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57) 광진(廣津) ①] 70대 영조가 정조 데리고 광나루 건넌 뜻은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기자 2020.06.29 14:16:44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어느덧 격세지감이 느껴지지만 한강에서 물놀이가 성행하던 날들이 있었다. 지금은 한강 고수부지에 인공 풀을 만들어 물놀이를 즐기는데 요즈음의 해수욕처럼 ‘강수욕’을 즐기던 시절에 서울 동쪽에는 뚝섬유원지와 광나루유원지가 삼복의 더위를 식혀 주었다.

뚝섬유원지는 삼전도 나루 북쪽 지금의 시민의 숲 앞 백사장이었고, 광나루유원지는 워커힐 쪽과 건너 천호동 쪽 강변 백사장에 인파가 몰렸다. 겸재의 동문조도(東門祖道)를 소개할 때 이미 살펴보았듯 동대문에서 기동차가 출발하여 뚝섬과 광나루를 연결해 주었다.

영조 17년(1741년) 그린 것으로 알려진 경교명승첩 속 광진(廣津)도(圖)를 보면 아차산 아래 한강변 나루에 두 척의 배가 보이고 강에는 돛을 올린 네 척의 배가 떠 있고 또 한 척의 돛배는 아래쪽에서 미풍을 타고 올라오고 있다. 그 배에는 양반으로 보이는 이들이 보인다. 위에 있는 네 척의 돛배도 선객은 갓 쓴 이들로 보인다.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선유락(船遊樂: 뱃놀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글이 남아 있다. 정조 때 문인 임하상(任夏常)이라는 이가 쓴 석양주기(夕陽舟記)라는 글은 친구 네댓 명이 석양에 배를 타고 뱃놀이를 즐기는 일에 대한 풍류를 적었다. 석양에 배 타고 즐기는 일은 광진을 넘어 오르지 않고, 저도(楮島: 저자도) 아래를 내려가지 않는다고 했다(上不過廣津 下不過楮島).
 

요즘의 아차산.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아차산 자료사진.

멋도, 돈도 풍부했던 광나루

영정조 시대는 변화와 낭만의 시대였다. 배고픈 백성은 여전했으나 전쟁도 없고 탕평책으로 정치도 안정되어 있었다. 지배층은 삶을 즐겼고 예술에 심취했다. 그들은 시(詩)와 그림을 비롯해서 새도 키우고 화초도 키웠다. 겸재도 그런 태평시대에 그의 그림을 애호하는 이들을 위해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시각(視角, 앵글)으로 보면 강 위에서 그린 그림이다. 겸재도 뱃놀이 하며 그린 그림일까?

한편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보이는 강가 두 척의 배는 비와 햇볕을 막을 수 있게 위를 덮은 작은 뱃사람의 배로 보인다. 낚시만 드리우면 한시(漢詩)에 등장해도 좋을 늙은 어부의 배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나루를 부산히 건너다녔을 나룻배와 백성들은 다 어디 간 것일까? 광진나루는 겸재의 그림처럼 그렇게 목가적인 모습만 있는 나루는 아니었다. 나룻배로 다니던 시대가 지나서는 이미 1930년대 발동기선이 건너 다녔고 이도 선객을 감당할 수가 없어 1936년에는 광진교(廣津橋)가 놓여 선객을 건너 주는 배편은 없어졌다. 그러나 뱃놀이를 즐기려는 놀잇배와 아베크를 즐기는 보트가 겸재의 그림 속 배를 대신하였다.

 

광진교 유래 설명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렇듯 광나루는 광진교 개통과 함께 일찍이 나루의 기능을 다 하였지만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서울 동쪽에 중요한 나루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광주목과 양주목에 이 나루가 소개되어 있다. 이 두 목(牧)에 중요한 나루였다는 뜻이다. 양주에서는 양진(楊津), 광주에서는 광진(廣津)이라 불렀던 것 같다. 양주목조에 소개한 내용을 보자. “양진(楊津)은 주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광진도(廣津渡)라 하기도 하는데 미진(迷津) 아래 5리에 있다(在州南六十里 一名廣津渡 迷津下五里). 강원도 춘천부 소양강(昭陽江)과 충청도 충주 금탄(金灘)이 합쳐져서 이 나루로 온다.”

