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기업] 양혜규, 팬데믹 시대에 현실·추상 간극 넘나들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 - O2 & H2O’ 전시 현장

김금영 기자 2020.10.14 09:23:38

양혜규 작가. 사진 = 현대자동차

코로나19로 잠시 문을 닫았던 국립현대미술관에 다시금 예술의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MMCA 현대차 시리즈’가 미술관 재개관의 첫 대규모 기획전으로 포문을 열었다.

MMCA 현대차 시리즈는 국립현대미술관과 현대자동차가 손잡고 이어 온 대표적인 예술 지원 활동 중 하나다. 국내 중진 작가 1인을 지원하는 연례전 형태로 2014년부터 매년 열려 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현대자동차가 선정 작가에게 전시를 위한 제작비, 운영비 및 다양한 홍보 활동을 후원한다. 전시를 통해 작업에 새로운 전환과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고, 국내외 미술계에 적극적으로 홍보함으로써 한국 현대미술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취지를 지녔다.

 

서울박스 공간에 설치된 ‘침묵의 저장고 – 클릭된 속심’. 사진 = 김금영 기자

MMCA 현대차 시리즈는 문화 예술과 기업이 만나 상생 효과를 창출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관련해 현대자동차 고객경험본부 조원홍 부사장은 “현대자동차는 미술계의 가치 사슬에 주목하고 있다. 예술은 인류가 미래 세대에 남겨야 할 공통의 유산”이라며 “특히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예술적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고, 그곳에서 펼쳐지는 아이디어들이 글로벌 시장에서도 주목받아, 궁극적으로 한국 아티스트들과 그 생태계가 더욱 확장되는 선순환 효과를 기대한다”고 MMCA 현대차 시리즈의 방향을 밝히기도 했다.

그간 이불, 안규철, 김수자, 임흥순, 최정화, 박찬경 작가가 이 시리즈를 거쳐 갔으며 올해엔 양혜규 작가가 선정됐다. 양혜규는 1990년대 중반부터 서울과 베를린을 기반으로 왕성하게 활동해 온 작가다. 베니스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 13 등 국제 미술행사에 작품이 소개됐고, 파리 퐁피두센터, 뉴욕 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등 미술기관에서 초대전을 가진 바 있다. 2018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통령 표창), 독일의 볼프강한 미술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모교인 프랑크푸르트 슈테델슐레 순수미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소리 나는 가물(家物)’은 방울이라는 오브제를 활용해 사람만한 크기로 확장시켰다. 사진 = 김금영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윤범모 관장은 “약 4개월만의 재개관 전시로 양혜규 작가의 개인전을 소개할 수 있어 기쁘다”며 “국제적 무대에서 활약하는 그의 작품을 소개할 수 있는 자리를 함께 마련해준 현대자동차 측에도 감사하다”고 밝혔다.

양혜규는 일상, 산업, 유사·민속적 성격을 갖는 다채로운 재료를 통해 서사와 추상의 관계성, 가사성(domesticity), 이주, 경계 등과 같은 주제를 포괄적으로 다뤄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현실의 추상성’이라는 화두로 또 다른 도약을 시도한다. 전시명 ‘O2 & H2O’는 이번 주제를 함축한다.

 

블라인드의 조합으로 이뤄진 대형 추상 작품 ‘솔 르윗 뒤집기’. 사진 = 김금영 기자

작가는 “과거 우연히 주유소에 갔다가 타이어 공기 주입, 워셔액을 채워 넣는 구역을 가리키는 ‘공기와 물(Air and Water)’ 안내판을 발견했다. 공기와 물은 화학 기호로는 각각 O2, H2O로 표기된다. 물질 자체는 변함없지만 공기를 O2, 물을 H2O로 표현하는 순간, 그 방식에 따라 괜히 더 과학적으로 느껴지고 현실에서 멀어진 듯 추상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며 “이에 현실과 추상의 여러 간극을 넘나드는 우리의 삶에 주목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즉 당연하다고 여겼던 존재를 다시금 돌아보고 일차적인 해석과 관점에서 벗어난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

작가의 말을 반영하듯 전시명은 ‘O2 & H2O’이지만 실제 공기와 물이 등장하는 작품 하나 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전시를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 이지회 학예연구사는 “생명 유지의 필수 요소인 산소(공기)와 물은 자연 상태에서는 물리적 현실이지만, 인간이 고안한 화학 기호에서는 O2, H2O와 같이 특정하게 추상화된다”며 “전시명에 사용된 ‘O2 & H2O’는 인간이 감각하는 경험의 추상적 성질을 미술 언어로 추적해온 작가의 관심사로부터 발현됐다”고 말했다.

