제안을 수락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 = 윤지원기자)


실효성 논란 속 위원회 활동 개시

기존에도 삼성에는 어엿한 컴플라이언스 제도가 갖춰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 경영진의 중대한 위법 행위가 발생했고, 이것이 수년째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연초 삼성이 새로운 준법감시위원회 설치 계획을 발표하자, 이는 이 부회장 파기환송심에서 유리한 양형 사유로 삼기 위한 보여주기식 제도에 그치거나 반대로 지나친 경영권 간섭이 될 수 있다며 실효성 및 적절성에 대한 회의적인 논란이 일어났었다.

특히 실효성 논란에 관해서는 위원회가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려면 독립성과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위원들의 수당 및 위원회 운영비 등이 관계사들로부터 나오는 한 독립성에 한계가 있어 허수아비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한편, 지난달 17일 열린 파기환송심 속행 공판에서는 재판부가 이 위원회의 운영 실태를 직접 점검하고 그 내용을 양형에 반영한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재판부는 또 3명의 전문심리위원단을 지정해 삼성 준법감시위의 실효적인 작동 여부를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전문심리위원단은 재판부가 추천한 강일원 전 헌법재판관, 피고인인 삼성 측이 추천한 김경수 전 고검장(사법연수원 17기)과 함께 특검 측이 추천하는 위원 1명으로 구성될 전망이다.

다만 특검이 현재 준법감시위원회를 양형에 반영하겠다는 재판부의 뜻 자체를 거부하고 있어 차후 귀추가 주목된다.
 

포스코가 자체 개발한 스마트 팩토리 기술로 수집·분석한 정보를 활용해 조업하는 모습을 구현한 이미지. (사진 = 포스코)

포스코, AI로 약관 부당특약 잡아낸다

3일 포스코는 AI를 활용한 약관 공정화 시스템을 구축하고 본격 가동한다고 밝혔다. AI 약관 공정화 시스템이란 포스코가 협력사 등 비즈니스 파트너와의 거래 약관을 딥러닝(Deep Learning) 기반의 AI로 일괄 심사해 불공정한 조항을 자동 검출하고, 법무 검토를 통해 개선된 약관을 회사 표준으로 등록하고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포스코 법무실과 포스코ICT의 6개월에 걸친 합작품이다. 시스템 명칭은 ‘포스 컴플라이’(POS-ComplAi)라고 명명했다. 법규 준수를 뜻하는 영단어 comply에 AI를 합친 것이다. 포스코에 따르면 법무 관련 업무에 AI를 도입한 것은 포스코가 국내 기업 중 최초다.

지금까지는 해당 부서가 약관 검토를 요청하면 법무실이 이를 일일이 확인했다. 계약서 한 건을 검토하는 데 평균 3시간이 소요됐다고. 업무 부하가 크고 많은 시간이 드는 데 비해 완벽에 가까운 정확성을 장담할 수도 없다.

하지만 포스 컴플라이를 활용하면 검토해야 하는 계약서들을 한꺼번에 일괄 심사할 수 있고 시간이 대폭 단축되는 등 업무 효율성이 높아진다. 특히 포스코는 검토 결과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1만 6천여 건의 관련 법령, 지침, 심결·판례, 사내 상담사례 등의 데이터를 수집해 이를 AI에 학습시켰으며, 테스트도 수차례 거쳤다고 밝혔다.

해외에서 AI를 이용해 계약서 등 법무 서류를 검토하는 선례를 통해 포스 컴플라이의 효율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9일 포항 포스코 스마트공장을 방문해 최정우 회장의 안내를 받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법률 업무의 정확성·효율성 개선 기대

2016년 미국의 대형 로펌 베이커 앤드 호스테틀러가 파산 관련 업무의 판례 검토를 위해 도입한 AI 서비스 ‘로스’는 초당 1억 장의 문서를 검토하는 속도를 자랑한다고 알려졌다.

또 ‘로긱스’(LawGeex)라는 이스라엘 스타트업은 지난 2018년 여러 대형 로펌 출신의 베테랑 변호사 20명과 자사 법률 AI 플랫폼을 겨루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똑같이 통제된 조건에서 아직 외부에 알려진 적 없는 비밀유지계약 5건에서 중재, 관계 기밀 유지 및 면책 등을 포함해 오류 및 수정이 필요한 30개의 법적 문제를 찾아내는 검토 미션을 수행했다.

20명의 변호사는 검토를 마치기까지 평균 92분이 걸렸다. 가장 빨리 끝낸 변호사는 51분만에 끝냈다. 반면 로긱스의 AI는 단 26초 만에 검토를 마쳤다.

채점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도였는데, 숙련된 변호사들이 평균 85%의 정확도를 달성한 데 비해 AI는 94%를 달성했다. 변호사 중 가장 정확했던 단 한 명이 94%를 기록해 AI와 동률을 만들었다.

USC에서 경영 전략을 연구하는 비벌리 리치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쓴 ‘AI가 계약을 변화시키는 방식’(How AI is changing contracts)이라는 글을 통해 AI가 기업의 계약 관리 업무를 얼마나 획기적으로 개선하는지에 대해 소개했다.
 

사진은 본문과 무관함. (사진 = Unsplash)


많은 계약 관련 문서 데이터를 학습한 AI는 여러 언어로 작성된 서류를 어려움 없이 빨리 처리할 수 있으며, 수많은 계약서의 내용 파악 및 분류 등 관리의 효율성을 높인다.

특히 계약 중도 해지나 부당특약, 손실 조항 등 리스크가 될 수 있는 다양한 특수 변수를 찾아내 표시한다. 따라서 인적 과오에 따른 오류나 의도적인 불법 조항이 남겨질 여지를 최소화하며, 법무팀의 인력은 소모적인 서류 검토 대신 준법 리스크 관리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다.

현재 포스 컴플라이는 하도급법상 부당특약 해당 여부를 자동 검출 범위로 설정해 구축했다. 포스코는 일부 그룹사 및 1차 협력업체가 최근 수년 국내외에서 부당특약과 관련한 여러 갑질 문제에 연루된 바 있기에, 이번 포스 컴플라이 시스템 구축으로 이러한 리스크의 재발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을 것으로 특히 기대된다.

또한, 포스코는 포스 컴플라이 시스템의 적용 범위를 향후 공정거래법, 대리점법, 약관규제법 등 공정거래 관련 다른 법률까지 확대하는 것을 검토할 예정이며, 이 시스템을 각 그룹사의 비즈니스 특성에 맞게 개선해 활용 범위도 확대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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