 

목은이 지나온 뱃길 위로 현재의 암사대교가 지나간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고려시대에도 개성에서 남경(한양) 지나 이 나루를 건너든지 아니면 장단 파주 지나 양주 땅으로 접어들어 이 나루를 건너 다녔다. 그 시대의 일이 목은 이색(이색)의 목은시고(牧隱詩藁)에 남아 있다. 제목은 ‘독포(禿浦)에서 달빛을 타고 광진(廣津)까지 와서 묵다(自禿浦乘月到廣津宿)’이다.

독포 모래언덕 어스름 빛이 찾아오니 禿浦沙頭暝色來
먼 산 너른 들이 완만한 형세일세 遠山平野勢逶迤
뱃사람 닻줄 풀어 물 따라 내려가니 舟人解纜隨流下
달 밝은 양주 땅에서 시 한 수 건졌구나 月白楊州恰得詩

여기에서 독포(禿浦)는 겸재의 그림 미호(渼湖)를 만날 때 갈 곳이지만, 예전 석실서원이 있던 남양주 석실마을 앞 나루를 말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미음진(渼陰津)이라 했다. 지금으로 보면 미사리 강 건너 마을이다.

광진에서 바라본 한강 상류.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아차산 기슭의 기와집들은 누구 것?

이제 겸재 그림 속 모습들을 살펴보자. 그림 1에서, 번호 1은 아차산 정상이다. 2는 용마산 정상, 3은 불암산으로 보인다.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산경표(山經表)에 의하면 뒤는 불암산, 앞 봉은 천보산(天寶山)이다. 4는 지금 강 위로는 천호대교와 광진교가 지나고 강 아래 땅 속으로는 지하철 5호선이 지나는 지점이다. 그 넘어 산은 분명하지 않다.

 

그림 1. 겸재 작 광진도.

사진 1 자료사진은 1980년대에 이 지역을 찍은 항공사진이다. 겸재의 그림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1은 광진도에서 보듯 아차산, 2는 불암산이다. 3은 광진교와 천호대교이며 4는 풍납토성 지역이다. 5는 올림픽대교로 겸재 그림의 방향을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사진 1. 아차산 주변 1980년대 자료사진.

이 사진에서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겸재 광진도 좌측 뾰죽한 봉우리들은 겸재가 그림의 구도를 위해 의식적으로 키워 놓은 봉우리들임을 알 수 있다. 겸재 그림을 보아 오면서 알 수 있었던 점은 겸재는 그림의 완성도를 위해 대상을 재배치하고 키우고 죽이고 하는 과감함을 보였다는 점이다. 겸재의 산들은 대부분 실제의 모습보다 잘 생겼다.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면 어느 곳 관광객을 모집하면서 안내서에 이렇게 그림을 그려 모객을 했다면 클레임을 많이 받을 것이다. 그러나 겸재 시대, 직접 그곳에 가보기보다 집에서 그림을 보며 와유(臥遊)했을 애호가들에게 실경을 그대로 그리기보다는 변화를 주어 멋지게 그린 그림이 더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림 애호가들에게 전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이 그림 우측 상단에는 천금물전(千金勿傳: 천금을 준다 해도 남에게 넘기지 마라)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소장자의 마음에 꼭 들었나 보다.

또한 광진도를 보면 아차산 기슭에 많은 기와집들이 보인다. 모두 강을 내려다 보는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지금 워커힐 호텔과 워커힐 아파트가 자리잡은 곳으로 보인다. 무엇 하는 집들이었을까? 그 시절 세도가의 별서(別墅)들이었다. 누구누구의 별서였는지는 자료를 찾지 못하여 알 수 없으나 알 만한 사람의 별서가 포함되어 있다.

남구만 약천집에는 “광진(廣津) 아차산(峨嵯山) 근처 약수암(藥水巖)에 거처하며 약천(藥泉)이라고 자호하였다”고 하였다. 남구만은 재력이 풍부하여 여러 곳에 별서를 두었는데 광진 아차산 별서를 좋아해서 본인의 호(號)도 약천(藥泉)이라 지었다. 후세 사람이지만 정조의 사위 홍현주의 형 홍석주도 이곳에 임한정(臨漢亭)이라는 별서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듯 전망 좋은 아차산 기슭에는 광진을 바라보며 겸재의 그림처럼 적지 않은 별서들이 있었던 것이다. 겸재의 많은 그림이 그렇듯이 아마도 이 그림도 저 별서의 어느 주인을 염두에 두고 그렸을 것 같다.