공기와 물이 O2, H2O로 불릴 때

 

전시장 벽면 한가득 문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사진 = 김금영 기자

MMCA 현대차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대규모 전시 공간이다.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중진 작가에게 대규모 신작을 실현할 기회를 장르의 제약 없이 제공한다. 대표적인 예로 앞서 임흥순 작가의 전시 당시 한국현대사 속 희생되고 소외된 인물에 주목한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영상 작업이 전시장을 가득 채웠고, 최정화 작가가 사람들이 쓰던 식기 7000여 개로 구성한 9m 크기의 대형 설치물 ‘민들레’가 국립현대미술관 마당에 설치돼 눈길을 끌었다.

이번엔 방울과 인조 짚 등 다양한 사회·문화권을 상징하는 요소를 비롯해 문손잡이, 블라인드 등 일상적 요소들까지 활용한 대형 설치물이 전시장 이곳저곳을 채웠다. 서울박스 공간에서 마주하는 ‘침묵의 저장고 – 클릭된 속심’은 총 154개의 블라인드 조각으로 구성됐으며 높이만 10m에 달한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 - O2 & H2O’ 전시 현장. 사진 = 김금영 기자

회전하면서 겹겹이 열리고 닫히는 블라인드의 새로운 조합으로 인해 관람객의 움직임과 관점에 따라 시시각각 다르게 관찰되는 작품이다. 빛과 시야, 몸의 움직임은 막지만 냄새와 소리는 자유롭게 통과하는 블라인드의 이중적인 물성이 돋보인다. 마치 한 가지 관점에서만 정의내릴 수 없는 우리네의 삶이 끊임없이 회전하는 느낌이다.

작가는 “보통 해외에서 전시를 준비할 땐 전시가 열리는 지역과 사람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다가간다. 반면 이번 전시는 오랜만에 서울로 돌아오면서 많이 고민했다. 서울을 일반화시켜 이야기하기엔 부족한 느낌이고, 그렇다고 한 면모만 이야기하기엔 한국인으로서 내가 아는 서울의 면모가 많았다”며 “그래서 큰 전시 공간에 먼저 집중했다. 공간의 수평과 수직 구조를 읽고 여기에 ‘침묵의 저장고 –클릭된 속심’을 배치시켰다”고 말했다.

 

꽃가루, 로봇 벌, 태양광 패널, 휴대용 손 선풍기 등 복합적인 요소들의 조감도 ‘디엠지 비행’. 사진 = 김금영 기자

또 이번 전시에서 눈길을 끄는 작품이 생명체와 기계, 사물과 인간 사이를 사유하는 ‘소리 나는 가물(家物)’이다. 시공간이 다른 문화권의 의례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방울이라는 오브제를 활용해 사람만한 크기로 확장시켰다.

모인 방울은 작가의 손길을 통해 일상적 기물인 다리미, 마우스, 헤어드라이어, 냄비의 생김새로 재탄생됐다. 여기에 바퀴와 손잡이가 달려 움직일 때마다 방울 소리가 들린다. 흔해빠졌던 작은 방울이 새로운 방식으로 재결합됐을 때 또 다른 존재감과 의미를 부여받는 현장이다. 이를 통해 대상을 볼 때 쉽게 빠질 수 있는 편견과 선입견을 지양하려는 작가의 태도가 엿보인다.

 

‘전시 속 전시’로 마련된 목우공방의 ‘108 나무 숟가락’ 공간. 사진 = 김금영 기자

어떤 현상을 인지할 때 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지향하는 작가의 태도는 ‘구각형 문열림’에서도 엿보인다. 전시장 벽면 한가득 문의 손잡이를 달아놓은 것. 이지회 학예연구사는 “손잡이는 어디에 설치됐는지에 관계없이 그 너머의 세계로 가는 일종의 인터페이스다. 손잡이를 밀거나 돌려 우리 앞의 무언가를 열고 미지의 세계로 다가설 수 있는 것”이라며 “손잡이는 경계를 표시할 뿐만 아니라, 경계 양편에 있는 두 가지 세계나 상황을 매개한다”고 말했다.

