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영의 음악가 이야기 (1) 차이콥스키 下] “왜 내 곡은 나만 좋아하나” 눈물 짓기도

이종영 전 경희대 음대 학장 기자 2020.07.13 13:40:11

(문화경제 = 이종영 전 경희대 음대 학장) 다시 차이콥스키로 돌아와서 그의 생애와 성장 과정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우랄산맥 가까이에 있는 Votkinsk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 철강과 관계된 일을 하러온 엔지니어였다. 차이콥스키가 4살 때 형을 가르치러 온 Fanny Durbach라는 불란서 가정교사가 있었다. 차이콥스키는 너무 어려서 가정교사가 가르치지 않으려 했지만 옆에서 따라하며 배운 공부로 6살 때는 불어와 독일어에 능숙했다고 한다. 그의 집에는 여러 가지 음악의 소리를 내는 피아노가 있었는데 그는 특히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마음이 싹텄을 것이다. 엄마가 멀리 간 사이 엄마를 위한 노래도 작곡한 것으로 전해진다. 차이콥스키가 예민하고 자주 신경이 쇠약해지도록 지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현상이었던 것 같다.

그의 음악이, 자신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그 안에 고통이나 두려움 등의 표현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고, 감정 표현도 극과 극을 오가는 것은, 그가 내성적이고 억눌린 감정들을 음악을 통해 표출하려는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차이콥스키는 15세까지도 계속 피아노 레슨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가 Rudolf Kundinger라는 명망 있는 음악가에게 “차이콥스키에게 음악을 직업으로 가질 수 있는 재능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천재성을 알아보기 힘드니까 별로 권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차이콥스키가 대기만성형인 것은 확실하다.
 

그가 사망한 해인 1893년, 5번이나 지휘를 했던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의 차이콥스키. 

있는 그대로의 고통-두려움을 음악에 표출

1866년 그가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된 후 몇 개의 오페라와 교향곡을 썼지만 특별한 각광은 받지 못한다. 그가 쓴 ‘로미오와 줄리엣’은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지휘 아래 1870년 초연되었고 그 후 몇 번 더 성공적으로 연주된 바 있다. 1874년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을 위해 피아노 콘체르토 1번을 작곡했지만 그의 혹평과 함께 많은 부분을 고치라는 말을 듣고 ”나는 한 음도 고치지 않겠다“고 반박한 후 한스 폰 뷜로프에게 헌정했다. 그는 콘체르토를 아주 좋아해서 미국 순회공연에서도 연주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니콜라이도 나중에 자기의 견해를 바꾸고 자주 연주했다고 한다. 오늘날 이 곡은 자주 연주되며 사랑 받는 콘체르토이다.

1877년은 차이콥스키에게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난 해였다. 4번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다. 흔히들 4번 교향곡은 운명적 모티브(fate motive)로 시작한다고 한다. 차이콥스키 음악에서 ‘내려오는 스케일’이 나왔을 때는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오네긴’ 오페라의 ‘렌스키 아리아’나 교향곡에서 내려오는 스케일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다. 4번 교향곡은 차이콥스키에게 첫 번째 성공을 가져다 준 성숙한 교향곡이다.

 

러시아 Votkinsk의 차이콥스키 생가. 현재 박물관이 돼 있다. 
자신의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Antonina Milyukova)와의 신혼여행 사진. 

같은 해에 ‘유진 오네긴’ 오페라를 쓰기 시작했고 모스크바에서 ‘백조의 호수’가 연주되었다(이 작품이 처음엔 실패했다고 하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또 그의 학생이었던 안토니나 밀류코바(Antonina Milyukova)와 결혼하는 실수를 범한다. 불행한 결혼 생활 3개월 후 자살 시도를 하기도 했고, 결혼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위스로 떠난다. 미망인 폰 멕(von Meck)이 그가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년에 6000루블을 후원할 것을 약속한다. 나중에 폰 멕 부인이 재정이 힘들다며 지원을 중단하지만 차이콥스키는 나중에 러시아 황제로부터도 재정 지원을 받아 그의 돈 사정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차이콥스키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폰 멕 부인.  

1878년에 바이올린 콘체르토를 끝내고 Leopold Auer에게 헌정하지만 그는 “너무 어렵다. 연주가 가능하지 않다”며 연주하기를 거부했다. 나중에 다른 사람이 연주하면서 이 콘체르토가 유명해졌고 Auer도 자기 학생들에게 이 콘체르토를 가르친다.

