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영의 음악가 이야기 - 차이콥스키 上] 대중의 선율을 클래식에 담은 러시아 5인조

이종영 전 경희대 음대 학장 기자 2020.06.29 14:16:44

(문화경제 = 이종영 전 경희대 음대 학장) 러시아인들이 하나님처럼 떠받드는 차이콥스키(1840-1893)에 대해 20세기 유명한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단순히 말하기를 “He(Tchaikovsky) was of all of us, the most Russian”이라고 했을 만큼 러시아의 정신과 영혼을 가장 잘 대표하는 음악가이다. 사실상 그가 없었다면 그가 만든 발레 음악만으로도 세계에 널려 있는 발레 시어터(ballet theatre)들의 레퍼토리(repertory)가 반으로 줄게 될 것이며, 그의 인기도(popularity) 때문에도 발레 컴퍼니(company)들에 재정 문제가 생길 듯하다. 크리스마스 계절이 오면 꼭 등장하는 ‘호두까기 인형’, 고전 발레라면 꼭 넘어야 할 산인 ‘백조의 호수’의 32번 돌아야 하는 기술, 익혀야 할 마임(mime)들만으로도 그는 발레 음악에 혁명을 가져왔다.

앞으로 ‘러시아적’이라는 단어를 쓰기 전 그것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러시아는 동쪽으로는 한국과 일본과도 가깝게 있으며 태평양과 만난다. 인도와도 국경을 접하고 이슬람 문명과도 국경을 넘나드는가 하면 중국과 인도와도 국경을 같이 한다. 그러니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음악에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많다고 하고, 차이콥스키의 발레 안에는 중국 춤, 인도 춤, 아랍 춤이 등장하고 온갖 의상들이 등장한다. 박력 있는 춤의 리듬이 등장하는가 하면 다양한 지방의 민요도 등장한다. 리투아니아 지방의 민요와 코카서스의 민속 춤이나 민요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광활한 대륙이 얼어 붙어 있다가 봄이 와서 얼음을 깨고 생명이 터져 나올 때는 무서울 만큼 다이내믹(dynamic)한 힘을 느꼈을 것이다. 차이콥스키가 유럽 여행 중 자주 느끼던 향수병(homesickness)도 광활한 숲과 초원을 가진 러시아 땅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의 음악 안에서 폭발적 힘을 느끼고 감미로운 서정적 노래와 슬픔, 비통함을 같이 느끼는 것도 이러한 러시아적인 성격에서 나왔을 것이다.
 

차이콥스키의 사진.
차이콥스키의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1892년 초연 사진.

서구 숭배냐 슬라브 숭배냐 갈림길에서

러시아 황제 중 예카테리나 대제(Catherine the Great)는 본래 독일 태생이었고, 표트르 1세(Peter the Great) 또한 러시아를 서구화하려고 했다. 한동안 러시아 황실에서 쓰던 언어는 불어였다. 러시아 황실은 막대한 부를 지니고 예술가에게도 막대한 돈을 지불했기에 이태리 오페라 작곡가들도 황실 작곡가로 있었고 마리우스 페티파(Marius Petipa, 1818-1910) 같은 유명한 프랑스 댄서이자 안무가도 황실에서 초대한 사람이었다. 그와의 협업으로 유명한 차이콥스키 발레가 탄생하였다.

 

러시아의 서구화를 추구한 예카테리나 대제의 궁정에서 유명했던 프랑스 출신 무용가 마리우스 페티파. 그와의 협업으로 차이콥스키 발레가 탄생하였다.  