별장 명지에 미군 위한 시설을

그들 자리에 1960년대에 주한 미군을 대상으로 한 리조트 워커힐이 들어섰다. 본래 그 자리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작은 별서가 있던 곳이라 한다. 휴가만 받으면 대부분 일본으로 놀러가는 미군들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한다. 이름도 초대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쟁 중 교통사고로 전사한 워커(Walton H. Walker) 중장의 이름을 땄다. 그 뒤에는 아파트도 들어섰는데 한때 우리나라 최고의 아파트로 불리던 워커힐 아파트가 이들 별서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그 이후로는 광진이나 아차산보다는 워커힐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해졌던 때도 있었다.

 

광주 옛 지도.

그런데 옛사람들은 광진나루를 건너서 어디로 간 것일까? 옛 광주읍지 속 지도를 보자. 지도 우측 상단에 광진(廣津)이 있다. 강을 건너 처음 만나는 곳이 구천면(龜川面)이다. 지금도 천호동 지나면 나오는 곳이 구천이다. 여기서 덕풍역(하남 덕풍동)을 지나 향교가 있는 동부면으로 간다. 이제 강을 건너고 싶으면 도미진(渡渼津: 팔당대교께 나루)을 건너 팔당 쪽으로 가고, 오던 길을 이어 갈 사람은 은고개(奄峴) 넘어 퇴촌(退村), 소내(牛川) 지나 도자기의 고장 분원(分院)으로 간다.

이후부터는 동여도나 대동여지도에 가는 길이 잘 그려져 있다. 한강의 남쪽 강변 가까운 길이다. 그러면 남종면 지나 남한강 월계(月溪)나루에 이르는데 이어서 가면 이포 지나 이천, 여주로 이어진다. 월계나루를 건너면 뗏목꾼들이 서울 들어오기 전 머물던 월계나루 마을이다. 원(院)도 있었는데 새로 지은 원을 신원(新院)이라 했고 지금도 용문 가는 열차 타면 이곳 신원역을 지난다. 조선시대 노비(奴婢) 시인 정초부가 살던 마을이다.

이곳부터는 우리에게 익숙한 길이다. 양근(양평), 지평, 횡성 지나 대관령을 넘으면 강릉이다. 영동이나 영서 지방으로 가려면 광진을 건너거나 중랑포(中浪浦)를 건너야 했으니 한양에서 강원도로 가는 대로였다. 길을 남으로 잡으면 죽산 지나 중원 땅으로 이어지는 길이기도 했다. 남한강 뱃길과 함께 국토의 중요한 교통로였던 것이다.

천호동에 푸른 풀만 있던 그 시절

그런 이 나루를 나그네들만 건넌 것은 아니었다. 영조는 70이 넘은 나이에 세손(정조)을 데리고 이 나루를 건너 1764년(왕 40년) 태조의 건원릉과 1768년(왕 44년) 태종의 헌릉을 다녀왔다. 세손에게 반듯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영조의 헌릉 행행(幸行) 때, 우리가 동소문과 무악재를 살필 때 만났던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는 재야의 유생으로서 다른 유생들과 함께 광나루에서 임금의 행차를 보았다. 그때의 느낌을 무명자는 칠언율시로 읊었다. 제목이 아주 긴데,

‘3월 21일에 상께서 헌릉에 납시기 위해 광나루를 건널 때 다른 선비들과 함께 강 머리에서 공경히 어가를 맞이하며 즉흥으로 짓다 (三月二十一日 上幸獻陵 渡廣津 余與諸儒祗迎于江頭 口占)

임금의 깃발이 멀리 헌릉길 가리키니 羽旄遙指獻陵途
우리 임금 무병하심 모두들 기뻐하네 擧喜吾王疾病無
많은 배 나란히 임금님 배 감싸고 翼夾龍舟千舸並
번쩍이는 의장(儀仗) 만군이 갖추었네 閃騰虎仗萬軍俱
해뜨는 하늘길 열려 천향이 진동하고 日開黃道天香動
푸른 물결 바람 잔데 수신(海若)이 달려가네 風靜蒼波海若趨
초야의 작은 정성 바칠 길이 없으니 草野微誠嗟莫效
절로 부끄럽다, 여러 유생 함께 영송하기가 自慙迎送伴諸儒 “.

