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72) 구담봉, 옥순봉 ①] 묶일 정자보다 노닐 배 택한 ‘자유 양반’ 김창흡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기자 2021.03.16 13:58:36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 그림을 따라가는 단양팔경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오늘은 단양의 비경 구담봉과 옥순봉이다. 겸재의 그림으로는 구담(龜潭)과 단사범주(丹沙泛舟)가 전해진다. 전하지는 않지만 ‘사군첩(四郡帖)’을 구성했을 그림으로 여겨지는 그림들이다. 옥순봉이나 구담봉을 그린 화가로는 겸재를 비롯하여 김홍도, 이방운, 이윤영, 윤제홍 등이 전해진다. 이들 그림을 보면서 구담봉과 옥순봉을 찾으려 한다.

이제는 충주댐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수몰되거나 수위가 높아져 옛 모습을 찾을 수는 없지만, 구담과 옥순봉은 물가에 우뚝 솟은 산이다 보니 비교적 그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듯이 청풍(淸風)과 단양은 신선의 고장이었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자연환경 속에 자리잡은 은일(隱逸)한 지역이어서 고려나 조선의 선비라면 한 번은 다녀가고 싶어 한 지역이었다. 비록 물산은 풍성하지 않았지만 지방관으로 나오고 싶어 한 지역이었고 다녀간 이들은 글 한 편 남기고 싶어 했다.

더욱이 뱃길은 낭만의 길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뱃길 여행의 기록이 삼연 김창흡의 단구일기(丹邱日記)다. 한식날 미호를 떠나 13일에는 마중 나온 충주 수령과 배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옥순봉을 지나 드디어 단구동문으로 접어든다. 우리는 지금 구담봉이라 부르지만 삼연은 물은 구담(龜潭), 봉우리는 구봉(龜峰)으로 확실히 구분하고 있다(無何玉筍峰出焉. 聳秀撑江. 自此爲丹丘洞門. 兩山環合. 船入積翠間. 亹亹延興. 水轉而爲龜潭. 右有龜峰).
 

옛 지도의 구담, 옥순봉. 
현재 지도의 구담, 옥순봉. 

17세기의 자유로운 영혼 김창흡

정확히 말하면 옥순봉, 구봉 앞 물길을 구담이라 부르고 그 구담에 두 개 봉우리 옥순봉과 구봉이 있다는 말이다.

잠시 삼연(三淵) 이야기를 하면 그는 날리는 6형제 육창(六昌) 중에서 벼슬길을 멀리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시 한 편 읽고 가자.

차라리 강 위의 배를 사겠네 寧買江上船
강가의 정자는 사지 않겠네 不買江畔樓
정자를 사면 한 자리에 매이겠지 買樓坐一處
배를 사면 바야흐로 멀리 다닐 수 있네 買船放遠遊

당시 사대부들 취미가 정자를 짓고 시 한 수 읊는 대세에서 삼연은 정자보다 배를 사서 다니겠다 한다. 이런 자유인이다 보니 청풍군수 형을 찾아 남한강 배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옥순봉’ 이름 지은 퇴계

또 한 사람, 이 뱃길을 지난 기록을 보자. 9개월간 단양군수를 지낸 퇴계선생의 글 단양산수가유자속기(丹陽山水可遊者續記 - 줄여서 단양산수기) 기록이다.

산봉우리는 그림 같고 골짜기는 서로 마주 벌어져 있는데, 물은 그 가운데에 괴어서 넓고 맑고 엉키고 푸르러 거울을 새로 갈아서 공중에 걸어 놓은 것 같은 것은 구담(龜潭)이다. 화탄을 거슬러 남쪽 언덕 절벽 아래로 따라 오르면, 그 위에 여러 봉우리를 깎아 세운 것이 죽순(竹筍) 같아서 높이가 천백 장(丈)이나 되며 우뚝하게 기둥처럼 버티고 서 있는데, 그 빛은 푸르기도 하고 창백(蒼白)하기도 하다. 푸른 등나무와 고목(古木)이 우거져 아득하고 침침한데 멀리서 볼 수는 있어도 오르지는 못하겠다. 내가 옥순봉(玉筍峯)이라 이름 지은 것은 그 형상 때문이다. 구담의 북쪽 가는 곧 적성산(赤城山)의 한 줄기가 남으로 달리다가 우뚝 끊어져 있다. 그 봉우리 중에 큰 것이 세 개 있는데 다 물에 다다라서 높이 빼어났지만, 가운데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층층으로 된 바위가 다투어 빼어나고 우뚝우뚝한 돌이 서로 끌어당겨 귀신이 새긴 것 같으며 기기(奇奇)하고 괴괴(恠恠)함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

