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70) 사인암 ②] 새긴 글로 보는 선인들의 센스와 기개 “짱”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기자 2021.01.29 13:57:34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사인암에는 바둑판, 장기판뿐 아니라 이곳을 다녀간 이들이 남긴 많은 각자(刻字)가 남아 있다. 옛사람들은 풍광이 뛰어난 승경(勝景)을 찾아가면 자신들의 이름을 비롯하여 시구(詩句)나 명언들을 그곳에다 새겼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환경파괴나 문화재 훼손 행위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풍류였다.

우리 시대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로는 국보 3호 진흥왕 순수비에도 추사가 새긴 각자가 남아 있다는 점이다. 친구와 함께 68자(字)를 해득했다는 자랑을 새겨 넣었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단양군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200여 개의 각자가 사인암에 새겨져 있다 한다. 지워져 가고 있지만 먹으로 써 남긴 글씨도 상당히 많다. 이제 몇몇 각자(刻字)는 읽고 가자. 저 골치 아픈 것을 어찌 다 읽고 해석할까 걱정도 했지만 먼저 다녀간 이들이 읽고 해석해 놓은 자료들이 많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이것들을 바탕으로 앞으로 찾아갈 이들을 위해 몇몇 각자들을 소개하려 한다.

가장 눈에 뜨이는 세 문인의 각자

우선 눈길을 끄는 각자는 바둑판 앞쪽에서 바로 보이는 절벽 위 글씨, 즉 승직준평(繩直準平)으로 시작하는 글씨이다.

繩直準平(승직준평) 먹줄처럼 곧고 수평계처럼 평평하네
玉色金聲(옥색금성) 옥빛 쇠붙이 소리
仰之彌高(앙지미고) 우러르면 더욱 높아
魏乎無名(위호무명) 우뚝하여 이름할 수 없구나
辛未春胤之定夫元靈撰 신미년 봄(영조 27년, 1751년) 윤지, 정부, 원령이 짓다.

 

‘승직준평(繩直準平)’ 각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사인암의 먹줄처럼 곧게 우뚝히 선 모습과 옥빛 금속성을 느끼면서 바라보니 더더욱 높아 감히 뭐라 이름 지을 수 없음을 읊고 있다. 목수(木手)가 집을 지을 때 필요한 도구가 네 가지 있다. 승준구규(繩準矩規)가 바로 그것이다. 승(繩)은 먹줄인데 직선을 긋는 기준선이 된다. 목재를 켜고 기둥을 수직으로 세우는 데 필요한 도구다. 준(準)은 수평을 잡아 주는 수평계로 들보의 수평을 잡아준다. 구(矩)는 ㄱ자(字) 자(尺)이고, 규(規)는 원(圓)을 그리는 컴파스이다. 이 네 가지 중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만 승(繩)과 준(準)이 없으면 건물이 올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승직준평(繩直準平)이다.

송나라 주자(朱子)는 당시 그림으로 많이 그려지던 선배 학자 6인(人), 즉 주돈이(周敦頤, 1017~1073),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頤, 1033~1107), 장재(張載, 1020~1077), 소옹(邵雍, 1011~1077), 사마광(司馬光, 1019~1086) 등 북송 육현의 그림에 대한 찬(贊)을 썼는데, 그 화상찬(畵像贊)의 글에 규원구방승직준평(規圓矩方繩直準平: 컴퍼스는 원, 곡척은 사각형, 먹줄은 직선, 수평계는 평형)과 양휴산립옥색금성(揚休山立玉色金聲: 태양처럼 훈훈하고 산처럼 우뚝하며 색은 옥 같고 쇠붙이 소리 같네)라고 했는데 이 글에서 빌려 사인암을 표현했다.

이 두 구(句)는 윤지(胤之) 이윤영(李胤永: 1714~1759)의 글이라고 한다. 다음 글 앙지미고(仰之彌高)는 논어 자한(子罕) 편에서 인용한 것으로 앙지미고찬지미견(仰之彌高鑽之彌堅: 우러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네)란 뜻이며, 정부(定夫) 김종수(金鍾秀)의 글이라 한다.

끝 구절은 원령(元靈)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의 글이라 하는데, 원전은 논어 태백(泰伯)으로 ‘외외호! 유천위대 유효즉지 탕탕호! 민무능명언((巍巍乎! 唯天爲大, 唯堯則之. 蕩蕩乎, 民無能名焉: 높고 높구나! 오직 하늘이 위대하다. 오직 요 임금이 그것을 본받았네. 넓고도 넓네. 백성들이 이름할 수 없네)’이다. 각자에서는 외(巍)가 위(魏)로 잘못 새겨졌다.

