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문-바이든-스가 통화에서 느끼는 ‘잘나진 한국인’과 ‘아직 모자란 韓 언론’

최영태 편집국장 기자 2020.11.12 12:16:00

(그래픽 = 연합뉴스)

 

최영태 편집국장

청와대 현장에서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와 문재인 대통령과의 첫 전화통화가 이뤄지는 모습을 이틀간 지켜보면서 두 번 빙긋이 미소 짓고, 한 번 ‘썩소’(썩은 미소)를 짓게 된다.

두 번의 빙긋 미소는, ‘우리 대통령과 스가 일본 총리 중 누가 먼저 통화하냐?’고 묻는 동료 기자들의 질문에서, 그리고 트럼프와의 통화 때보다는 훨씬 더 편안하고 희망적인 표정으로 정상통화를 하는 문 대통령의 얼굴에서다.

그리고 한 번의 썩소는 스가 총리의 바이든과의 10여분에 대해서는 ‘회담’이라는 거창한 표현(이 아니라 번역)을, 그리고 문 대통령과의 14분에 대해서는 통화라는 표현을 쓰는 일부 한국 언론들의 무감각에서였다.

“한일 중 누가 먼저 정상통화하냐”는 질문

12일 전화통화를 하루 앞둔 11일 오후 3시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내일 바이든과의 정상전화가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는 언론 대상 브리핑 중 한 질문이 나왔다. “한국과 일본 중 어느 쪽이 먼저 정상통화를 하냐”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듣는 순간, “오잉? 당연히 미국 입장에서는 일본이랑 먼저 통화를 하지, 아무리 최근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 한들 한국과 먼저 통화하고 그 뒤로 일본을 미루겠느냐?”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11일 일부 언론이 이 같은 내용을 보도하는 걸 보면서(기사 제목이 ‘文대통령? 스가? 바이든, 누구와 먼저 통화할까?’ 등) 코로나19 사태를 지나면서 ‘우리가 일본보다 더 나은 나라이고, 미국도 이제 이걸 인정해야 하는데…’라고 희망하는 한국인들의 소망이 읽혀졌다.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 시대에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노골적으로 일본 편을 들면서 일본이 원하고 한국이 반발한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을 타결시키고, 2016년에는 한국이 원치 않는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까지 체결시킬 때만 해도 ‘미국에게 한국은 일본보다 아주아주 뒤쪽’이라는 생각이 상식이었다.

작년 8월 문재인 정부가 일본과의 지소미아(GSOMIA) 종료를 선언하자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의 반응을 전한 미국의 소리(VOA) 방송 화면.

 

따라서 그때만 해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한국과 일본 중 어느 쪽과 먼저 정상통화를 할까’라는 질문은 거의 나오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통과하면서 “우리가 선진”이라는 생각이 국민들 속에 뿌리를 내렸고, 이러한 의식변화가 ‘누가 먼저 통화하냐?’는 질문으로 터져나옴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한-미-일 삼국 관계에 대한 높아진 의식과 여전한 현실

이런 의식변화는 그 자체로 나쁘진 않지만, 현실적이진 않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면 미국에게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더 중요한 동맹국이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태도가 그렇게 만든다. 일본은 1945년 미국의 ‘핵’ 펀치 두 방을 맞고 망했던 나라다. 물론 1942년 시작된 과달카날 해전에서 이미 일본군이 참패하면서 사실상 승부가 결정 났다고는 하지만 이런 사실은 일본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기에 보통 일본 국민들은 ‘미국의 비인간적인 원폭 때문에 우리가 졌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한다.

완패했다가 미국의 지원으로 겨우 살아난 일본이기에 일본 총리가 미국 대통령 앞에서 호감을 얻으려 의도적으로 ‘원숭이 짓’을 해도 일본인들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반면 한국은 안보를 미국에 일부 의존하고는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중국과 훨씬 더 밀접하고, 그래서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 앞에서 ‘쥐 짓’ 또는 ‘닭 짓’을 의도적으로 한다면, 분노를 느낄 정도로 자존감이 강하다.

이런 특성 때문에 미국은 동맹의 서열에서 일본을 한국보다 앞자리에 배치할 수밖에 없다. 마음속 깊이, 뼛속으로부터 충성하는 부하와, 예의 바르기는 하지만 ‘적’과도 자주 대화하는 부하가 있다면, 당신은 누구의 서열을 더 올려주겠는가?라고 자문한다면 결론은 뻔하지 않겠는가.

 

트럼프와 골프를 치던 아베 전 총리가 트럼프를 급히 따라가려다가 넘어지는 모습. (YTN 화면 캡처)

 

10분 통화도 일본 언론이 회담이라면 회담이 되나?

이런 한국인의 높아진 자존감이 기쁘면서도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일부러 시간을 내 발언한 ‘왜 일본은 전화회담이고, 우리는 전화통화인가’라는 문제제기는 “아, 역시 우리 언론은 ‘번역 언론’이구나” 하는 자괴감에 이르게 만든다.

10분 간의 전화통화를 전화‘회담’이라고 격상시키고, 14분 간의 우리 대통령과의 통화는 전화‘통화’라고 격하하는 보도가 실제로 있었나를 찾아보니 역시 여럿 있었다. 그리고 일본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역시 우리 언론과는 달리 일본 언론들은 전화‘회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야후 재팬에 톱 기사로 올려져 있는 스가와 바이든의 전화'회담' 관련 기사. 

한국어에서 10여 분 통화를 ‘회담’이라고 표현하면 영 어색하지만, 일본 언론이 회담이라면 회담이 되고마는 무뇌(無腦)의 현장이다.

‘미-일 언론은 항상 맞다’라는 이상한 사대주의를 갖고 있는 한국 일부 언론들은 실제 내용이 통화이건 회담이건 상관없이 일본 언론이 회담이라고 쓰면 그대로 번역하는 버릇을 갖고 있다. 미국 언론이 아랍 국가들을 죄악시하면 예컨대 이란 같은 나라들이 대한민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언론들은 ‘악의 축 같은 아랍 나라들’이라고 서슴없이 쓴다. 뇌는 있되 생각은 남에게 맡긴 꼴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한국인 일반은 선진국 수준으로 생각이 올라가고 있지만, 일부 언론인들의 의식은 아직도 20세기에 머물고 있는 건 아닌지…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일본과 조선-한국의 개화사를 보면 ‘언론이 국민을 계몽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최종적으로 언론의 품질을 결정짓는 것은 국민-독자-시청자의 수준임을 미국 뉴욕타임스의 예에서 확인한다. 높아진 선진 국민의 의식이 아직 낮은 언론인의 의식을 끌어올릴 모습을 생각하며 세 번째 미소를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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