베토벤을 이야기할 때 그가 태어난 시기가 좋았던 점을 말하듯 차이콥스키가 태어난 시기도 러시아의 가장 격동적인 시기였으며 예술가를 탄생시키기에 좋은 시대였다. 서구적인 음악의 전통도 익힐 수 있었지만, 풍부한 독창적인 러시아 음악의 자원도 시대적인 배경과 함께 모든 러시아 음악가들의 관심이었다. 러시아의 작가와 작곡가의 연도를 살피는 것은 이 독특한 러시아의 시대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은 이 시대의 작곡가들이 오페라나 프로그램 음악을 가장 많이 썼기에 작가도 같이 살펴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

 

러시아 음악의 대부 글린카

알렉산더 푸시킨(Alexander Pushkin, 1799-1837)에 대해서는 셰익스피어가 영어와 영문학의 기초를 세운 것 같은 역할을 푸시킨이 러시아 문학의 기초를 세우는 데 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글린카(Mikhail Glinka, 1804-1857)가 1836년에 쓴 오페라 ‘A Life for the Tsar’는 그 당시 사람들도 인정한, 처음으로 쓰인 위대한 러시아 오페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의 1825년 12월 혁명 후의 언론 탄압으로 작가나 음악가들 또한 자신의 작품 속에서 러시아적인 것에 대한 정체성(identity)을 찾고 표현하고자 하는 갈망이 짙어졌고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는 시베리아로 추방당하기도 한다. 투르게네프(1818-1883)는 그의 너무 서구적인 사상으로 비난도 받았지만 그의 정부(mistress)가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기에 브람스 같은 음악가와도 친분이 있었다. 톨스토이(1828-1910) 또한 차이콥스키를 좋아해 그의 음악회에도 참석했고, 안톤 체호프(1860-1904) 또한 차이콥스키와 언젠가는 오페라 리브레토를 쓸 것이라고 농담하던 사이였다. 차이콥스키는 그의 잘 알려진 2개의 오페라 ‘유진 오네긴’, ‘스페이드의 여왕’을 푸시킨 원작의 스토리 위에 작곡했다. 무소륵스키(1839-1881)의 오페라 ‘Boris Godunov’ 또한 푸시킨의 원작을 리브레토로 쓴 작품이다.

차이콥스키가 살던 시기에 그 시대를 사로잡았고 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들을 지배했던 사상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한국 사람에게도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와 일맥상통하기에 잠깐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당시 러시아 작곡가나 문인들은 Zapadniki(pro-Westerner: 친서방주의자)와 Slavophiles(슬라브숭배주의자: 슬라브적인 것만 옹호하는 사람들) 두 개의 캠프로 나뉘어져 서로를 비난하고 있었다. 차이콥스키는 Westerner로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지만 Slavophiles들이 충분히 러시아적이라고 인정하고 서로 왕래를 하면서도 독립성을 유지했다.

 

러시아 최초의 오페라를 쓴 미하일 글린카. 

최초로 러시아적인 오페라를 쓴 작곡가 글린카는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배우고 귀족으로서 일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20대에 작곡가가 되고 싶은 열망에 3년 동안 밀라노 음악원(Milan conservatory)에서 작곡을 공부했고 그 후 베를린에서도 1년간 더 공부한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귀국한 그는 주콥스키(Zhukovsky)라는 황실 소속의 시인을 만난다. 황실을 드나드는 작가들의 서클 안에는 푸시킨과 고골도 있었다.

