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58) 광진(廣津) ②] 삼국쟁패부터 온달까지 굽이굽이 아차산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기자 2020.07.13 13:40:11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옛사람은 산수화(山水畵)를 와유(臥遊: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 집에서 명승이나 고적을 그린 그림을 보며 즐김을 비유)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필자는 겸재의 그림 글을 쓰면서 행유(行遊: 그 반대의 의미로 쓴다면)를 위한 글로 쓰기 시작했다. 겸재의 그림을 보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겸재의 많은 그림들은 본인이 잘 알고 있는 산과 물을 그렸다는 점이다. 특히 인왕산과 장동, 양천, 내연산 같은 곳은 속속히 밟아 보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점들이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겸재는 와유층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자신은 많은 대상 지역을 행유(行遊)했을 것이다. 이제 겸재의 광진(廣津) 도(圖)를 따라 아차산 행유길에 오른다.

5호선 광나루역 1번 출구를 나와 골목길을 들어서 광장초등학교나 천주교 광장동성당을 지나면 예쁘게 가꾼 생태공원이 있다. 이 공원 뒤쪽 끝이 아차산 들머리이다. 혹여 시간여유가 있으면 좌측 길로 내려가 영화사란 절을 들러 오는 것도 좋다. 화양동에 있던 절을 일제강점기 때 옮겨 놓았는데 이 절에는 큰 석불이 모셔져 있다. 영험이 있으신지 기도처로 이 일대에 소문이 났다. 석불은 키가 훌쩍 크고 상호(相好)는 선량하시다. 조선 후기쯤 모셔진 것으로 보이는데 문화재적 가치는 적어도 민중들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다시 들머리로 돌아온다. 아차산 안내도와 아차산 역사 유적에 대한 설명판이 붙어 있다. 이제 산머리로 들어서 오르는 완만한 산길 중간에 옛 산성의 모습이 완연하다. 여러 해에 걸쳐 발굴도 있었는데 아직은 정비가 안 끝났는지 개방은 되지 않고 있다. 1973년 5월 사적 234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모습은 아마도 신라가 쌓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차산 답사길. 
겸재의 광진도에 그려본 답사길.

500년간 삼국 전쟁터였던 아차산

아차산을 비롯한 주변 지역은 2000여 년 전부터 그 뒤 500여 년간 백제, 고구려, 신라 간에 사생을 결단한 전쟁터였기에 기록된 역사도, 땅속에 묻힌 그 날의 흔적들도 가벼이 넘어갈 수 없는 땅이다. 겸재는 그 1000 수백 년 뒤 뱃놀이 하는 선비들의 뒷산 배경으로, 평화로움 그 자체로 그렸지만 삼국시대로 넘어가면 국가의 명운을 건 땅 중심에 아차산이 있었다.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통해 그 날로 돌아가 본다. 백제본기 온조(溫祚)왕 조(條)를 보면,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 땅으로부터 내려와 비류는 미추홀(彌鄒忽: 인천 지역)에, 온조는 한강가에 자리를 잡는다.
 

위례성의 위치 추정. 

마침내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한산(서울 지역)에 도착하여 부아악(인수봉이라 하나 북한산의 통칭으로 비정함)에 올라가 거주할 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열 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이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BC 18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遂與鳥干(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 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아차산성의 현재 모습.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다시 온조왕 13년 2월조 기록을 보자. 온조는 북쪽과 동쪽 국가들로부터 잦은 침략이 있었기에 한강 남쪽 위례성(慰禮城: 지금의 풍납동)으로 수도를 옮긴다. 그렇다면 건국 후 13년 동안 위례성은 한강 북쪽 지역에 있었다는 말이다. 아차산 서쪽 지역이었을 것이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가을 7월,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東有樂浪, 北有靺鞨. 侵질疆境, 少有寧日. 況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대중 외교에서 쓴잔 마신 백제

이렇게 하남위례성(풍납동)에 자리 잡고 백제는 국력을 키워 마한을 접수하고 고구려를 밀어붙여 13대 근초고왕 때는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임진강 이북 땅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등장하면서 세력의 균형은 깨졌다.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한을 풀고자 절치부심했던 이들은 북방 연(燕)의 세력이 꺾이고 북위(北魏)와 평화 무드가 조성되면서 국력을 남으로 돌렸다.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한 백제는 고구려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임진강 유역 성(城)들은 차례로 함락되었다.