세 사람 모두 옛 글을 인용하여 사인암의 위대함을 유감없이 표현한 것이다.

글씨 또한 뛰어난 예서(隸書)인데 글씨 공부하는 이들 말로는 팔분서체(八分書体)라 한다. 팔분(八分)은 금예(今隸)라고도 한다는데, 예서가 처음 나온 한(漢)나라 시절에 격을 지키고 있던 서체(古隸)가 자유분방해지면서 당나라 때가 되면 더욱 멋을 부린 예서가 되는데 이를 팔분체(今隸)라 했다 한다. 원령 이인상이 썼다 한다.

 

‘일주경천(一柱擎天)’ 각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그 옆으로는 많은 각자들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다. 사람들 이름도 참 많이 새겨 놓았다. 그 이름들 옆에 눈에 띄는 글이 있다. 일주경천 백천회란(一柱擎天 百川廻瀾: 기둥 하나 하늘을 받들고 개울들은 돌아 흐르네). 두 개의 글귀로 사임암과 운계천을 명료하게 풀어냈다. 글씨를 쓴 사람은 숭정사원온성정만석서(崇禎四元溫城鄭晩錫書: 숭정 4원에 온성 정만석 씀, 1808년, 순조 8년)라고 돼 있다. 숭정의 시대는 1644년 막을 내렸는데 조선에서는 참으로 오랫동안 기려주고 있다. 정만석은 이때 충청관찰사로서 사인암에 다녀갔을 것이다.

 

‘청냉대(淸冷臺)’ 각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사인암과 운계천이 얼마나 몸과 마음에 신선함을 주었는지 누군가가 암벽에는 청냉대(淸冷臺)라고 새겨 놓았다. 아쉽게도 세(勢)를 얻지 못하여 청냉대란 이름은 전해지지 못했다. 아마도 정암이나 우암, 퇴계나 율곡 선생께서 명명(命名)했다면 후세에 크게 전해졌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이치엔 변함이 없다.
 

우탁의 ‘탄로가’가 새겨져 있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교과서에도 실렸던 대학자 우탁 선생의 ‘탄로가’

개울가 많은 각자들은 일단 남겨 두고 다시 쪽문 안쪽 청련암 경내로 들어간다. 비석 하나 서 있는데 낯익은 시조(時調)가 씌어 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 있는 시조로 우리 고등학교 시절 탄로가(嘆老歌)라고 배웠던 그 시조이다. 이 시조가 사인암에서 만난 우탁 선생 작품이었구나. 공부도 잘 하시고 센스도 만점이셨네. 애들 말로 “짱”이다. 시비에는 빠져 있지만 이어지는 이 시조 한 번 읽고 가자. 신춘문예에 등단해도 좋을 만큼 감각이 좋다.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없다
잠시만 빌려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여
귀밑에 해묵은 서리 녹여볼까 하노라

늙지 말고 다시 젊어져 보려 했더니
청춘이 날 속이고 백발이 다 되었구나
이따금 꽃밭을 지날 때면 죄 지은 듯하여라

 

삼성각 오르는 길.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시비 옆에는 사인암 뒤로 가파르게 오르는 계단이 있다. 계단 위 끝에는 숨은 듯 부끄러이 고개 내민 작은 건물이 보이는데 삼성각(三聖閣)이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보면 조심스러워 발밑만 보는데 천천히 계단 좌측도 보자. 운화대(雲華臺)란 글씨가 보인다. 꽃처럼 피어오르는 구름을 보았던 곳이었던가. 누가 쓴 글씨일까? 글씨 옆으로는 둥근 막도장처럼 앙증맞게 새긴 낙관(落款)이 보인다. 곰곰 살펴보면 윤(胤)이다. 반갑구나. 앞서 만났던 윤지 이윤영(李胤永)이다. 윤지의 다른 호는 단릉(丹陵)이다. 이윤영은 그의 문집 단릉유고(丹陵遺稿)에 운화대에 대한 시 세 수를 남겼다 한다. 서운하니 한 편만이라도 읽고 가자.

江屋書燈細 강가 집엔 책 읽는 불빛 가물거리고
巖棲容榻尊 바위 거처는 겨우 책상 하나 넣을 수 있지
喜成偕隱志 그래도 더불어 은일할 뜻 이루어 기쁜데
桃杏自開村 그 마을엔 복사꽃 살구꽃 절로 핀다네

그가 이렇게 읊을 수 있었던 것은 계단 위 숨은 듯 자리 잡은 삼성각 자리에 윤지 이윤영이 짓고 거처했던 서벽정(棲碧亭)이 있었기 때문이다.
 