이때에 처음으로 산에 비가 개어서 골짜기의 기운은 새롭고 운물(雲物)이 맑고 고왔다. 마침 현학(玄鶴)이 가운데 봉우리에서 날아와 몇 차례 빙빙 돌다가 구름 낀 하늘로 멀리 들어가는지라, 내가 배 안에서 술을 들고 시를 읊으니 초연히 서늘한 바람을 타고 허공에 노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때문에 그 봉우리 아래에 있는 것을 채운(彩雲)이라 하고, 그 가운데 봉우리를 현학(玄鶴)이라 한 것은 그 보이는 대로 지은 것이고, 그 상봉을 오로(五老)라 한 것은 그 형상을 따른 것이다.

배를 저어 조금 올라가다가 꺾여서 북으로 가니 이미 가운데 봉우리를 지나 오로봉 아래에 배가 닿았다. 그 봉우리의 동쪽에 또 큰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단구(丹丘) 골짜기와 서로 이어졌으니, 이것은 지지(地誌)에 이른바 가은암(加隱巖) 산이며 가은성(可隱城)이 그곳에 있다. 물이 장회탄(長會灘)으로 흘러 서쪽으로 구봉(龜峯) 언덕에 부딪혀 돌아 구담의 머리가 되고, 또 북으로 돌아서 서쪽으로 꺾여서 구담의 허리가 되고, 구담의 꼬리는 채운봉의 발치에서 다하였다.


峯巒如畫. 峽門對拆. 水積于其中. 而涵泓凝碧. 如鏡新磨. 如在空中者. 龜潭也. 泝灘而進. 循南涯絶壁下. 其上諸峯. 削立如筍. 高可千百丈. 突兀橕柱. 其色或翠或白. 蒼藤古木. 縹緲晻靄. 可仰而不可攀也. 請名之曰玉筍峯. 以其形也. 潭之北涯. 卽赤城山一支南騖而陡斷者也. 其峯之大有三. 皆臨水峭拔. 而中峯爲最. 層巖競秀. 矗石爭挐. 如鬼刻神剜. 奇奇怪怪. 不可具狀焉. 于時山雨初霽. 峽氣如新. 雲物淸姸. 適有玄鶴. 自中峯飛出. 盤廻數匝而入於雲霄之表. 余於舟中. 取酒吟詩. 超然有御泠風遊汗漫之意. 因以名其峯之在下者曰彩雲.

 

구담, 옥순봉, 옥순대교 자료사진.

퇴계는 청풍에서 배를 타고 상류로 오르면서 죽순이 뻗어 오른 것 같은 모습을 살려 옥순봉이라는 이름도 지었다는 것이다.


이제 옥순봉과 구담봉을 찾아간다.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겸재를 비롯하여 여러 화인(畵人)들의 그린 모습을 보려면 물길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가야 한다. 또 하나 방법은 발로 걸어 두 봉우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요즈음은 구담봉, 옥순봉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전(前)과 같은 위험은 없다.

 

장회나루 선착장.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구담봉에서 바라본 장회나루와 제비봉.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우선 뱃길로 떠나 보자. 뱃길로는 충주유람선 코스와 장회나루(長淮) 코스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이번은 장회나루다. 배는 상당한 크기로 안전하게 출항한다. 선장님이 해설을 시작하는데 흥미로운 말솜씨가 흥을 돋운다. 사진으로 보면 알 수 있듯이 물이 가득한 남한강 뱃길을 따라 유람선 출발이다. 하류로 내려가야 하는데 배는 잠시 상류로 오른다. 충주호를 내려다보기 최적인 월악산 국립공원의 북단 제비봉(721m 燕子峰, 芙蓉城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을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산 모습이 이름처럼 물찬제비 같이 날렵하다. 제비봉은 등산인들이 즐겨 찾는 코스다. 월악산 연봉 중에서 충주호를 내려다보기에 으뜸 장소이기 때문이다. 월악산과 관련한 도참사상 같은 예언도 있었다.
 