이때의 일들은 공개토대왕비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드디어 수도(首都) 위례성에 위기가 찾아 왔다. 백제의 왕은 21대 개로왕(蓋鹵王, 또는 近蓋婁)이었다. 왕은 시시각각 닥치는 고구려의 위협에 맞서 북위(北魏)에 외교사절을 보낸다. 신하 나라가 되기를 자처하며, 북위가 고구려를 공격하면 후방에서 공격하겠다고 적극 외교를 폈다. 그러나 신라의 김춘추가 당(唐)을 설득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滅)한 것과는 달리 쓰디쓴 외교적 실패를 맞보았다. 고구려를 만만히 볼 수 없었던 북위는 거꾸로 백제의 속내를 고구려에 알려 주었다 한다. 드디어 그 날은 왔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비장하다.
 

고구려 대장간 마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개로왕 21년(서기 475년) 가을 9월, 고구려왕 거련(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한성을 포위했다. 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웠다. 백성들 중에는 두려워하여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죽였다.

二十一年, 秋九月, 麗王巨璉帥兵三萬, 來圍王都漢城. 王閉城門不能出戰. 麗人分兵爲四道, 夾攻, 又乘風縱火, 焚燒城門. 人心危懼, 或有欲出降者. 王窘不知所圖, 領數十騎, 出門西走. 麗人追而害之.

관련된 이야기는 이어진다.

장수왕이 기뻐하며 백제를 치기 위하여 장수들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었다. 근개루(개로왕)가 이 말을 듣고 아들 문주에게 말했다.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문주가 곧 목협 만치와 조미 걸취(목협, 조미는 모두 복성인데, 수서/隋書에서는 목협을 두 개의 성으로 보았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이때 고구려의 대로 제우, 재증 걸루, 고이 만년(재증, 고이는 모두 복성이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 지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 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아차성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長壽王喜, 將伐之, 乃授兵於帥臣. 近蓋婁聞之, 謂子文周曰: “予愚而不明, 信用姦人之言, 以至於此. 民殘而兵弱, 雖有危事, 誰肯爲我力戰? 吾當死於社稷, 汝在此俱死, 無益也. 蓋避難以續國系焉?” 文周乃與木劦滿致.祖彌桀取,木협.祖彌, 皆複姓, 『隋書』以木劦爲二姓, 未知孰是.南行焉. 至是, 高句麗對盧齊于.再曾桀婁.古尒萬年(再曾.古尒, 皆複姓.)等帥兵, 來攻北城, 七日而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恐, 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下馬拜 已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戕之 桀婁萬年 本國人也 獲罪逃竄高句麗.

이렇게 개로왕은 아차산(阿且山) 아래서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백제를 배신하고 고구려로 도망친 자들에 의해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고. 김부식도 이 부분을 기록하면서 이례적으로 논평을 달았다.

걸루 등의 행위는 불의임이 명백하다.
桀婁等之爲不義也 明矣.