오페라를 작곡하고 싶다고 하는 글린카에게 주콥스키는 이반 수사닌(Ivan Susanin)의 이야기를 오페라로 작곡할 것을 권한다. 이반의 이야기는 폴란드와 러시아와 전쟁이 있을 때 농부였던 이반이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고 폴란드 군인들에게 황제(Tsar)가 어디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황제를 지켜낸 이야기다. R. 그린버그(Greenberg)의 말을 인용하면 이 오페라가 성공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냥 몇 개의 민요나 민속 음악 같은 것을 따온 것이 아니라 오페라 전체가 러시아 노래의 감성과 폴란드 춤으로 엮어있는 것이다. 둘째, 러시아어 특유의 소리와 리듬에 맞는 가사에 의해 창작됐다. 셋째 국제적인 오페라에 걸맞게 멋있는 아리아, 오케스트라 반주가 있는 레치타티보, 여러 개의 앙상블, 화려하게 끝나는 엔딩까지 전부 갖춘 현대판 오페라인 동시에 풍부한 음향을 지닌 오케스트라 음악이 있고 동시에 민속적(folk-like)인 음악이다. 게다가 황제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긴 가사를 가지고 있었기에 러시아 민족에게 커다란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폭발적인 반응으로 러시아 음악계에 메시아 같이 등장한 그에게 발라키레프(Balakirev, 1837-1910) 같은 재능 있는 추종자가 있었다. 글린카는 발라키레프가 쓴 글린카의 노래를 변주한 환상곡(Fantasy)을 무척 좋아해 만날 때마다 발라키레프에게 연주시켰다고 한다. 그 후 글린카는 ‘루슬란과 류드밀라(Russlan and Lyudmila)’라는 또 하나의 훌륭한 오페라를 썼지만 이 오페라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로 인한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는 유럽으로 떠난다. 그 후 베를리오즈도 만나고 베를리오즈는 그의 작품을 연주도 했지만 베를린에서 감기를 앓던 끝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러시아 음악의 기초를 세웠기에 ‘Mighty Five’로 불리는 다섯 작곡가.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발라키레프, 무소륵스키,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 쿠이. 

러시아 국민악파 5인조 ‘Mighty Five’

1860년경 글린카의 뒤를 발라키레프가 이어가며 러시아 음악에 대한 미래를 같이 개척해나가는 슬라브숭배주의자(Slavophile) 동지들, 소위 러시아 국민악파 5인조(Mighty Five) 작곡가들인 보로딘(1833-1887, 과학자), 쿠이(1835-1918, 군인, engineer general), 무소륵스키(공무원), 림스키코르사코프(해군 장병)의 지속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오랫동안 러시아에서는 화가나 조각가는 예술가로 대접 받았지만, 음악가는 예술가 대접을 못 받는 제2급 시민(second class citizen)으로 주로 아마추어 집단이었다. 차이콥스키의 경우도 정부의 행정법을 집행하는 공무원이 되기 위한 학교를 갔고 공무원으로 일했다. 러시아 국민악파 5인조는 모두 음악학교는 다녀본 적도 없는, 귀족 출신에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 음악에 있어서 아마추어 집단이었다.

단지 그들은 독일 전통음악을 따르는 것은 독일 장군을 따르는 서구 사상에 복종하고 독일 전통 음악 형식인 소나타 알레그로 형식을 따르는 것은 독일적 사고를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러시아적인 독창적 음악을 전개하는 방식을 같이 모색해 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러시아 음악은 발전부가 짧고 제시부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적대시하던 친서방주의자 진영에는 당시 독일에서 공부하고 피아니스트로서도 세계적인 명성을 지녔던 안톤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과 그의 동생 니콜라이 루빈스타인(Nicolai Rubinstein)이 있었다. 1862년 안톤 루빈스타인이 상트 페테르부르크(St. Petersberg)에 음악학교를 세울 때까지 러시아에는 음악학교가 없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차이콥스키와 함께 음악 이론을 공부한 니콜라이 자렘바. 

차이콥스키도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처음으로 니콜라이 자렘바(Nicolai Zaremba, 베를린에서 음악공부를 함)와 21세부터 시작해 1862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St. Petersberg Conservatory)에 입학한 후 자렘바와는 이론을, 루빈스타인과는 작곡 공부를 하며 이어간다. 차이콥스키의 재능을 알아본 안톤 루빈스타인은 자기 동생 니콜라이가 모스크바 음악원을 시작할 때 차이콥스키를 1865년 12월 화성학 교수로 추천한다. 1877년 그의 후원자 나데자 폰 멕(Nadezhda von Meck)이 1년에 6000루블의 후원금을 약속하고, 그의 불행한 결혼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불가피해진 1878년까지 차이콥스키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선생으로 있었다.