현재 우리의 현실 = 혼종(混種)

 

전시장 높게까지 방울이 설치된 모습. 사진 = 김금영 기자

복도에 설치된 콜라주 현수막 ‘오행비행’과 벽지 ‘디엠지 비행’은 물질과 상징, 에너지와 기술, 기후와 사회적 양극화, 재해와 국경 등 우리가 마주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현상을 다룬다. 특히 ‘오행비행’은 오방색(검정, 파랑, 빨강, 노랑, 흰색)이 상징하는 다섯 가지 원소(물, 나무, 불, 흙, 철)의 속세적인 시각화를 시도했다. 표현 방식에 따라 현실과 추상의 간극을 넘나들며 새로운 이야기를 형성하는 것. 예컨대 토(土)는 부동산, 땅 투기, 풍수지리, 거름, 변기, 지렁이 등의 이미지와 뒤섞였고, 금(金)은 보석, 방울, 수저, 탄소 등 오늘날 사회를 반영하는 이미지로 변이되며 나름의 리얼리즘을 구사한다.

이밖에 ‘전시 속 전시’로 마련된 목우공방의 ‘108 나무 숟가락’은 작가의 지인 김우희 목수의 글과 숟가락을 전시하며 일상, 지역, 공동체, 공예적 수행성 등의 의미를 오늘날에 비춰 본다. 5전시실에서는 세계 곳곳에서 선보인 바 있는 블라인드의 조합으로 이뤄진 대형 추상 작품 ‘솔 르윗 뒤집기’를 볼 수 있다. 음성 복제 스타트업 네오사피엔스와의 협업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복제해 만든 인공지능 목소리 ‘진정성 있는 복제’는 정체성, 진짜, 유일함 등 진정성 있는 가치란 무엇인지 질문하는 작품이다.

 

인조 짚을 엮어 만든 조각 연작이 전시장에 설치됐다. 사진 = 김금영 기자

이지회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는 우리의 현실만큼 혼종(混種)적인 특성을 지녔다. 작가는 오늘날 현대 문명이 처한 초현실적 상황에 대한 사유를 작품을 통해 고백한다”며 “과학적 사실계, 그 사실을 오롯이 인지할 수 없는 경험과 감각을 포함한 지각계, 기후, 재난 등 점차 극단으로 치닫는 현상계를 총체적으로 사유하기 위한 화두를 이번 전시는 제시한다”고 말했다.

특히 작가는 코로나19가 야기한 사회적 변화에서 예술가로서의 역할을 고민 중임을 고백했다. 그는 “보통 작업을 위해 독일에 가 있었는데 올해 코로나19로 비대면 시대를 맞이하며 한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며 “예술가로서 이런 시대의 변화에 대한 고민도 하고 있다. 그간 우리는 너무도 많은 퍼포먼스, 일을 원하고 요구했다. 그러다보니 약간의 숨고르기도 올해의 팬데믹에 숨어 있는 것 같다. 다만 이 사태가 그간 쌓아온 열정까지 싸잡아 불씨를 꺼뜨리진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오행비행’은 오방색(검정, 파랑, 빨강, 노랑, 흰색)이 상징하는 다섯 가지 원소(물, 나무, 불, 흙, 철)의 속세적인 시각화를 시도했다. 사진 = 김금영 기자

그는 이어 “또 이런 위기를 극복하는 데 연대하지 않고 서로 ‘누가 더 잘 대처하느냐’ 식의 또 다른 국가주의 형태로 경쟁을 벌인다면 글로벌리즘 시대에 우리가 배운 것이 정말 없는 것 아니겠느냐”고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며 “이 가운데 미술도 속세화의 위기를 맞았다. 이번 위기를 계기로 고급미술만이 할 수 있는 본연의 자리를 찾는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전시를 위해 배우 정우성이 특별 홍보대사를 맡아 오디오 가이드에 재능 기부로 참여했다. 전시화 함께 국립현대미술관과 현실문화의 공동출판으로 ‘공기와 물: 양혜규에 관한 글모음 2001-2020’이 출간된다. 지난 20년 동안의 작품 활동과 맞물린 다양한 국내외 미술계 필진들의 글 36편을 선정해 연대순으로 엮었다.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내년 2월 28일까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