아차산 길을 오르며 그렇게 죽어간 개로왕을 생각한다. 선조, 인조, 이승만 대통령도 생각한다. 도망친 이들, 죽음을 맞으며 수도를 사수하던 이들…. 우리 삼국사기는 웅진(공주)으로 옮겨 백제를 이어간 문주왕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우리에게 잊힌 이야기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다. 개로왕은 위기에 처하자 아우 곤지(昆支)에게 만삭의 왕후를 대동하고 일본으로 갈 것을 명한다. 이 왕후는 일본으로 가는 길에 규수(九州) 북쪽 작은 섬 가당도(加唐島, 가까리시마, 各羅島)에서 왕자를 분만했다. 이 왕자가 일본 천왕가에 혈연을 맺고 백제로 돌아와 26대 무녕왕(武寧王)이 된 분이다. 동백꽃 향 가득한 가까라시마에 가면 지금도 사마왕(斯麻王, 武寧王)이 태어났다는 작은 동굴을 신성시하며 모시고 있다.

 

아차산 보루 발굴 당시 필자의 자료사진. 

길은 평탄하나 사연은 굽이굽이

아차산을 오르는 길은 서울둘레길답게 평탄한 길이다. 시야는 일망무제(一望無際) 시원하게 트여 있다. 새해에 해맞이, 세모(歲暮)에 해넘이 하기에 좋은 곳이다. 지나는 봉우리마다 보루(堡壘)의 옛터가 있다. 아차산에서 시작된 보루는 불암산 수락산을 거쳐 양주 불곡산, 도락산, 천보산을 거쳐 연천 임진강가로 이어진다. 누가 왜 쌓은 보루였을까? 우선은 고구려와 백제가 첨예하게 부딪치던 시기에 이곳을 점한 고구려의 방어기지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신라의 팽창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한강변에서 수락지맥을 따라 이어지고 양주, 연천 임진강으로 뻗어가는 보루를 이해하기 힘들다. 신라는 왜와 백제로부터 고통 받던 시간을 고구려의 힘을 빌려 버텨 냈는데 그 결과 고구려군이 왕성에 주둔하여 간섭받는 시기를 맞았다. 여러 아픔을 거친 신라와 개로왕의 죽임을 당했던 백제는 동병상련의 아픔 속에서 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 견제에 나섰다. 급기야 백제 동성왕과 신라 소지왕은 결혼 동맹을 맺어 그 관계를 더욱 견고히 하여 고구려와 맞섰다. 이에 따라 거꾸로 수비에 몰린 고구려는 한강변 방어가 급해졌으니 더욱 철저히 방어망을 구축해야 했을 것이다.

신라는 서서히 힘을 길러 뻗어나가기 시작했는데 22대 지증왕이 등극하는 500년대로 접어들면서 나라 이름도 신라(新羅)로 정하고(그 전에는 계림, 사로, 서라벌) 통치자 명칭도 마립간(麻立干)에서 왕(王)으로 바꾸는 등 나라다운 나라 되기에 힘을 쏟았다.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 ‘독도는 우리 땅’에 나오는 신라장수 이사부는 이 지증왕 때 우산국을 신라 땅으로 편입한 장수이다. 이어서 23대 법흥왕은 금관가야를, 24대 진흥왕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대가야를 병합하여 가야의 모든 땅과 백성을 흡수하였다.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거기에 머물지 않고 백제 성왕과 힘을 합쳐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 그 땅을 백제가 6개 군(郡), 신라가 10개 군(郡)을 배분하였다. 고구려는 이때 아차산 보루들을 상실했을 것이다. 1977년 화양지구택지개발사업 중 구의동에서 발견된 전초 초소로 보이는 작은 보루에서는 3000여 점의 화살촉과 토기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는데 얼마나 급히 기습을 받았는지 그때의 모습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아차산을 비롯해 보루들에서 출토되는 고구려 유물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북한 땅과 중국 땅에도 없는 유물도 있다고 하니 고구려에 다가가는 데 큰 길이 되고 있는 것 같다.