유람선과 선객.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여자 임금 3~4년만에 통일 된다 하더니

“월악산 영봉(靈峰) 위로 달이 뜨고, 이 달빛이 물에 비치고 나면 30년쯤 후에 여자 임금이 나타난다. 여자 임금이 나오고 3~4년 있다가 통일이 된다.”

탄허스님 발(發) 예언이라는데 84년 충주호가 준공되어 월악산의 달빛이 물에 비치고 여자 대통령이 등장하자 혹시나 이 예언이 맞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3~4년이 훌쩍 지나갔는데도 통일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허망한 도참일까? 한 10년 속는 셈 치고 더 기다려 볼까?

 

강선대.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선장님은 이제 건너편 기슭에 혼자 외롭게 자리 잡은 무덤을 가리킨다. 단양 기생 두향(杜香)의 묘라면서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 시절 정인(情人)으로 애뜻한 사랑이 있었다 한다. 본인이 죽을 때 이곳 강선대 아래 묻어 달라 했다는 것이다. 댐이 건설되면서 수몰 위기에 몰리자 마을분들이 위쪽으로 이장했다 한다.

과연 사실일까? 이 이야기가 근래 우리에게 다가온 것은 ‘자유부인’의 작가 정비석의 소설 ‘명기열전’ 속 두향 이야기가 소개되면서였다. 조선일보에 연재된 명기열전은 인기가 대단했다는데 연재물 22화에 ‘단양기 두향(丹陽妓 杜香)과 퇴계 선생과의 러브스토리’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도 실렸고 최인호 작가의 소설 유림(儒林) 3부 ‘군자에 이르는 길 군자유종(君子有終)’ 첫 대목을 채우면서 더욱 흥미를 유발하였다.

 

두향 묘.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나루터 앞 작은 공원에는 좀 어설프긴 하지만 두향과 퇴계의 러브스토리를 형상화한 조형물도 만들어 놓았다. 이들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있었을까?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1548년 정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년) 선생이 단양 군수로 부임했다. 그의 나이 48세의 홀아비였다. 그 시절 퇴계는 첫 부인을 사별했고 이어 두 번째 부인과도 사별 뒤 을사사화를 겪은 후 단양 군수로 부임한 때였다. 또 부임 한 달 만에 둘째 아들 채(寀)마저 잃어 적막감에 빠져 있던 때였다. 이때 단양 관아에는 지혜롭고 사랑스러운 열아홉살 관기 두향이 있었다. 재예(才藝)가 뛰어난 두향은 퇴계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둘 사이에는 나이를 뛰어넘은 사람이 싹텄다. 매화를 좋아하는 퇴계처럼 두향도 매화를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짧은 사랑도 한 때, 9개월 만에 퇴계는 풍기군수로 이전하게 된다. 친형 온계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형제가 한 지역에서 상하관계로 일하면 나랏일이 공평함을 잃을 수도 있어 이를 기휘(忌諱)하여’ 경상도 풍기 군수로 가게 된 것이다.

 

퇴계와 두향 상(像).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두향은 이때 곱게 키워오던 매화 한 분(盆)을 선생께 드렸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두향은 고향 마을(두항리) 강 맞은편 강선대(降仙臺) 옆에 초가를 짓고 퇴계를 그리워하며 외롭게 살았다 한다. 퇴계는 풍기에서 1년 만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토계(안동)로 낙향한다. 그리고는 두향과 떨어져 산 지 20여 년, 퇴계는 일흔의 나이(1570년)에 몸져눕는다. 퇴계의 병색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해 음력 12월 “저 매화에 물 잘 주라”는 한 마디 남기고 눈을 감는다. 두향에 대한 그리움이리라.

두향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강선대 아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매화를 사랑한 퇴계는 1백여 편의 매화시(梅花詩)를 남겼는데 후인들은 두향을 그리며 쓴 시들이 많을 것이라 한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산창에 기대니 밤 기운 차갑구나
梅梢月上正團團 매화나무 가지 끝에 둥근 달이 걸렸네
不須更喚微風至 구태여 소슬바람 다시 불러 무엇하리
自有淸香滿院間 맑은 향기 저절로 집안 가득한데

또 다른 한 편 더 읽자.