영조의 광진 행행에는 많은 배가 함께 도강했나 보다. 이때의 일은 일성록에 보다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에는 정조가 광나루를 건너면서 배 위에서 느낀 감회를 읊은 시도 전해진다.

광진의 배 위에서 (廣津船上)

긴 둑 십 리 버들 이내 피어오르고 長堤十里柳生烟
강 머리 춘삼월 날 가마를 내네 駕出江頭三月天
날리는 휘장 용선은 춘색 멀리 飛幔龍舟春色外
행행길 나각 소리 석양 가에 울리네 行營螺角夕陽邊
강 가운데 빛은 구름과 짝지어 가고 中流彩仗祥雲動
먼 곳 들판엔 푸른 풀이 이어졌네 遠望平郊碧草連
임금의 행행이 이 같이 법도 있어 一豫重宸斯有度
백성들이 임금 앞에 다투어 축수하네 黔黎爭祝羽旄前

지금은 천호대교가 지나고 강 밑으로는 지하철이 쌩쌩 달리며 고층건물 군 빽빽한 천호동 지역이 ‘먼 곳 들판에 푸른 풀이 이어져 있던’ 날을 생각하면 아련하다. 그 시절에는 임금이 한 번 움직이면 백성들은 구경도 하고 머리도 조아리고 때로는 억울함도 호소하였다.
 

아차산 표석

태종, 물러난 형 정종 위해 광나루에서 잔치

그런데 광나루와 인연을 가진 임금들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망우리 넘어 동구릉(東九陵)에 묻혔다. 신덕왕후 강씨 곁에 묻히지 못하고 강 건너 고개 넘어 건원릉(健元陵)에 묻힌 것이다. 정종이나 태종의 능묘 참배길은 광나루를 건너 이루어졌다. 이들은 고려에서 벼슬살이를 한 사람들이어서 몽고 풍습인 매사냥도 즐긴 이들이었다. 살곶이 다리를 건너 매사냥을 즐겼는데 태종은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된 정종을 위하여 광나루에서 잔치를 열곤 했음이 태종실록에 남아 있다. 그런 광나루이다 보니 신에게 제사도 지냈다 (遣內侍別監, 祭廣津之神). 실록 기록 한 꼭지만 읽고 가자.

태종 14년 (1414) 2월 어느 날 기록인데,

임금이 상왕을 받들고 동교(東郊)에서 매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낮에 광나루에 이르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여악(女樂)을 연주하도록 하여 지극히 즐거워하였다. 경기도관찰사 이은, 광주 목사 황녹, 양주 부사 이지가 와서 주과(酒果)를 바쳤다. (上奉上王, 觀放鷹于東郊. 晝至廣津設酌, 令奏女樂極懽. 京畿都觀察使李殷, 廣州牧使黃祿, 楊州府使李漬來獻酒果).

광나루에 관한 옛 글은 심심치 않게 전해진다. 기왕 읽는 거 동문선(東文選)에 전하는 송처관(宋處寬)의 시 한 수 더 읽자. 우리에게는 잊힌 조선 전기의 문인인데 제목은 ‘서거정에게(奉寄徐剛中)’이다. 참 살갑다.

남한산성 아래 낡은 초가집에 日長城下古茅廬
돌아와 벌써 살 곳을 정했다네 歸去吾今已卜居
병든 노승 괜스레 잠만 즐기고 老病維摩空愛睡
청빈한 두보는 책읽기에 빠졌다네 淸貧杜甫酷耽書
가을 되니 숫깔엔 기름진 밥 매끄럽고 匙秋流滑長腰粒
날마다 밥상엔 싱싱한 큰 입 생선 盤日行鳞巨口魚
어느 저녁 광나루 나루 윗길로 何夕廣津津上路
술 한 병에 취하러 나귀 타고 찾아 갈고? 一壺相訪醉騎驢

이제 강물은 버리고 산으로 찾아가자. 아차산이다. 겸재의 광진(廣津) 도(圖)에는 아차산, 용마산이 그려져 있고 망우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중간에 잘려 있다. 이 산들은 지금 6호선 봉화산역 뒤에 있는 봉화산을 포함하여 모두 아차산(阿嵯山, 峨嵯山, 阿且山 등)이라 불렀다.

한양에는 도성(都城)을 호위하는 안쪽 내사산(內四山: 北岳, 駝駱-낙산, 木覓-남산, 仁王)이 있고 그 밖으로 멀리 외호(外護)는 외사산(外四山: 三角, 峨嵯, 冠岳, 德陽-행주산성)이 있다.
 