 

1879년 ‘유진 오네긴’이 학교에서 초연되지만 1884년에는 페테르부르크 임페리얼 오페라 하우스(Imperial Opera House)에서 큰 성공을 거둔 후 자주 연주된다. 1878년 그가 동생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어제 ‘유진 오네긴’ 전곡을 피아노로 쳐봤다. 작곡가만이 이 곡을 듣고 있는 청중이었다. 조금 창피하지만 너에게 내 비밀을 이야기하건대 듣는 사람은 나 혼자였지만 난 눈물이 날 만큼 감동했다. 그리고 작곡가에게 많은 찬사를 보냈다. 앞으로 올 청중도 그렇게 해주면 좋을 텐데….”

 

차이콥스키의 음악적 동료이자 적이었던 루빈스타인 형제(왼쪽이 니콜라이, 오른쪽이 안톤). 

1881년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을 추모하며 그 유명한 피아노 삼중주곡을 헌정한다. 1888년 브람스도 만나고 드보르작도 만난다. 그는 브람스의 복잡한 대위법이 독일 장군을 연상시켰는지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드보르작과는 금세 친근감을 느꼈던 것 같다. 파리에서 구노와 마스네도 만났고, 5번 교향곡의 초연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있었다.

1889년 그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발레 음악을 끝내고 1890년 ‘스페이드의 여왕’ 오페라를 쓰기 시작한다. 그의 ‘플로렌스의 추억’도 이때 작곡된다.

미국에서의 인기에 깜짝 놀라

1891년 뉴욕 카네기홀 건립 축하 음악회에서 자기 작품들을 지휘한다. 그는 자신이 미국에서 유명한 것을 보고 놀란다. 1892년 ‘호두까기 인형’ 발레의 초연이 이루어졌고 1893년 6번 ‘비창’ 교향곡을 끝마치며 이 작품에 대해 흡족해 한다. 이 곡의 초연이 있은 10월 28일로부터 9일 후 차이콥스키는 생을 마감한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그가 가장 사랑한 모차르트처럼 멜로디가 풍부하고 아름다우며, 모차르트처럼 선명하다(대단히 러시아적 멜로디지만). 그는 러시아 민속 음악(folk music)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불규칙적인 리듬(5/4, 7박자) 등도 자주 썼고(그는 브람스의 복잡한 리듬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오케스트라 악기의 색채 선택 또한 뛰어나다.

그의 6번 ‘비창’ 교향곡은 자서전적(autobiographic)이라고 할 만큼 과감하게 솔직하다. 그의 슬픔, 그의 인생 드라마. 그리고 러시아 대륙만큼 큰 오케스트레이션, 우아한 왈츠, 러시아 사람들 특유의 스토리텔링, 발레 음악을 연상하는 다이내믹하고 빠른 리듬을 전부 내포하고 있다(유명한 불란서 안무가 Roland Petit가 ‘스페이드의 여왕’을 안무할 때 차이콥스키는 6번 교향곡을 썼다.)

사람들은 그가 비창 교향곡 초연 9일 후 죽었기에 이를 ‘레퀴엠’이라고 부른다. 조용하게 끝나는 이 심포니는, 모차르트가 죽기 전 바로 레퀴엠을 쓴 것처럼 차이콥스키가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나 하는 의문이 남게 미스터리하게 끝난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이나 그의 성 생활에 대해 소설을 쓰기 좋아하고 마치 그것이 그의 작품에 중대한 일인 것처럼 시간을 낭비하곤 한다. 그가 동성연애자였던 건 여러 가지 추측으로 보아 맞는 것 같다. 그러나 당시 그가 다녔던 학교처럼 상류사회의 남자들만 모아놓은 학교에서는 자주 있었던 일인 것 같다.

 

1848년의 가족 사진. 맨 왼쪽이 차이콥스키다. 철강 관련 엔지니어였던 아버지는 그에게 피아노 교육을 시켰지만 당시 저명한 음악가는 “천재성이 없으니 시키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그의 가족에 대한 애정도 따뜻하고 깊었으며, 그가 Mighty Five(러시아 국민악파 5인조)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을 보면, 겉으로 나타난 그의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그의 예술가로서의 외로움, 잘못한 결혼으로부터 겪은 여성에 대한 공포(그녀는 그 후 다른 사람의 애도 2명이나 낳았다지만 러시아의 그 당시 법은 이혼을 허용하지 않았다)도 보인다. 차이콥스키는 유언에 그녀가 1년에 1200루블을 받도록 했다. 그녀는 1896년 차이콥스키 사망 3년 뒤 정신병자를 위한 수용소에 들어갔고 21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시간이 증명해준 그의 위대함

