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코로나19에 ‘기생충’ 특수 못 누리는 극장가 "아무 계획이 없구나"

'옥자' 때 한국 극장업계가 외면했던 넷플릭스는 가입자 증가율 최고

윤지원 기자 2020.03.05 11:52:04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전후로 ‘기생충’ 열풍이 거셌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아시아 곳곳에서 ‘아시아 영화의 쾌거’라며 숟가락을 얹었다. 아카데미 92년 역사상 처음 영어권 국가 영화가 아닌 한국영화에 작품상을 선사한 미국 내에서도 할리우드가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게 드디어 증명됐다며 자축이 이어졌다.

아카데미 직후 국내 극장가에 ‘기생충’이 다시 걸렸고, 초반에 하루 3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5위 이내에 재진입했다. 북미에서는 전 주 대비 3배가량 매출이 늘면서 박스오피스 톱10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북미 시각 기준 3월 2일까지 ‘기생충’의 글로벌 매출은 2억 3207만 달러(한화 약 2593억 원)에 달했다.
 

코로나19로 국내 개봉이 연기된 '기생충' 흑백판의 한 장면. (사진 = CJ ENM)


한국 최초 아카데미 수상작의 경제효과

우리 유통업계도 ‘기생충’ 특수를 적극적으로 노렸다. 농심은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로 해외에서도 관련 먹방이 이어지는 등 ‘기생충’ 최대의 수혜를 입은 기업으로 꼽힌다. 십수 년째 기발한 패러디 광고로 호평받고 있는 팔도 ‘왕뚜껑’은 이번에도 ‘기생충’ 패러디 광고로 효과를 누리고 있다.

대형 마트와 온라인 쇼핑몰 등은 짜파게티와 너구리 동시 구매시 할인을 해 주는 등 관련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는 전국적인 유행어가 됐고, 아카데미상 트로피 이미지나 ‘기생충’ 포스터에서처럼 눈을 가린 얼굴 이미지도 패러디 마케팅에 즐겨 쓰이고 있다.

그런데 정작 가장 큰 수혜를 입어야 마땅할 한국 영화계와 극장가는 역대 최악의 겨울을 보내고 있다. 아카데미 이후 한 달 동안 전국적으로 5000명 이상의 확진자를 내며 확산하고 있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이하 코로나19) 때문이다,

한국 영화계에 유례없는 불황이다. 4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전날 전국 극장을 찾은 일일 총 관객은 5만 9881명으로 이는 통합전산망 관객 수 집계가 시작된 2010년 이후 최저치다.

지난해 3월 첫 번째 화요일의 일일 관객 수는 17만 2000명 이상이었다. 참고로 ‘기생충’은 개봉 첫날인 지난해 5월 30일 목요일 하루 동안 단독으로 56만 8천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광진구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에서 광진구 보건소 관계자들이 방역 작업을 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명성교회 부목사가 2월 20일 이 영화관을 다녀간 사실이 뒤늦게 확인돼 2월 26일 오후부터 휴점에 들어갔다. (사진 = 연합뉴스)


바이러스에 눌린 ‘기생충’ 열기

급격한 관객 수 감소에 3, 4월에 개봉이 예정됐던 한국영화 기대작들이 일정을 미루고 있다. ‘기생충’의 최우식이 출연한 ‘사냥의 시간’을 비롯해 ‘결백’, ‘콜’, ‘침입자’ 등 이미 몇 주 전부터 3월 개봉을 전제로 캠페인을 시작한 영화들이 남은 시사회 일정을 모두 취소하는 등 일정을 미뤘다. 해외에서 먼저 공개되어 호평받고 있는 ‘기생충’ 흑백 버전의 국내 개봉도 미뤄졌다.

볼 영화가 없는 극장엔 관객이 더 뜸해질 전망이다. 악순환이다. 이에 CJ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했다.

코로나19 사태 확산을 늦추기 위한 ‘이웃과 거리두기’가 강조되고 있다. 최대한 상호 접촉을 자제하고, 여러 사람이 한 장소에 모이지 않도록 스스로 고립되는 것이 기본 생활 지침으로 권장되고, 많은 사람이 실천에 옮기고 있다.

오프라인에서 사람을 상대하는 산업은 죽을 맛이다. 소상공인의 위기에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자발적으로 낮출 정도다. 극장가와 공연계 등 오프라인 엔터테인먼트 업계 역시 큰 피해를 입고 있다.

지금 극장가와 영화계가 직면한 문제는 단지 당장의 코로나19 사태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에 그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고,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으며, 향후 이러한 상황이 또 발생할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 영화계는 ‘넷플릭스’를 다시 보고, 그 존재에 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
 

넷플릭스는 집에서 혼자 영화를 감상하는 데 적합한 서비스로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호황을 누리고 있다. (사진 = Pixabay)


극장가, 넷플릭스 보고 느끼는 바 없나요?