수락지맥.

일제 잔재 ‘산맥’ 대신 대간·정맥·지맥 사용해야

아차산은 한양을 동쪽에서 외호해 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산이다. 영조 때 문인 여암 신경중 선생의 저서로 전해지는 산경표(山經表)라는 책이 있다. 우리나라 산줄기를 이어서 기록한 책이다. 필사본인데 1913년 조선광문회에서 활자본으로 정리하여 발간하였다. 거기에는 백두산을 할아버지 산으로 해서 백두대간(白頭大幹), 장백정간(長白正幹)을 기록했고 다시 뻗어나온 산줄기를 정맥(正脈)이라고 기록했다. 정맥 아래로는 거기에서 분기된 산들을 기록해 놓았는데 달리 이 산줄기 이름은 붙이지 않았다. 요즈음 산사람들이 안타까웠는지 이들 산줄기를 지맥(支脈)이라고 부른다. 한편 OO산맥이라고 부르는 산줄기 호칭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학자(小藤文次郞: 고또분지로)가 우리 땅의 광물탐사를 하면서 지질을 기준으로 만든 산줄기 이름이니 이제는 버려야 할 이름들이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아직도 태백산맥, 소백산맥… 이렇게 사용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국민학교 때부터 그렇게 배운 우리 세대의 아픔이다.

 

산경표 표지. 

그러면 산경표에는 아차산도 기록되어 있을까? 그렇다. 한양의 외사산 동청룡(東靑龍)이 어찌 빠질 수 있겠는가? 한수(漢水)의 북쪽을 달리는 한북정맥(漢北正脈)이 포천 축석령에 와서 남으로 한 줄기가 분기해 내려간다. 수락산(水落山) ~ 불암산(佛岩山) ~ 천보산(天寶山) ~ 검암산(儉岩山) ~ 아차산(峨嵯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보산은 불암산성이 있는 불암산 남봉이고 검암산은 태조의 건원릉이 자리 잡고 있는 동구릉의 주산(主山)이다. 높지는 않지만 국조(國祖)의 능(陵)이 있어 소중히 다루었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 산줄기를 자주 종주산행 길로 삼는다. 이름도 수락지맥(水落支脈)으로 정했다. 축석령에서 분기하여 용암산 ~ 깃대봉 ~ 수락산 ~ 불암산 ~ 구릉산 ~ 망우산 ~ 용마산 ~ 아차산이다.

관심의 대상이 달라지니 천보산은 불암산에 포함되었고 검암산은 아홉 능이 있다 해서 구릉산(九陵山)으로 바꾸었다. 이 산줄기 중 수락산 ~ 아차산 구간은 서울둘레길에 포함되어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기왕 이 길을 가는 이들이 겸재의 광진도 한 번 보고 가면 좋으련만….

그런데 겸재의 광진에 그려져 있는 아차산은 뭔가 이상하다. 능선이 이어지다가 정상 부근에 가면 바위층이 시루떡처럼 켜켜히 네 단(段)으로 쌓아 올려져 있다. 아차산은 과연 정상부 바위층이 이럴까? 아쉽게도 이렇게 쌓여 있는 바위층은 없다. 겸재가 창작해서 그린 부분이다. 밋밋한 산보다 훨씬 멋있게 보인다. 찾아보니 이렇게 바위를 시루떡처럼 잘라 쌓은 모양처럼 그리는 화법을 절대준법(折帶皴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봐도 봐도 헷갈리는 겸재의 ‘준법’

고백하건데 겸재의 그림 길을 나서면서 필자에게 닥친 가장 큰 애로는 준법(皴法)이었다. 민속문화사전의 준법 설명을 보면 ‘산과 바위 표면의 질감과 입체감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화법’이라 했다. 글자대로 보면 ‘주름잡는 법’인데 붓을 든 일이 없는 필자에게는 구분하기 힘들었다. 중앙박물관에 가서 그림과 함께 해설해 놓은 설명도 보고, 그림 하는 지인에게 물어도 보았지만 필자는 여전히 겸재의 그림을 보면서 무슨 준법인지 알지를 못한다. 겸재 글이 끝날 때쯤 알게 되려나….

이제 아차산 길로 접어든다. 아차산 표석이 반갑게 맞는다.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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