‘운화대(雲華臺)’ 각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단양을 가장 사랑했던 단구처사 이윤영

단양을 사랑한 많은 이들이 있지만 이 이윤영을 따를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이윤영(李胤永, 1714-1759)은 숙종~영조 연간에 활약했던 문인이며 그림도 그린 문인 화가이다. 그는 1751년부터 1755년까지 약 5년간 단양 지역에 은거하였고 단양을 떠난 뒤에도 단양을 잊지 못하여 단양 꿈도 자주 꾸었다. 자신의 호도 윤지 이외에 단릉산인(丹陵山人), 단구처사(丹丘處士)로 부르기도 했다. 그의 문집도 단릉유고이니 이윤영의 단양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증조부 이행(1657-1702)은 1689년 기사환국 때 집안이 속했던 노론계 인물 송시열과 김수항 등의 참화를 보고 충청도 결성(충남 홍성)으로 낙향했는데 이윤영도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벼슬길을 멀리하고 산수를 즐기며 살아갔다.

그래도 부친 이기중(李箕重)이 단양군수로 발령받았다. 이를 계기로 이윤영은 단양에 왔고 이내 단양 사랑에 빠졌다. 이윤영은 일찍이 단양 땅을 유람하고 돌아온 스승 한빈(漢濱) 윤 선생을 찾아가 이번 유람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한다. 이때 한빈 선생은 사인암을 가장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는데 이윤영은 부친이 이곳으로 고을살이를 떠나게 되자 신미년(1751) 3월 20일에 선생의 장남 윤덕이(尹德以)와 동생 이운영(李運英)과 함께 단양 땅을 찾았다. 그리고 며칠 뒤 김상묵(金尙黙), 김종수(金鍾秀)가 합류하여 오인(五人)이 사인암을 찾았는데 이때 단양에 살겠다고(卜居) 마음을 먹었다.

 

겸재가 그린 또 다른 사인암. 

임신년(1752년) 들어 구담에 창하정(蒼霞亭)을 세우고, 계유년(1753)에는 사인암에 서벽정(棲碧亭)을 지어 복거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아예 사인암을 운영석(雲英石)이라 부르고는 절친 이인상(李麟祥)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을 불러 5년간의 단양 생활을 은일하게 보냈다. 그는 승직준평 옥색금성(取繩直準平玉色金聲八字, 奉爲石丈之贊辭耳)이라는 여덟 자를 취하여 석장(石丈)에 대한 찬사로 받들며 지냈다. 복거기(卜居記)에 실린 사인암기(舍人巖記)를 참고로 싣는다(번역이 필요한 분들은 이미 번역된 자료들이 나와 있으니 검색 바랍니다).

舍人巖高四十丈, 東向立, 溪水流其前, 巖下之石, 又盤陁如堂如陛, 如安牀如置几. 高下平仄, 各得其宜. 可以坐八九十人, 尊俎筆硯, 隨意在前, 俯弄溪水, 可漱可濯. 循巖自北而南, 爲五十餘步, 巖之北根浸于水, 水深可航. 人之遊巖下者, 必取下流淺處涉之. 捨溪行田畝中, 過書堂牆外, 出俟仙臺松林, 壁下又得淺處, 涉溪. 遂挾溪北行, 良久乃至巖下, 未至巖十餘步, 見巖之南頭盡處, 如屛扇折摺, 方而直, 曲而奧, 望之甚奇. 巖盡而復有巖, 拆立如門. 從門而入, 如入室中. 左右削立如牆壁, 上覆松如帷幕. 巖西拆昻低離合, 如用斧鋸刻畵, 各異其態. 至鳳嘴巖, 而又南轉, 南轉之, 巖遂成壁勢彎. 其中有水田數百畝, 瀑水又當中瀉下, 以灌其田, 長可十五丈. 瀑泉之南十餘步, 又有石室, 二人可把書而坐. 壁止而有小岡, 環而西竢仙之臺, 復與此相近矣. 溪兩傍石白如雪, 坐而忘起. 整斲成臺, 展開受水. 水入其中, 如大槽盈溢. 臺上亘石爲底, 水流淸淺, 其勢回旋, 作雲錦之文. 臺下水深石濶, 圓鑑通明. 東西松林蔭, 人坐釣, 種種可愛. 然其環奇之觀, 不在此數處. 而在四十丈東面之石夫, 如壇而不築, 如碑而不磨. 方平峻正, 一刀直斷, 無缺剥凹凸之㾗. 雖使巧匠執繩尺無以過之者. 舍人巖之面勢也, 丹而不焦, 蒼而不黝. 淸華古雅, 五彩錯文, 無渲染點綴之跡. 雖使畵工施粉墨, 無以倣其貌者. 舍人巖之輝光也, 望之而可愛, 卽之而可敬. 端莊和潔, 肅而不厲, 終日對之, 而不知其厭. 又不敢生怠傲之意者. 舍人巖之氣像也, 平易處生至奇, 雅素中有純美. 不在深山絶壑之中, 而一塵不到, 如華表特立, 白鳥將返赤城, 鬱鬱霞氣建標. 林宗見之, 當曰: 貞不絶俗. 堯夫見之, 當曰: 空中樓閣. 然曰余小子敢取繩直準平玉色金聲八字, 奉爲石丈之贊辭耳.