그의 음악 안에 있는, 마치 상처받기 쉽게 보이기까지 하는 솔직함(openness) 또한 도스토옙스키를 연상케 하는 깊이를 지녔다. 차이콥스키의 작품들이 150년이 지나도록 드보르작, 브람스의 교향곡이나 콘체르토 기악곡들과 함께 현재 음악회에서 많이 연주되고 있는 것을 보면, 브람스의 반대파들이 차이콥스키를 “케케묵은 음악이나 쓴다”고 비난했고, 쉔베르크 스쿨(학파)이나 현대 음악의 선봉자들은 “차이콥스키나 드보르작은 2류 센티멘털리즘”이라는 대단히 콧대 높은 견해를 보였지만, 시간이 역시 그의 위대함을 증명해 주는 것 같다. 과연 사람들이 어렵고 즐겨하지 않는 주지주의(intellectualism) 음악이 얼마나 영구성을 가지고 있는지…. 음악은 역시 나의 감성, 영혼, 또 높은 지적 수준, 미스터리, 기적이 균형 있게 전부 다 갖추어져 있지 않는 한 우리에게 만족감을 가져다 줄 수 없다.

 

우크라이나 심페로폴에 세워진 차이콥스키의 동상.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서, 그의 첼로 협주곡은 모차르티안(Mozartian)과 러시안 로코코가 합성된 테마의 발레가 연상되는 변주곡이다. 그 특유의 스토리텔링도 있고, 첼로가 충분히 기교를 발휘할 시간을 주면서, 향수를 일으키는 러시아적 멜로디가 풍부해서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그의 자주 공연되는 2개의 오페라 역시 현대적 프로이드적(Freudian) 깊이의 심리적 묘사를 해낸 작품들이다. ‘스페이드의 여왕’의 시작은 그가 좋아한 비제의 ‘카르멘’과 비슷한 세팅으로 시작해 도박에 대한 강박 안에서 느끼는 공포, 야심으로 가득 차 범하는 범죄 등 묘한 인간의 심리를 그린 작품이다. 그 당시 유행했던 역사적인 드라마 대신 인간의 심리를 다룬 오페라인 것이 특징이다.

그의 발레는 △여러 가지 동화(fairy tale) 같은 주제 △재미있는 사랑 이야기 △다양한 리듬을 지닌 온갖 춤 △차이콥스키 이전까지는 발레 음악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음악성-예술성 △마리우스 페티파(Marius Petipas)와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춤과 음악의 완벽한 결합 등으로, 모든 발레단이 꼭 갖춰야 할 스탠더드 작품이 되었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Mighty Five, 그리고 늦게 받은 교육으로도 위대한 작품들을 만든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그 후 스트라빈스키(그의 아버지가 마린스키의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기에 차이콥스키의 작품을 자주 보았다고 했다. 마린스키 극장 건너편에 살면서 어려서 본 차이콥스키의 장례식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고 한다), 스크랴빈, 글라주노프, 프로코피에프, 카챠투리안, 쇼스타코비치, 라흐마니노프처럼 노래(song)와 춤(dance)을 결합시킨 20세기 거장 작곡가들에게로 이어진다. 그들의 작품들은 인기가 높기에(popular하기에) 우리의 생활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에서도 한국 클래식 음악의 앞으로 나아갈 하나의 방향을 찾아보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한다.

추천 레코딩 & DVD

- 차이콥스키 심포니 4, 5, 6 (Mravinsky, Leningrad Philhamonic)
- Eugin Onegin (Valery Gergief, Metropolitan Opera)
- Pique Dame, Bolshoi Ballet (Rolandi Petit)
- Nutcracker Ballet (New York City Ballet, Balanchine)
- 차이콥스키 피아노 콘체르토 (Richter, Mravinsky)
- 차이콥스키 피아노 삼중주(Heifetz, Rubinstein, Piatigorsky)
- 첼로 협주곡 Rococo Variation (Rostopovich)
- Swan Lake, Sleeping Beauty 등


이종영 전 경희대 음대 학장 첼리스트로서 이화여고 2학년 때 제1회 동아일보 콩쿠르에 1등을 했고, 서울대 음대를 거쳐 맨해튼 음대 학사, 석사를 마쳤다. Artist international 콩쿠르 입상, 뉴욕 카네기 홀 연주, 아메리칸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 등으로 활약했다. 예술의 전당 개관 및 10주년 기념 폐막 연주 등 수많은 연주 활동을 펼쳤으며 1996년 Beehouse Cello Ensemble을 창단하고 사단법인을 만들어 음악감독으로 여러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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