黃卷中間對聖賢 책 속에서 옛 성현 마주하며
虛明一室坐超然 빈 방에 초연히 앉아 있네
梅窓又見春消息 매화 핀 창가에 봄 소식 또 왔는데
莫向瑤琴嘆絶絃 이별을 한탄하며 거문고는 타지 말게

 

1000원 지폐 속의 퇴계와 매화.

매일 접하는 우리나라 1000원 지폐에는 퇴계 옆으로 매화가 화사하게 피어 있다. 어떤 이들은 도산서원 매화가 두향이 준 분매(盆梅)일 것이라고도 한다. 과연 이런 러브 스토리는 사실일까? 관련된 옛 기록을 살펴보자. 퇴계학보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조사, 연구하였다.

두향이 단양의 기생이라는 오래된 기록은 수촌(水村) 임방(任埅, 1640~1724)의 기록인데 수촌은 1694년에 단양 군수로 부임하여 1699년까지 재직하였다. 그의 문집에는 두향이라고 생각되는 두양(杜陽) 묘가 나온다.

두양은 단양의 기생이다. 가야금을 잘 탔고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췄다. 스무 살의 나이에 일찍 죽었는데 강선대 맞은편 산기슭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杜陽丹妓也. 能琴善歌舞, 二十而夭, 遺 囑葬降仙臺對麓)

一點孤墳是杜秋 한 점 외로운 두추랑의 무덤이
降仙臺下楚江頭 강선대 아래 초강(楚江) 어귀에 있네
芳魂償得風流債 꽃다운 영혼이라도 풍류 빚을 갚으려고
絶勝眞娘葬虎丘 진랑은 천하 명승인 호구산에 묻혔구나

두추는 당(唐)나라 기생의 이름, 진랑(眞娘)은 오(吳)나라의 기생으로 호구산(虎丘山)에 묻혔다고 한다. 두양을 비유한 시 구절이다. 상대 남성은 드러나지 않았다.

순조 때부터 벼슬길에 나아가 후에 영의정까지 오른 심암(心庵) 조두순(趙斗淳, 1796~1870)은 이런 시를 썼다.

不有退翁詩 퇴옹(퇴계)의 시가 없었더라면,
誰識杜娘名 누가 두랑의 이름 알았으리오
娘亦女流秀 두랑도 빼어난 여류였으니
得知君子榮 군자와 어울릴 영예 있다네

이 시를 보면 조두순은 퇴계와 두향을 정인으로 여기고 있다.

또 조선말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산 정객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시 ‘장호의 배 안에서(長湖舟中)’에 두향(杜香)이 나온다.

一疋長湖剪越羅 한 필 기다란 호수는 월나라 비단을 오린 듯,
東風過岸麥生波 봄바람이 언덕 지나자 보리 물결 출렁이네.
灘頭輕舫閑時少 여울가 가벼운 배는 한가할 때가 드물고,
煙外遙峯缺處多 안개 너머 먼 봉우리는 갈라진 곳이 많네.
苔線宛如飛白字 이끼 자라 이룬 선은 꼭 비백 글자 같은데,
漁謠時雜採靑歌 뱃노래는 때로 나물 뜯는 노래와 섞이네.
杜香芳草年年綠 두향 무덤의 방초는 해마다 푸르건만,
一曲箜篌恨奈何 한 곡조 공후의 한은 어찌하면 좋으냐?
(기존 번역 전재)

운양도 퇴계와 두향 사이를 정인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최근 퇴계학보 자료는 두 사람의 연인관계는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공부 삼아 살펴본 자료들이지만 필자는 이 길을 가며 두향은 우리 마음속 정인이면 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유람선은 강선대를 버리고 선수(船首)를 하류로 돌려 청풍 방향으로 내려간다.

물막이 공사로 막힌 남한강은 호수처럼 크고 잔잔하다. 운양 김윤식이 장호(長湖)라 했듯이 장회(長淮)나루 앞 남한강은 호수처럼 넓고 편하다. 앞쪽으로는 구담봉(龜潭峰)과 마주한다.

겸재는 구담(龜潭)이란 화제(畵題)로 이곳 물길과 봉우리를 그렸다. 그림 속에는 선유(船遊)하는 4, 5인이 물살을 가르며 상류(동쪽)으로 오르고 있다. 봉우리들은 수직 절벽으로 강기(剛氣)를 느끼게 한다.
 