운화대 각자 옆으로는 원령 이인상의 각자가 있다. 그림처럼 쓴 글씨인데 웬만한 전서(篆書)의 전문가도 읽기 힘든 글씨이니 전문가의 풀이를 통해 접해 보자.

有暖芬盡 有色英 : 따스한 향기는 극에 달하고 색도 영화롭네
雲華之石 愼莫鐫名 : 운화대 바위에 삼가 이름을 새기지 마시게

 

매국노 이경식의 각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앞에 이윤영이 서벽정 오르는 길에 운화대라 했듯이 그 친구 이인상은 이 아름다운 곳에 함부로 이름 새기지 말라고 거들었다. 그런데 이 당부는 지켜졌을까? 사인암 개울가 벽에는 차마 이름이 남지 않아야 할 사람의 이름도 있다. 일제강점기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를 거치면서 왜정에 앞장서 협력한 자의 이름이다. 군수 이경식 대정사년 십일월(郡守 李敬植 大正四年 十一月). 1915년 11월에 와서 새겨 놓은 것이다.

능호관(凌壺) 이인상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떠했을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를 살펴보고 해야 할 것과 안 해야 할 것을 돌아볼 자료가 된다. 곳곳에 남아 있는 떳떳하지 못한 이들의 이름 각자를 만날 때마다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독립불구(獨立不懼: 홀로 서도 두렵지 않고)’라 새겨진 각자의 탁본.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홀로 돼도 두렵지 않고 걱정 없어라”

층계를 다 올라 삼성각 주변을 살피면 또 여러 각자를 만나게 된다.

독립불구 둔세무민(獨立不懼 遯世無悶).

윤지(胤之)라는 관지(款識)가 선명한 이윤영의 아름다운 전서체(篆書体) 글씨다. 주역 28번째 괘인 택풍대과(澤風大過)에서 나온 말이다. 홀로 서도 두렵지 않고 세상을 등져도 걱정이 없다는 말이다.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알려 준다. 서벽정 처사에게 무슨 두려움과 근심의 눌림이 있었겠나.

 

‘탁이불군(卓爾弗群: 우뚝하여 무리를 이룰 것이 없고)’ 각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영조 때(1766년, 영조 42년) 단양 군수를 지낸 정이(正而) 조정세(趙靖世)의 글씨도 보인다.

탁이불군 확호불발(卓爾弗群 確乎不拔).

우뚝하여 무리를 이룰 것이 없고 확고하여 빼낼 수 없다라는 말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사인암의 위용을 표현하였다. 한서(漢書)와 주역(周易)에서 가져다 쓴 말인 것 같다.

또 이 글씨 옆으로는 전서로 크게 쓴 퇴장(退藏: 물러나 은둔함)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누구 글씨인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전서를 잘 아는 이들 말로는 쓴 이가 운수(雲叟)라 한다.

 

삼성각.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또한 필자는 미처 보지 못했는데 삼성각 뒤 길 막은 곳 바위에 소유천문(小有天門)이라는 전서가 새겨져 있다 한다. 길을 막기 전에는 이곳을 통하여 사인암에 오를 수 있었다 하니 천문으로 이르는 작은 통로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왜 유(有)란 글자를 썼을까? 글을 읽는 필자는 매번 이런 것들이 궁금하다.

그 많은 각자 중에 몇몇 소개하는 것으로 아쉽지만 자 이제 각자는 그만 다루려 한다. 사인암에 들렸던 많은 시인묵객들이 읊은 시(詩) 한두 편은 만나야 되지 않겠나.​

추사는 사인암을 이렇게 읊었다.

怪底靑天降畫圖 : 괴이하군. 그림 한 폭 하늘에서 내려왔네.
俗情凡韻一毫無 : 범속한 정과 운은 터럭만큼도 없군.
人間五色元閒漫 : 인간의 오감이란 본시 한만(閑漫)하지.
格外淋漓施碧朱 : 격 밖으로 힘찬 기운 붉고 푸름 펼쳤다네.

