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윤기 법 칼럼] 자식에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 법(유언신탁 이야기)

고윤기 로펌고우 변호사 기자 2020.05.29 10:26:27

(문화경제 = 고윤기 로펌고우 변호사) 내가 생애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행위는 아마도 상속일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손이 더 가는 자식, 더 물려주고 싶은 자식이 있을 수도 있다. 솔직히 내가 모은 재산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 상속법에는 ‘유류분’이라는 브레이크가 있다. 쉽게 말하면 ‘아무리 미운 자식도 조금은 물려줘라’라는 제도이다. 유류분은 상속인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최소한의 상속권이다. 법으로 강력히 보장하고 있다. 망나니 자식, 불효하는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싶지 않지만, 우리 법에서 강제로 물려주라고 하니 난감하다. 만약 한 자식에게 재산을 다 물려주었다면, 나의 사후에 재산을 물려받지 못한 자식은 ‘유류분’ 반환청구라는 전쟁을 시작한다.

유류분은 피상속인(물려주는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상속인(물려받는 사람)에게 증여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3자에게 증여하는 것도 문제된다. 예를 들어 내가 종교단체에 전재산을 기부했는데, 내 사후에 자식들이 그 종교단체에 가서 유류분 침해를 이유로 일부 금액을 돌려달라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다만 우리 법은 공동상속인 중 1인에게 증여한 재산은 아무리 오래 전에 주었다고 해도, 유류분 반환청구의 대상이 된다고 보지만, 제3자에게 증여한 재산은 피상속인이 사망하기 전 1년 내에 증여한 것만 유류분 반환청구의 대상이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리어 왕의 세 공주에 대한 잘못된 재산 상속을 둘러싼 비극을 그린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묘사한 그림.  

예를 들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3년 전에 종교단체에 기부한 돈은 아무리 액수가 커도 유류분을 주장해서 찾아올 수 없다. 하지만 아버지가 공동상속인인 형에게 준 거액의 돈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10년 전에 주었든 20년 전에 주었든 ‘유류분 침해’를 주장해서 찾아올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이 유류분 제도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 아직 1심 판결이기는 하지만, 유언대용신탁 상품에 맡긴 재산은 상품 가입 후 1년이 지나면 유류분 반환 대상이 아니라는 판결이 선고되었다.

 

국내 금융기관들은 다양한 유언대용신탁 상품을 내놓고 있다. 사진 = 채널A 화면 캡처

사실관계를 좀 간단하게 설명하면, 아버지가 둘째 딸에게 전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유언대용신탁 상품에 가입을 하고 전재산의 소유권을 넘겼다. 이 경우 신탁이라는 제도의 특징상 은행에 재산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재산의 소유권이 은행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1년이 지난 후, 아버지가 사망했다. 유언대용신탁을 받은 은행은 계약 내용에 따라 맡아 두고 있던 재산을 둘째 딸에게 넘겨주었다. 첫째 딸은 당연히 화가 났고, 둘째 딸에게 유류분 반환청구를 했다.

유언대용신탁에 패배한 첫째 딸

아버지의 재산의 흐름을 보면, 사망 1년 이전 재산의 소유권이 은행에 이전되었고, 사망 후 공동상속인인 둘째 딸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아버지에게서 딸로 상속되는 과정에서 은행이라는 ‘제3자’가 중간에 개입된 것이다. 아버지가 둘째 딸에게 전재산을 직접 증여한 사례와 이 사건을 비교해보면, 아버지가 둘째 딸에게 재산을 증여했다는 결과는 같으나 중간에 은행이 들어와 있다는 차이가 발생한다.

그러면 이 사례는 아버지가 재산을 제3자인 은행에게 증여한 것일까? 아니면 공동상속인인 둘째 딸에게 증여한 것일까? 만약 은행에게 증여한 것으로 본다면, 아버지가 사망한 후 1년이 지났으니까 유류분 반환청구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둘째 딸에게 증여한 것으로 본다면, 기간에 관계없이 유류분 반환청구가 가능하다. 즉 첫째 딸은 둘째 딸에게 유류분 반환청구를 할 수 있게 된다.

 

미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리빙 트러스트’란 신탁 형태로 재산의 안전한 상속이 이뤄지고 있다. 사진 = Nick Youngson

여기에 대해 아직 1심 판결이기는 하지만, 우리 법원은 재산의 소유권이 일단 수탁자, 즉 은행으로 완전히 넘어갔다고 보았다. 그렇게 보면 이 사건의 유언대용 신탁은 제3자 증여이다. 그 결과 첫째 딸은 유류분 반환청구 소송에서 패소하였다.

정리하자면, 최근 판결에 따르면, 유언대용신탁 제도를 통해서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을 방법이 생긴 것이다. 이 판결에 따르면, 피상속인, 즉 재산을 물려줄 사람이 유언대용신탁 상품을 계약하고 1년이 지나서 사망하면, 신탁한 재산은 유류분 반환청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주의해야 할 점은 피상속인이 유언대용신탁 계약을 하고 재산을 은행(수탁자)에게 넘긴 뒤에도 최소 1년 간은 더 살아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직 1심 판결이기는 하지만 신탁의 효력에 대한 대법원의 일관된 태도를 볼 때, 필자는 대법원까지 이 판결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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