한편 야심가 진흥왕은 백제를 배신하여 백제가 회복한 한강가 땅을 점령하였고 임진강 유역과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으로도 영역을 넓혀 갔다. 개로왕 이야기에서 살폈듯이 장수왕이 개척한 땅은 단순 한강 이남에 머물지 않고 백두대간을 경계로 하는 계립령(지릅재, 현 하늘재), 죽령, 추풍령으로 이어지는 땅이었는데 고구려는 이 땅을 신라군에게 모두 빼앗겼다. 진흥왕은 이렇게 개척한 땅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다. 북한산, 함경도 마운령, 황초령, 그리고 가야(伽倻) 땅 창녕에는 척경비(拓境碑)를 세웠다. 짐승들이 그리하듯 영역 표시를 한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임진강 유역 감악산 적성비도 진흥왕의 비석일 가능성이 많다.

 

아차산에서 바라본 광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시주기’로 보는 조선시대 소박한 민심

다시 이어지는 보루 길을 간다. 우리 시대에 와서 그때의 고구려 보루들이 하나 하나 발굴되어 1500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세력 다툼의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 낙타고개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대성암으로 가는 길이다. 옛 이름은 범굴사(梵窟寺)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실려 있는 절이고 보면 연조가 깊은 절이다. 세종대왕의 막내 아드님 영응대군의 원찰이기도 했다.

 

쌀바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절마당에서 내려다보는 광진과 독포(禿浦) 사이 뱃길이 그림 같다. 어느 때였던가는 저 물길로 뗏목이 줄을 이었겠지. 절 뒤로 돌아가면 바위 천정에 쌀바위라고 부르는 두 개의 구멍이 있다. 수도승 하루 식량 될 양식이 매일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속초 화암사 쌀바위 전설과 마찬가지로 욕심 많은 어떤 이가 더 많은 쌀을 얻으려고 구멍을 크게 한 후로 쌀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는 이야기겠지.

옆쪽 암벽에는 범굴사에 시주한 신도들의 범굴사 불량 시주기(梵窟寺 佛粮施主記)와 그 시주로 산 논밭의 내력과 목록이 적혀 있다(梵窟寺佛粮券). 불량(佛糧)이란 부처님의 양식으로 절을 유지하기 위한 논밭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절에 큰 시주(施主)가 줄어드니 신도들 사이에 불량계(佛糧契)를 조직하여 모금한 돈으로 논밭을 사 시주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런 흐름의 한 모습이다. 이제 그 내용을 보자.

범굴사 불량권(범굴사 부처님 양식 문서)

광주군 구천면 곡교동의 낮은 과(果)자 54에 논 35두락 5복 5속
같은(同) 자에 논 57 3두락 5복 8속, 같은 자 63에 밭 반나절 갈이 합쳐서 3작ㅇㅇ
돈 70량으로 안국민이 가지고 있던 같은 면(구천면) 암사동의 유자 9번째 논 3두락 1야미 4복을 매수했고
면목리 신기논 3두락 5야미 2를 값을 흥정해서 사들임
면목리 술(戌)자 신기논 8두락 9야미를 값을 흥정해서 50량에 샀다.
또 경술년에
면목리 이상대가 팔려고 한 논 8두락 10야미를 깎아서 50량에 삼.


梵窟寺 佛粮券
廣州 龜川面 曲橋洞 伏 果字 五十四畓 三十五刀落 五卜 五束
同字畓 五十七 三斗落 五卜 八束 同字 六十三田 半日耕 合 三作ㅇㅇ
錢文 七十兩 買得 安國民 所納 同面 岩寺洞 愈字 第九畓 三斗落 夜味 四卜
買得 面木里 戌 新起畓 三斗落 五夜味 二兮 廤価折錢ㅇ
面木里 新起畓 八斗落 九夜味 廤価折錢 五十兩
又 庚戌年
面木里 李尙大 處賣畓 八斗落只 十夜味 価折錢文 五十兩.