넷플릭스는 지금 사람들이 강제로, 또 자발적으로 고립되는 것이 필수인 상황에서, 오히려 호황을 누리고 있는 몇 안 되는 기업 중 하나다.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관련 업계에 따르면 2월 국내 넷플릭스 이용객은 코로나19 국내 확진자가 나타나기 전인 1월에 비해 10% 이상 증가했으며, 올해 1~2월 넷플릭스 가입자 증가율은 역대 최대 수준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넷플릭스는 매년 수조 원의 예산을 투자해 수많은 작품을 제작하는 메이저 콘텐츠 공급자다. 동시에 극장이 아닌 개인의 TV, 컴퓨터, 태블릿, 스마트폰 등 비교적 작은 스크린에서의 감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 업체다. 극장 상영을 전제로 하는 콘텐츠만을 영화로 규정할 경우, 넷플릭스의 존재는 참 골치 아프다.

일단, 할리우드는 넷플릭스와 공존하고 있다. 넷플릭스는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결혼 이야기’, ‘두 교황’, ‘아이리쉬맨’ 등등 가장 많은 후보작을 내놓으며 할리우드 영화산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튜디오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기생충’에 황금종려상을 수여한 칸 국제 영화제에서는 넷플릭스가 제작한 영화를 초청 대상 영화로 봐야 하는지, 아닌지를 두고 수년 동안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일단은 배타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영화 '옥자'의 한 장면. (사진 = 넷플릭스)


국내 영화계는 넷플릭스에 대해 어떤 입장일까? 지금까지는 갈등을 빚어왔던 기록이 가장 또렷하게 남아있다. 공교롭게도 봉준호 감독의 전작 ‘옥자’가 그 기록의 중심이다. 당시 넷플릭스는 봉 감독에게 거액의 제작비를 대면서, 봉 감독의 위상과 한국영화 시장의 특수성을 감안해 ‘국내 극장가 동시 개봉 보장’이라는 조건을 수용해주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극장가는 ‘옥자’가 극장에서 먼저 독점 개봉한 뒤,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되어야 한다는 전통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넷플릭스를 메인 배급 플랫폼이 아니라 IPTV나 DVD처럼 2차 판권 대상으로만 본 것이다. 넷플릭스가 이를 거부하니 국내 최다 스크린을 보유한 CJ CGV를 필두로 대형 멀티플렉스 체인들이 보이콧을 선언했다, 그 결과 ‘옥자’는 각 지방의 개별 극장들에서만 상영됐고,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중 ‘플란다스의 개’와 함께 극장 매출로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한 단 두 작품으로 남았다.

‘기생충’ 환상으로 외면한 바이러스 취약성

이후 한국에서는 넷플릭스와 극장 개봉이 함께 고려되는 ‘영화’가 좀처럼 제작되지 않고 있다. 봉 감독 이후로 박찬욱, 김지운, 최동훈 등등 한국의 스타급 흥행감독들이 넷플릭스라는 할리우드 대표 스튜디오의 거대 자본을 투자받아 더 많은 글로벌 관객들을 만날 것으로 기대됐지만, 드라마 ‘킹덤’과 유재석이 캐스팅된 ‘범인은 바로 너’ 외에 화제를 모을만한 넷플릭스 전용(우선) 한국어 콘텐츠는 딱히 없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는 매우 특수한 상황이다. 하지만 과거 신종플루나 메르스 때를 돌아보면, 일말의 예측도 못 할 정도로 드문 일이라곤 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의 극장가와 영화계는 속수무책이다. 극장으로 유인하는 프로모션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관객이 극장에 발길을 끊으면 아무런 대안이 없다.
 

지난달 21일 오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113번째 확진자가 다녀간 전북 전주시 완산구 효자몰 내 CGV 전주효자점이 임시 휴업해 불이 꺼져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지금까지 주류 한국영화계는 극장 우선 배급 이후 IPTV, VOD로의 공급이라는, 틀에 박힌 단계적 판로가 아니면 이익을 낼 수 없는 구조를 유지하면서, 이러한 틀을 깨야 한다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소수의 메이저 대기업이 투자, 배급, 제작은 물론 전국적인 극장 체인까지 소유하고 있는 지금 한국영화 산업의 구조에서는 전염병이 최대 약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반면, 넷플릭스는 지금 호황이다. 관객이 집에서도 얼마든지 비용을 지불하며 소비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아카데미 최다 후보작을 배출한 만큼 뛰어난 콘텐츠까지 잔뜩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봉 감독이 감독상의 영광을 돌린, ‘시네아스트’의 상징과도 같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아이리쉬 맨’도 볼 수 있다.

이미경 CJ 부회장은 ‘기생충’ 수상소감의 마지막의 마지막에 ‘한국영화 관객’에게 그 공을 돌리고 “뤼얼리, 뤼얼리 뤼얼리 땡큐”라고 강조하며 큰 감사를 표했다. 지난해 1인당 영화 관람 편수에서 세계 최다를 기록한 열정 가득한 관객들이다.

그런데 정작 그 관객들과 극장이 그 기쁨을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기생충’ 흑백판 개봉관 표를 예매하는 대신 넷플릭스에서 ‘옥자’를 재생하고 있을 관객들을 그리워하며, 극장들은 코로나19 탓만 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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