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항상까기 한국 언론 1: 부동산은 원래 이상한데 ‘비꼬는 언론’까지

최영태 편집국장 기자 2021.05.13 14:20:30

(문화경제 = 최영태 편집국장) 부동산은 이상한 상품이다. 어제까지 200만 원 하던 삼성전자의 고가 노트북이 오늘 180만 원으로 떨어지고 내일 150만 원까지 떨어진다면, 필자 같은 소비자들은 당장 사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반대로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면 “지금은 안 되겠다”라고 포기한다.

그러나 부동산 시장은 반대다.

10억 원 하던 아파트가 11억 원이 되면 사람들은 하나둘 관심을 갖는다. 12억 원이 되면 본격적으로 거래가 늘어난다. 13억 원이 되면 누구나 사려고 한다. 그렇게 15억 원이 된다. 반면 10억 아파트가 9억이 되면 기다리던 사람들이 이 집을 산다. 하지만 8억, 7억 원이 되면 누구도 사지 않는다. 시장은 얼어붙고 부실은 금융시장으로 이어진다. (KBS 김원장 기자 저 ‘집값의 거짓말’ 33쪽)

오르면 사고 떨어지면 안 산다는 얘기다. 올라야지 불이 붙는 부동산 시장의 이상한 특징(시장 경제의 다른 상품과는 완전히 다르게 움직이는)은 국제적인 현상이다. 미국에서도 비슷하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의 부동산 시장에서 크게 다른 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언론의 역할이다. 미국에서 집값이 오르면 언론들이 관련 사실을 보도는 하고, 독자들이 그런 보도들을 보면서 “아, 나도 이제 집을 사야 하나?” 또는 “그때 샀어야 하는데…” 하고 안달들을 떨지만, 그렇다고 언론들이 안달하지는 않는다. 미국 언론들의 기사는 거의 언제나 항상 그냥 부동산 시세에 대해 팩트 보도만 할 뿐이다. ‘정부 정책이 글러 먹었다’든지, ‘전세 씨가 말랐다’든지 하면서 감정을 듬뿍 넣어 비판-조롱하는 미국 기사를 본 기억이 없다. 반면 부동산에 대해 한국 언론들은 시종일관 비판적-조롱적이다.

집값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면 ‘신고가 행진’ 등의 제목을 달며 마치 축구 경기에서 골이 터진 것처럼 환호하는 기사들, 그리고 ‘정부는 뭐 하나’라는 비판 기사들을 내놓는다.

오르는 집값에 정부가 대책을 내놓으면 ‘귀막고 있다가 이제서야’라며 뒤늦음은 비판하는 제목이 바로 나온다. 부동산 대책이라는 게 효과를 보려면 최소한 몇 달, 실제로는 몇 년의 시간이 걸리는데도 불구하고 언론들은 대책이 나온 뒤 일주일 안에 ‘정부 대책 비웃듯’이라며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기사들을 내쏟는다.

이렇기에 한국에서는 ‘오른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갔다고 기사로 혼나고,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갔다고 혼나고, 가운데 있으면 가운데 있다고 혼나는’, 그야말로 움직여도 혼나고, 안 움직여도 혼나는, 그래서 어찌 할 바를 모르게 만드는 형국이 벌어진다.
 

6일 서울 남산공원에서 한 시민이 아파트로 가득찬 도심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오를 때는 정부 비판, 떨어질 때는 소비자 비판

집값이 오를 때는 정부를 비판하고 시장 편에 섰던 언론들이라면, 집값이 떨어질 때도 계속 시장 편을 들어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다시 김원장 기자 책으로부터의 인용이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자산가치가 폭락하고 잔치가 끝나면 우리는 꼭 이런 신박한 분석을 내놓습니다. 그 유명한 사후판단 편향(hindsight bias)이 작동합니다. (중략) 이쯤 되면 투기를 부추기던 언론도 돌변합니다. 어리석은 투기 패턴을 비판하는 기사를 쏟아냅니다. (23~24쪽)

집값이 뚝 떨어지면 최소한 겁 없이 투자했던 주택소유자들 편을 들어줄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이번에도 역시 “내가 그렇게 기사를 쓴다고 집을 사냐? 주관도 없이”라면서 비꼰다는 것이다.

정부 정책을 비판할 때도 기자들이 기준 없이 마구잡이 식으로 비판하더니, 이제 소비자에 대해서도 집값이 오를 때는 “아직도 안 샀냐?”고 비꼬고, 집값이 떨어지면 “그때 왜 샀냐?”고 비아냥거리기만 한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가운데)가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열린 ‘진단, 대한민국 부동산정책’ 토론회에 참석,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이렇게 ‘모두까기’로 일관하는 한국 언론은, 1830년대 프랑스에서 등장했던 예술지상주의(l’art pour l’art)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판을 위한 비판, 까기 위한 까기라는 소리다.

예술지상주의를 처음 제창한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 테오필 고티에(1811~1872년)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에도 아름다움은 있는 거라네”라는 자신의 소설 속의 대화를 통해, ‘잠자고 있는 우리의 영혼에 숨을 불어넣어준다’(김동섭 수원대 교수 저 ‘라틴어 문장 수업’ 263쪽)는 평가를 받았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이런 효용이라도 있지만, 한국 언론의 모두까기(사실 자기 편은 보호하니까, 남의 편만 공격하는 ‘한쪽만 항상까기’)에 도대체 무슨 효용이 있는지 모르겠다. 오르면 오를수록 더 오르는 게 부동산인데, 오를 때는 “아직도 안 샀냐?”고 비아냥거리면서 불에 부채질을 하고, 떨어지면 더 떨어지는 게 부동산인데, 떨어질 때는 “내 기사 보고 샀어?”라면서 얼음물을 끼얹으면서 관련자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는 언론이라면 정말로 없어지는 게 상책 아닐까?

*다음 편에는 ‘항상까기 한국 언론 2: 근원은 동족상잔 전통으로부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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