작곡 선생으로 일하며 전통적인 작곡 기법 익혀

러시아의 음악 발전에 가장 많은 공헌을 한 두 작곡가(차이콥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선생이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오랜 세월 가르치는 동안 그들은 늦게나마 전통적인 작곡 기법을 확실히 익혀 나갈 수 있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 또한 27세의 나이에 1871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오케스트레이션과 작곡 선생이 된다. 이 경험은 그의 작곡 기법을 키울 수 있는 계기였고 그는 또한 유명한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한 책도 쓴다. 그의 밑에서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에프, 글라주노프 등 러시아의 쟁쟁한 작곡가가 나온다.

이 이야기를 길게 하는 것은 과연 우리 음악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우리가 깊이 반성하고 성찰을 거듭하는 것이 좋을 듯해서이다. 지금까지는 러시아의 민족주의에 대해 잠깐 살펴봤다. 차이콥스키가 쓴 안단테 칸타빌레(Andante Cantabile)는 그가 러시아 지방을 여행하다 들은 멜로디를 적은 것이다. 바르톡(Bartok)의 ‘루마니안 댄스’ 역시 그가 지방 민요를 채집했을 때 멜로디를 그대로 적은 것이라고 했다. 스트라빈스키 또한 자기의 여러 작품 속에 러시아 민요를 사용한 곡들이 많다. 러시아에서도 이러한 민족 운동을 통해 많은 훌륭한 러시아적인 작곡가들이 나왔다.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또한 보통 사람들이 즐겨듣는 ‘핀란디아’를 작곡했다.

 

젊은 시절의 차이콥스키.

필자가 오래 전 시애틀의 한 레스토랑에서 칵테일 시간에 어떤 무명의 피아니스트가 아리랑을 치고 있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너무 반가워서 연주가 끝난 후 어디서 그 노래를 배웠냐고 물었더니 하와이에서 누군가가 그 곡조(tune)을 가르쳐 줬는데 아름답기에 자기가 즉흥 연주(improvise)했노라고 했다. 그는 재즈 피아니스트였기에 아름답게 즉흥 연주를 펴나갈 수 있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또 한 번 생각하게 했다. 민요가 풍부하고 음악성이 풍부한 우리 민족에게 왜 우리가 즐겁게 연주하며 흔히 들을 수 있는, 피아노나 현악기든 관악기든 악기를 위한 곡이든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이든 변변한 아리랑 변주곡이나 교향곡 하나 없는 것인지….

우리는 빨리 서양의 산업화를 받아들였고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에 나가 온갖 기악 경연대회나 성악 경연대회에서 좋은 성적으로 입상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방탄소년단이나 싸이가 빌보드 차트의 높은 순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 자랑스럽게 느낀다. 그러나 음악에 있어 우리가 진정한 한국적인 정체를 찾고 그것을 세계화하려는 노력은 김치나 비빔밥 같은 요리를 세계화하려는 노력보다 훨씬 더 시급한 일이다. 윤이상 선생님처럼 세계적인 한국 출신의 작곡가가 있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한국적 악기의 색채들을 많이 인용했지만 독일의 주지주의(intellectualism) 작곡가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보통 사람이 그냥 부를 수 있고 즐겁게 들을 수 있는 음악과 거리가 멀다. 또한 그가 데려다 키운 서울대학교 작곡 교수들도 그의 영향 안에서 컸기에 우리 음악을 세계화하는 능력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음악을 저속화 하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우리의 정체성도 담긴 음악을 작곡해 세계화하는 것도 작곡가로서의 사명인 것이다. 바흐,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의 작품 속에 팝송(대중음악)이 있는 것을 잊지 말기를.


이종영 전 경희대 음대 학장: 첼리스트로서 이화여고 2학년 때 제1회 동아일보 콩쿠르에 1등을 했고, 서울대 음대를 거쳐 맨해튼 음대 학사, 석사를 마쳤다. Artist international 콩쿠르 입상, 뉴욕 카네기 홀 연주, 아메리칸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 등으로 활약했다. 예술의 전당 개관 및 10주년 기념 폐막 연주 등 수많은 연주 활동을 펼쳤으며 1996년 Beehouse Cello Ensemble을 창단하고 사단법인을 만들어 음악감독으로 여러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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