다산도 단양에서 다섯 수 절구를 지었다(丹陽絶句五首). 그 중 사인암을 보자.

玉削霞標萬仞森: 옥을 깎은 듯 노을 속 표석 만 길 우뚝하고
雲根倒揷綠波深: 구름 뿌리 녹색 물결에 거꾸로 잠겼는데
侍郞騎鶴松猶在: 시랑이 학 탔던 소나무 상기도 여전하고
丞相彈琴石不沈: 승상이 거문고 타던 바위도 안 잠겼네

채재공의 처남으로 시랑 벼슬을 한 오대익(吳大益: 1729~1803)은 단양에 내려와 운계천 가에 수운정(水雲亭)을 중수하고 은일한 삶을 살았다 한다. 어느 날은 사인암 꼭대기 소나무에 줄을 매고 나무 학을 타고 내려왔다 한다. 짚 라인(zip line)의 원조인 셈이다.

서애(西厓) 유성룡도 수운정을 짓고 지낸 일이 있었다 하는데 다산은 서애가 거문고 타던 바위(彈琴石)를 상기해 낸 것이다. 서애가 단양에 오면서 남긴 칠언배율(七言排律) 시가 전해진다. 앞 한 꼭지만 맛보자.

단양행(丹陽行)
丹陽之山高復高 : 단양의 산 높고도 높아
石峯攙天如列戟 : 석봉(石蜂)은 하늘 찌를 듯 창을 벌려 세운 듯
一線棧道縈岩巒 : 한 가닥 잔도는 바위 봉우리에 얽혔는데
十步九折迷南北 : 열 걸음에 아홉 구비 앞뒤가 아찔하네 (이하 줄임)

석실서원을 소개할 때 만났던 미호 김원행도 사인암에 와서 감회를 읊었다. ‘미호집’에는 사인암 곁에 있던 오대익(吳大益)의 별업 개황정을 읊은 시가 전해진다.

개황정(開荒亭)
開荒亭子長靑苔: 개황정 찾아오니 푸른 이끼 자라는데
繫馬蒼松微雨來: 푸른 솔에 말 매니 이슬비 내리누나
絶壁行雲花細濕: 절벽에 구름 흘러 꽃잎은 촉촉하고
淸流激雪岸爭廻: 맑은 물결 부서지며 산기슭 굽이도네
舍人去矣自春草: 사인이 떠난 자리 봄 풀만 무성하고
仙鶴杳然餘古臺: 선학은 간 곳 없이 누대만 남았구나
林鶯數囀空山靜: 적막한 산속에 꾀꼬리 울어대니
悵望高天一擧杯: 서글피 하늘 보며 술 한 잔 마시노라 (기존 번역 전재)
 

옛 지도의 사인암 운선구곡. 

한반도 곳곳에 남겨진 ‘구곡’의 사연

이제 시는 여기에서 줄이고 오대익을 잠시 돌아보자. 그는 단양 사인암 가에 자리 잡고 앞으로 흐르는 내 남조천을 운계천(雲溪川)이라 불렀다. 그리고는 신선이 노니는 계곡으로 여겨 운선구곡(雲仙九曲)이라 명하였는데 황정리에서 시작하여 사인암 앞을 지나 하류 괴평리에 이르는 계곡 아홉 군데를 정하여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새겨 넣었다.

송나라 주자(朱子)는 그가 살던 무이산(武夷山) 계곡에 구곡(九曲)을 정하고 무이구곡가를 지었는데 이 구곡 문화가 조선에 전해지면서 은둔한 양반 사회에서 대유행을 하였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지금도 많은 구곡이 남아 있으며 어김없이 그곳 바위에 구곡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인암 운선구곡을 지도에 표시했다. 

가깝게는 도선사 오르는 우이동 계곡도 우이구곡(牛耳九曲)이었다. 이곳 운선구곡은 1곡 대은담(大隱潭), 2곡 황정동(黃庭洞), 3곡 수운정(水雲亭), 4곡 연단굴(煉丹窟), 5곡 도광벽(道光壁), 6곡 사선대(四仙臺), 7곡 사인암(舍人岩), 8곡 도화담(桃花潭), 9곡 운선동(雲仙洞)으로 이름 붙여져 있다. 아직은 찾는 이가 많지 않은 곳인데 조만간 단양 답사에 또 하나 즐거움을 줄 것 같다.

기왕이면 계곡 트레킹 코스로 활용하면 어떨까? 아쉬운 대로 사안암을 마무리한다. 찜찜한 것은 겸재의 또 하나 그림 사인암에 대한 궁금증이다. 어디를 그린 것일까?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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