겸재 작 ‘구담’.

‘손가락 화법’의 윤제홍 그림도 있어


이에 비해 이방운의 구담도는 수직 절벽은 겸재와 같지만 인물들이 아기자기하다. 윤지 이윤영의 창하정(蒼霞亭) 안에는 세 사람의 선비가 구담을 바라보는 듯 자리했고 밖에도 세 사람이 서 있다. 왼쪽 바위에는 소나무 아래 앉아 있는 두 선비와 서 있는 한 선비가 있다. 강을 그슬어 오르는 배의 모습도 우측 산세(山勢)에 반쯤 모습을 나타냈다. 강물은 그다지 깊지 않은지 바닥의 바위들이 물속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겸재의 그림에 비해 훨씬 사실적이다.

또 다른 구담도는 윤제홍(尹濟弘)이 그렸다. 벼슬 운도 참으로 없어 59세에 겨우 청풍현감을 제수 받았다. 이 양반이 손가락으로 그린 두지화법(指頭畵法)의 구담도다. 손가락으로 그리다 보니 세세하지는 못하지만 무리 없는 구도에 구담봉 건너로는 윤지의 창하정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시기가 가물었는지 이방운의 그림에는 물속에 잠겨 있던 바위들이 모두 드러나 보인다. 화제(畵題)를 이렇게 썼다.

창하정에서 구담봉을 바라보며 내가 일찍이 말하기를: 옥순봉은 청수하고, 구담봉은 웅혼하고 넓은 하늘은 특별하고 기이한 격이며 단릉(이윤영)이 자신의 호를 그렇게 정한 것도 하나의 기이함이다. 관람자는 어찌 여길까? 재홍 경도 씀(蒼霞亭望龜潭 余嘗云 玉筍淸秀 龜潭雄涽 壺天特一奇格 丹陵題名又一奇 覽者以爲如何 濟弘景道 作).

이방운 작 구담도.
윤제홍 작 구담도. 

두 그림에 나타나는 창하정은 앞 글 사인암 서벽정에서 소개했듯이 윤지 이윤영이 구담을 바라보는 강 건너에 지은 정자다. 능호관 이인상(李麟祥)과 함께 능호관은 다백운루(多白雲樓)를, 윤지는 창하정을 지어 이곳에 와서 살기로 하였다. 그러면서 능호관은 두 정자의 상량문을 지었는데 윤지는 뜻을 이루었고 능호관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윤지의 두 정자에 대해서는 정암(貞菴) 민우수(閔遇洙)가 쓴 기문이 전해진다. 서벽정은 약(略)하고 창하정만 보자.

단구에 있는 이윤지의 두 정자에 대한 기문(李胤之丹邱二亭記)

구담(龜潭)은 매번 배를 타고 아래에서 보기 때문에 전체를 보지 못한다. 이자유(李子由)가 단양(丹陽) 군수로 있을 때에 가은봉(可隱峰) 아래에 터를 잡고 작은 정자를 지어 구담과 마주하게 하였는데,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면 구담의 전체 모습을 이곳에서 다 볼 수 있다. 자유의 맏아들 윤지가 주자(朱子)의 ‘푸른 이내는 붉은 성에 비치네(蒼霞映赤城)’라는 시구에서 취하여 정자의 이름을 창하(蒼霞)라 지었고, 한강(漢江) 가에 사는 윤경평(尹景平)이 편액의 글씨를 썼다. 내가 또 짧은 기문을 지어 정자에 비치하니, 이때는 계유년(1753, 영조29) 늦봄이다.


李胤之丹邱二亭記

龜潭每泛舟從下而觀. 故未覩其全體. 李子由爲丹陽守. 相地於可隱峰下. 置小亭. 以與龜潭相對. 憑檻而望則龜潭之全面在是矣. 子由之胤胤之. 取朱子蒼霞映赤城之句. 命其名曰蒼霞. 漢濱尹景平書其額. 余又作小記置亭中. 時癸酉春末也).

그러나 이렇게 지은 창하정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윤지가 단양을 떠난 후 두 번의 수리가 이루어졌고, 1804년에는 다시 지었으나 1871년 이후 사라졌다 한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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