땅문서 치고는 참 소박하다. 시주자 명단도 한결같이 ㅇㅇ양주(兩主: 내외)로 되어 있다. 조선의 백성들은 부처님 앞에 평등했나 보다. 명단 중에는 상궁들 이름도 보인다. 상궁김씨수열(尙宮金氏守烈), 상궁김씨족금(尙宮金氏足今), 상궁양씨복련(尙宮梁氏福連), 상궁강씨유월(尙宮姜氏六月). 상궁들은 이렇게 번듯한 이름도 가졌었구나. 전문직 여성이었던 궁인(宮人)들은 이렇게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퇴임 후에 절로 들어와 마음 닦으며 살다가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대성암.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대성암에서 오솔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온달샘이라는 샘이 있고 체육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곁에는 무너진 석탑의 석재들을 맞추어 놓았다. 안내문에는 신라계 석탑을 이은 고려 석탑이라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은석사(銀石寺)라는 이름이 나오니 은석사 터일 가능성이 있다.

길을 비껴가면 골짜기에 삼층석탑도 서 있다. 경기도 문화재 20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설명문에 의하면 백제계 석탑으로 고려 전기에 유행했던 양식이라 한다. 바위 위에 우뚝한 모습이 경이롭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만난 모습이라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아차산 동쪽 기슭은 또 하나의 작은 불국토이다. 암자 터로 보이는 평탄지도 곳곳에 있다.

이제 강이 보이는 오솔길로 내려오다 보면 주먹처럼 보이는 바위와 나부(裸婦)의 뒷모습처럼 보이는 바위가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평강공주바위, 온달장군 주먹바위라고 부른다. 이 골자기에 왜 온달이 이렇게 많을까? 다시 삼국사기로 돌아가자. 열전(列傳)에 온달열전(溫達列傳)이 있다. 우리가 아는 바보 온달이다. 온달의 내력은 모두 생략하고 온달의 장군으로서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 한다.

샘물로, 바위로 환생한 온달 장군

양강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기를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북 지역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그곳의 백성들이 통탄하며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불초하다고 여기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단번에 우리 땅을 도로 찾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그가 길을 떠날 때 맹세하였다.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는 드디어 진격하여 아단성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를 장사지내려 하였으나 영구가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사생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가소서!” 말하고, 마침내 영구를 옮겨 하관하였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 하였다.

及陽岡王卽位, 溫達奏曰: “惟新羅, 割我漢北之地, 爲郡縣, 百姓痛恨, 未嘗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王許焉. 臨行誓曰: ‘鷄立峴,竹嶺已西, 不歸於我, 則不返也.’ 遂行, 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路而死. 欲葬, 柩不肯動, 公主來撫棺曰: ‘死生決矣, 於乎! 歸矣.’ 遂擧而窆. 大王聞之悲慟.

 

온달장군 주먹바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평강공주 바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아차산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온달장군의 죽음이다. 진흥왕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고자 계립현(문경 하늘재)와 죽령 땅을 회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며 전장에 나선 온달은 아단성(阿旦城)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아단성(阿旦城)은 아차성(阿且城)의 판각 오류이거나 찍을 때 오류일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 위치로 보았을 때도 아차성이 타당하다. 이렇게 간 온달은 아차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마음에 살아나 샘물로도 환생하고 바위로도 환생하였다.

 

석실묘.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관룡탑.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효빈 김씨 묘.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강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절벽께로 내려간다. 아래로는 고구려 대장간 마을이 보인다. TV극 태왕사신기의 무대였다고 한다. 절벽 위에는 석실묘가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몇 기의 무너져 내린 석실묘도 보인다. 아차산은 긴 역사가 있었던 산이다. 하산은 구리시 아치울마을이다. 어느 거사가 쌓았다는 관룡탑도 보고 태종의 후궁 효빈(孝嬪) 김씨 묘역도 들려 간다. 옆 동네는 박완서 선생이 만년에 사시던 마을이다. 겸재의 그림 광진도에 그려진 아차산은 시간의 흔적이 켜켜히 쌓인 곳이다. 이제 또 다른 겸재의 그림을 만나기 위해 발길을 석실(石室)로 돌린다.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문화경제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